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분

투덜일기 2010. 12. 14. 11:59

발신 번호가 길고 복잡한 것으로 보아 국제전화임이 분명한 전화가 두번이나 오다 받으면 아무말 없다가 끊기고 또 받으면 아무 소리도 안하다 끊어졌다. 해서 또 그놈의 보이스피싱인가 지레 겁을 먹고 이맛살을 찌푸린 채 전투태세를 취하고 전화기를 노려보며 기다렸더니, 이번엔 또 컴퓨터방 전화가 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리로 전화를 거는 이 역시 대부분 텔레마케터들이라 번호부터 확인했다. 아하. 이번에도 국제전화는 분명한데, 지역번호가 낯익은 친구 전화였다. 

미서부에 사는 친구가 아는 사람에게 새로 전화카드를 샀는데, 대체 얼마 짜리인지 몰라도 아 글쎄 한국이랑 1900분이나 통화할 수 있는 카드란다. +_+ 한국으로 전화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했더니만 아예 휴대폰에 핀번호를 다 입력해주었으나, 그 단축번호로 전화를 거니 자꾸 에러가 나서 운전하다 말고 수첩 꺼내 일일이 그 번호를 다 눌렀단다. 아무리 핸즈프리로 통화를 하는 거니 상관없다지만, 그래도 운전중엔 위험하다고 일단 끊고 다시 통화하자고 추임새처럼 반복하면서도 수다가 길어져 LA에서 고속도로 탔다는 애가 통화 끝날 때쯤엔 집에 다 와간다고 했다.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는데도 친구가 음화화홧 웃으며 아직도 1800분 넘게 남았으니 염려 말란다. 앞으론 자기가 전화할 테니까 쓸데없이 내쪽에서 전화하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셈에 약한 나는 1900분이면 대체 몇시간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 요금제에도 무료음성통화가 200분 들어 있는데, 워낙 전화질을 꺼려하다보니 노상 남아돌아간다. 데이터용량처럼 음성통화도 다음달로 이월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보지만, 지지난달엔 무려 130분이나 남았다고 말일날 문자가 왔었고, 지난달엔 분발하는 의미로 악착같이 휴대폰을 써댔어도 40분이나 남았던 걸 감안하면, 나 같은 사람은 음성통화량을 이월시켜줘도 다 못쓰고 점점 불어나 오히려 부담만 느낄 것 같다. 

85년도에 친구가 이민갔을 때만 해도 서로 말소리가 한참 뒤에 전달되는 션찮은 통화품질의 국제전화로 몇분 얘기 안했는데도 전화요금이 몇만원씩 나왔으므로, 그땐 정말 급한 일이나 친구 생일날 축하 전화가 아니고선 선뜻 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요샌 대체로 국제전화 요금이 싸져서 TV 광고처럼 굳이 저렴한 회사를 찾아 누를 필요도 없다. 자주 걸지도 않는데 무엇하러 숫자 하나라도 더 눌러서 실수의 가능성을 높인단 말인가. 헌데 알뜰한 친구는 나와 다르다. 얼마 전까지 친구는 나와 통화를 하려면 반드시 국제전화 정액제를 쓰고 있다던 언니네 집에 가서 전화를 걸었다. 한달에 10불쯤 내면 100분이 무료통화라던가. 그 이전에는 홍보용으로 나눠주는 전화카드를 주로 이용해 전화를 걸었다. 나도 여행갈 땐 전화카드를 사가지고 가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일이 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게 귀찮아서 나중엔 그냥 신용카드 전화기를 찾아 쓰거나 좀 비싸도 짧게 끝내지 싶어 호텔전화를 그냥 썼다. (그러고 보니 휴대폰 로밍 같은 거 불가능하던 시절 얘기다 ^^;)

새로 전화카드 사업을 시작한 지인을 돕느라 산 거라지만 1900분짜리 전화카드는 항상 검소하고 알뜰한 친구에겐 엄청난 소비가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 둘의 요즘 통화 빈도수로 볼 때 그 시간을 다 쓰려면 아마 몇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_-; 그 카드 다 쓰기 전에 꼭 내가 가든 니가 오든 2주짜리 휴가계획을 잡아보자고 아련한 꿈을 수다로 풀어내다 전화를 끊었다. 1900분. 단순한 계산도 서툴고 아둔한 내 머리로는 거의 영원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든든한 쌈짓돈 같은 게 생긴 기분이다. 친구가 돈 버렸다고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새해 인사 전화는 내가 먼저 걸어야겠다. 크리스마스 카드 겸 편지라도 새삼 쓰면 더욱 좋겠지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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