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에 해당되는 글 103건

  1. 2009.06.02 우리, 테오와 빈센트 반 고흐 8
  2. 2009.05.26 이해불가 10
  3. 2009.05.14 뒷북관람 - 클림트 전 10
  4. 2009.04.23 잠이 보약 15
  5. 2009.04.17 음식 단상 13
  6. 2009.04.09 연예인과 딴따라 10
  7. 2009.04.04 관계의 강요 23
  8. 2009.04.03 강박증 13
  9. 2009.03.30 기억력 21
  10. 2009.03.27 담백하다/담박하다 23
지인이 연극 초대권을 주겠다고 했다. 다른 정보는 전혀 없이 산울림 소극장에서 하는 고흐에 대한 연극이라는 것만 듣고도 당연히 갈 작정을 했다. 헌데 퀵으로 보내준 초대권과 함께 온 소개 전단지엔 테오와 빈센트, 단 두 사람이 등장하는 연극이며,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각색한 내용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얼마만에 연극을 보는 것인지 까마득할 정도여서, 설레는 마음으로 웬만하면 즐겁게 감상할 다짐이 되어 있었다.
지인들과 일찌감치 만나 저녁을 먹고 좌석을 배정받고는 산울림 소극장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신뒤 8시를 기다려 드디어 극장안으로 들어갔더니, 이미 소극장 바닥 무대엔 두 배우가 쪼그려 앉아 있는 바람에 조금 놀라웠다. 예상과 달리 평일 저녁임에도 소극장은 거의 빈자리 없이 관객이 들어차, 연극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 올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곧이어 그것은 나의 착각임이 드러났다.

임영웅 연출, 이호성/이명호 출연


빈센트 역할의 이호성과 테오 역의 이명호, 두 배우의 연기는 훌륭한 편이었다.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연기할 때는 약간 손발이 오그라들긴 했지만서도. 단순한 무대에서 각기 모노드라마를 하듯 수많은 사건들을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감정을 표출하는 건 분명 쉽지 않았을 텐데, 두 형제의 격렬한 고통과 교감은 시종일관 팽팽히 느껴졌다.
그러나 내용은 너무나 뻔했다.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 <반고흐, 영혼의 편지>에서 익히 본 내용 이외의 참신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변화 없이 단조로운 무대에서 들려주는 뻔한 이야기는 두 배우가 아무리 감정을 담아 호소한다고 해도 지루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식곤증 탓도 있었지만, 연극 자체는 정말 하품나게 재미 없었다. 나는 고흐에 대한 예의와 의리(?)로라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느라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같이 간 지인 둘은 계속 졸았노라고 나중에 실토했다. 한 친구는 나갈 통로만 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거라나.
그런데도 어떻게 그날 그렇게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 죄다 초대권의 힘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 아무리 고흐를 다룬 작품이라 해도 절대 주변에 추천해줄 수 없는 연극이다. 특히 <반고흐, 영혼의 편지>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혹시 책을 안 보았고, 고흐의 생애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면 재미가 있을 수 있으려나? 글쎄, 나는 둘의 대화와 관련된 그림들을 떠올리려 애쓰며 심취하려 노력했음에도 즐기기 어려웠으니 그 마저 장담할 순 없다. 아무리 소극장이라지만, 관련 그림들을 뒷배경에 슬라이드로라도 비춰주었으면 덜 지루했을 텐데 싶었다. 초대권 들고 갔는데도 엉덩이 아프고 시간이 아까웠을 정도니 거금 3만원을 들여 보러 갔더라면 억울해서 펄펄 뛰었을 거다. 언제부턴가 연극 보는 일이 드물어진 건, 뜸해진 나의 문화생활 탓이기도 하지만 가끔 본 연극에 노상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고전을 졸려하는 나의 짧은 식견도 크게 작용하지만, 재미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재미없는 이 연극보다는 근처 밥집 찾아다니다 먹은 돈까스 집 <담(談)>의 낮은 천장과 바삭하고 양많은 돈까스가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가격도 단돈 6천원. 근처에 가게 되면 담에 또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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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불가

하나마나 푸념 2009. 5. 26. 21:30

매사를 삐딱하게 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나는 납득할만한 까닭없이 무조건 하지 말라면 더 해보고 싶고 다들 한쪽으로 몰려가면 괜한 반항심에 반대로 가고 싶어하며, 자발적인 비주류 또는 소수에 속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럴 때마다 나에겐 양심을 바탕으로 한 고유한 잣대 또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기에 삐딱하게 살아왔어도 크게 남들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비난 받을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똑같이 서 있더라도 잔디가 밟아줘도 될 만큼 싱싱하면 냉큼 들어가, "잔디밭은 사람들 들어가 놓으라고 만드는 거지 구경만 하라고 만드는 게 아니잖아!"라고 큰소리 치지만 잔디가 부실하게 막 자리를 잡는 중이면 알아서 냅둔다는 말이다.
그런데 삐딱투덜이과에 속하는 나로서도 도무지 이해불가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가령, 경관이 아름다운 자연 속의 바위나 나무, 문화재 같은 것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 이름을 새기는 인간들. 들짐승들이 겨우내 먹고 살아야 하니 도토리를 주워가지 말라고 부탁하는데도 굳이 배낭과 비닐봉지 한 가득 바리바리 도토리를 따고 주워 내려오는 사람들. 새로 조성한 동네 공원에 심어 놓은 식물 이파리가 나물거리라면서 남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죄다 따가는 아줌마들. 자기밖에 모르는 무식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라고 그들을 욕하지만, 최소한 그들에겐 이익을 추구한다는 (이름을 남겼고, 맛있는 도토리묵과 나물을 해먹을 테니까) 명분이라도 있으니 용서할 순 없어도 납득이 가긴 한다.
그런데 딱히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근 우리 동네 산책로는 자연천 복원이다, 자전거길을 새로 닦는다 해서 몇달째 계속해서 공사중이었는데 장마 전에 공사를 마무리하려는지 요즘들어 거의 막바지 포장 작업을 하는 곳이 많다. 한동안 흙길이었던 곳 한쪽을 먼저 아스팔트로 덮고 나머지는 특수 포장재를 깔 모양인데, 며칠 전 소나기가 내리는 날 하필 포장 작업을 했는지 산책을 나가보니 길 한쪽편으로 뭔가 하얀 재질을 깔고는 길게 비닐을 덮어 군데군데 벽돌로 고정시켜놓았고 새로 포장한 길 양쪽 끝에는 통행금지 표지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직 포장길이 마르지 않아서 그렇게 해놓았으리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막아놓은 길로 접어들어 버젓이 비닐을 밟고 다니고 있었다. 일반 보행자 뿐만 아니라,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아이들, 어른들, 자전거를 타고 끄는 사람들까지. 나는 그 사람들을 하나 하나 붙잡고 인터뷰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들어가지 말라고 표지판도 서 있고 아직 안 말라 비닐 안쪽으로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게 빤히 보이는 그 위로 왜 굳이 들어가 걸어다니고 있는지? 바로 옆에 더 넓은 길이 얼마든지 뚫려 있는데?
그 구간을 더 지나니 새로 아스팔트를 깔아 놓은 넓은 공간 중간중간엔 찐득한 페인트를 쏟아놓은 것처럼 빨간색 과 초록빛 안료 같은 것이 넓게 칠해져 있고 역시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빨간 원추모양 기둥과 벽돌이 둘레에 쳐져 있었는데, 표면이 마르기 전에 이미 여러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가 밟고 다녔는지 가혹한 발자국과 안료 엉겨붙은 자국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도대체 왜일까?

아무 설명 없이 <들여다보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이 문에 붙어 있다면, 오히려 호기심이 동해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으리라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시멘트나 포장길, 페인트 위를 걸으면 표면이 망가질 뿐만 아니라 신발도 버릴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도 굳이 막아놓은 길을 뚫고 그리로 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대체 무언지, 절대 이해가 안된다. 물론 누군가 처음 그짓을 시작하면, 덩달아 따라하고 싶은 군중심리나, 남들도 하니까 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막가파 정신이 발동할 수 있다는 정도는 나도 안다. 하지만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은 뻔뻔한 그들을 지켜보아야하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상해서 전전긍긍하고 새로 까는 길 완공도 전에 다 망가진다고 혀를 끌끌차시는데, 그들의 양심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철판을 둘렀을 리는 없고 도무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차라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겉치레 행정에 앙심을 품은 행동가들이 훼방을 놓은 것이라면 이해가 더 쉽겠다. 정치뿐만 아니라 도덕과 윤리 면에서도 후진국민이라 그렇다고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역시 그게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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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전시회 시작됐을 때 연일 관람객이 바글거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인파가 뜸해지길 바라며 꽃과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에 소풍삼아 예술의전당에 가리라 마음먹었다. 3월엔 클림트 전을 보고 나온 지인 모녀를 만나러, 4월엔 카쉬 전을 보러 예전에 가기는 했지만 정작 클림트전은 못보고 조바심만 내고 있었는데, 어느덧 달력을 보니 이번주 금요일이면 전시회가 끝난다고 적혀 있었다. 정신머리 없는 내가 못미더워 밀린 숙제처럼 탁상달력에 적어놓고도 마지막 주까지 버티다니. 참 한심스러웠지만 아예 놓쳐버린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지난 화요일 잠을 줄여 헐레벌떡 구경을 다녀왔다.
관람료도 비싼 대규모 기획전시를 찾아다니는 건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한 문화산업에 편승하는 짓이니 지양해야한다고 익히 들었어도, 그림구경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늘 그 장단에 춤을 추고 있긴 하지만 이번엔 특히 마음이 찜찜했다. 평일 오전엔 원래 한가로운 아줌마 관객들이 미술관에 많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입구부터 줄을 서듯 두겹 세겹으로 그림앞에 둘러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안내직원들이 소리를 쳐댔다.
"다른 전시실 먼저 둘러보십시오! 안쪽으로 가시면 빈 공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전시실도 한가롭게 그림 하나를 오래 감상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곳은 없었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딪치고 시야를 방해받고 누군가의 발을 밟거나 밟혀야 했다. 그동안 관람객이 어찌나 많았는지 전시 팸플릿도 다 떨어졌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미리 준비된 게 다 떨어졌으면 다시 인쇄를 해야 마땅할 텐데, 아무리 마지막 주에 뒷북관람을 하는 관객이로서니 대놓고 푸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전시 주최사인 동아일보사는 반성하라!
게다가 저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유디트I>을 제외하면 유명 작품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실망감은 줄지 않았다. 그나마 <베토벤 프리즈> 벽화와 정사각형 캔버스가 인상적이었던 풍경화를 직접 본 것으로 관람료 본전은 뺀 거라고 애써 위로하고 돌아왔는데, 기막히게도 그 <베토벤 프리즈> 원본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있고(현재도 전시중이라고 ㅠ.ㅠ) 훼손을 염려하여 한국에 보낸 건 복제본이란다. 완전 사기당한 기분!! 나만 몰랐던 것인가??

물론 전시 끝나기 직전이라 더욱 복잡했을 시기에 그림을 보러간 건 순전히 내 잘못인 걸 잘 안다. 대작들은 많이 없는 대신 드로잉과 뜬금없는 디지털영상사진이 더 많아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괜히 보러갔다고 후회를 한 건 아니었고, 보길 잘했다는 생각은 확실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는 속담이 어김없이 들어맞는 요란스런 거대자본형 전시에 머릿수를 보태준 것이 찜찜하다는 얘기다. 암튼 이러저러한 투덜거림은 전시회 자체에 대한 것이고, 다른 화가들에 비해 큰 애정을 갖고 있진 않았던 클림트에 대해선 이참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생기긴 했다. 클림트와 황금빛 색채는 뗄레야 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나는 <키스>나 <포옹>, <유디트> 같은 그의 그림들이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눈쌀을 찌푸리곤 했다. 뭘 그렇게 유난스럽고 번쩍거리게 드러내나 싶은 무식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건데, 이번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거의 사진처럼 묘사한 그의 초기작부터, 이미 대가로 칭송받던 시기에도 수없이 연습을 거듭한 드로잉과 스케치 작품, 중년 이후에 시도한 인상파 풍의 풍경화를 실제로 보니, 책과 화집에서 <읽어낸> 느낌과는 여실히 달라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졌다.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하여 늘 가난하고 힘겨웠으며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을 따라 모사하고 연습하던 고흐의 그림들이 상대적으로 아마추어 같은 노력의 과정을 진하게 풍긴다고 한다면, 클림트는 천재적인 자기 재능을 거리낌없이 온갖 방식으로 시도해본 노련함과 여유가 강렬하게 뿜어나왔다. 클림트의 황금빛 찬란한 작품에서 평범한 이들을 약간 움츠러들게 만드는 천재 특유의 오만함을 (경외심과는 별도로) 느끼는 건 순전히 나만의 편견일 수도 있겠는데, 하여튼 나는 그런 색다른 인상이 신기했다.

그림전시회를 보고 나와서 소박한 의식을 거행하듯 천원짜리 엽서 몇장을 사며 우리나라 업자들의 그림 인쇄술이 조악하다고 늘 불평했던 것 같은데, 이번 클림트전은 아예 그림 엽서와 카드, 복사본 그림 따위를 독일에서 수입했더라. 지금까지 그런지는 몰라도 컬러 인쇄술은 독일이 가장 앞섰기 때문에 고가의 화집 같은 건 독일에서 만든 걸 사라고 익히 들어왔는데, 색감이 확실히 선명하긴 해도 <Made in Germany>라서 작은 엽서 한장에 3천원, 5천원씩 하는 걸 보며 또 한번 내 입에선 불평이 터져나왔다. 젠장!
오스트리아엘 간다 해도 만나볼 수 없는 <처녀>와 <친구들> 엽서를 어렵사리 한장씩 고르고, 실물 알현의 영광을 누린 <아담과 이브> 타일 자석을 받아들고 흐뭇하긴 했어도 이번 전시의 노골적인 상업성은 성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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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보약

투덜일기 2009. 4. 23. 15:52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불면증 탓에 며칠 또 제대로 잠을 못자고 빌빌댔다. 온갖 병균들은 그런 때를 귀신같이 간파하고 달려들기 때문에 목감기가 시작된 건 그러려니 했는데, 그제어젠 어쩜 야속하게도 단 한순간도 잠들수가 없는지 기가 막힐 정도. 경험상 그럴 땐 몸과 정신이 더 못 버티고 완전히 뻗어버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마침 출판사 갈 일도 있겠다 안 어울리게 어젠 아침부터 나를 못살게 굴었다. 화분에 물주고, 청소기 돌리고, 국도 미리 끓여놓고, 강건너 출판사 가서 점심먹고, 상담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보고, 정민이 자전거 타는 거 졸졸 따라다니고(행여나 느루 망가질까봐ㅠ.ㅠ), 저녁 해먹이고, 영어수업하고, 잠깐이지만 조카들과 몸을 쓰며 놀아주기까지. -_-;
늦은 밤이 되자 정말 드러누우면 최소한 열두시간은 못일어날 것 같은 피로가 몰려왔다. 시체처럼 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중간중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깨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만에 아주 푹 잘 수 있었고 작정한 김에 잠이 깨도 다시 잠을 청해 까무룩 또 잠들 수 있었다. 그토록 달콤하고 행복한 잠이 왜 간간이 나를 버리는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어제 아침엔 온 얼굴의 모공이 분화구처럼 자라고 하얀좁쌀 같은 여드름이 돌연 대여섯개나 돋아 <나 잠 못잤음>이라고 사방에 광고하는 듯한 시커먼 얼굴이라 뭘 찍어발라도 둥둥 뜨더니, 하루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얼굴은 세수도 안했는데 다시 뽀얘졌고 뾰루지도 큰것들 빼고는 다 자취를 감췄으며 목도 덜 아프다. 참 놀라운 잠의 효력. 밥심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뭐니뭐니해도 잠이 보약이다.
가끔 잠이 달아나는 건 내가 보약을 불신하기 때문일까? 내가 불신하는 건 원래 뜻대로의 <보약>이 아니라, 발로 밟다가 보낸 중국산일지도 모를 온갖 약재들을 넣고 푹푹 끓여 뜨거울 때 비닐팩에 넣어(분명 환경호르몬 나올거다) 포장해주는 <요즘 보약>일 뿐, 옛날처럼 한약방에서 하얀 종이에 하나씩 담아 접어준 좋은 약재(지리산 같은 데서 딴!)를 들고와 집에 와서 약탕관에 넣고 온종일 부채질해가며 달인 진짜 보약이라면야 나도 벌컥벌컥 마셔줄 수 있단 말이다! 나에게 보약잠은 분명 그런 정성으로 달인 훌륭한 치유제이거늘 왜 자꾸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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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단상

식탐보고서 2009. 4. 17. 21:43
얼마전 공주님 납시는 날 저녁메뉴를 무얼로 할까 고민하다 연어 스테이크를 구웠다. 거창하게 말해 연어 스테이크지, 소박하게 말하면 그냥 생선구이였다. 다만 멋을 좀 부리느라 연어 살덩이에 소금과 후추, 바질가루를 슬쩍 뿌려 1시간쯤 재놨다가 열량은 그냥 무시하고 버터와 다진마늘을 좀 넣어 구웠고, 어서 본 건 있어가지고 타르타르소스랍시고 다진 양파와 다진 마늘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뒤 피클 대신 병제품으로 나온 레몬갈릭소스를 조금 섞어 구운 연어에 얹어 먹었다. 당연히 구울 때부터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훈제 연어 샐러드인줄 알고 인상을 찌푸리던 공주님은 반색을 하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제대로 된(?) 연어를 처음 먹어본다면서.
왕족들은 역시 아무리 잘해줘도 끝이 없다. 이번주에 역시나 공주님 납시는 날 장도 보러가기 전에 일찌감치 전화가 왔길래, 오늘은 빨간고기를 해줄까 닭볶음탕을 해줄까 물었더니 공주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둘 다 싫고 내가 안 먹어본 걸로 맛있는 거 만들어주라. 지난번 연어 스테이크처럼." 
버럭 화가 나서 고모가 해주는 거 아무거나 먹으라고 대꾸하곤 또 착한 무수리답게 골똘히 고민해봤는데, 연어 스테이크는 어쩌다 운이 좋았던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12살난 조카가 먹어보지 않았으면서 내가 요리해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란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야흐로 없는 것이 없는, 풍요의 세상에 태어나 거의 모든 걸 누리며 살아온 공주가 아닌가 말이다.

일제 강점기 끄트머리에 태어나 전쟁을 거치고 어마어마한 변화의 역사를 거쳐온 우리 엄마 세대엔 댈 것도 아니겠지만, 먹거리에 관한 한은 나 역시 퍽이나 큰 변화의 흐름 속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외식이라고 하면 엄마 곗날 중국집에 쫓아가 짜장면을 먹거나 졸업식 같은 중요한 날 큰맘 먹고 한일관 같은 불고기집엘 가는 게 전부였던 나의 유년과 비교하면 요즘 호화찬란하고 국적까지 다양한 외식문화와 먹거리의 발달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아직도 지방에 따라 취향에 따라 사람들마다 먹어본 음식의 종류가 한정될 터이고, 음식도 유행이라 시대의 흐름을 타 새로 생겨나거나 새삼 유행을 하거나 인기를 잃어 사라지는 걸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밖엘 나가보면 한집 건너 한집씩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놀라우리만치 방대해진 외식산업은 확실히 옛날과 다른 방식과 빈도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나는 감자탕을 대학시절에나 비로소 구경해보았고 삭힌 홍어 전문점은 사회생활을 한참 하고 난 뒤에나 접할 수 있었으며 누룽지탕 같은 메뉴는 불과 몇년 전에 생겨난 것 같은데, 우리 조카들만 해도 이미 열살 이전에 저런 음식들을 다 거쳤기 때문이다. 다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맛있는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어른들 탓이고, 또 정 먹고 싶으면 삭힌 홍어 사다가 집에서도 삼합을 만들어 먹거나 오븐에 수제 피자를 구워내는 놀라운 솜씨를 지닌 우리 올케들 덕분이다. 
뷔페에라도 가면 울 엄마는 지금도 무얼 먹어야할지, 뭐가 뭔지 메뉴를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시는 터라 우리 아랫것들이 적당히 알아서 음식을 담아다드릴 때가 많다. 하지만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인 어린 조카들은 아무 문제 없이 척척 지들이 먹고 싶은 것들을 담아다가 먹는다. 어쩔 땐 어른들이 되레 그들에게 뭐가 맛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우리집의 진짜 미식가들은 어린 조카들이어서, 옛날부터 그들이 잘 먹고 맛있다고 하는 걸 먹으면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_+ 파스타가 맛이 없네, 깐소새우가 맛이 있네... 어른스러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끔은 실소가 나온다.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임을 내가 알게 된건 분명 어른이 되고 난 뒤였다. 아니, 어른이 된 후로도 한참동안 스파게티는 <경양식집>에서 가끔 파는 맛없는 이태리 국수라고 여겼고(그게 첫 만남이었으니까;;) 맛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첫 출장을 갔을 때 본사 직원들이 환영파티랍시고 뉴욕에서 꽤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엘 데려가선 파스타를 먹으라고 권하는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까지 가서 맛없는 스파게티를 환영파티 음식으로 먹을 순 없다고 여기며 낯선 메뉴에 끙끙거리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시켜 먹은 <토르텔리니>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태리식 작은 만두인 토르텔리니를 맛있게 하는 곳을 아직도 서울에서 찾아 헤매고 있을 정도. +_+
어쨌거나 나는 <파스타>라는 말을 안 게 얼마 안되는데, 겨우 열살 전후의 조카들이 제 엄마에게 파스타며, 바비큐립, 퀘사디아 같은 어려운 음식이름을 척척 대며 만들어달라고 청하는 걸 보면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 그리고 확실히 음식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내 주변엔 덩치만 커다란 어른이었지 감자탕이며 선지해장국, 간장게장을 못먹거나 맛을 모르는 지인들이 꽤 되는데 나의 조카들은 서너살 때 이미 입주변이 새빨갛게 변할 만큼 매워서 낑낑대면서도 감자탕의 맛을 알았고(할아버지의 술안주 기호식품이었으니까;;), 선지 해장국을 시키면 공주는 온 식구들의 선지를 죄다 빼앗아 먹곤 했다. 간장 게장 게딱지를 먼저 차지하고 앉아 거기에 야물딱지게 밥을 비벼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집에선 전혀 놀라운 게 아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답게 조카들도 고기를 심히 편애하고 채소를 마지못해 먹기는 하지만 지금 하는 식상활 대로라면 웬만한 나의 지인들보다 빨리 음식 사회화 과정을 마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런 마당에 나더러 안 먹어본 맛있는 요리를 해놓으라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요구였던 셈인데, 난 또 뭐가 없을까 며칠째 틈틈이 고민하며 무수리의 책무에 충실히 살고 있다.

음식은 언제부턴가 식탐 많은 나에게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짜증스러운 노동의 집약체가 되고 말았다. 맛있는 음식 먹는 걸 그 무엇보다 좋아하기에 식도락 흉내내며 이런저런 음식점을 순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확실히 예전보다 외식 요리에 대한 애정이 줄었고 좋지 못한 재료가 남기는 외식 후유증에 더욱 민감해졌다. 복잡한 건 귀찮으니까 당연히 재료의 원맛을 살리는 소박한 요리법을 실천하게 되기도 했고, 온갖 성인병의 징후를 다 갖고 있는 엄마 때문에라도 싱겁고 건강한 집밥을 <손수> 해먹고 살다보니 생겨난 결과다. 아직도 맛있는 걸 먹으면 몹시 행복한데 그걸 만드는 주체가 주로 나여야 한다는 상황은 여전히 뼈저리게 체화되질 않는다. 비길 데 없이 맛있었던 엄마표 탕수육과 엄마표 돈까스, 엄마표 김밥 따위를 이제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고만 싶은 중년의 딸에게, 부엌은 확실히 <맛있는 냄새가 나는 지옥>이다(오래 전 씨네 21 칼럼에서 본 표현인데 바쁘게 부엌에서 콩닥거리다가 땀찬 고무장갑을 서둘러 벗을 때 잘 벗겨지지 않는 짜증스러움 등 공감가는 얘기들이 참 많았으되, 누구의 칼럼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차라리 먹는 걸 뜨악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더라면 정말 대충 해먹으며 덜 불행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문제는 나의 식탐으로 귀결됨을 느끼며 더욱 한숨이 나온다. 요리하는 건 싫은데 반찬 없는 밥상은 더 싫으니 어쩌란 말이냐!

이왕 할 거면 투덜거리지를 말든지, 투덜거리려면 하지를 말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할 텐데, 식탐녀 무수리는 끼니때마다 노상 입이 튀어나온다. 어쨌든 오늘 저녁 다시멸치와 마른 새우를 넣고 감자 한개, 애호박 반개, 양파 한개, 새송이버섯 한개, 맛타리 버섯 한줌, 두부, 다시마가루 조금,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찌개는 <매우> 맛있었고, 소금을 거의 뿌리지 않고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먹은 삼치구이도, 파프리카, 오이, 샐러리, 삶은 달걀에 발사믹 식초와 흑임자소스를 섞어 뿌린 샐러드도 훌륭한 맛이었다. (솜씨 자랑하는 거 맞다;;)
짜증과 투덜거림 속에서 그나마 내가 붙들고 살아갈 기둥은 이것뿐이려니...
<식탐은 나의 힘. 밥심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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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생을 마감한 젊은 연예인과 관련된 연예계 비리와 고질적인 이 사회의 접대문화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걸 보며 계속 마음이 언짢았다. 젊고 예쁜 여자들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유력인사를 초대해 사업을 도모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렇고,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 절반이 연예인일 정도로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여자 연예인을 아무렇게나 소모해도 되는 물건 취급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기막힌지.
뇌물을 써서 권력을 매수하는 행위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도 같지만, 뇌물로 쓰이는 도구에 아직도 인간이, 특히 젊고 예쁜 여자들이 포함되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생각의 근본엔 아직도 뿌리깊은 성차별 의식과 특정 직업에 대한 멸시가 동시에 담겨있는 것 같다. 예로부터 예술하는 이들을 무조건 천것이라 깔보는 사람들의 편견이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딴따라>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이니까.

나 역시 어려서부터 <딴따라>에 대한 좋지 못한 편견을 품고 자란 경험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친척 가운데 이른바 연예인(배우가 더 적당한 말이긴 하겠지만, 연예인엔 배우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이 있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리 건전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끔 대면하는 그분의 모양새는 늘 흐트러져 있었고(요즘의 나처럼 밤낮을 거꾸로 살았던듯^^; 가보면 언제나 방에 누워 뒹굴며 우리에게 만화책을 빌려오라거나 군것질거리를 사오게 하거나 다리를 밟으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텁수룩하게 기른 장발을 사자갈기처럼 뻗친 채로 좀체 사랑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끌끌찼고, "<딴따라>는 저래서 안돼...젊은 놈이..."라고 나중에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불규칙한 생활과 불규칙한 수입, 허망한 인기, 보장없는 미래, 알려진 얼굴 때문에 제한될 수 밖에 없는 삶, 실제 형편과 상관없이 품위유지(?)를 위해 부려야 하는 허세. 어려서부터 지켜보아도 어느 것 하나 <바람직한> 직업은 아니었기에, 나 역시 <딴따라는 안돼>라는 구식 편견을 그대로 물려받고도 당연하다 여겼다. 멋진 배우들과 연예인을 동경하는 마음 따로, 현실적인 잣대 따로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주변에서 누군가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면 본인의 재능여부를 떠나 일단은 말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요즘 연예인은 성공만 하면 단순히 인기를 누리는 것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이윤을 내는 일인기업으로 촉망받는 유망직종이다.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부터 연예인이 되겠다고 유명 기획사에 들어가 몇년씩 가수 연습생 생활을 견디기도 하고, 노예계약이든 아니든 일단 어딘가에 소속되어 연기자로 빛 볼날을 감내하는 것이겠지. 오래 전 친구의 취재를 돕느라 SM과 JYP 엔터테인먼트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곳 연습실엔 정말로 열살 전후의 어린아이들이 제2의 보아를 꿈꾸며 수십명씩 춤과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고, 연습실 밖 복도에 줄지어 서서 기다리던 엄마들은 춤연습이 끝나면 아이의 연기지도를 위해 곧장 연기학원엘 데려가야한다고 말했다. 정말로 제2의 보아가 될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원하고 끼도 있으니> 힘닿는 데까지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예비 연예인 엄마들의 각오였다. 그때 그 아이들 가운데 과연 몇명이나 혹독한 훈련을 견디고 오랜 기다림 끝에 데뷔에 성공을 했을지, 요즘 떼로 나오는 아이돌 그룹을 보면 혹시 그 중에 그때 그 아이들이 있는 건 아닌지 문득 궁금해진다. 하기야 데뷔를 하고 음반을 내거나 단역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했더라도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고, 연예계의 특성상 언제 어떻게 허망하게 사라질지 모를 위치에 놓인다는 것을 알면서 그들은 왜 그렇게 매달리는 것인지. 확률이 적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매주 1등이 나오는 걸 알기에 로또를 사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희박하지만 자기가 제2의 보아나 비, 배용준이 될 거라는 꿈을 먹고 살기 때문일까. 

학교 후배 가운데 동아리 활동 때의 열정을 살려 뮤지컬 배우가 된 아이가 있다. 노래하는 걸 옆에서 들으면 정말 소름이 오드득 돋을 정도로 가창력이 뛰어나고, 팔이 안으로 굽는 걸 감안하더라도 연기력이나 춤솜씨도 손색없는 편이다. 몇몇 뮤지컬에서 조역으로 활약해온 그녀의 궁극적인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꽤 오래 음반준비를 한다더니 작년이었나 난데없이 가스펠 음반을 냈다고 알려왔다. 일반 음반을 내려니 우선은 기획사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아직 20대인데도!)도 걸림돌이라 난색을 표했고, 쓸데없이 수많은 <접대 자리>에 수시로 불려나가 관계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단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깨끗한> 업계인 가스펠 음반사와 계약을 해 노래를 한 것으로 만족했다나. 아니, 관계자 얼굴 도장을 왜 꼭 술자리에서 찍어야하는지!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자리야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지만, 일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같이 술을 마셔줘야한다는 상황은 굳이 연예계가 아니어도 흔한 일이지만 참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악습이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터지는 연예계 비리도 그렇고, 상하를 막론하고 도대체가 비뚤어진 접대 문화도 그렇고,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나 양심과 도덕성의 결여다. 크든 작든 권력을 손에 쥐면 잇권에 개입하고 약자들을 장난감 주무르듯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막히고 공분할 비리들은 언제든 터져나올 것임을 각오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기야 청렴한 체했던 대통령도 힘있는 동안 당당히 수십억씩 해먹는 나라에 살면서 양심이니 도덕이니 따지고 있는 나 같은 인간이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하다. 손가락질 받고 벌 받아야 하는 놈들은 떵떵거리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잘 살고, 힘없고 억울한 이들만 죽어가는 이 사회를 잠시라도 잊으려면 잘생긴 꽃남이나 예쁘고 늘씬한 소녀들에게 정신을 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연예계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 어쨌거나 오늘도 나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멋진 딴따라들을 발굴하려고 눈을 번득이고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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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강요

추억주머니 2009. 4. 4. 22:01

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그 시기에 특히 또래 집단들과의 긴밀한 우정이 형성되는 모양인지, 반엔 유독 끼리끼리 어울리는 무더기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 꽤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우정을 과시하듯 서너명씩 몰려다니는 그 아이들이 꼴같지 않기도 했고, 당시 유행하던 고무줄 놀이에 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실력(밑바닥이란 의미다) 때문에 어차피 같이 놀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독 나를 자기네 무리에 끌어들이려고 공을 들이는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H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닌데도 괜히 빙 돌아서 시장 언저리까지 나와 동행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막 우겨서 나를 고무줄 놀이 깍두기로 껴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고맙다기 보다는, 1, 2단을 넘기지 못해 놀림감이 되기 쉬운 내 고무줄 실력을 아이들 앞에 보여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H의 바람대로 학기초에 써내는 가정환경조사서에 그애의 이름을 적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만, 부모의 학력과 직업은 물론이고 집에 TV 따위의 가전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말도 안되는 항목까지 써내야 했던 그 종잇장에는 친하게 지내는 학우관계에 관한 항목도 있었고, 그 종이를 내기 전날 H는 나에게 다가와 "나는 친한 친구 이름에 니 이름 쓸 거니깐, 너도 내 이름 써야한다. 알았지?"라고 말했었다. 
H가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그냥 귀찮아서 그애와 친구로 지내는 걸 <눈감아주기로> 했던 것 같다. 도시락을 먹을 때나 점심시간 이후 운동장에서 놀 때, 방과후 집에 갈 때도 난 오히려 요란하게 휩쓸려 놀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편했음에도 거의 모두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반 분위기 때문에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4월 중순쯤 우리반에 전학생이 등장했다. 뿔테 안경을 써 모범생 분위기가 나고 꽤 얌전해 보이던 그 아이는 전학생이 흔히 겪어야 하는 따돌림의 운명을 고스란히 겪기 시작했다. 학기초이긴 해도 이미 <파벌>이 형성된 이후에 전학을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점심 시간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애를 확 밀어 넘어뜨리는 장난을 한 순간 그애가 "아부지!"라고 외치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부분 아이들은 깜짝 놀라거나 위험에 처한 순간 본능적으로 "엄마!" 또는 "엄마야!"라고 하는데, S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비쳤던 거다.
육성회 임원인 엄마를 둔 H는 당장 자기네 엄마를 통해 S의 뒷조사에 돌입했고, 전학시키던 날 학교에도 온 적 있던 S의 예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라는 사실, 그날 등에 업혀 있던 유난히 어린 아기동생은 배다른 남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온 반아이들에게 떠들어댔다. 이혼율이 높아진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혼이든 사별이든 재혼 가정이나 홀부모 가정은 무조건 <결손가정>이라며 잠재적인 문제아를 양산하는 가정으로 손가락질 했던 것 같다.
나도 2학년때 그 학교로 전학을 와 한동안 빙빙 겉돌던 기억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새엄마와 함께 사는 S를 안쓰러워하진 못할망정(사실 나의 무작정 동정심도 문제였지만;;) 괜히 따돌리는 반아이들에게 분노했고, 마침 집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S를 우연히 등교길에 만난 날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때도 친구를 본격적으로 사귀는 건 꽤나 뜸을 들이는 성격이라, 내가 S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의협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그냥 편견없이 전학생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와 S가 몇번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즉각 수군대기 시작했고, H는 나를 운동장으로 불러내 <절교선언>을 했다. "S랑 같이 다니면 너랑 절교할 거야. 어쩔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H에게 나는 기가 막혀서 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는, 보란듯이 S와 친한 척을 했다. 당연히 나까지 따돌림을 당하는 추세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들의 패거리 횡포가 부당하다고 느끼며 분노했다. 다행히 한동안 지켜본 결과 S는 나와 책읽는 수준도 비슷했고, 나처럼 운동도 싫어하는데다 나처럼 아기들을 예뻐해서 자기네 아기동생을 만날 업어준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집보다 훨씬 책도 많은 S의 집에 놀러가 보니, 동화속의 악독한 새엄마들과 달리 S의 새엄마는 특별히 다정스럽진 않아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다.
내 인생의 책 첫권으로 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바로 이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었다. 여자애들의 전반적인 따돌림 속에서 나는 얼떨결에 S와 단짝이 되고 말았지만, 나에게 정말로 각별한 친구의 존재는 S가 처음일 정도로 반발심이랄지 분노에서 시작된 우정은 퍽이나 성공적이었다. 한편, 나에 대한 H의 응징은 단순히 절교로 끝난 게 아니었다. ^^; 자신의 우정을 <감히> 거부한 배신자(실제로 H는 고무줄 놀이에 나를 끼워주었던 무리들에게 나를 <배신자>라고 칭했다)를 가만둘 수 없었는지, 따돌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H는 화장실 낙서사건을 공모했다. 당시엔 재래식 화장실인 <학교 변소>에 남녀 학생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하트 속에 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남자애가 우리반에서 제일 말썽쟁이에다 잘 안씻어서 더럽고 공부도 못하는 또 다른 왕따였다는 사실이 H가 꾸민 복수극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화장실 벽에 분홍색과 노란색 분필로 그린 하트 속에 이름이 적히는 사상최대의 스캔들을 직면하고 엄청난 놀림을 받기 시작한(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떼지어 "얼레리 꼴레리, 라니하고 OOO하고 얼레리 꼴레리~"라고 놀려댔다) 나는 처음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머리와 삐딱한 반항심은 그때도 여전했는지, 스스로도 잘난 척하며 나와는 터무니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던 코찔찔 말썽쟁이 OOO에게 일부러 보란듯이 연필도 빌려주고 전에없이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왕따들의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때부턴 유독 잘난 아이들이 못되게 따돌리던 힘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독 뚱뚱해서, 말을 더듬어서, 잘 안씻고 꾀죄죄해서, 숙제를 잘 안해와서, 그밖에 사소한 이유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은 각자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드러내놓고 엄청 친한척을 하진 않았지만 심정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사이였던 셈이다.
마침 그해 담임은 2학기부터 이상하게 좌석배치를 자율에 맡기겠다며 조장 몇명을 임명하곤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대신 남녀 비율은 반반씩 섞어 조를 꾸리게 했다.  폐품수집이든, 환경미화든, 용의검사든, 학예회 준비든 모든 경쟁평가는 조별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장으로 뽑힌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이미 패거리는 정해졌고 나는 굳이 조원을 선별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데도 뽑히지 않은 왕따 아이들은 전부 우리 분단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
그래서 우리 왕따 조가 모든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분야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든가 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꼴찌 조는 우리가 아니었다. 육성회 임원 자식들이 대거 모여있던 H의 조가 단연 극성스러운 1등을 차지한 건 말하나 마나일 것이다. 하지만 왕따들도 모이면 힘이 세지는 걸 우린 느꼈고, 근거없이 화장실 벽에 이름을 적혀 스캔들을 내는 복수극 같은 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에서 제일 키 큰 코찔찔 OOO이 주먹을 휘두르며 누군지 들키면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스캔들 당사자인 내가 바락바락 아니라고 하며 울고불고 해야 재미가 있을 텐데 오히려 의연하게 구니까 소문은 더 빨리 잦아들었던 것 같다.

쓰다보니 나 혼자 옛생각에 재미가 들어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왜 내가 새삼 이런 사연을 적고 있는고 하니, 제목에도 적은, 최근 경험한 어떤 관계의 강요 때문이다. 나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많아서 누가 느닷없이 강요하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수긍하기 보다는 반발심이 먼저 생기는 편이고,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더라도 제3자의 판단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겪고 판단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꼭 나를 염려한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대신 정립해주려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다가와서 간섭한 이들과 오히려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친하게 지내라거나, 새삼스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지인에게 듣더라도,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때문인지 덜컥 그 말을 수긍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십수년을 겪어도 뜻밖이라 생각되는 면을 발견할 만큼 한 인간을 파악한다는 게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느닷없는 관계의 강요에 제일 먼저 불쾌감을 느꼈다. S와 놀면 자기와는 절교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협박을 한 H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어쨌든 나는 내 판단력과 관계망을 간섭하려는 그의 시도에 11살 때의 추억이 떠올랐고 부디 그때처럼 순전히 반발심으로 원래 관계가 흐트러지진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기야, H와는 5학년에 올라가서 그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S와 함께 셋이 다시 친구가 되긴 했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그 둘다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지금 그들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하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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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증

투덜일기 2009. 4. 3. 17:33

내가 완전히 강박증 환자라는 얘기는 아니고, 사람마다 약간씩 강박증에 가깝게 신경쓰는 부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강박증은 좀 센 말이고 그저 염려증 정도가 적당하려나.
나도 몇가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부분이 있다.

첫번째는 손씻기. 볼일을 보고나서 손을 씻거나 뭔가를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밖에 나가선 손 안씻고 밥도 잘 먹으면서 집에 있으면 커피 한잔을 마시려해도 먼저 손부터 씻고 있다. 문제는 그냥 나만 그러고 살면 되는데, 온종일 엄마한테 손씻으라고 잔소리 하는 것. +_+
울 엄마는 예로부터 전쟁을 거쳐 물 길어 먹던 세대를 오래 살았던 지라, 웬만해선 손을 안씻으신다. ㅋㅋ 씻으라고 잔소리 하면 물 묻히는 시늉만 하시는 정도. 꼭 <비누질> 하시라고 덧붙여도 손씻는데 30초도 안걸리나보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가 손을 너무 자주 씻는다고 타박이다. 으휴.
그치만 손만 잘 씻어도 감기에 걸릴 확률이 반으로 준다는데!

두번째 염려증은 컴퓨터가 어느 순간 망가져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거의 컴맹인지라 아주 가끔 <치명적인 오류> 어쩌구 하는 글귀를 볼 때면 겁부터 난다. 최근 10년동안 두번, 컴퓨터가 망가진 적이 있었다. 처음 망가졌을 땐 아무 대책없이 모든 파일을 다 날리고 복구도 하지 못해 새 컴퓨터를 장만하며 정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컴퓨터 수리를 하러 온 기술자의 실력부족 탓이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이미 엎어진 물. 그래서 옛날 초기에 작업한 책들은 원고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두번째로 컴퓨터가 이상해졌을 땐, 일부 파일을 복구해주어서 너덜너덜해지긴 했어도 자료를 얼마간 건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컴퓨터에 든 자료를 날릴까봐 염려하면서도 그간 백업을 해놓는다든지 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것. 섹스앤더시티에서 캐리가 노트북이 망가져 원고를 모두 날리고 전전긍긍하는 에피소드를 봤을 때부터, 나도 백업해두는 습관을 들여야한다고 생각은 오래 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나마 노트북이 생긴 뒤로 usb로 간간이 공유해돈 파일이 있긴 해도 체계적인 백업은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웠다. 원고를 날릴까봐 늘 불안에 떨면서도 외장하드를 사야지 사야지 마음만 먹다가 드디어 실천에 옮긴 게 불과 지난달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다 복사해놓고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외장하드도 에러나면 어쩌나, 이러면서. +_+

세번째 염려증은 매사를 의심하고 걱정하는 나의 태도 자체다.
오늘도 교정지를 퀵 아저씨에게 보내며, 마구 불안했다. 이미 내 머리속에선 퀵서비스 아저씨가 요리조리 복잡한 도로를 오토바이로 달리다 사고가 나 심하게 다치고 상자에 든 원고는 어디론가 내팽개쳐지는 장면이 연상되고 있었다. 켁. 물론 퀵서비스며 택배로 출판사와 원고를 주고받은지 몇년동안 그런 사고는 단 한번도 없었는데도!
조금전엔 엄마가 동네 친구의 부추김을 받아 뒷동산 산책을 가셨는데, 엄마가 돌아오기까지 나는 계속 부실한 다리로 언덕을 오르다 나동그라져 구급차를 부르는 상황에 놓인 엄마의 모습이 자꾸 상상돼서 안절부절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거의 노이로제 수준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모시고 산책나가는 건 또 싫다. -_-;
노파심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점점 실감하는 나이가 된 겐가. 젠장.
요 며칠처럼 잠을 부실하게 자면 확실히 쓸데없이 불안한 마음이 더 커지는 것도 같다. 
그저 잠이 보약이려니 생각하고 오늘은 푹 좀 자야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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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

투덜일기 2009. 3. 30. 16:59

머리가 좋은 것과 기억력이 비상한 것은 특별히 상관 없단 얘기를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좋지도 않고 기억력도 좋지 않으니 그런 얘기를 들어도 별 위로는 되지 않는다. 특히 요사이 깜빡깜빡 잊는 것들이 하도 많아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은데, 나이 분포가 위아래로 다양한 편인 주변 지인들도 거의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건망증은 그냥 스트레스 속에 사는 현대인들의 습관 같은 것일지 모른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잠시 품기도 한다.
어쨌거나 어디 잘 둔다고 둔 물건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것은 다반사이고,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전날 계획했던 일도 까맣게 잊는 게 많다. 하물며 몇년 전 일이야 오죽할까. 이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저 친구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엉뚱한 기억으로 갖고 있는 경우도 많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는 아예 내가 먼저 뭘 아는 척 하지 않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도 있다. 특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귀신같이 잘 기억하고 있는 똘똘한 지인들에게 나의 건망증과 무덤덤함은 때로 배신감을 안기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기야 내쪽에서 더 잘 기억하고 있는 지인들의 에피소드도 더러 있긴 하다. 서로에게 각인되는 사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는 사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데 취약하다. 나와 사적으로 상관없는 유명인의 얼굴과 이름이야 잊어도 해될 것은 없지만, 한두번 대면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그저 공백으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만날 일이 있으면 뜨끔하다. 심지어 서너번 만나고도 얼굴이 희멀건 윤곽선으로 남은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 <면치>라고 인정하기로 한 나의 기억력을 통 믿을 수가 없게 된 뒤로, 그래서 나는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를 삼가고 있다. 안전하게 무조건 "안녕하세요"다. 상대쪽에서는 반갑게 알아보는데 내쪽에선 '누구더라, 누구더라, 누구더라...' 초조하게 아득한 머릿속을 헤집고 있노라면 진땀이 날 지경이다.
얼굴은 알아보겠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질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그쪽에서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서로 민망하게 웃으면 마음이 편한데, 상대편은 나름 특이한 내 이름을 기억하는 반면 나는 그러지 못할 때 참 미안하다. 다시 안볼 사람이면 상관없지만, 일 때문에 만나는 관계망 안에서 나는 얼굴 알아보기에 관한 한 분명 칠칠하지 못한 인간으로 분류되어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한탄한 바 있는 부실한 기억력 타령을 새삼 또 하고 있는 이유는 키드님의 블로그에서 언급된 <책 읽어주는 남자> 포스팅 때문이다. 케이트 윈슬렛이 <더 리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단 얘기를 듣고는 영화를 한번 봐야겠다 생각을 했었다. 원작도 있으며 부제가 각기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줄곧 과거에 내가 읽은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프랑스 책이었고, 당시에 그 책을 읽은 친구들과 우리도 책 읽어주는 귀여운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크게 베스트셀러가 되진 않았지만 알음알음 꽤 읽혀, 어느 출판사에서는 그 제목을 본따 <~ 해주는 남자> 시리즈물을 기획하기도 했었다.  
오늘 문득 똑같은 제목의 책을 프랑스와 독일 작가가 썼단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아니다. +_+
이번에 영화화 된 <책 읽어주는 남자>는 10년 전에 내가 읽은 그 책인 모양이다. 다른 책은 없다. 그런데도 내 기억엔 책을 읽어주는 귀여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전쟁이니 나치니 하는 주변 상황은 하나도 없고 기막히게도 프랑스어로 책 표지에 적힌 원제를 본 것만 같다. 큭.

하기야, 어떤 책이나 영화는 예전에 본 것인줄도 모르고 끝까지 보다가 기적적으로 기억을 해낸 경우도 있으니 아마 두번째 보면서도 두번째인줄 몰랐던 것들도 더러, 어쩌면 꽤 많이 있을 것 같다. 책이야 두고두고 여러번 보며 감동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은 것이니 억울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정신머리없고 기억력 나쁜 내가 한심스럽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의 기억이란 게 자기 좋을 대로 재편집되는 모양이지만, 그나마 뇌리에 남아있는 나의 기억들이 내 마음대로 휘저어 믿음직하지 않은 재구성의 산물임을 깨닿게 되는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슬쩍 겁이 난다. 차라리 그냥 까맣게 잊어버리는 쪽이 낫지 않은가 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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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낙서장에 가까운 블로그지만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뜻과 속속들이 맞는지 궁금해져 사전을 찾아보니, 또 하나 배우게 됐다.
<담백하다>는 원래 담박(淡泊)하다에서 나온 거란다.
1.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
2. 아무 맛이 없고 싱겁다.
3.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 
사전에 <담백한 글>이라는 용례는 없지만, 담백함의 반대말은 느끼함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며 글에도 비유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련다.

요 며칠 또 괜히 머리가 시끄러워서 잠도 잘 안오는 밤과 새벽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고 정서불안 환자처럼 이 책 저 책 들춰보다가 느낀 게 있다. 나도 접속사로 연결된 복잡하고 긴 문장을 습관적으로 많이 쓰는 편인데, 확실히 간결한 문장이 더 설득력있고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 문장이 긴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유려한 글쓰기를 하는 이들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은 호흡이 길어지면 시선과 이해력이 흐트러져 다시 되돌아가야할 때가 많다. 특히 요즘의 나처럼 정신 시끄러울 때 하는 독서의 경우는 더더욱. 거기다 젠체 하는 거들먹거림까지 버무려진 느끼한 글을 만나면 아예 참을 수가 없다.
어디선가 소개글을 보고 한번 읽어보고는 싶은데 내 돈주고 사기는 아까운 책이라 마침 그 출판사에 다니는 지인에게 한권 얻어놓은 책이 있었다. 이참에 한번 읽어볼까 싶어 몇달만에 드디어 들춰보려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무거운 주제도 아니고, 인간의 <쇼핑> 욕망에 대한 잡다한 단상을 적은 것임에도 그렇더라. 조사와 접속사 빼고는 죄다 외래어인 패션잡지를 멀미나서 잘 못 읽는 나의 개인취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유없이 거슬리는 꼭지들을 건너뛰어 뒷장으로 넘어가도 문장들이 딴죽을 걸듯 자꾸 턱턱 걸렸다. 어찌나 멋을 부리셨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패션전문가의 손을 빌려 꾸미고 명품으로 휘감았는데, 진품인지 모조인지 구분하기는커녕 명품 브랜드에 무지한 나는 그게  명품인줄도 모르는 격이랄까. 아니지, 내눈엔 진짜도 죄다 가짜로 보인다는 게 더 맞겠다.
아무튼 결국 난 그 책 읽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다 읽진 못했어도 나도 쓸데없이 기교와 멋부리는 문장은 쓰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을 주었으니 그마저도 성공적인 독서라고 할 수 있으려나. ㅎ

상대적으로 수전 손택, 서경식의 글과 생각들은 어찌나 명징(나는 이 단어가 참 좋다!)한지 하나같이 밑줄 그어 두고 싶은 주옥같은 표현이다. 우리말로 옮긴이들의 공도 당연히 있겠지만 저들은 삶부터 겉치레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원래 글도 담백하고 간결했을 거라 믿는다. 
한 두어달 일은 관두고 장서욕심에 사두고 밀린 책들이나 죄다 읽으면 좋겠건만 마음만 바빠서 독서도 초조한 메뚜기처럼 자꾸 이 책 저 책 옮겨다니게 되니 어쩌면 좋으냐. 으휴. 하기야 그런 욕심을 품으면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건가? 이래저래 딜레마로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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