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에 전시회 시작됐을 때 연일 관람객이 바글거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인파가 뜸해지길 바라며 꽃과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에 소풍삼아 예술의전당에 가리라 마음먹었다. 3월엔 클림트 전을 보고 나온 지인 모녀를 만나러, 4월엔 카쉬 전을 보러 예전에 가기는 했지만 정작 클림트전은 못보고 조바심만 내고 있었는데, 어느덧 달력을 보니 이번주 금요일이면 전시회가 끝난다고 적혀 있었다. 정신머리 없는 내가 못미더워 밀린 숙제처럼 탁상달력에 적어놓고도 마지막 주까지 버티다니. 참 한심스러웠지만 아예 놓쳐버린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며 지난 화요일 잠을 줄여 헐레벌떡 구경을 다녀왔다.
관람료도 비싼 대규모 기획전시를 찾아다니는 건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한 문화산업에 편승하는 짓이니 지양해야한다고 익히 들었어도, 그림구경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늘 그 장단에 춤을 추고 있긴 하지만 이번엔 특히 마음이 찜찜했다. 평일 오전엔 원래 한가로운 아줌마 관객들이 미술관에 많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입구부터 줄을 서듯 두겹 세겹으로 그림앞에 둘러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안내직원들이 소리를 쳐댔다.
"다른 전시실 먼저 둘러보십시오! 안쪽으로 가시면 빈 공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전시실도 한가롭게 그림 하나를 오래 감상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곳은 없었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딪치고 시야를 방해받고 누군가의 발을 밟거나 밟혀야 했다. 그동안 관람객이 어찌나 많았는지 전시 팸플릿도 다 떨어졌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미리 준비된 게 다 떨어졌으면 다시 인쇄를 해야 마땅할 텐데, 아무리 마지막 주에 뒷북관람을 하는 관객이로서니 대놓고 푸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은 영 가시질 않았다. 전시 주최사인 동아일보사는 반성하라!
게다가 저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유디트I>을 제외하면 유명 작품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실망감은 줄지 않았다. 그나마 <베토벤 프리즈> 벽화와 정사각형 캔버스가 인상적이었던 풍경화를 직접 본 것으로 관람료 본전은 뺀 거라고 애써 위로하고 돌아왔는데, 기막히게도 그 <베토벤 프리즈> 원본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있고(현재도 전시중이라고 ㅠ.ㅠ) 훼손을 염려하여 한국에 보낸 건 복제본이란다. 완전 사기당한 기분!! 나만 몰랐던 것인가??

물론 전시 끝나기 직전이라 더욱 복잡했을 시기에 그림을 보러간 건 순전히 내 잘못인 걸 잘 안다. 대작들은 많이 없는 대신 드로잉과 뜬금없는 디지털영상사진이 더 많아 속상했지만 그렇다고 괜히 보러갔다고 후회를 한 건 아니었고, 보길 잘했다는 생각은 확실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는 속담이 어김없이 들어맞는 요란스런 거대자본형 전시에 머릿수를 보태준 것이 찜찜하다는 얘기다. 암튼 이러저러한 투덜거림은 전시회 자체에 대한 것이고, 다른 화가들에 비해 큰 애정을 갖고 있진 않았던 클림트에 대해선 이참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생기긴 했다. 클림트와 황금빛 색채는 뗄레야 뗄 수도 없는 것이지만 나는 <키스>나 <포옹>, <유디트> 같은 그의 그림들이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눈쌀을 찌푸리곤 했다. 뭘 그렇게 유난스럽고 번쩍거리게 드러내나 싶은 무식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건데, 이번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거의 사진처럼 묘사한 그의 초기작부터, 이미 대가로 칭송받던 시기에도 수없이 연습을 거듭한 드로잉과 스케치 작품, 중년 이후에 시도한 인상파 풍의 풍경화를 실제로 보니, 책과 화집에서 <읽어낸> 느낌과는 여실히 달라 나도 모르게 입이  헤벌어졌다.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하여 늘 가난하고 힘겨웠으며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을 따라 모사하고 연습하던 고흐의 그림들이 상대적으로 아마추어 같은 노력의 과정을 진하게 풍긴다고 한다면, 클림트는 천재적인 자기 재능을 거리낌없이 온갖 방식으로 시도해본 노련함과 여유가 강렬하게 뿜어나왔다. 클림트의 황금빛 찬란한 작품에서 평범한 이들을 약간 움츠러들게 만드는 천재 특유의 오만함을 (경외심과는 별도로) 느끼는 건 순전히 나만의 편견일 수도 있겠는데, 하여튼 나는 그런 색다른 인상이 신기했다.

그림전시회를 보고 나와서 소박한 의식을 거행하듯 천원짜리 엽서 몇장을 사며 우리나라 업자들의 그림 인쇄술이 조악하다고 늘 불평했던 것 같은데, 이번 클림트전은 아예 그림 엽서와 카드, 복사본 그림 따위를 독일에서 수입했더라. 지금까지 그런지는 몰라도 컬러 인쇄술은 독일이 가장 앞섰기 때문에 고가의 화집 같은 건 독일에서 만든 걸 사라고 익히 들어왔는데, 색감이 확실히 선명하긴 해도 <Made in Germany>라서 작은 엽서 한장에 3천원, 5천원씩 하는 걸 보며 또 한번 내 입에선 불평이 터져나왔다. 젠장!
오스트리아엘 간다 해도 만나볼 수 없는 <처녀>와 <친구들> 엽서를 어렵사리 한장씩 고르고, 실물 알현의 영광을 누린 <아담과 이브> 타일 자석을 받아들고 흐뭇하긴 했어도 이번 전시의 노골적인 상업성은 성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