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보약

투덜일기 2009. 4. 23. 15:52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불면증 탓에 며칠 또 제대로 잠을 못자고 빌빌댔다. 온갖 병균들은 그런 때를 귀신같이 간파하고 달려들기 때문에 목감기가 시작된 건 그러려니 했는데, 그제어젠 어쩜 야속하게도 단 한순간도 잠들수가 없는지 기가 막힐 정도. 경험상 그럴 땐 몸과 정신이 더 못 버티고 완전히 뻗어버릴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마침 출판사 갈 일도 있겠다 안 어울리게 어젠 아침부터 나를 못살게 굴었다. 화분에 물주고, 청소기 돌리고, 국도 미리 끓여놓고, 강건너 출판사 가서 점심먹고, 상담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장보고, 정민이 자전거 타는 거 졸졸 따라다니고(행여나 느루 망가질까봐ㅠ.ㅠ), 저녁 해먹이고, 영어수업하고, 잠깐이지만 조카들과 몸을 쓰며 놀아주기까지. -_-;
늦은 밤이 되자 정말 드러누우면 최소한 열두시간은 못일어날 것 같은 피로가 몰려왔다. 시체처럼 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중간중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깨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 만에 아주 푹 잘 수 있었고 작정한 김에 잠이 깨도 다시 잠을 청해 까무룩 또 잠들 수 있었다. 그토록 달콤하고 행복한 잠이 왜 간간이 나를 버리는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거나 어제 아침엔 온 얼굴의 모공이 분화구처럼 자라고 하얀좁쌀 같은 여드름이 돌연 대여섯개나 돋아 <나 잠 못잤음>이라고 사방에 광고하는 듯한 시커먼 얼굴이라 뭘 찍어발라도 둥둥 뜨더니, 하루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얼굴은 세수도 안했는데 다시 뽀얘졌고 뾰루지도 큰것들 빼고는 다 자취를 감췄으며 목도 덜 아프다. 참 놀라운 잠의 효력. 밥심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뭐니뭐니해도 잠이 보약이다.
가끔 잠이 달아나는 건 내가 보약을 불신하기 때문일까? 내가 불신하는 건 원래 뜻대로의 <보약>이 아니라, 발로 밟다가 보낸 중국산일지도 모를 온갖 약재들을 넣고 푹푹 끓여 뜨거울 때 비닐팩에 넣어(분명 환경호르몬 나올거다) 포장해주는 <요즘 보약>일 뿐, 옛날처럼 한약방에서 하얀 종이에 하나씩 담아 접어준 좋은 약재(지리산 같은 데서 딴!)를 들고와 집에 와서 약탕관에 넣고 온종일 부채질해가며 달인 진짜 보약이라면야 나도 벌컥벌컥 마셔줄 수 있단 말이다! 나에게 보약잠은 분명 그런 정성으로 달인 훌륭한 치유제이거늘 왜 자꾸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