불경기

하나마나 푸념 2008. 8. 7. 17:35

피부로 마구 실감하는 건 아니지만 워낙 심한 불경기라 오히려 IMF 차관을 들여와야 했던 외환위기 때보다
더욱 살기가 어렵다고 난리다. 언론에서 괜히 부추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조그맣게 장사나 사업을 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일을 하기는 하는데 좀처럼 이윤을 남길 수가 없다니 말이다.

불경기엔 당연히 사람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갑을 닫으니 소비는 위축되고 경기는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위정자들이 내놓는 '경기부양책'이라는 것들이 과연 힘을 발휘하긴 하는지도 사실 나는 관심이 없다. 과거 외환위기 때 국민들이 나라를 살리겠다며 금모으기 행사 같은 걸 벌이기도 했지만, 그 때 돈을 번 건 이스라엘 금업자라던가. 나중에 우리나라에선 웃돈을 주어가며 다시 금을 사들여야했다고 들었다. 뭐든 떠들썩하고 요란하게 벌이는 생색내기엔 언제나 구린 구석이 감추어져 있고, 이면엔 겉보기와 다른 고도의 계략이 존재하는 듯하다.

어쨌거나 불경기에 사람들이 줄이는 비용엔 문화비가 포함되니, 학습지와 아동물을 제외한 출판물은 불경기에 속수무책으로 타격을 받는다. 안 그래도 워낙 망하는 출판사도 많고 새로  생겨나는 출판사도 많은 곳이 출판계이긴 하지만 조만간 또 수많은 소형 출판사들이 떼거지로 도산했다는 소식이 들릴까봐 걱정이다.
몇달 전부터 프리랜서로 출판계에 종사하는 지인들은 재정상태가 어려워진 출판사가 많아 결제가 미뤄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귀띔을 해주었었다. 꽤 탄탄한 규모의 출판사에서도 편집료나 번역료 지불을 마냥 끌고 있다나.

과거 뒤통수를 치듯 결제문제로 몇몇 출판사와 골머리를 썪은 뒤로는 사실 나도 부끄럽지만 <좋은 책>을 번역하겠다는 욕심보다 <안정적인 결제조건>을 우선으로 계약을 추진하는 게 사실이다. 사장님과 편집자까지 속속들이 친하고 애정을 갖고 있어도 회사가 어려워져 문을 닫게 되거나 몇년씩 지불을 끌면 자선사업 하는 셈 치고 번역료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서로 민망한 관계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말로 어떻게든 돕고 싶은 마음으로 무상 번역을 해준 출판사도 있기는 하지만, 가뜩이나 부정기적이고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수입체계에 자선사업을 자주 할 수야 없으니 조직을 떠나 좋아하는 일을 하네 마네 평생 자유를 추구하네 마네 그럴듯한 겉모습을 자랑하긴 해도 결코 재정적인 관계를 소홀히 할 순 없다.

내 나름대로 약삭빠르게 운신했던 덕분에 최근 몇년 사이엔 번역료를 망연하게 <떼인> 경험이 없긴 한데
작년부터 번역료 지불여부와 상관없이 무작정 출간이 마냥 보류, 지연되는 사태가 더러 생기더니
급기야 출간을 아예 포기하는 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굳이 제작비를 들여 출간을 할만큼 책에 대한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작년까지 우후죽순으로 임프린트를 늘려 이름 다른 자회사를 대거 만들어낸 출판사들일 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어차피 휴짓조각으로 변할 상업적인 책이니,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인쇄비며 광고비며 인건비며 크게 절약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실컷 공들여 번역해놓고 엎어지는 책들이 늘어나는 건 번역자로서 몹시 입맛이 쓰다. 으휴.

올들어 벌써 두 번째로 <죄송하지만 회사 여건상 책을 출간을 하지 않게 되어 송구하다> 내용으로 출판사가 보낸 이메일을 열어보니 새삼 불경기는 불경기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연한 위기감과 불안감에도 긴장할 줄 모르고 지속되는 일 거부감은 또 어쩐 일인지 원.
오늘은 맥이 빠졌다는 핑계로 또 슬며시 작업할 책을 저만치 밀어놓았다.
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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