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추억주머니 2011. 1. 6. 14:14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버스에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뒤에서 두번째 줄,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요샌 거기도 두 좌석이 놓여있는 버스가 많지만, 몸체가 낮고 하차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신형 버스에도 맨뒤에서 둘째 줄엔 한 좌석짜리 버스들이 더러 있어서 드물게 거기 앉을 수 있는 날이면 몹시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나는 모든 공간에서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모양으로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한가운데보다는 주로 모퉁이에 콕 박혀 있는 게 좋다. 요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연코 내가 원하는 자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아도 되는 벽쪽 가장자리 자리다. 하지만 공주마마를 보필하고 다니는 무수리로선 가장자리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벽쪽은 언제나 낼름 조카가 앉는다. 그래서 둘이 티격태격할 때도 있는데 내가 차지하고 싶은 요가매트는 가장자리 중에서도 버스 자리처럼 뒤에서 둘째 줄이다. 사람들이 꽉 차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뒤에서 둘째 줄에 앉아도 뒷사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워낙 촘촘하게 요가매트를 깔아놓았기 때문에 맨끝줄에선 구르기 같은 동작을 할 때 잘못하면 벽에 부딪친다. 하지만 공주는 무조건 맨끝줄에만 앉으려고 든다. 앞쪽은 나도 절대 사절이지만 맨끝줄에 앉아서 설렁설렁 딴짓하며 동작도 어설프게 하다가 걸핏하면 잠들어버리는 조카녀석을 보노라면, 과거 맨뒷줄에 앉아서 노상 꾸벅꾸벅 졸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_-; 

학창시절 내 자리는 거의 언제나 앞쪽이었다. 국민학생 때는 그나마도 키와 상관없이 중간쯤까지 진출했었고,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십몇번대라 둘째 줄이었으나 고등학교 올라가선 가차없이 맨앞줄에 앉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고2땐 키와 상관없이 제비를 뽑아 자리를 정하는 바람에 나중엔 슬쩍 번호표를 바꿔 친구들끼리 앉을 수 있었고, 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대로 맨 뒷자리를 몇달간 경험할 수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따로없다며 친구들끼리 다닥다닥 앞뒤로 옆으로 붙어앉아 지냈던 그 시절엔 정말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게 즐거웠다. 맨앞줄에선 등잔밑이 어두운 교탁 바로 코밑자리(거기선 교탁에 교과서를 기대놓는 척하고 딴 책을 숨겨보는 게 가능했다)아니고서야 딴 책 읽기가 불가능했지만, 맨뒷줄에 앉으니 온종일 교과서에 숨겨 만화책을 비롯한 딴 책을 읽어대도 걸릴 염려가 없었다. 돌아가며 망보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 선생들이 필기를 시켜놓고 교실 앞뒤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우린 교실이 좁다는 핑계로 의자를 벽에 바짝 대놓고 우리 뒤쪽으론 못다니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당시엔 아직 과외금지령이 내려져 있을 때라 학원이니 과외니 하는 것도 전혀 없었고 순전히 학교 공부로만 버텨야 하는 시대였다. 나는 예습복습을 거의 하지 않고 수업중에 바짝 정신차려 집중하는 걸로만 대충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맨 뒷줄에 앉아서 그렇게 노상 딴짓만 하다보니 성적에도 당연히 티가 날수밖에 없었다. 단순암기, 찍기의 여왕이 되려면 일단 수업중에 선생이 중요하게 언급한 부분에 형광펜이라도 칠해놓아야 하는데 그 몇달간은 망보는 임무를 맡은 수업이 아니고선 교과서며 요점정리 유인물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사실 딴짓하는 친구들을 위해 망을 보느라 대표로 수업을 들을 때도 맨뒷줄에선 앞줄에 앉았을 때와는 공부의 질이 달랐다. 선생에게 시선을 집중해 보아도 시야에 들어와 거슬리며 움직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을 빼앗겼고(맨앞줄에선 선생과 나의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중간에 없다! ㅋㅋ ) 목소리가 작은 선생의 설명은 맨뒤까지 잘 들리지도 않아 수시로 졸렸다. 키가 커서 늘 뒷자리에만 앉아 지냈던 친구들은 아마도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수업에 집중하는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왔을지 몰라도, 앞줄 붙박이였던 나는 암튼 그랬다. 그렇다고 친구들 배신하고 다시 맨앞줄로 갈 수도 없으니, 공부엔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그래도 고2때 아니면 언제 놀아보겠냐며, 고3 올라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3때 다시 맨앞줄로 회귀한 뒤에도 그랬지만, 대학엘 가서도 강의실에서 내 자리는 거의 앞쪽이었다. 맨앞줄은 단호히 거부했어도 거의 두세째 줄에 늘 앉았던 이유는 워낙 거구의 친구들이 많아서 뒤쪽에 앉으면 아예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200명씩 듣는 합동강의실이든 영문과 단독 강의실이든 뒤쪽엔 요란하게 사투리를 쓰는 '무섭고 시끄러운' 남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가끔 졸릴 때면 일부러 덩치 큰 친구 뒤에 앉아 잘 가리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싫어하던 교직과목의 경우엔 가려주는 사람 없이도 뒷줄에서 빌빌 졸았지만.

사실 고2때 찍은 저 기념비적인 사진 속엔 뒷줄에 앉았든 아니든 전교1등 하던 친구도 있었으니 교실에서 앞줄과 뒷줄 여부로 공부나 집중도의 차이를 단정할 순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처럼 얼치기 범생에겐 확실히 지리적인 차이가 성적과 수업집중도에 분명 영향을 미쳤으니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도 할 수없다. 요가원 원생들을 봐도 그렇다. 언제나 맨앞쪽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늘이고 유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수업 맨 마지막에 편하게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자세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쿨쿨 잠을 자다가, 그만 휴식에서 깨어나라는 요가 강사의 말을 못듣고 끝까지 누워 있다가 얼떨결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나의 조카를 비롯해 꼭 뒷줄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도 이젠 확실히 어떤 자리든 뒷줄이 편하고 앞장서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뒷자리에서 구시렁거리는 걸 즐기는 사람이지만, 벌써부터 맨 뒷자리만 고집하는 조카의 기호는 너무 일찍 자리잡은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학교에서도 만날 맨뒷자리에 앉아 딴짓하고 조는 거 아니니, 공주야? ㅠ.ㅠ 물론, 맨 뒤에 앉아 빌빌 졸거나 만화책만 읽어대도 행복하고 바른 아이로 잘만 자라준다면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다 부질없는 욕심 탓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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