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가 있다. 19살부터 알고지냈으니 이 친구와도 모르고 지낸 인생보다 알고 지낸 인생이 더 길다. 고등학생 때 지루한 수업시간에 쪽지를 보내던 버릇이 대학 때도 이어져 이 친구랑도 어쩌다 보니 강의실에서 시답잖은 쪽지를 주고받았다. 친구는 악필로 유명하면서도 연습장이나 공책 한 가득 적은 기묘한 일기나 만화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고 (정말 싫었다 -_-;;), 당시 유행대로 시집을 끼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보고서 용지에 적어 주기도 했다. 친구가 군에 간 뒤엔 당연히 위문편지를 써주었다. 카투사라 용산에 배치돼 수시로 휴가를 나오기는 했지만. 

학교 졸업후 각자 회사에 들어가선 전화가 유일한 연락방법이었다. 몇달에 한번씩은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친구가 덜컥 영국 지사로 발령이 났다. 다시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서로 선물도 보냈다. 내쪽에선 주로 영국에서 몹시 비싼 '담배' 같은 걸 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내가 회사를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며 팩스 기계를 장만한 뒤로는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대신 감열지가 삐직삐직 기어나오는 팩스가 이용되었다. 친구를 지사로 보내며 주재원들의 품위유지를 위해 좋은 집과 BMW 5시리즈를 내주었던 한국 대기업이 망해 그 무렵엔 영국 회사로 옮겼기 때문에 친구 이름만 영어로 쓰면 편지 내용을 아무도 몰랐으니 상관 없었다.

(중간에 '새롬 데이터맨'을 사용하던 pc 통신 시절이 있기는 했는데, 한때 주말이면 그 불안한 전화모뎀으로 밤샘 채팅에 열을 올리기도 했으나 이 친구와는 거리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덧 세월이 바뀌어 이메일이 일상화되었으므로, 친구와의 소통은 팩스에서 이메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로는 휴대폰도 이용됐으나, 친구도 나도 전화를 그리 자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이든 회사든 노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위한 MSN 메신저라는 유용한 물건이 나타났다. 친구와도 메신저 채팅이 주요 창구가 되었다. 그 즈음이었던가 그보다 먼저였던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싸이월드에도 대학동기들 클럽이 생겨났다. 내가 수없이 도토리를 사들여가며 미니홈피도 열심히 꾸밀 때였다. 대학시절 연습장이나 보고서 용지에 서너장씩 빼곡하게 채워 편지를 써보내던 친구는 여전한 '글빨'로 클럽 게시판에 주옥같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나는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한때는 MSN와 네이트온을 동시에 로그인해놓고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지인들과 수다떠는 것이 낙이었지만, 쓸데없이 방만한 인간관계로 나는 금세 피곤해졌다. 급기야 나는 메신저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 '오프라인 표시'라는 훌륭한 기능이 있기는 했지만, 싸이월드 '일촌' 사이에도 등급이 필요하다고 느꼈듯이 어설프게 알려준 메신저 아이디로 아무 때나 뜬금없이 "올만요! 안녕하삼. 방가방가!"라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슬그머니 두려웠다.

내가 메신저질을 '끊은' 이후, 전화 통화보다는 글로 쓰는 수다가 더 편했던 친구와 나는 확실히 소통이 뜸해졌고, 이젠 가끔 안부 문자를 주고 받거나 클럽 게시판의 댓글로, 드문 통화로 지금껏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블로그다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뱁새 주제에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인 나와 달리 친구는 스마트폰을 장만했으니 발을 들여보겠다던 소셜네트워크 세상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신상이 위험해진다나 뭐라나. -_-;

'집요하고 무섭다는' 페이스북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바다 건너 있는 지인들의 권유로 얼마전 시작하고 보니 신상이 위험해질 거라는 친구의 말이 차츰 실감난다. 트위터도 노상 추천 친구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팔로우' 하고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데 반해, 페이스북은 '너 얘랑 아는 사이 아니냐'고 의외의 인물까지 수시로 사진까지 보여주며 옆구리를 찔러댄다. 일부러 입학이나 졸업 년도 같은 정보는 올리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는 무서워라 싶어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으나, '미아니'의 헐벗은 사진을 계속 보여주면서 '너 얘랑 아는 사이일걸!'이라며 부추기는데는 나도 모르게 '넵!' 하며 친구 추가를 클릭하고 말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이폰에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을 깔고 난 이후로는 딩동딩동 친구들이 뭔가를 끼적일 때마다 친절하게 또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과 다른 시간에 자는 나에게 아무 때나 날아오는 문자와 전화는 미움의 대상이거늘, 이젠 페이스북까지! 카카오톡 어플은 또 어떻고! 암튼 휴대폰 알림이야 설정을 모두 바꾸면 되는 것 같기는 하다만, 1억명 이상이 하고 있다는 페이스북의 절묘한 관계찾기는 좀 으스스하다. 아직은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은 친구들 열명 뿐이라 '관리 가능' 수준이지만 멍하니 있다가 또 메신저 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조심해야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암흑 세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고, 염려대로 중독 수준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단 말이닷.

돌아보면 정말 세상은 놀랍도록 변하고 있다. 누가 우스개 소리로 십년 뒤면 스마트폰이 작아져 머릿속에 마이크로칩으로 심어지게 될 거라던데, 앞으로 소셜 네트워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두려우면서 약간 궁금하긴 하다. 아무려나 현재로선 두려움이 더 크다는 의미로 티스토리의 '소셜네트워크 플러그인 3종세트'는 설정 보류다.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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