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유감

투덜일기 2011. 1. 9. 16:15

왕비마마와 내가 옷에 대한 취향이 사뭇 다르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의견통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모피 코트에 대한 거부감이다. 젊어서는 모피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고 특히 노년에 접어들면 모피, 특히나 밍크 코트 한벌쯤은 갖고 있어야 면이 선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므로, 엄마가 예순살 즈음부터는 겨울마다 나도 아버지도 계속 왕비마마의 의향을 물었다. 한벌 사줄 테니 골라보시라고 말이다. 한벌에 몇천만원까지 한다는 초고가의 모피는 못 사줘도 '까짓것' 몇백만원짜리는 사주겠다며 몇번이나 백화점엘 모시고 나가 입혀본 적도 있었다. 엄마가 내심 갖고 싶은데 괜히 사양하는 '척'하는 거라면, 백화점까지 가서 입어본 다음에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실 것이라는 게 우리의 짐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마다 억지로 걸쳐는 보았으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우리 모녀는 웬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옷을 잘 입어보지 않는다. 입어보고 나면 소심한 성격에 점원에게 미안해 마음에 안들어도 얼떨결에 사버리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모피 코트가 워낙 고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왕비마마의 거절 이유는 우리가 듣기에도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첫째로는 불자로서 수백마리 짐승을 죽여 만든 옷을 걸치고 절에 다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고, 둘째로는 당신 몸이 뚱뚱해서 그렇게 짐승털가죽 옷을 입은 본인의 모습이 한 마리 곰처럼 흉측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말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모피코트를 입지 않은 사람은 울 엄마밖에 없더라면서 그게 속이 상했는지 아버지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계속 백화점 모피 매장으로 왕비마마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왕비마마는 밍크 코트 대신에 밍크털이 깃과 소매에 장식된 무스탕이나, 오리털, 모직 코트를 대신 사거나 차라리 아버지랑 세트로 등산 점퍼를 장만해 들어오셨다. 그러고 나서는 지난 몇년간 나는 왕비마마의 모피 취향이 변했는지 아닌지 떠보기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유난히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올 겨울, 왕비마마의 나들이라고 해봤자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 아니면 절에 가는 것 이외엔 죄다 병원 정기검진이긴 하지만 노친네들이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밍크 코트'를 보니 새삼 또 찔려 왕비마마에게 물었다. 엄마도 이젠 밍크코트 한 벌 입으시지, 라고. 그랬더니 단박에 싫으시단다. 더 뚱뚱해보일 거라나. 그럼 살 빠지면 입으실 거냐고 했더니 그도 아니란다. 오히려 입고 싶으면 너나 입으라고, 통 크게도 한벌 사주시겠다고, 요즘엔 젊은 애들도 많이들 입나보더라고, 한 술 더 뜨는 거다. -_-; 징그러워서 개털도 잘 못쓰다듬을 뿐더러, 특히 실감나게 생긴 밍크털은 더 소름끼쳐서 소매나 깃장식도 못 견딜 판국인데 무슨!

이렇게 모피 혐오증 환자처럼 굴고는 있지만 나도 짐승털이 얼마나 따뜻한지는 알고 있다. 할머니 유품 중에서 스웨터 말고도 내가 또 챙긴 물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밤색 토끼털 목도리다. 다행스럽게도 토끼 눈과 꼬리까지 실물처럼 재현해놓은 그런 모양이 아니라(그런 거라면 무서워서 절대 갖겠다는 소리 안했을 거다. 할머니 밍크 코트를 외면했던 것처럼;;) 둥글게 코트 깃처럼 생긴 집게형 목도리라 모직코트를 즐겨 입던 시절엔 정말 거의 매일 두르고 다녔다. 비록 이제는 몇년째 장농에 그저 매달려 있기만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가죽코트 사면서 안에 입는 토끼털 조끼가 덤으로 생겨 입어본 적도 있다. 그나마 변명이라면 내가 일부러 모피를 추구해서 장만한 건 아니라는 정도지만, 토끼털은 괜찮고 밍크 코트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과연 나도 더 '늙으면' 취향이 바뀔지 그건 모르겠으나, 어려서는 모피가 징그럽다고 나와 동감하던 친구들도 중년에 접어들더니 슬슬 모피에 눈길이 가고 호피무늬가 좋아진다고들 고백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요즘 모피 코트 디자인이 제 아무리 세련되게 바뀌었다고 해도, 깜찍 발랄하게 새하얀 모피를 입은 젊은 아가씨들을 보아도 전혀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데 말이다. 호피무늬 싫은 거야 예전에도 포스팅했던 적이 있을 정도고! (좋아하는 배우가 배역 때문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호피무늬 걸치고 나오면 호감도는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선호 배우 명단에서 제명될 수도 있다) 얼마 전 혹독하게 추운날 잠깐 만나 밥을 먹었던 친구는 나 싫어할까봐 제일 뜨뜻한 모피 코트를 못입고 나왔다고 툴툴거렸다. 그 친구는 그 옛날부터 걸어다니면 반드시 팔짱을 껴야 하는데, 모피 걸치고 나온 날은 내가 내내 사모님이라고 놀려줄 뿐만 아니라 팔짱도 금지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 취향을 고려해 하루쯤 모피를 포기한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긴 것, 짧은 것, 색깔 연한것, 조끼형까지 일일이 갖고 있는 모피 코트를 들먹이며 효용성을 피력하는 사모님에게 결국 나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존중해 줄 터이니 그만 입닥치라고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까마득한 옛날에 결혼할 때도 시어머니 혼수로 모피코트를 해드리고 저도 모피를 받았던 것 같다. 어차피 물려받을 거라 생각하고 좋은 걸로 바치기로 했다던가.

암튼 그렇게 뜨뜻하다는 모피 코트에 대한 왕비마마의 거부감이 진심인지 아닌지, 진심이었더라도 혹시 변하는지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떠볼 작정이다. 왕비마마가 계속 싫다고 하시면 몹시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하겠지만, 못 이기는 척 입겠다고 하셔도 매몰차게 친구에게 하듯 팔짱을 못끼게 하지는 말아야지 마음먹고 있다. 곰 한마리나 바야바 같은 왕비마마를 모시고 다니는 일은 정말 싫겠지만, 뭐 그렇게 또 따뜻하다니까... 원시 시대엔 겨울에 누구나 모피를 몸에 두르고 다녔을 텐데 뭐... 암... 혹시 내가 하도 질색팔색을 하니까 왕비마마가 모피 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계신 건 아닌가 슬며시 걱정스럽기도 하다. 빤딱이 여우털 프린세스 라인 패딩을 사다 입으라고 강요 받았을 때 내가 난감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취향을 노친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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