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청룡영화제에 과연 어떤 드레스를 입고 나올 것인지 세간의 주목을 받는 배우 김혜수. 당연하겠지만 그녀에게도 풋풋하고 싱그럽고 깜찍하기만 하던 십대가 있었다. 중학생쯤으로 기억되는 그녀가 나온 TV 광고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심지어 광고문구까지도.
"못생겨도 맛은 좋아, 매치매치바!"
아니, 어쩌면 그 광고문구 때문에 귀엽게 콧등을 찡그리며 웃는 김혜수의 앳된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막내동생이 방문에 브로마이드를 붙여놓을 정도로 김혜수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나 역시 그 땅콩초콜릿바를 꽤나 애용했다. 5분 더 자겠다고 아침을 굶고 떠난 등교길, 산꼭대기에 있는 학교건물까지 올라가려면 언덕배기 초입에 있는 문방구에 들러 초코바를 하나 입에 물어야 무거운 다리를 들어올릴 기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소녀 김혜수의 깜찍함에 힘입었든, 초코바의 맛 때문이든, 기발한 광고카피 때문이든 그 제품은 한동안 꽤나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같은 속담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꽤나 인상적이었을 그 광고문구 덕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못생긴 걸 자랑삼은 경우는 아마도 그게 유일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때도 지금도 '추함'은 이 사회에서 비웃음과 손가락질과 비하의 대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 같은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드러내놓고 희화해서 성공을 거두었고(아예 그가 부른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노래도 있었다) 요즘도 못생김을 무기로 활동하는 수많은 코미디언, 개그맨들이 있지만, 나는 덩달아 웃으면서도 그들의 자기비하가 마음 불편하다. 얼굴 생김새가 곧 개그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곧, 대한민국의 외모지상주의가 점점 공고해지고 심화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였던가 외모가 뛰어나고 키가 커야 성공한다는 논문이 발표될 정도이니, 외모지상주의는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좀 괜찮게 산다 싶은 나라로 꼽히는 국가 가운데선 이력서에 대놓고 사진을 붙이게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밖에 없을 거다. 하기야 어디 사람얼굴 뿐인가. 최상품이 되려면 황소도 잘 생겨야 하고, 과일도 번지르르 때깔이 고와야 하며 애완동물도 더 예쁜것들을 골라 더 예쁘게 치장하는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들은 원래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다. 여기서 예쁘다는 말은 이미 보편적 잣대로 굳어져 버린 <현재의> 인공미 기준을 따질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저 자연스러운 형태를 예쁘다고 찬미하는 시대는 가버린 듯하다. 아니,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나 역시 무슨 물건을 사든 예쁜 게 좋고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속물이지만, 예쁘지 않다고 차별하거나 무시하거나 인위적으로 바꿔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요즘 사고방식엔 숨이 막힌다.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이고 본인의 선택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사람들까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배불리는 사회현상이 건강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젊든 늙든 예쁘지 않고는 못견디도록 만든 건 분명 집단의 압력이 작용한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엔 징그럽기만 한데, 연세 많으신 시골 할머니들까지 시커멓게 눈썹 문신을(십중팔구 불법 시술이었을 거다;;) 하고 계신 걸 보면 숨이 막힐 정도다.
그나마도 현대인의 건강염려증과 환경에 대한 일부인들의 뒤늦은 염려로 차츰 늘어나고 있는 유기농이나 무농약 채소들을 보면 조금씩 변화가 느껴진다. 농약을 하나도 치지 않고 때깔나게 왁스도 바르지 않고 나온 과일들은 울퉁불퉁 크기도 제각각 모양도 제각각이며, 채소들도 하나같이 참 못생겼다 싶을 정도로 매끈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익숙해진 감별방법에 따르면 차마 선뜻 손이 안 가게 생긴, 흠집도 많고 모양도 비뚤어진 녀석들을 엄청나게 비싼 값에 사먹으며 새삼 느낀다. 자연스럽다는 건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텃밭에서 채소를 키워먹는 외삼촌이나 고모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엔 비료를 치지 않고는 고추 하나 오이 한개도 똑바로 자라지를 않더란다. 생김새는 비틀리고 굽었지만 맛은 비할데 없이 좋은 그 채소들을 얻어먹으며, 생산자의 양심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비싼 유기농 제품들을 사먹으며 자꾸만 나도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중이다.
자연스럽게 못생겨야 예쁜 거라고.
영화든 드라마든 주인공이 예쁘고 잘생겨야 볼 맛이 난다는 편견도 이젠 좀 버려야겠다고 반성하고 있다.
많이 티 안나게 참 잘도 고쳐 예쁜 사람들을 보며 감탄하고, 티나게 고친 사람들을 보며 쑥덕거릴 것이 아니라
나라도 자연스럽고 개성있는 얼굴들에 박수를 쳐줘야 할게 아닌가.
비록 내 목소리가 외모지상주의의 집단최면의 기세에 눌려 이내 짓밟히고 말지언정
잊지는 말아야겠다.
못생긴 떡도 재료만 좋으면 얼마든지 맛있다고!
백화점에 즐비한 요란한 화과자보다 옛날 집에서 대충 만들어 먹은 인절미가 정말 훨씬 더 맛있었단 말이다.
"못생겨도 맛은 좋아, 매치매치바!"
아니, 어쩌면 그 광고문구 때문에 귀엽게 콧등을 찡그리며 웃는 김혜수의 앳된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막내동생이 방문에 브로마이드를 붙여놓을 정도로 김혜수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나 역시 그 땅콩초콜릿바를 꽤나 애용했다. 5분 더 자겠다고 아침을 굶고 떠난 등교길, 산꼭대기에 있는 학교건물까지 올라가려면 언덕배기 초입에 있는 문방구에 들러 초코바를 하나 입에 물어야 무거운 다리를 들어올릴 기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소녀 김혜수의 깜찍함에 힘입었든, 초코바의 맛 때문이든, 기발한 광고카피 때문이든 그 제품은 한동안 꽤나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같은 속담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꽤나 인상적이었을 그 광고문구 덕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못생긴 걸 자랑삼은 경우는 아마도 그게 유일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때도 지금도 '추함'은 이 사회에서 비웃음과 손가락질과 비하의 대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 같은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드러내놓고 희화해서 성공을 거두었고(아예 그가 부른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노래도 있었다) 요즘도 못생김을 무기로 활동하는 수많은 코미디언, 개그맨들이 있지만, 나는 덩달아 웃으면서도 그들의 자기비하가 마음 불편하다. 얼굴 생김새가 곧 개그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곧, 대한민국의 외모지상주의가 점점 공고해지고 심화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였던가 외모가 뛰어나고 키가 커야 성공한다는 논문이 발표될 정도이니, 외모지상주의는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좀 괜찮게 산다 싶은 나라로 꼽히는 국가 가운데선 이력서에 대놓고 사진을 붙이게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밖에 없을 거다. 하기야 어디 사람얼굴 뿐인가. 최상품이 되려면 황소도 잘 생겨야 하고, 과일도 번지르르 때깔이 고와야 하며 애완동물도 더 예쁜것들을 골라 더 예쁘게 치장하는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들은 원래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다. 여기서 예쁘다는 말은 이미 보편적 잣대로 굳어져 버린 <현재의> 인공미 기준을 따질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저 자연스러운 형태를 예쁘다고 찬미하는 시대는 가버린 듯하다. 아니,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나 역시 무슨 물건을 사든 예쁜 게 좋고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속물이지만, 예쁘지 않다고 차별하거나 무시하거나 인위적으로 바꿔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요즘 사고방식엔 숨이 막힌다.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이고 본인의 선택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사람들까지 나이고하를 막론하고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배불리는 사회현상이 건강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젊든 늙든 예쁘지 않고는 못견디도록 만든 건 분명 집단의 압력이 작용한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엔 징그럽기만 한데, 연세 많으신 시골 할머니들까지 시커멓게 눈썹 문신을(십중팔구 불법 시술이었을 거다;;) 하고 계신 걸 보면 숨이 막힐 정도다.
그나마도 현대인의 건강염려증과 환경에 대한 일부인들의 뒤늦은 염려로 차츰 늘어나고 있는 유기농이나 무농약 채소들을 보면 조금씩 변화가 느껴진다. 농약을 하나도 치지 않고 때깔나게 왁스도 바르지 않고 나온 과일들은 울퉁불퉁 크기도 제각각 모양도 제각각이며, 채소들도 하나같이 참 못생겼다 싶을 정도로 매끈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익숙해진 감별방법에 따르면 차마 선뜻 손이 안 가게 생긴, 흠집도 많고 모양도 비뚤어진 녀석들을 엄청나게 비싼 값에 사먹으며 새삼 느낀다. 자연스럽다는 건 원래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텃밭에서 채소를 키워먹는 외삼촌이나 고모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엔 비료를 치지 않고는 고추 하나 오이 한개도 똑바로 자라지를 않더란다. 생김새는 비틀리고 굽었지만 맛은 비할데 없이 좋은 그 채소들을 얻어먹으며, 생산자의 양심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비싼 유기농 제품들을 사먹으며 자꾸만 나도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중이다.
자연스럽게 못생겨야 예쁜 거라고.
영화든 드라마든 주인공이 예쁘고 잘생겨야 볼 맛이 난다는 편견도 이젠 좀 버려야겠다고 반성하고 있다.
많이 티 안나게 참 잘도 고쳐 예쁜 사람들을 보며 감탄하고, 티나게 고친 사람들을 보며 쑥덕거릴 것이 아니라
나라도 자연스럽고 개성있는 얼굴들에 박수를 쳐줘야 할게 아닌가.
비록 내 목소리가 외모지상주의의 집단최면의 기세에 눌려 이내 짓밟히고 말지언정
잊지는 말아야겠다.
못생긴 떡도 재료만 좋으면 얼마든지 맛있다고!
백화점에 즐비한 요란한 화과자보다 옛날 집에서 대충 만들어 먹은 인절미가 정말 훨씬 더 맛있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