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책보따리 2009. 1. 4. 22:16
하루하루 연속되는 날들의 연장이라지만
새해엔 그래도 마냥 투덜거리기만 하는 잡문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책만드는 업계에 한 다리 걸치고 사는 인간으로서 책 관련 포스팅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힘든 회상이었다.
어쨌거나 블로그 이웃이신 노나또님키드님의 바통을 이어본 내 인생의 책.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책은? 언제, 어떤 책인지? 

대여섯 살 무렵, 버스, 택시, 삼륜차, 케이블카, 비행기 따위의 탈것과 동물, 꽃 등이 소개된 딱딱한 그림책 시리즈다. ^^
우리 삼남매는 그 책을 <읽으며> 놀기 보다는 주로 집을 짓거나 방 한 가운데에 성을 둘러치고 그 안에서 놀았는데, 총 대여섯권쯤 되는 그 그림책은 제법 탄탄하게 생긴 빨간 가방 안에 들어 있어서 다 놀고 나면 큰누나인 내가 낑낑거리며 어렵사리 책을 그 가방 안에 넣느라 애를 먹었다. 
그때만 해도 워낙 옛날이라 책이 꽤 귀했던 것 같은데, 나중엔 그것 말고도 그림책 시리즈가 또 한 질 생기는 바람에 집짓기 재료가 많아져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은 어떻게 들이게 됐는지?

취학전부터 책을 줄줄 읽었다는 신동 이웃들도 계시지만, 그 옛날의 나는 7살에 제 이름 석자 쓸 줄 아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대견스러워하는 상황이라 연년생 동생과 터울을 두기 위하여 입학식도 못하고 뒤늦게 덜컥 국민학교엘 입학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그런 수준이긴 했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1학년땐 꽤나 늦된 아이라 칠판에 적힌 알림장 내용을 <적는>게 아니라 <그려> 오느라 다른 애들 청소할 때까지 홀로 책상에 앉아 낑낑대며 베껴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7월생의 아이를 덜컥 입학시켜놓고 담임으로부터 한글 배우기가 늦어 <이해력>이 약간 딸리는 것 같다는 평을 들은 엄마는 뒤늦게 후회를 하며, 큰 마음 먹고 월부로 동화책 전집을 사들였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이었다.
각권마다 사전처럼 빳빳한 책껍데기가 갖추어진 양장본에다 빤질빤질한 노란색 표지, 책등이 빨간색인 그 책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나는 수시로 동화책을 꺼내 읽었다. 처음엔 이야기가 짤막한 안데르센 동화, 이솝 이야기 등부터 읽었고 차츰 장편도 무리없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고학년이 된 후에도, 심지어 중학생이 된 뒤에도 가끔 심심하면 뽑아 읽을 정도로 계몽사 동화전집은 내 유년 독서의 중심이었다.
동화책을 열심히 읽은 덕분인지, 늦된 아이였다가 2학년부터 비교적 우수한 학생의 범주에 속하게 된 맏딸의 선례에 고무된 울 엄마는 어려운 살림에도 간간이 월부로 전집류를 사주셨다. 재미있는 건, 나와 달리 두 남동생들이 독서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특히 큰 동생 녀석은 책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동네에 월부 책장사가 나타나면 꼭 우리집으로 데려와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대문도 잘 안열어주는 판국에 앞장서서 장사꾼을 데려오는 아들녀석이라니...  워낙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울 엄마는 동생녀석의 너스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월부 책을 들일 때도 있었는데, 내 기억으론 굉장히 두꺼운 백과사전 세트(아마도 4권짜리), 위인전집류도 그래서 생겨났던 것 같다.
독서에 맛을 들인 나는 일단 책을 잡으면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만큼 빠져들었다. 엄마가 밥먹으라는 소리도 못 알아듣고, 만날 책만 본다고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땐 밥먹는 것보다 책의 뒷이야기가 정말이지 더 궁금했다.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절은 언제인가?
우습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중학생때인 것 같다.
국민학교땐 집에 있는 서너 질의 전집류를 읽고 또 읽는 반복독서를 했던 반면, 중학생 때는 드디어 학교 도서실 책을 빌려읽기 시작했고 한권에 300원짜리 삼중당 문고판을 골라 사서 읽는 묘미를 알게 되었으며, 친척 중에 출판사에 다니시는 분들이 생겨나면서 세로판형에 글씨도 깨알같은 한국단편문학 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생겨났다.
그뿐인가, 나랑 9살 차이인 막내고모가 읽던 <방황의 끝> <풀잎처럼 눞다> 같은 대중소설도 모두 섭렵했고, 일간지에 연재되던 소설들도 악착같이 찾아 읽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보면 안된다는 고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꽤나 야하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대중소설을 훔쳐 읽고는 친구들에게 조숙한 척, 어른들의 세계를 다 아는 척 하는 게 재미 있었다.
더욱이 내가 다닌 중학교 국어선생님들이 특이했는지 월말고사 국어 과목에 교과서와 상관없는 필독도서 관련 시험이 세 문제씩 꼭 나왔는데, 책만 읽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필독서는 거의 단편소설인데도 아이들은 죽어라 안읽고 시험문제를 찍거나 차라리 컨닝을 시도하는 반면, 나는 해당 단편소설 한편만 읽는 게 아니라 굳이 책 한권을 다 읽느라 오히려 다른 공부를 못하는 형편이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월말고사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어찌나 기쁘던지. 종이는 갱지처럼 싯누렇고 세로판형에 글씨도 작았지만, 표지에 명작 그림이 자랑스레 들어가고 나름대로 책 껍데기(크기만 작았지, 형태는 반양장인 셈이다)도 있었던 삼중당 문고판은 매달 새 책이 몇권씩 나올 때마다 무얼 골라 살 것인가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해주었고, 집에 전집으로 있는 책도 굳이 문고판으로 사서 들고 다니면서 읽는게 좋았다. 
김동리, 김동인, 황순원, 염상섭, 나도향을 비롯해 지금은 이름도 가물거리는 근현대작가들의 책을 나는 모두 중학생때 읽었고 순전히 그 때 읽은 <감>으로 대입 학력고사까지 버틸 수 있었을 정도다. 

좋아하는 작가는?
과연 내가 아무 사심과 조건 없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누굴 언급해야 하나 막막하다. 좋아했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존경하지만 종종 너무 어려워서 심술나는 작가도 있으니 원.
마가렛 애트우드는 음울하고 비장하지만 꽤 오래 좋아하는 작가였으나 한동안 멀리했다. 어느 순간 너무 힘들어져서.
제인 오스틴은 번역본으로 읽으면 어쩐지 좀 짜증스러워지는데, 어순도 낯설고 말투가 흥미로운 원서로 보면 시간여행을 하듯 그 때로 되돌아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된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혼불과 최명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우리말과 사투리, 옛말 공부 교과서 같은 존재이지만, 성역화, 권력화된 느낌이 싫어지는 중이다. 책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대상이어야 하거늘.  
노엄 촘스키, 마루야마 겐지, 수잔 손택, 강준만은 나의 무지를 일깨워 살살 이끌어주는 선생님 같은 느낌이라 좋으면서 동시에 또 너무 거대하고 종종 어려워서 심술난다.

읽다가 포기했던 책은?
<삼국지>, <존재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는 아직 최종적으로 포기는 안했다).  
그밖에 단권짜리들도 읽다 말고 던져둔 책들 꽤 많다. +_+ 과거의 나는 책이 재미 없어도 악착같이 끝장을 내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인내와 열정도 사라지더라.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 뉴스를 본 날, 언젠가 사두고 다 못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고 아직 못 끝냈다.
최근에 독서를 마친 책을 의미하는 거라면 <서울은 깊다>.

내 인생의 책은? 많겠지만 다섯 권 이하로 압축해본다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국민학교 4학년때였을 거다. 활자 빽빽한 동화책과 위인전, 세계명작 전집이 책의 전부인 줄 알던 나에게 친구가 선물했는데 예쁜 그림과 단출한 글귀도 마음에 들었지만, 어린 아이가 서점에 가서 단권으로 책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좋아하는 친구에겐 나도 문방구 선물 대신 이 책이나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선물하곤 혼자 뿌듯해 했다. 
<빨간머리 앤>
계몽사의 50권짜리 동화전집 가운데 딱 한권 파본이 있었으니, 바로 <빨간머리 앤>이었다. 잘못된 책을 보낸 뒤 새책을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빨간머리 앤>의 내용을 홀로 상상하며  읽고 싶다고 염원하기만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도서실에서 발견한 뒤에야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뒤늦게 읽은 이 책이 어찌나 재미 있던지 책을 훔쳐다가 집에 있는 동화전집 빈자리에 끼워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소심해서 훔치지는 못했지만...  <제인에어>와 함께 중고등학생 시절 나의 단골 반복독서용 책이었다.   
<제인에어>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말고도 중학생 때 나는 집에서 또 한권의 <제인에어>를 발견했었다. 그때도 이미 종이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던 그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2권으로 1963년 9월에 발행했고 정가가 290원이라고 적혀 있다(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 먼저 읽은 제인에어는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한 페이지를 상하로 구분해 빽빽하게 세로쓰기로 인쇄된 이 책은 제인과 아델, 소피가 사용하는 프랑스어도 모두 원어로 실리고 주석이 꼼꼼하게 달린 그야말로 <완역본>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어린 마음에 확실한 이유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막연한 분노와 불편함을 느끼며 못마땅한 구석이 참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속상할 때나 화날 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되는 효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도, 어른이 된 뒤에도 가끔씩 읽으며 막연한 불편함의 정체를 찾아보려 애를 썼던 것 같은데, 결국엔 20여년 뒤 석사논문을 제인에어로 쓰게 되더라. 
<혼불>
고등학교때 막연하게 대학엘 가면 국문학을 전공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국어선생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때 내가 따르던 국어선생님이 은사님이 쓴 책이라며 <혼불> 1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대보름날 달맞이 하는 장면의 묘사부터 무척이나 매혹적이었고, 종종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순우리말 낱말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나도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쓰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더불어 국어공부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태백산맥>
당시 대학생에게 강요되는 사회과학 서적들에 대해 나는 묘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알아야 하는 진실이기는 하지만, 이북 출신에다 빨갱이라면 서슬이 퍼래지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향 때문인지 '용공불순서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금서들이 불편해서 외면했다고나 할까. (80년대 중반 웬만한 사회과학서적은 전부 금서였다^^) 그런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게 긴 대하소설인줄도 모르고 한권한권 눈빠지게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헐레벌떡 밤새 읽곤 했는데,태백산맥을  몇권 읽고 나자 그제야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부하듯 관련 역사책을 찾아읽으며 뒤늦게 정치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으니, 나에겐 다른 독서를 이끄는 좋은 책이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한 구절만 소개해 달라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기록을 하는 습관도 없고 기억력도 나쁜 허당이라 슬프다.
그나마 오래 전 미니홈피 대문에 남겼던 글귀가 있어서 옮겨 적는다.

"네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오늘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 마루야마 겐지 <천년동안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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