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11.09.30 티백 16
  2. 2011.09.14 변덕 20
  3. 2011.08.31 풀이름 11
  4. 2011.08.18 까탈의 궁극? 15
  5. 2011.08.06 여름 새벽 6
  6. 2011.08.03 아이디어 좋다 9
  7. 2011.08.02 1
  8. 2011.08.01 지금도 좋아 11
  9. 2011.07.27 비, 운, 집 7
  10. 2011.07.27 비사이로 막가 7

티백

투덜일기 2011. 9. 30. 04:40

커피는 투박하고 큼직한 머그잔에, 그밖의 차는 예쁜 찻잔에 마시는 게 제격이라는 편견은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 몰라도 나 또한 그 편견에 꽤나 충실한 편이다. 커피는 잔이 투박하고 큼직해야 오래도록 식지 않을 테니 맞는 말 아닐까. 그리고 주워들은 풍월에 따르면 홍차는 약간 되바라진 잔에 마셔야 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던데.

커피를 제외한 차의 맛을 잘 모르는 무감한 혀를 가졌으되 그냥 홍차는 모르겠고 한동안 '밀크티'에 탐닉한 적이 있었다. 하루에 네다섯 번은 홍차를 마셔대는 영국인들과 거래할 일이 있던 직딩 시절 출장 직후였던가, 아니면 번역으로 전업 후 영국에 있는 친구한테 다녀온 직후였던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여간 겨우 며칠 영국엘 다녀온 주제에 겉멋이 들었던 것인지, 우유를 넣은 그곳의 홍차가 진짜로 기막히게 맛이 있었는지, 영문은 알 수 없어도 평소 같으면 커피 생각이 날 무렵 밀크티 생각이 간절해질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카페에 가면 무조건 커피를 시키던 내가 대신 밀크티를 주문하기도 하고...

밖에서 마시는 홍차나 밀크티는 대부분 또 얼마나 예쁜 잔과 주전자에 담겨 나오는지, 차 한잔에 스스로가 괜히 우아해지는 것도 같았다. 원래부터도 예쁜 커피잔만 보면 기어코 뒤집어서 제조사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도자기 주전자와 다양한 모양의 인퓨저(거름망이라고 해야하나? 잔에 걸쳐 놓는 채 같은 형태도 있는데;;), 앙증맞은 티백 접시까지 세트로 구비되어 나오는 집엘 가면 아주 흐뭇했다. 그런 걸 보며 흐뭇하기만 하면 좋겠으나 견물생심이라고... 예쁜 티팟도 갖고 싶고, 독특한 디자인의 인퓨저도 자꾸 눈에 들어오고, 브랜드명은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가격의 찻잔도 덜컥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안 돼~~! 지름신 노예의 최종 귀결지가 주방기구라지 않던가! +_+

결국 나는 찻잔 욕심과 함께 밀크티를 끊는 쪽으로 마음을 접었고 이후 아무 잔에다 마셔도 적당한 농도에 양만 많으면 그저 기쁜 커피파를 고수했다. 그렇다고 과연 내가 티팟과 인퓨저를 하나도 사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부담없는 수준으로 당연히 장만해 놓은지 오래라 가끔은 우아떨며 차마시기 놀이를 한다. 커피 생각 간절한데 한밤중에 커피를 마실 순 없고, 이렇게 갑작스레 서늘해진 날 따끈한 차 한 잔이 마시고 싶으면 만만한 카모마일이나 국화차, 허브차를 준비한다. 문제는 제대로 우아 좀 떨겠다고 간편한 티백 형태가 아닌 꽃이나 잎을 인퓨저에 넣고 우려내고 했다간, 나중에 치우는 일이 대단히 성가시다는 것. -_-; 새삼 방에 매달린 줄을 당겨 하인을 불러 차를 부탁하는 귀족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못할 짓이다. (매번 커피잔 씻는 것도 귀찮아서 갯수대로 있는 컵을 다 꺼내 쓰고 한꺼번에 설거지하는 인간이라고 이미 밝힌 적 있음;;) 

시방도 1인용 티팟에 인퓨저로 카모마일을 우려낼까 하다가 문득 다 귀찮아져 티백을 꺼냈는데, 젠장, 대강 물을 부어 방에 와보니 종이 손잡이까지 찻잔에 몽땅 다 빠져버렸다. -_-; 혹자들은 티백에 든 차는 차로 쳐주지도 않는다던데, 그까짓 간단한 절차도 귀찮아한 사람에 대한 차의 반격일까 싶은 생각에 (쓰면서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ㅎㅎ) 웃음을 흘리며 뜨거운 찻잔에 손가락을 담가 티백을 건져냈다. 오 위대할손 나의 게으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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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

투덜일기 2011. 9. 14. 16:11

지난주에 대학로에 갔다가 전철역 앞 꽃좌판에서 파는 소국을 보고 반색했다. 박스에서 찢어낸 누런 골판지에 적힌 '한다발에 2천원'이라는 글귀까지 여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기운도 서늘하고 가을은 가을이구나 싶어 가을맞이 소국 한다발 꽂아야지 마음을 먹었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들러 한다발 주세요 했더니 무작정 5천원에 세 다발 가져가라며 제일 볼품없는 꽃들로만 주섬주섬 챙기는 아줌마. -_-; 

5천원도 싸다 생각은 했지만,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 해도 시든꽃 바가지를 쓸 수는 없었다. 겨우 한 다발은 싱싱해 보이는 걸로 바꿔달라는 데 성공을 거두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화병에 꽃으려니... ㅎㅎㅎ 세 다발이라는 소국 5천원어치가 겨우 다섯줄기였다. 그럼 그렇지.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아직도 소국 한 다발에 2천원, 3천원이 옛날 그대로 있겠나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꽃 다섯 줄기를 이리저리 요령껏 잘라 최대한 풍성하게 꽂아놓고 이제 내 몸과 마음도 가을맞이 준비를 해야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서늘해졌던 날씨는 추석날부터 다시 더워져 어제 오늘 계속 30도래고, 원래 열흘은 끄덕없이 싱싱해야 정상(?)인 소국은 일주일만에 꽃잎이 꽤 작아진 느낌이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일까, 영 션찮은 소국을 챙겨준 꽃좌판 아줌마 때문일까, 요즘 웬만한 생화도 중국에서 들여온다던데 혹시 저 소국의 원산지 때문일까.

예쁜 꽃을 보며 자꾸 심술이 돋아나면 안되느니라, 변덕스러운 날씨 따라 꿀렁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중. 덜컥 가을오면 겨울과 추위도 금세 쳐들어올 테니  여름이 안 가고 미적거리는 게 어쩜 더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신문지에 대충 둘둘 말아주세요'라고 특별히 주문해서 들고 오다 찍은 꽃사진.
 

일부러 둘로 나누어 꽂은 5천원의 행복. 사오자마자 찍은 이 싱싱한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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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름

투덜일기 2011. 8. 31. 15:30

노상 지하 주차장으로 드나들어 통 모르고 있다가 동생네 집주변 나무와 풀들이 꽤나 예쁘단걸 알게됐다. 배롱나무도 세 가지 색(분홍, 보라, 흰색)으로 꽃을 피우고 맥문동도 연보라색 꽃을 피웠다. 그중 젤 내 시선을 끈건 현관 옆 화단을 뒤덮은 하트 모양의 연약한 풀잎!! '하트모양'을 키워드로 며칠째 검색해도 이름을 모르겠다. ㅡㅡ;



토끼풀, 괭이밥의 일종일까? 주변에서 흔히 보는 꽃과 풀의 이름 정도는 척척 댈 수 있으려면 대체 내공을 얼마나 쌓아야하는 걸까.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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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탈의 궁극?

투덜일기 2011. 8. 18. 02:47

나이와 상관이 있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예민함이 점점 극에 달해 옷에 달린 라벨을 못견디는 인간이 되었다고 잘 다니는 동호회 게시판에 고백을 했다. 예전엔 가끔 여름 티셔츠 중에 목덜미를 간질이는 것들만 선별해 라벨을 떼고 입는 수준이었다면, 요즘엔 살갗에 닿는 위치에 달린 라벨이 두툼한 새틴을 접어 붙인(옷이 고급일수록 라벨도 고급화되어 금은실로 글씨를 새겨넣거나 말끔히 접어 다림질까지 한 두툼한 라벨이 달리기 마련;) 경우나 봉제에 쓰인 실이 뻣뻣한 경우 예외없이 떼어내야만 마음 편히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옷 안쪽 옆솔기에 달린 케어라벨(섬유 혼용율과 세탁방법이 적혀있으며 가끔은 여벌 단추까지 매달려있기도 하다)도 영 거슬려서 잘라내고야 마는 사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들의 내의엔 상표와 솔기가 바깥쪽에 달려 있는 게 많은데, 내 피부의 연약함이 갓난아기에 필적할 리는 없고 그저 예민함과 까탈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고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고.

그랬더니 용기를 북돋아주는(?) 댓글 가운데 누군가는 양말도 뒤집어 신고 다닌다며 피부 민감성은 얼마든지 개인차가 있으니 개의치 말라는 의견이 있었다. 자기만 편하면 됐지 양말 봉제선을 굳이 안쪽으로 감추고 발등에 걸리적거리는 걸 참을 이유가 없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처음엔 그럼 속옷도 뒤집어 입고 다닐 테냐고 비웃었는데, 막상 따라해보니 엄청 편하다나. 이후 그도 계속 양말을 뒤집어 신고 있단다. 오옷 이것이야말로 발상의 전환! 여름들어 몇달째 맨발족이라 최근엔 양말을 신어본 기억이 없으나, 나도 운동화를 신을 땐 양말 솔기 때문에 발등이 불편한 걸 느낀 적이 많다. 양말 안쪽의 솔기 마무리를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스포츠양말처럼 두툼한 면양말은 안쪽으로 꿰맨 솔기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양말을 뒤집어 신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앞으로 양말 신고 다니는 계절이 오면 나도 시도해볼 작정이다.

사실 라벨은 오려내고 잘라낸 다음 편히 입을 수나 있지 최근엔 속옷의 솔기도 영 거슬려 괴로워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비싼 속옷도 왜 솔기가 아예 없는 팬티는 못 만드는 건지?! (설마 있는데 나만 모르는 건 아니겠지?) 요즘처럼 까탈의 궁극을 떨다간 조만간 속옷도 뒤집어입고 살게 생겼다고 한탄했었는데, 어찌 보면 이게 한탄할 일이 아니라 익숙한 습관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입기의 결과로 내가 바보같이 불편을 참아왔다는 의미라는 걸 새삼 느낀다. 속옷을 뒤집어 입으려면 일단 모든 팬티를 면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난점과 함께 밀착되는 얇은 겉옷의 경우 솔기가 도드라져 보일 수 있다는 단점이 지금 퍼뜩 떠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그럼 또 어때? 누가 나만 보는 것도 아니고... -_-; 이참에 사회 곳곳에서 남몰래 괴로워하고 있던 수많은 까탈족을 위하여 당당하게 양말 뒤집어 신기와 속옷 뒤집어 입기 운동을 널리 퍼뜨려볼까나.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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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새벽

투덜일기 2011. 8. 6. 05:39

알람을 서너 개 동시에 맞춰놓은 것처럼 별안간 매미가 울어댄다.
모니터 하단의 시계를 보니 다섯시 반이 조금 안됐다.
창밖 하늘은 어느새 훤하고 마침 오늘은 분홍색 아침 노을이 예쁘다.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도 목표 분량을 채우지 못하고 날이 새버렸군.
쓰르라미인지 매미 울음소리가 조롱처럼 들려 공연히 심술이 난다.
새벽 하늘이 좀 더 밝아지면 새들까지 날아들어 더욱 시끄러워질 게다.
녀석들의 출현시간은 대개 여섯시 반쯤.
몇년 전 열심히 조류도감을 검색해 이름을 알아둔 곤줄박이 말고도
요샌 집앞 나무에 찾아드는 새들의 종류가 꽤 다양해졌다.
지저귀는 소리 또한 제각각.
그 중에는 까치가 제일 흉하게 운다.
까치 울음을 누가 길조라했는가.
다른 새들은 종류별로 풀피리를 부는 것처럼 영롱하게 노래하는데 반해
까치 울음은 욕심쟁이가 포악을 부리는 투정 같다.
대체 우리집 마당에 뭐가 그리 먹을 게 많다고 새벽마다 찾아오는지 원.
이제는 다 떨어져 사라진 듯한 버찌를 먹으러 오는 것 같진 않고 내가 모르는 벌레류가 많은가?
설마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자꾸만 잡생각으로 빠져드는 머리를 다잡아 원고량이나 좀 더 늘리지 그러셔.
진짜 올빼미는 밤 사냥을 마치고 둥지로 쉬러들어갈 시간일 텐데
얼치기 올빼미는 날이 밝아도 편히 잠자리에 누울 수가 없다.
일도, 잠도, 생각도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여름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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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좋다

투덜일기 2011. 8. 3. 01:59

주말에 사촌동생네 아기 돌잔치에 갔었는데 답례품으로는 처음 받아본 게 있어서 소개한다. 언제부턴가 돌잔치를 하면 주최측에서 꼭 답례품을 돌리는 게 유행이다. 잔치를 준비하는 엄마들로서는 아가들 한복 준비하랴, 본인 의상 챙기랴, 입구에 세워놓을 사진장식 준비하랴 바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답례품까지 골라 주문하려면 정말 머리깨나 아플 것 같다. 조카들 때도 그렇고 다녀보면 돌잔치 답례품에도 유행이란 게 있는 듯하다.

오래전부터 제일 흔한 건 주방용 작은 수건이나 행주, 아니면 머그잔이다. 돌잔치 답례품이 정민이 때만해도 없었으니 대대적으로 유행한지는 10년 정도밖에 안 된 듯한데, 최근까지도 수건과 머그잔을 받은 기억이 있으니 아직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주방용 수건도 행주도 머그잔도 별로 달갑지 않다. 준비한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미리 슬쩍 확인해서 머그잔이 마음에 안들면 괜히 짐만 되는 걸 알기에 사양해보지만, 고약한 내 심보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건지 그런 답례품은 꼭 두개나 챙겨주더라. ㅠ.ㅠ 버리기도 뭣해서 그런 머그잔을 꺼내놓고 더러 물잔으로 쓰기는 하지만 취향이 다양하니 내 마음에 꼭 드는 디자인일 리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내다버린 답례품 머그잔 꽤 여럿이다. 다 낭비라고!) 주방은 원래 내가 선호하는 공간도 아니니 주방 수건이나 행주는 선물로 받고 싶지 않다! (게다가 우리집 수납장에 들은 행주는 대체 다 어디서 난 건지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쓸 만큼 많고, 돌잔치마다 받아온 주방수건--나는 쓰지도 않는데!--도 골치아프게 여러 개다. -_-;) 역시나 주방용품인 작은 쟁반을 받아온 적도 있는데 이건 꽤나 요긴하게 사용중이다. 일부러 그림 예쁜 걸로 내가 골라오기도 했고. ^^v

암튼 엄마들의 아이디어인지 답례품 전문회사의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계속해서 트렌드가 변해가는 듯한 돌잔치 답례품 가운데 최근 내가 가장 므흣하게 받아온건 앙증맞은 상자에 담긴 수제쿠키였다. 요번에도 상자를 딱 보니 수제쿠키인 것 같아서 입맛을 다시며 두 상자 가져와야지, 라고 욕심을 부렸는데 묵직한 무게로 보아 쿠키가 아닌 듯했다. 그럼 혹시 전에도 받아본 적 있는, 분홍색 하트를 새긴 백설기인가, 짐작했다. 그치만 여름인데! 겨울이나 봄, 가을엔 떡을 답례품으로 받은 적이 있기는 했으나 여름 잔치에 떡 선물은 쉴까봐 조마조마할 것 같다.

궁금증을 못이긴 큰고모가 먼저 차에 오르자 마자 열어보니 뜻밖에도 저 상자 안엔 국산 잡곡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묵직하더라니...
비용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각해보니 일단 건강에 별로 이롭지도 않은 쿠키보다는 잡곡이 훨씬 의미 깊고 좋은 것 같다.


포장을 열면 안에 또 예쁜 레이스 종이를 감은 잡곡 비닐이 들어있고, 혼용율을 적은 스티커가 보인다. 흔히 돌잔치 주최측에서 오래 쓸 수 있는 머그잔이나 주방용품을 선물하는 건 그만큼 오래 첫돌 맞은 아이를 생각해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내 입장에선 그것 또한 귀찮게 늘어나는 살림살이일 뿐, 차라리 떡이나 쿠키처럼 훅 먹어버리면 그만인 답례품이 더 좋았다. 헌데 아무래도 떡이나 쿠키는 열량을 생각하면 건강에 그리 좋은 게 아니랄 수도 있다. 그런데 국내산 잡곡은 우리 농촌에도 이롭고 모두의 뱃속에도 좋은 선택이 아닌가! 전통적으로 이웃에 돌떡을 돌려 나눠먹으며 아이의 무병장수를 비는 풍습과도 일맥상통하면서, 뭔가 건강을 선물 받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암튼 좋은 아이디어, 현명한 답례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이렇게 구구절절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는 과연 쿠키, 잡곡 말고 또 어떤 기발한 돌잔치 답례품들이 나타날지 그것도 궁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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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1. 8. 2. 16:06

진정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섣불리 직업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평생 잊지 않고 꿈을 좇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는 것 같다. 멋지다고 추켜세우거나 현실감 떨어진다고 좀 한심해 하거나. 대부분 현실과 타협하면서 꿈을 포기하거나 잊기 때문이다. 꿈을 잃지않고 끈질기게 좇아 결국 성공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갈채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꿈이란 것이 다분히 허황되고 실현 가능성이 낮을 때, 사람들은 냉혹하게 낙오자라는 도장을 찍고 만다. 인생은 결코 꿈만으론 살 수 없는,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과거 주변에 이상스레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충무로 바닥에서 한동안 연출부 막내부터 경험을 쌓기도 했고 전세금을 뽑아 돌연 유학을 떠난 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조감독 호칭을 받을 때까지 버틴 이도 있으나 결국 영화감독으로 입봉에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판이란 곳이 마약이나 개미지옥인듯, 조감독이 마지막 경력이었던 사람은 좀체 다른 일에 정착하지 못했고 거의 무위도식하며 백수로 늙어가도록 '이감독'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한심스러운 '낙오자',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몇편의 영화 포스터와 엔딩 크레딧에 연출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연봉이 백만원도 안되는 기막한 현실에 질려 충무로 판을 영영 떠난 이들은 이제 확실히 꿈을 버린 것 같다. 영화판은 포기했어도 그나마 얼추 비슷한 영상 쪽을 대안으로 선택한 이(=큰동생 이야기다 ^^;)는 여전히 열심히 영화를 보러다니며 관객으로서 한국 영화계를 응원중이다.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며 늙으막에 유학까지 다녀온 친구는 충무로를 떠나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한 이후로 십수년간 영화관에도 가 본 적이 없단다. 뭔가 아주 심하게 학을 뗀 모양이다. 그 외 친구들은 잘 모르겠다.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마흔살이 넘도록 아직 밴드의 꿈을 못 버린 이도 있다. 스무살 언저리에 부모를 졸라 거금 들여 장만해놓은 온갖 악기와 컴퓨터 기기를 아직도 보물단지 모시듯 껴안고 산다.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연주 실력과 작곡 능력이 얼마나 되기에 그 꿈을 이십여년간 못버리고 백수로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하필 밴드에서 그가 맡은 파트는 드럼이다. 밴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역시나 보컬 아니면 기타 연주자 아닌가? 내가 그 방면에 무지하기도 하지만, 드러머로 이름 높였다는 사람 당최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요즘 우후죽순 많아진 서바이벌 프로그램 가운데 <탑밴드>라는 게 있단다. 그리고 문제의 이 사람도 자기네 밴드와 함께 그 프로그램에 나왔더란다. 보기좋게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말이다.

백발이 성성해서도 근육질의 몸으로 멋지게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을 상상하면 꽤나 멋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이면에 제 밥벌이도 못하고 늙도록 부모님이 주는 용돈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생활고가 감추어져 있다면 슬프기만 하다. 홍대에 가면 기타를 둘러매고 오가는 젊은 음악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이 아무리 밝고 빛나더라도 나는 불쑥 그들이 가엾다. 쟤네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임재범 콘서트에 갔을 때 본 영상이었던가, 천하의 임재범도 <나는 가수다>에 나와 새삼 조명을 받기 전까지 한달 수입이 저작권료로 들어온 7천원돈 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TV에 노상 얼굴을 비추며 돈방석에 앉겠겠다 싶은 부활의 김태원도 그 이전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살을 생각했다니 말해 무엇할까. 이 땅에선 밴드로 밥벌이 해먹고 산다는 게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과연 응원을 해주어야 할까, 정신 차리라고 질책을 해주어야 할까.

따져보면 내 주변에서 현재 그럭저럭 제 앞가림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다 젊어서 꾸던 원대한 꿈을 버렸거나 꿈을 소박하게 변경한 사람들인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으니 이의를 제기하실 분 있으면 언제든 환영! (내 생각이 교정될 수 있도록, 제발이지 나는 꿈을 이루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예 젊어서 품은 찬란한 꿈이 뭐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번역은 그저 7년간의 직장생활이 지겨워질 무렵 평생 직업으로 딱 좋겠다 싶은 하나의 대안이자 선택이었을 뿐, 엄청 선망하는 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단 시작은 했으되 성공할지 말지 알 수도 없고 크게 자신도 없었는데, 하면 할수록 일이 어려워 자신감은 나날이 떨어지고만 있다. 그러니 새로운 꿈은 꿀 여력조차 없는 느낌이다. -_-; 

어린아이들에게, 청소년에게는 끊임없이 니들은 꿈이 뭐냐고 물으며 꿈을 향한 그들의 행보를 한껏 부추기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꿈이란 건 그저 과거의 갈피에 잘 간직해두거나 절대 손닿지 않는 곳에 높이 올려두어야만 빛이 나는 허상 같다. 설사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꿈의 직업이 현실의 무게와 어우러지면 본래의 빛을 잃고 마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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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좋아

투덜일기 2011. 8. 1. 02:00

10년이 넘도록 생일카드에 덕담으로 "올해는 꼭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시길 빌게요, 화이팅!"이라는 말을 빠짐없이 적는 친구가 있다. -_-; 해마다 푸하하하 비웃어주는데도 참 끈질기고 열심이다. 주변에 결혼을 굳이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회의파>와 태도가 어중간한 <중도파>, 그래도 결혼은 반드시 하고 봐야한다고 믿는 <결사파>가 있는데 이 친구는 결사파에 속한다. 해서 선과 소개팅에도 열심이다. 말로는 부모님의 성화로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과거 겪어봐서 아는데 몇년 결혼 시장에 끌려다니다 영 싹수가 없어보이면 부모님도 포기하기 마련이다. 본인이 포기를 안했다는 뜻이다. 

여러 모로 나와 공통점이 많은 비혼족이면서 내년이면 꼭 예순이 되는 선생님 한분과 셋이 종종 만나는데, 셋이 다니면 친구 사이가 아니라 두 딸 데리고 외출한 엄마 같아 보일 거라 자조하시는 그 선생님께도 이 친구는 내게 하는 것과 똑같은 덕담을 고수한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인연설을 굳게 믿는 눈치다. 보아하니 내가 예순살, 일흔살이 되더라도 이 친구와 관계를 지속하는 한은 매년 같은 덕담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 친구가 얼른 결혼을 해서 결혼생활의 비애(행복한 결혼에도 비애는 있기 마련이니까;;)를 뼈저리게 느껴, 다른 기혼 친구들처럼 결혼관에 균열이 생겨 "그래, 혼자 사는 게 속편하지!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거다. ㅎㅎ

어제도 친구는 저보다 한참 나이많은 우리 둘을 앞에 두고 인연설을 강조하며 또 다시 <좋은 분> 타령을 이어갔다. 대개는 킥킥 웃으며 알았다고 얼버무리는 걸로 화제를 종결짓는데, 어젠 그 수법이 안통했다. 결혼이 정 싫으면 애인이라도 꼭 만들어야 한다고 성화(?)였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이 진화에 나섰다. 잊고 살던 본인 나이를 생각하면 참 싫지만, 그 나이의 늙은 남자를 생각 하면 너무 혐오스럽다고. 그러니 애인 따위 전~~~혀 필요 없다고. 까탈스럽지만 우아하고 순수함을 잃지 않은 나이 예순의 비혼녀는 쉽게 그려지는 반면, 예순살의 비혼남이라고 하면 벌써부터 추레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이 상상되지 않나? (나의 비뚤어진 편견이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반색하며 맞장구를 쳐, 우릴 좀 내버려두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려 했으나 친구는 완강했다. 그럼 연하의 젊은 남자친구를 만들라는 것. 우어~~~~!!! >.,<

친구는 진정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임을 알기에 속으로 부아가 나도 화를 낼 순 없다. 그저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다. 비혼을 미혼이라 부르는 건 나이가 어찌됐든 미완성의 인생이자 결핍을 의미한다는 함의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야 그렇게 여기더라도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에 젖어 살았으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만 보면 젊은축에서도 혀를 끌끌 차며 나 같은 처지(?)를 안쓰러워하는 태도를 보인다. 결혼과 자녀를 엄청난 성취로 여기는 기혼자 친구들 중에 더러 그러는 이들이 있는데, 가끔은 이렇게 별종 같은 친구도 존재한다. 내 인생이 <꽃피려면> 반드시 <좋은 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아야한다며, 이제는 울 엄마도 친지들도 감히 안하는 잔소리를 턱턱 해댄다. 

선생님과 나는 둘만 아는 미소를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끄덕, 알았으니 눈씻고 주변을 잘 둘러보겠다고 다짐을 한 뒤에야 그 화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린 정말로 지금 그대로도 별 부족함 없고 좋은데, 참 좋은데 그것 참 말로 설명해줄 수도 없고 안타깝다(나름 광고 패러디 한 거다 ㅋㅋㅋ). 친구가 더 나이를 먹고 생각이 넓어져 우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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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운, 집

투덜일기 2011. 7. 27. 18:15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언덕 동네에 자리잡은 우리집 뒤쪽엔 축대로 옹벽을 쌓고 그 위로는 잡풀과 잡목이 자라는 경사진 공터가 있다. 그런데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져 작게나마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그 공터의 흙이 우리집을 덮쳤다. 마침 우리는 동해안으로 가족 피서를 떠났던 터라 서울지역에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줄도 몰랐다가 올라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얼른 집으로 가보라는 아버지 동료의 연락을 받았다. 운이 좋았던 우리와 달리 아래층에선 두 사람이나 목숨을 잃는 엄청난 사고였다. 집 뒤쪽의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1층 아주머니와 작은 방에서 쉬고 있던 막내딸은 물을 잔뜩 머금었다가 순식간에 밀어닥친 흙더미에 명을 달리했고,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저씨만 홀로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부리나케 집에 와보니 2층인 우리집에도 뒷베란다와 창문으로 흙이 밀려 들어와 내방과 동생방에 수북하게 쌓여있고 TV가 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우리집을 보고 나니 아래층은 집안 전체가 거의 다 토사에 파묻혔다는 사실이 이해되었다. 2층에도 사람이 있는 줄 알고 119 구조대가 창문을 뜯고 들어와 확인을 했고, 이미 집안에서 흙을 퍼내는 작업이 한참이었다. 만약 우리가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막내동생과 나 역시 자다가 봉변을 당했을지 모른다며 다들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산사태가 그리도 무섭다는 걸 난생처음 경험한 셈이었다.

산사태로 아파트 2, 3층까지 흙더미에 파묻힌 광경을 뉴스로 보며 옛날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사고 수습을 하고 집수리를 하는 동안 거처를 모두 큰동생네 신혼집으로로 옮겨 피난살이 하듯 지냈다. 구청에선 집 뒤쪽 경사진 공터를 정비하고 수로를 내고 나무를 더 심었지만, 우리집은 창문과 베란다 섀시가 모두 파손되었는데도 '집이 무너진 건 아니'라며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집수리는 오로지 우리 몫이었다. 심지어 인명이 상한 아래층도 위로금조로 얼마간 나왔을 뿐 보상비는 없었다고 들었다. 상심한 아래층 아저씨는 곧이어 집을 팔고 이사를 나갔지만 우리는 잠시 이사 욕망에 '들먹'하다가 그냥 눌러앉았다.

고비가 번역한 <식스펜스 하우스>를 읽다가 나는 도시에 살지만 정작은 시골집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한해가 멀다하고 상태 좋고 깔끔하고 번듯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한다. (중략) 마치 집을 커다란 여행 가방으로 보는 것 같다. 시골에서는 다르다. 우리는 어떤 집이 갈라질 때까지 살다가, 갈라진 틈에 회를 바른다. 집이 기울면 보강을 한다. 흔들리면 밧줄로 붙들어 맨다. 벌어지면 조인다. 무너지기 시작하면 토대를 덧댄다. 그러더라도 계속 그 집에 산다."(255쪽) 처음  이집에 이사를 왔을 때 무려 '연탄 보일러'를 때던 집은 석유보일러를 거쳐 도시가스 보일러로 바뀐 엄청난 난방의 역사마저 갖고 있다. 집수리의 역사는 말도 하기 싫다. 그러면서 줄곧 그 집에 살고 있다. -_-;; 우리의 경우 시골 사람들의 집지키기 철학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재테크 거부감과 귀차니즘 때문이다. 말로는 노상 이사 가고 싶다고 되뇌면서도 나는 사실 나이만 먹었지 이사와 관련된 모든 과정이 무섭다. 집을 팔고 사고 30년가까이 묵은 엄청난 짐을 정리하고 옮기고... 으어. 새삼 집안 돌아가는 꼬라지에 눈길을 돌린 엄마는 가을되면 뒷베란다 지붕도 고쳐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사를 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과연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서운 비 이야기 쓰려고 시작했는데 얼토당토않게 집타령으로 끝을 맺을 줄도 몰랐다. 대체 아는 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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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이로 막가

투덜일기 2011. 7. 27. 03:19

그야말로 70년대 유머가 생각나 제목을 저리 적었다. 저게 세상에서 제일 날씬한 일본 사람 이름이었던가? 헛. 답은 생각나는데 질문이 정확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_-'

암튼 서울경기 지방에 호우경보가 내렸다지만 희한하게도 내가 딱 왕복 100km를 운전해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오는 동안엔 무서운 폭우가 계속 나를 피해다녔다. 길이 너무 안 막힌 덕분에 약속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이리저리 마트를 배회하다 시간 맞춰 커피집엘 가보니 친구는 비옷에 장화까지 신고 앉아 있었다. 내가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만해도 환하게 말짱했던 바깥 하늘은 시커멓게 변해 우산으로도 도저히 가릴 수 없는 폭우를 퍼붓는 중이었다. 무섭게 내리던 비는 우리가 커피, 밥, 또 커피를 곁들여 긴긴 수다를 떠는 동안 다시 잦아들어,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또한 수월했다. 결국 나는 챙겨간 우산을 단 한번도 펴지 않았고, 세찬 빗줄기에 자동세차 하듯 차체에 떨어진 무궁화 꽃잎 좀 씻겨 내려가길 빌었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귀가하자마자 다시 천둥치며 쏟아지는 폭우가 새벽까지 그치질 않고 있다. 베란다 지붕에 '빵꾸'라도 낼 것처럼 몹시도 요란하게.

폭우속 밤길 운전이 얼마나 위험한 줄 잘 알기에 이런 날 교묘히 시간차 공격을 해준 비가 고맙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래 벼르다 세차하고 나면 꼭 비오는 징크스가 쌓여 이젠 빗물 자연세차도 못하게 '비사이로 막가' 신공까지 불러온 것인가 싶어 킥킥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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