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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31 5월이 간다 3
  2. 2011.05.30 으으음... 4
  3. 2011.05.28 세상이 쌈닭을 기른다 8
  4. 2011.05.27 의무 7
  5. 2011.05.26 이웃 복도 복 4
  6. 2011.05.17 아는 게 병 11
  7. 2011.05.13 4
  8. 2011.05.04 멍과 상처 13
  9. 2011.04.30 뇌우 9
  10. 2011.04.13 꽃과 벌 1

5월이 간다

투덜일기 2011. 5. 31. 17:26

일년 열두달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5월이 간다. 찌뿌드드 잔뜩 내려앉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함께. 뭔가 아쉽다. 하기야 내눈에 최고로 예쁜 연초록의 시기는 어느 틈에 지나버렸다. 어제 보니 밤마다 유독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를 뿜던 아카시아꽃이 다 말라 떨어져 부서진 누런 팝콘처럼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마저 이 비에 다 씻겨 사라지겠다. 그러고는 초록이 한층 더 짙어지겠지.

날씨도 초록도 기분도 가장 싱그러워야할 5월은 올해 축 처져 보냈다. 계획은 원래 어기려고 있는 것이라는 쉰소리로 변명을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하려고 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해야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렇게 마냥 힘빼는 삶도 가끔은 필요하다, 스스로 속닥이며 충전을 바랐으나 눈금은 오르지 않았다. 조바심 내지 말아야지, 하며 또 그냥 늘어졌더니 한달이 후딱 가버렸다. 이젠 정리가 필요할 때.

마감이 닥쳐야 손발이 움직이는 버릇은 아무래도 평생 가져가야할 악습인 듯하다. 또 다시 돌아온 세금신고의 계절. 해마다 개악되는 게 틀림없는 오리무중 세무신고 프로그램과 홀로 싸우다 결국 어제 세무서에 찾아가 해결 안되는 문제를 직원에게 물어본 다음에야, 마지막날인 오늘 전자신고를 마쳤다. 그래도 마감 안 어긴게 어디냐고 자평. 늘어져 뒹구는 동안 그나마 잘한 일이 있다면 독서. 한달간 7권 읽어, 드디어 올해 월평균 세권을 넘겼다. 영화는 두 편. 전시관람은 전무. 타일깨기 기록은 194점. 일은 당연히 뒷전. 

마감 독촉전화가 무서우면서 왜 그게 채찍질은 안되는지 의아한 나날이다. 작업 계획표는 두달째 어긋나고 있다. ㅎㅎㅎ6월의 화두는 다시 심기일전. 일부러 콘서트를 두 개나 가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씩씩하게 잘 놀러다닐 때 일도 잘한다. 방구석에 처박혀 노상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다고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나는. 놀 욕심에 힘이 나는지 어디 두고보자. 어쨌든 이렇게 5월이 간다. 그러니까 꿍얼꿀얼 이 변명은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5월을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다는 사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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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투덜일기 2011. 5. 30. 16:19

세상도 그렇고 주변도 그렇고 들리는 이야기가 다 우울하고 쓸쓸하다. 연로한 부모님들은 자꾸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와 자식들을 긴장시킨다. 사별 후 홀로 남은 부모님을 '잘' 모시는 일도 쉬운 건 아니다. 엄마의 황혼 재혼을 나는 단 한번도 상상해본 일조차 없는데, 주변에선 아주 흔한 일도 아니니 무엇이 옳은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나마 하나 알겠는 건 부모에게 재산이 좀 있으면 확실히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연이어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은 그냥 망연히 슬퍼하는 것밖엔 딴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두분 다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신 편인데다 얼마 앓지도 않고 갑자기 돌아가셨고, 남겨줄 유산 같은 건 거의 없었으니 자식들 간에 분란 일어날 일도 없었다. 어떤 집안에선 장례 때 들어온 부의금 갖고도 싸움이 난다는데, 두분의 장사를 치르고 남은 돈은 앞으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장남이 '당연히' 갖고 있는 거라며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나는 다 그런 줄만 알았고,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자손들의 유산 싸움은 재벌들 사이에서나 벌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상황이 달랐다. 할머니의 유산이라야 집 한 채가 전부이긴 해도 규모가 크니 다툼이 벌어졌고 심지어 장례비용과 부조금 갖고도 내놔라 마라 패악을 부리는 자식이 있어 지켜보며 학을 떼었다. 욕심을 크게 부린 그 자식은 장례 며칠 후 현관 유리를 깨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기가 막혔고, 외할머니의 삶이 너무도 기구해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을 엄마 명의로 바꾸느라 법무사를 찾았을 때, 괜히 듣기 좋으라고 한말이겠지만 법무사가 엄마에게 자제분들이 다 착하네요, 했다. 집이라고 얼마 하지도 않는데요 뭐, 정도로 대꾸하자 그들은 정색을 했다. 요즘 자식들이 각박해서, 단돈 백만원도 순순히 부모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나. 그래서 어차피 돌아가실 노인들이라는 핑계로, 사별의 경우 집 같은 건 당연히 자식 명의로 바꾸는 게 대세인데 자식들이 서로들 가지려고 쌈박질을 해댄다고 했다. 외할머니 때 이미 그런 자식을 본 적이 있으니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버지 형제 팔남매, 우리 삼남매의 의가 좋은 건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이라는 명제를 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친구 하나는 요즘 홀로 남은 아버지 때문에 전전긍긍 속앓이 중이다. 재작년에 10년 넘게 병석에 계시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70대 중반인 친구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난 권사님과 얼마전 살림을 차렸단다. 그 '아주머니'(새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기로 형제들은 작당을 했다)를 집에 받아들이며 자식들이 부자 아버지와 협상한 조건이 있었다. (재산 때문에 재혼도 마음대로 못하는 불쌍한 노인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처음 알았다. 부모가 돈이 많으면 자식들이 고분고분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수억대의 아파트를 그 아주머니 명의로 해주는 것으로 추후 재산권 주장은 금하며,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하여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각자 자식들이 있으니 처음엔 그 아주머니도 아버지도 그러마고 동의를 했다는 모양이다. (자식들에게 그분들이 환멸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헌데 누구의 의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60대인 그 아주머니의 처지가 늙은 남자 밥 해주러 들어온 살림 도우미도 아니고 하니 혼인신고를 끝내 해야겠다고 두분이 우기신다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친구 아버지는 아직도 제조업을 경영하고 있는 상당한 재력가이고 장남인 친구 오빠가 같이 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친구를 포함하여 모두 결혼해 분가한 오남매는 그 아주머니를 거의 재산 노리고 접근한 꽃뱀 취급하며 결사반대를 하고 있어, 집안이 쑥대밭이란다. 친구는 아버지가 적잖은 돈이 든 통장을 생활비조로 이미 아주머니에게 넘겼을 텐데, '정말 욕심 많은 노친네'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두분이 정말로 정이 깊어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 부부로 말년을 보내고 싶으실지도 모른다는 나의 의견은 단칼에 무시됐다. ("니가 뭘 안다고 그러니!"-- 그럼 암것도 모르는 나한테 얘기는 왜 했담;;)

물론 나는 두분의 마음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울 엄마가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 개가하길 원한다면... 한동안 배신감에 사로잡히기는 하겠지만 그것 역시 엄마의 권리이자 선택이므로 자식으로서 말리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물정을 아직 몰라서, 또는 거액의 상속재산 따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홀로 남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비혼의 친구 하나는 아직 건강한 아버지가 쓸쓸하지 않게 여자친구라도 만드시길, 가능하다면 황혼재혼도 추진해보려고 넌지시 권유하는 중이라던데, 그 친구도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서 그런 생각을 품은 걸까?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요즘 세상 자식들 하는 짓과 욕심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무섭다. 가난해도 자식에게 버림받고 돈이 많아도 자식의 욕심에 말년이 편칠 않으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옛날부터 있었겠지만,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씁쓸하다. 수십억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라며 핏대를 올리는 친구 앞에서 계속 인상을 쓰다가 들어왔더니 머리가 다 아프다. 부자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은 참 의외의 순간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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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더운데 으으으 열 뻗칠 일을 방금 또 겪었다.
조금 전 서너집 건너에 사는 이웃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하얀 봉투를 하나 들고서. 엄마에게 서명을 받으러 왔단다. 아까운 세금으로 왜 쓸데없이 돈 있는 집 애들까지 무상급식을 줘야하느냐며, 그걸 반대하는 서명이란다. 헛...

모른 척 내방으로 건너와 그냥 앉아있으려니 속이 시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간 엄마에게 무상급식 반대하는 오세훈 일당과 강남 부자들에 대한 욕을 실컷 해대며 왜 무상급식이 평등교육권인지 설명해드리긴 했지만, 엄마는 옆집 아줌마가 10분 이상 떠들어대면 그냥 쫓아버릴 욕심에 내용파악도 없이 그냥 서명을 해줄 사람이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야 했다.

일단 우리 모녀는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사람이고 오세훈, 이명박 일당의 이상한 돈지랄이 더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이라고 포문을 열고 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해 언성이 높아졌다. <복지포퓰리즘추방 국민운동본부>라고 적혀 있는 하얀 서류 봉투의 정체도 의심스러웠다. 대체 무슨 관계로 오세훈 일당 꼬봉 노릇을 하시는 거냐고 아주머니에게 따져묻기도 했다. 쌈닭기질이 제대로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아주머니 왈, 남편이 한국전쟁참전 유공자라 무슨 위원회에 한 자리 차지하고 계신단다. 영문도 없이 거기서 그 봉투가 날아와 서명을 받으라는 지령이 떨어져 그 임무를 하는 수 없이 아주머니가 떠맡았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하도 서슬이 퍼렇게 언성을 높이며 이명박 오세훈 욕을 해대니까 말문이 막혔을 뿐이지, 처음 오자마자 살금살금 무상급식의 문제점을 들어 울 엄마를 설득한 논조를 보면 무비판적인 딴나라당 지지자임이 틀림없었다.

어휴... 전면 무상급식 반대를 위한 한나라당의 주민투표 청원 서명운동이 강남서초구 주민들과 보수 노인층을 중심으로 조직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손길이 우리집까지 뻗치고 보니 화가 치민다. 하기야 보수 우익단체들은 늘 한나라당의 사조직이나 다름없었음을 잘 안다. 그런데 이렇게 그 조직을 이용해 민심인 척 억지로 세를 모으고 있다니. 복지 포퓰리즘 추방이라고? 참 이름 하나는 잘도 갖다 붙였다. 그렇다면 이번에 수세에 몰린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을 카드로 뽑았던데, 재원마련에 대한 계획도 없이 일단 지지율 떨어지는 거 막으려고 시작한 일이니 그것도 엄연히 포퓰리즘이라 매도하면 어쩔 셈인가?
 
정신나간 놈들.
학생들의 대학진학률이 90퍼센트를 넘겼으니 일부 부유계층 이외엔 어느집이나 살인적인 대학등록금이 큰 부담이므로  반값 등록금 공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일이다. 대학등록금 문제가 복지 포퓰리즘이니 뭐니 해서 당략으로 싸울 일이 아니듯이 전면무상급식 문제도 아까운 국민의 세금 운운하며 눈가리고 아웅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국민 세금이 아까우면 쓸데없는 삽질이나 저지르지 말란 말이다!

오세훈파 아주머니가 아직도 가지 않았다. -_-; 오래 눌러앉아 지치게 만들어 서명을 받으려는 전략인가? 한판 붙고 후퇴했으니 다시 가서 서명 파일 열어보자고 할 수도 없고 으으으... 얼음물이나 벌컥벌컥 마시며 참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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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투덜일기 2011. 5. 27. 16:41

우편으로 청첩장을 하나 받았다. 봉투에 적힌 혼주 이름이 영 낯설었으나, 내 이름으로 온 청첩장이니 잘못 왔을 리는 없었다. 대개 봉투엔 신랑신부의 부모님 성함을 인쇄하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내용물을 보았으나 혼주 이름 아래 적힌 신랑 역시 모르는 이름이었다. 혹시 엄마 친구분이 병 잦은 친구에게 참석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요량으로 내게 보낸 건가,  엄마에게 물으니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의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절친한 친구분들의 경조사에 나는 계속 부모님 대신 참석하는 걸 의무로 여겼다. 부부동반으로도 모임이 잦았던 친구분들의 경우는 홀로된 엄마라도 불러내어 자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권하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엄마도 나도 알기에 처음 몇번은 모녀가 동반참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못할 짓이었다. 즐겁자고 모인 자리에서 자꾸 고인을 추억하게 하거나 질질 짜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고, 동정적인 시선을 감당하기도 싫었다. 가끔 걸려오는 안부전화를 받는 정도가 그나마 딱 좋은 선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론 아버지 친구분들께 연락이 오면 계속 엄마의 건강을 핑계로 웬만한 자리는 다 마다하고, 어쩔 수 없는 경조사의 경우에만 싫든 좋든 내가 홀로 다녔다. 엉겁결에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끌려가 내키지 않는 밥을 먹은 적도 딱 한번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얼른 요식행위만 하고 달아났다. 어려서부터 다 아는 면면이라 해도, 굳이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고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전달하는 일은 숫기없는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귀찮은 마음이 들어 불쑥 짜증이 치밀어도 그게 의무이고 도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떡하니 날아온 청첩장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고인인지 아닌지 모른채, 혹은 고인인 건 알지만 어쨌든 그간 뿌린 축의금은 거둬들이겠다는 욕심에 보냈을 것으로 의심되는 청첩장이 아버지 앞으로 날아든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그런 건 무시했다. 하지만 이번 청첩장은 내쪽에서 낯설 뿐, 내 이름까지 알고 있고 내가 아버지 대신 경조사에 참석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학교 쪽 지인(그야말로 이름만 아는 지인;;)이 틀림없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쪽에선 나를 잘 아는 아버지의 친구분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분들 성함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소속된 각종 등산회 모임 연락처를 해마다 다시 뽑아드려 웬만큼 절친한 지인의 이름은 나도 다 아는데 대체 누구일까.  

버럭 짜증이 났다. 이 사회에서 결혼식이란 많은 경우 일종의 흥행을 노린 비즈니스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결혼식 참석이 대부분 마뜩찮은데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빚을 갚는 마음으로, 또는 미래의 수확을 기약하며 품앗이 다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하지만 이 경우는 뭔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장례 후 보낸 인사장 명단 파일을 찾아보았다. 거기 들어 있으니 아버지의 '지인'임은 확실하지만, 이름을 확인하고도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딸인 나는 그렇다 쳐도 엄마도 이름이 낯선(생전에 아버지는 그날 하루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 무얼 했는지 시시콜콜 아내에게 다 털어놓는 분이었고,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울 엄마도 아버지의 온갖 등산모임, 동반모임에 다 같이 참석하셨다. 엄마가 모르면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 결혼식까지 참석하는 것이 의무일까? 엄마는 아버지 장례 때 부의금 기록을 확인하여 그 사람이 낸 금액과 동일한 축의금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3만원짜리일 거라면서. +_+ (원래 대학교쪽 인원이 워낙 방대하여 부서별로 부의금을 모아 보낸 경우는 1, 2만원도 흔하다.) 그러나 부의금 기록 따위는 없다. 경조사 때 받은 만큼 갚겠다는 사람들의 계산속이 늘 못마땅했던 나는 아버지 장례 때, 문상객 접수를 맡은 이에게 조문객 명단만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품앗이를 해야 한다면 그때그때 마음과 형편이 닿는 대로 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1. 어쩔 수 없다. 묵묵히 청첩일에 결혼식에 참석하여 통상적인 액수의 축의금을 직접 내고 온다. (누군지 서로 얼굴도 모르니 인사는 생략하고 봉투만 불쑥 내밀면 끝이겠다)
2. 시간도 아까운데 직접 갈 필요까진 없다. 참석 못해 죄송하다는 메모를 넣어, 전신환 축의금이나 현금 봉투를 등기로 부친다.
3.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참석자를 수소문하여 축의금을 대신 내달라고 부탁하고 송금해드린다. (전화 기피증 환자에겐 가능성 거의 제로;;)
4. 무시한다.

현재로선 1, 2번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런데 계속 부아가 치민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 금전적인 채무가 배우자와 자식에게 남는다는 건 알지만, 경조사의 품앗이 빚도 똑같은 의무라는 건 좀 서글프다. 내게 청첩장을 보낸 저 어르신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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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복도 복

투덜일기 2011. 5. 26. 17:01

그동안 시나리오를 거의 수십번은 고쳐썼을 것이다. 다짜고짜 쌈닭형, 비굴 간청형, 도도한 충고형, 험상궂은 협박형, 대면회피 서면통보형, 일방적인 민원신고처리, 반상회 추진... 아래층 똥개 문제를 그 집 사람들에게 어떻게 항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이야기다.

1년도 넘게 고민만 했을 뿐 속 시원히 아래층 사람들과 맞서지 못하고 여기다 애먼 욕만 써대면서 급기야 불만은 부글부글 끓어올라 넘치기 직전이었다. 이젠 날도 더워져 베란다문을 열고 살아야하는데 온집안을 뒤흔들듯 목청껏 짖어대는 놈의 울대를 맨손으로라도 끊어버리고 싶은 심정;;

밤늦게나 집에 들어오는 아랫집 식구들을 언제 찾아가야할 것인지도 난감해서,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현관문에 붙여놓는 방법도 생각할 지경이었는데... 두둥... 어제 얼떨결에 똥개 주인한테 불만을 토로했다. +_+ 저녁 설거지를 하는데 이 미친개가 깽깽거리며 우는 소리를 막 내기 시작했다. 우렁차게 짖는 소리와는 또 다르게 귀청을 찢을 듯 파고드는 소리에 확 열이 오른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쿵쾅쿵쾅 아래층으로 내려가 놈을 호통쳤다. 조용히 못해! 그랬더니 놈은 나를 잡아먹을 듯 짖어대며 뛰어올라 쇠사슬을 쩔렁거렸고 그 순간 개주인 등장!

그동안 수십번 고쳐썼던 시나리오 덕분인지 안녕하세요, 인사에 이어 주절주절 불평이 터져나왔다. 1년 넘게 고민하다 이제야 이야기를 하는 거라는 푸념으로 시작하여 대체로 비굴 간청형이었던 것 같아(개 짖는 소리 때문에 일을 많이 못해 생계에 지장이 있다는 말도 했다;; 완전 과장은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임) 내심 좀 부아가 치밀었다. 차근차근 도도하게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서 굴복시키는 상상을 너무 오래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개주인에게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_-v

게다가 이사를 갈 지도 모르는다는 말에 어찌나 반갑던지 이사 전까지는 참아보겠다는 말이 새어나오려는 걸 얼른 혀를 깨물었다. 전세집 구하기 어렵다는데 그러다 이사 안가면 어떻게 하라고! 째뜬 어젯밤에는 전기충격 목줄을 매달았는지 개가 짖다 말고 낑낑대는 양상을 보이더니 계속 조용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으면 진즉 이야기할 걸, 괜히 망설였나 싶을 정도였다. 그놈의 똥개가 전기충격에 죽어나든 말든.. 내 알바 아니었다. 독약 사다먹여 죽일 생각도 했는데 놈이 괴롭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그러나.
오늘 놈은 다시 홀로 남아 마당을 점령한 채 평소처럼 짖어대고 있다. 아우 씨... 골목에 차만 지나다녀도 짖는 놈의 횡포를 하루 종일 기록해 보고서라도 작성해야 하나, 소음측정기로 피해정도를 규명해야 하나, 2차로 또 다른 시나리오를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 암담하다. 앵두가 바알갛게 익어가고 있는데... 놈의 위혐 없이 앵두를 따먹으려면 그전에 해결되야 하는데, 어쩌나 젠장. 이웃 복도 참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몰염치한 아래층 집 사람들은 1년 넘게 신고 한번 안하고 무던히 참아준 이웃들 잘 만난 걸 과연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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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병

투덜일기 2011. 5. 17. 17:41

이 세상에 감기를 치료하는 약은 없으며, 모든 감기약은 증상완화제일 뿐이다.
어차피 감기는 약 먹으면 2주, 안 먹으면 보름만에 낫는다.
물 많이 마시고 밥이랑 과일 잘 챙겨먹고 잠 잘자서 몸의 면역력을 높이면 감기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감기약 먹으면 졸리고 멍해서 정신집중이 안된다.
감기약 먹고 운전하면 사고날 확률이 늘어난다.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본 것 같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지어주는 감기약의 알약 갯수를 보면 딴나라 의사들은 기함을 한다. 약 흡수 잘 되라고 소화제까지 처방하는 의사들 여기밖에 없다더라.

이상은 감기에 대한 평소 나의 지식이랄까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근거로 거의 3주간 계속 버텼다. 이번 감기는 다른 증상 없이 그냥 기침만 나왔던 터라 더욱 소신껏 밀고 나갔던 것 같다. 사실 무작정 버틴 건 아니고 지난번 먹고난 테라플루도 몇번 먹어주었다. 크게 효험은 없다고 투덜거리면서. 기침도 낮엔 얼추 괜찮다가 밤에만 좀 많이 나왔다. 원래 기압이 낮아져 기침은 밤에 더 심하진다니까 그러려니 했다.

지난주초엔 기침을 하느라 뱃가죽이 당기는 수준까지 이르긴 했으나 나로선 별로 불편할 게 없었다. 나을듯 나을듯, 떨어질 듯 떨어질듯 하다가 밤만 되면 다시 도지는 기침이 그저 얄미울 정도였다. 그런데 왕비마마는 나의 기침을 못견뎌했다. 기침 소리 들을 때마다 병원으로 끌고 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기침보다도 그놈의 잔소리가 지겨워 결국 어제 동네 내과를 찾았다. 목안을 들여다본 의사는 내 짐작과 별 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 염증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심하지 않다. 낮에 물 많이 마시고 체온관리 잘 하고 푹 쉬는 정도로 나을 수 있겠지만 약을 먹으면 좀 더 빨리 나을 테니 이틀치 처방을 내려주겠다. +_+

주사는 맞고 싶으면 맞으라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당연히 안 맞기로 했다. 약만 타가지고 돌아와 어제오후부터 시간 맞춰 열심히 먹고 있는데.... 

젠장, 하나도 변한 게 없다!
밭은 기침은 콜록콜록 똑같고 괜히 정신만 멍하다. 알러지 약까지 들어 종류도 6가지나 되는데 왜 효과가 없는 거냐!(콧물에다 몸살까지 겹쳤으면 약을 열개는 처방했으려나? -_-;) 엄마는 주사를 안 맞아서 그런다며 약 다먹고 내일은 주사까지 맞으라고 또 성화다. 나는 애당초 병원에 갔던 걸 후회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플라시보 효과 때문인 것 같다. 의사와 약의 권위를 믿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가짜 약을 먹고도 30%쯤의 환자들은 증상이 완화된단다. 그래서 그런 착한(?) 환자들과 의심 많고 부정적인 태도의 환자들은 치료효과가 두배나 차이를 보인다. 플라시보 효과 대신 역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걸 노시보 효과라고 한다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딱 그짝이다. 이 세상 감기약을 죄다 불신하는 나에게 감기약이 효력을 제대로 나타낼 리 없잖은가. ㅋㅋㅋ 병도 병이지만  나는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인 셈. 어쩌면 아는 게 병이 아니라, 불신과 회의가 병일지도...  역시나 믿을 건 내 몸과 오기밖에 없다 싶다.

이놈의 기침 감기 바이러스, 내 오늘부터 너를 물에 빠뜨려 죽여주마!
기를 쓰고 물을 마시고는 있는데...
계속 화장실 다니느라 귀찮아 죽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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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1. 5. 13. 21:28

끊임없이 창의력을 발휘해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직업을 지닌 동생은 얼마 전부터 전업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이 분야에선 감 떨어지면 생명 끝이야, 라는 그의 비장한 말을 들은 건 꽤 됐다. 20년 가까이 머리를 쥐어짜가며 버티고는 있지만 자꾸만 그 '감'이라는 게 떨어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타고난 재능이 워낙 화수분 같아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감 떨어질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확실히 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노래방엘 가서도 꼭 김동률, 넥스트 같은 노래를 선곡하며 젊은 감각을 유독 자랑하던 부장이 있었다. 다방면의 음악을 들었고 와인을 음미했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정장에 메신저백을 매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십대였던 우리는 그 사람을 질색했다. 그가 어디선가 물어오는 썰렁한 유머라는 것도 하나같이 고리타분 전혀 웃기지 않았고, 우리들의 유머는 잘 못알아듣고 초를 쳤다. 그럼에도 부하직원들의 사적인 대화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하는 행동이 밉상이었다. 우리는 애써 젊은 척하려는 그에게 '나잇값' 못한다고 흉을 봤다. 이제는 '나잇값'이라는 말을 치떨리게 싫어하건만, 그 땐 툭하면 쯧쯧 혀를 차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걸 보면 한심하게도 나는 조직내 왕언니라는 호칭 때문에 조로 상태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나잇값을 못했던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나름의 취향을 고수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감이 떨어진 것 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감이 떨어진다는 건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도 서글픈 일이었다.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 지난 과거를 포장해 자꾸만 추억하는 사람을 보는 때만큼이나 서글펐다. 꼴같잖은 상사나 중노년의 어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던 게 벌써 까마득한 오래 전 일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렇게 감 떨어진다고 비웃던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중년이 되었다고 해서 철이 더 들었다거나 현명해졌다거나 지식이 많아졌다거나 하는 변화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순간순간 스스로 감떨어지는 중늙은이가 됐다는 깨달음이 들어 허걱 하고 놀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늙는 건 마음먹기 달렸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의 나는 간혹 저도모르게 꼰대같은 소리나 툭툭 내뱉고 앉았고 빠릿빠릿한 센스도 한참 뒤떨어졌다. '아'하고 이야기했는데 '어'하고 알아듣는 사람만큼 답답한 게 없다고 노상 떠들어댔으면서 문득 내가 그러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도 원래 자의식에 빠져 움츠러들면 아무것도 아닌 말조차 오해하고 오독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내가 시방 그러는 것 같은 기미가 느껴진다. 서글프다. 가장 슬픈 건 슬쩍 나이탓을 하며 모자란 행동에 면죄부를 씌우려는 무의식적인 나의 태도다. 아니, 감이 떨어졌는지 아닌지 모를만큼 거침없고 무감하게 살 수 없게 된 작금의 상황이 참 슬프다. 

떨어지는 감을 세워올리려면 최첨단 안테나라도 구비해야하는걸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 옛날 내가 손가락질하며 외면하던 중년의 부장처럼 못나게 몸부림치다 사그라져야 하는 걸까. 비어버린 머리는 어떻게든 두들겨서 뭔가를 집어넣어본다지만, 고성능 최첨단 안테나는 구할 수나 있는 것인지 그걸 몰라 더욱 어깨가 처진다. 감 좀 떨어지면 어때, 하면서 뻔뻔하고 자연스레 수긍하며 살아갈 용기를 찾는 게 더 빠르고 옳은 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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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과 상처

투덜일기 2011. 5. 4. 17:35

지난 수요일이었으니까 딱 일주일 전에 안하던 짓을 하다가 호되게 자빠졌다. 저만치 남은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켜지면 원래 절대 뛰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따라 좀 늦은 것 같아 뛰어보겠다고 작심한 게 잘못이었다. 오래 걸을 요량으로 운동화까지 떨쳐 신고서 거기서 왜 넘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암튼 자동차가 막 오가는 길 한복판 언덕에서 넘어졌다. 아픈 것보다 창피해서 얼른 일어나보니 다행히 바지 무릎엔 구멍이 나지 않았고 제일 쓰라렸던 손바닥도 빨갛기만 할뿐 멀쩡했다.

후딱 택시를 잡아타고 마침 가방에 든 물휴지로 손바닥을 닦는데 이상하게 어디서 피가 묻는 것 같았다. 켁. 왼손 엄지 끝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옷에 묻은 건 어니어서, 마른 휴지를 대고 꽉 눌러 지혈을 했다. 집안에서도 수시로 어딘가에 부딪쳐 종아리 언저리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 건 다반사지만, 길바닥에서 된통 넘어진건 그래도 간만이라 아프고 창피하고 민망하면서도 킥킥 웃음이 나왔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미친 여자 취급할까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날은 일회용 반창고를 사서 손가락에 붙인 뒤 온종일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에야 시큰거리는 무릎을 확인했다. 청바지에 구멍이 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멍 정도만 들었겠거니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더 아픈 건 분명 왼쪽 무릎인데도 거긴 멍만 들었고 별로 아픈 줄도 몰랐던 오른쪽 무릎엔 지름 5센티미터쯤 살갗이 홀라당 얇게 벗겨져 진물과 피까지 나 있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심히 아픈 걸 모르다니 테라플루의 힘이었을까? 넘어진 뒤 벌떡 일어나 한참 놀다가 피를 보고나서야 새삼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처럼 나도 그제야 상처 난 데가 쓰라리고 아픈 느낌이었다. ㅎㅎㅎ

일주일이 지난 지금 찢어졌던 손가락도,딱지가 앉은 무릎도 거의 다 아물어 가고 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미 중년인 걸 감안하면 인체의 치유력이 참 놀랍고 신기하다. 특히 진보라색과 푸르딩딩한 색이 어우러졌던 멍자국의 변화는 제일 이상하다. 넘어진 다음날은 양쪽 무릎이 거무죽죽하게 죽은 듯 멍든 부위가 작았다. 그러더니 그 거무죽죽한 색이 진보라색으로 변하면서 부위가 점점 커져 멍자국이 제일 크고 요란한 건 사건(?) 4,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샤워하다가 흠칫 놀라 내가 또 어디엔가 심히 왼쪽 무릎을 부딪쳤나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선반에 이마를 찧었을 때 생겨난 시커먼 멍이 나중엔 뺨으로 내려왔던 게 떠올랐다. 멍자국도 중력의 작용을 받나보다 신기했는데, 이번엔 중력에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도 아니고 동그랗게 사방으로 번지는 멍자국이라니! 게다가 놀라운 건 까져서 피난 오른쪽 무릎엔 멍이 거의 들지 않았다는 거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겉으로 피가 터져나왔으니 속으로 피가 스며들어 생기는 멍이 들지는 않았겠지.

새삼 멍드는 게 나은가, 피나는 쪽이 나은가 한참을 고민했다. 내상과 외상, 어느쪽이 빠르게 후유증 없이 나을까. 요번 무릎의 경우, 울긋불긋 멍든 왼쪽 무릎은 일주일이 지난 오늘 간지러움을 동반하며 색이 많이 연해져 이삼일 뒤면 멀쩡해질 기세다. 딱지가 앉은 오른쪽 무릎 역시 간질간질 나아가고 있지만 딱지가 완전히 떨어지려면 며칠이 더 걸릴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상이 더 나은 건가? 양쪽 무릎이 똑같은 강도로 다쳤을 리 없으니 비교는 불가능한데도 쓸데없이 생각에 빠졌다가, 어쩌면 그냥 피를 철철 흘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든 멍은 티도 잘 안나고 본인이나 주변의 동정을 사기도 쉽지 않은 반면, 외상은 척 보기에도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속으로 드는 골병보다는 아쌀하게(?) 겉으로 터지는 상처가 치유하기도 좋을 것 같다.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쪽과 가슴에 멍이 든 경우를 비교해보면 어떤가. 에고 머리 아파져서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그만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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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우

투덜일기 2011. 4. 30. 05:45

토요일에 비가 꽤 온다는 일기예보는 들었지만 요란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밤중부터 뒷베란다 섀시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매우 요란한 비가 내리며 간간이 천둥벼락이 쳐댔다. 천둥을 유독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닌데도 공연히 겁이 났다. 번개가 치는 순간 두꺼비집이 내려앉는 건 아닌가, 찌르르 벼락이 전선이나 케이블을 타고 들어와 컴퓨터를 태워버리는 건 아닌가 갖은 상상을 다 하느라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멀리서 그르르릉 천둥의 전조가 시작되면 몸이 먼저 긴장을 했다. 그러다가 천둥이 치면서 내리는 비를 뜻하는 말이 뭐였더라, 뭐였더라 생각이 나질 않아 또 한참 정신 끄나불을 한 자락 풀어놓았다가 끝내 방금 떠올렸다. 그렇다. 뇌우(雷雨). 몇시간 만에 생각해낸 주제에도 기뻐하다 보니 빗줄기도 얇아졌는지 소리도 덜 요란하고 천둥번개도 잠잠하다. 그러면 뭐하나 온 새벽을 다 황망히 허비하고 나서 머리는 이미 멍해진 시간인 걸. 파랗게 밝아오는 새벽에 느껴지는 묵직한 피로감은 때로 쾌감일 때가 있다. 몸과 정신을 꽤 잘 쓰고 나서 마땅한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됐을 땐 그러하다. 그럴 때 이부자리에 누워 몽근한 잠에 빠져들면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뿌듯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그런 행복을 느낄 자격이 없다. 멍해진 머리를 다시 바짝 조여야 한다. 어렵사리 뇌우 하나 떠올렸다고 기특해할 게 아니라 그걸 잊은 머리에 꿀밤을 먹여야 하느니라. 아, 입이 방정인가. 빗소리가 다시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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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벌

투덜일기 2011. 4. 13. 14:43

몇년전 <꿀벌대소동>이란 애니메이션을 보기도 했지만, 공해가 점점 심해지면서 꿀벌들이 차츰 사라져가는 추세를 걱정하는 환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꽤 많이 접했다. 꿀벌이 사라지는 바람에 모든 식물의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먹이사슬의 근간이 무너져 결국 최종 포식자인 인간에게도 대재앙이 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러고 보니 도시에서 벌 구경한 적이 정말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땐 마당에 피어난 자잘한 꽃들 사이로 벌들이 쉴새없이 날아다녔고, 종종 벌에 쏘이는 사고도 벌어졌는데 말이다. 못생긴 꽃의 대명사로 알려진 호박꽃을 어린 나는 꽤 좋아해서 못생겼다는 세간의 잣대를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꽃잎마저도 통통하고 푹신한 주황색 꽃이 얼마나 탐스러운가. 게다가 가느다란 덩굴손은 또 얼마나 신기한지. 할아버지댁 마당에도, 나중에 우리집 마당에도 한켠엔 꼭 호박덩굴이 몇 그루 자라고 있었고 거기서 딴 애호박으로 할머니도 엄마도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애호박으로 만든 온갖 반찬을 좋아하는 건 그 시절의 추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안이 깊은 호박꽃을 들여다보며 노는 걸 즐겼던 나는 두번이나 크게 벌에 쏘인 뒤 호박꽃 갖고 놀기를 포기했다. 처음엔 손가락을 쏘였지만 두번째는 눈두덩을 쏘이는 바람에 호되게 앓으면서 사실 꽃밭에서 노는 걸 금지당한 셈이었다. 곤충은 거의 다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편인데 지금도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면 순식간에 얼어붙는 걸 보면 어린시절의 각인 효과가 퍽이나 큰 모양이다. 

어쨌거나(요즘 포스팅의 모든 마지막 문단은 이 말로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논리의 부족을 얼버무리는 이런 말--어쨌거나의 친구로는 '아무튼, 여하튼, 암튼, 어쨌든' 등이 있다--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그거야 서울도 그리 삭막해지기 이전 이야기고 최근엔 환경공해 때문에 벌을 구경한 적이 거의 없다고 여겼다. 꽃놀이하러 외출하는 걸 그리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봄꽃 피는 과정에 눈감고 살았듯 꽃을 보아도 벌을 굳이 찾아보지 않은 나의 비뚤어진 시각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역시나 화창하고 찬란한 날씨에 창밖을 내다보니 집앞 벚꽃은 거의 다 만개해 눈이 부실 정도다. 놀라운 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수십 수백마리의 벌들이 가지마다 윙윙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보는 꿀벌 뿐만 아니라 날아드는 종류도 다양하다. 어린 시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꿀벌의 두세배쯤 되는 큼지막한 벌을 호박벌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시커멓게 생긴 그 대형 벌에 말벌까지 경쟁적으로 꽃을 탐하고 있다. 벚꽃에도 그렇게 꿀이 많았던가? 하도 신기해서 한참을 내다보고 섰다가 피식 웃었다. 꽃을 유난히 좋아하면 늙는 거라던데(그치만 난 어리고 젊었을 때도 꽃을 좋아했다고!), 이젠 꽃에 벌 날아드는 거 보고도 좋아라 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싶다. 굳이 우기자면 꽃에 벌 날아드는 게 좋은 게 아니고 아직 이 도시엔 날아들 꿀벌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게 반가운 거다. 이왕 날아온 벌들이 옆에 있는 앵두나무도 열심히 수정해주면 더욱 금상첨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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