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에 해당되는 글 64건

  1. 2011.03.24 잡념 15
  2. 2011.03.21 딸기와 신문지 12
  3. 2011.03.11 30년 11
  4. 2010.12.21 감기약 테라플루 10
  5. 2010.11.25 소셜 네트워크의 끝은 어디일까 23
  6. 2010.10.15 흥얼흥얼 4
  7. 2010.09.26 헌 휴대폰 3
  8. 2010.09.17 자꾸 바뀌는 주소 3
  9. 2010.09.04 3분 6
  10. 2010.08.11 모순인가 아닌가 3

잡념

하나마나 푸념 2011. 3. 24. 02:35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상을 떠났단다. '여배우'라는 말과 함께 내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을 두 사람이 바로 오드리 햅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는데, 이제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어리고 깜찍한 모습으로 <녹원의 천사>, <작은 아씨들>에 나온 리즈 테일러를 보면서 어린 나는 세상에 저렇게도 예쁜 사람이 다 있군, 하며 놀라워 했다. 인형처럼 생겼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도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리즈 테일러가 나온 여러 영화를 봤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과 함께 나온 <자이언트>에서의 모습이 내겐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다.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늘 욕 먹고 씹히던 남성편력도 내겐 멋졌다. 남자만 여러 번 결혼하란 법 있나. 게다가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마다할 남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고혹적인 입술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나라도 혼이 쏙 빠져나갈 것 같던데. 다만 오드리 햅번처럼 외형적으로도 자연스레 아름답게 늙어가지 못한 게 안타깝긴 해도 온갖 지병과 싸우며 끊임없이 사회에 기여한 노력은 똑같이 우러러보인다. 대중과 미디어가 아무리 제 멋대로 소모해버리려고 파고들어도 당당히 버텨냈으니 이젠 고이 잠들어 편히 쉰다고 생각하면 될텐데, 왠지 기분이 착잡하다. 

리즈 테일러의 부고가 아니어도 온종일 잡념이 많아 별로 일을 하지 못했다. 학력위조 파문과 정치권 특혜 의혹으로 언론을 홀딱 뒤집어놓았던 장본인이 이번에는 또 책으로 세상을 들쑤시고 있다. 당시엔 나도 한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학력위조 문제가 이 사회의 고질적인 학벌주의가 낳은 폐해라 생각했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로 질겅질겅 씹어대듯 한 여자를 매도하는 분위기가 못마땅했다. 도무지 실체가 잡히진 않지만 누구나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연예계 성상납 비리와 마찬가지로,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오르내리던 수많은 정치권 인사의 개입은 진실 여부를 떠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남성 중심의, 상품으로서의 여성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도 그 여자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요번에 대대적인 출판기념회를 열어 선정적인 회고록을 내놓은 걸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책을 냈을까? 하기야 요즘은 굳이 자비출판을 하지 않더라도 책 내는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느 쪽에서 기획을 하든 일말의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 나무에게 부끄럽든 말든, 일단 책의 형태로 출간된 책은 세상에 나올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는 출판계의 속설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꾸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더 어처구니 없고 힘빠지는 소식은 그런 황당한 자서전이 벌써 나온지 하루만에 2만부가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나는 출간기념회도 그렇고 책 속에 언급되었다는 정치인의 이름도 그렇고, 그 여자가 들고 나왔다는 명품 가방이 더 큰 이슈가 되는 찌라시 언론에 그저 코웃음만 치고 있었는데, 이 나라 출판시장이 겨우 그 꼴이라니 맥이 탁 빠졌다. 노이즈 마케팅이든 아니든 자서전을 낸 그 사람으로서나 출판사 입장에선 두손 들고 환영할 일일 것이다. 이 엄청난 불황에 초판을 5만부 씩이나 찍어서 1, 2주 만에 2쇄 인쇄에 돌입하는 책이 어디 흔한가. 몇년 전까지만 해도 백만부 이상 팔리는 초베스트셀러를 일년에 서너 권씩 냈던 어느 대형 출판사도 작년에는 10만부 이상 팔린 책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게 요즘 현실이다. 최근 1, 2년 새 초베스트셀러 경향을 보면, 인기 작가 몇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연예인이나 아이돌의 팬덤에 편승해 낸 책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연예계와 가요계 뿐만 아니라 출판계 마저도 연예인과 아이돌이 접수하는 거 아니냐고 씁쓸해 하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거라던데, 정말 출판시장에서 이제 팔리는 책은 떠들썩한 유명세를 업어야만 나올 수 있다는 뜻일까?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번역을 하든 글줄만으로 밥벌이를 제대로 하는 게 그리 쉽지 않고,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출판계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남은 한 가지 잡념은 가끔 주제도 모르고 펄럭대는 내 오지랖에 대한 자책이다. 주변에서 간혹 번역을 해보고 싶다는 지인들이 있으면 펄펄 뛰며 말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연하게 아련한 희망을 심어주지도 않는 편이다. 그저 혹독한 현실을 일러주고 스스로 가능성을 점쳐보도록 이끄는 것밖엔 해줄 수가 없는 걸 어쩌랴. 그리고 책이란 게 백이면 백 모든 사람에게 다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문장 역시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친구의 문장력과 외국어 이해력을 속속들이 알 방법 또한 없다. 그러니 나로선 얇디 얇은 연줄을 대어줄 순 있으되 그 이상의 생존은 어디까지나 본인에게 달렸다. 실제로 지난 십수년간 우연한 기회로 몇몇 지인들을 '추천'해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어느 출판사든 초짜 번역가를 선뜻 쓰려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책의 검토나 시험번역의 기회를 어렵사리 주선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연줄'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서로 운대가 맞아야지 소심의 극치인 내가 먼저 불쑥 누군가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섰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돌이켜보면 양쪽에서 만족하는 결과가 나온 적이 별로 없다. 시험번역을 통과했던 친구 하나는 결국 자기 이름으로 번역서를 한권 내기는 했지만, 자기는 죽어도 번역으로 못 먹고 살겠다며 떨어져나갔다. 현재는 학원 원장님이신데, 나더러도 만날 그 골빠지는 일 때려치우고 고액과외나 하라고 권유한다. 친구 하나는 안타깝게도 시험번역 단계를 통과하지 못했다. 수년에 걸쳐 서로 재고 테스트하고 망설이는 과정을 거쳐 동료 번역가 대열에 접어든 친구가 둘 있는데, 하나는 출산 후 육아에 전념하다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 아무데도 찾아주는 데가 없다고 괴로워하는 중이다. 얼마 전 다행히도 검토 일을 하나 연결해줬건만, 작품 분석력이 떨어져 안되겠다는 출판사 지인의 귀띔을 들었다. ㅠ.ㅠ 다른 친구 하나는 세번째 책이 요번에 나올 예정인데, 마침  잘 아는 후배가 그 책의 외주 편집을 맡았다. 뜻밖에도 문장력도 없고 원고의 첫장부터 오역 투성이라면서 온통 새빨갛게 된 교정지를 후배가 내게 보여주었다. 그 친구에게 일을 맡긴 최종 결정은 출판사가 했음에도, 내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물론 친구에겐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앞으로 절대로 사람을 추천하지 않기로 홀로 결심만 세웠다. 그러면서 총체적으로 또 다시 시작된 고민. 과연 나는 이 일을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잡념인데 잘 떨쳐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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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와 신문지

투덜일기 2011. 3. 21. 02:05

나이가 많아지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뜨악해 하거나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험들이 내게도 꽤 많다. 동네 시장 어귀에서 살아 있는 닭 한마리를 골라 주인이 탁 모가지를 쳐서 잡아가지고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털뽑는 기계에 넣어 닭털을 정리한 뒤 생닭을 팔거나 그 옆에 기름솥을 놓고 튀겨서도 팔던 닭집이라든지, 아궁이에서 연탄갈기, 석유곤로 따위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흔해빠진 흰색/검정색 비닐봉지 이전에 모든 시장에서 사용하던 신문지도 빠뜨릴 수 없다.

닭집 앞을 지나치는 게 너무 무섭긴 했지만 엄마 따라 시장 다니는 걸 좋아하던 나는 나중엔 엄마 대신 혼자 장보기 심부름을 다녔다. 그땐 모두들 플라스틱 장바구니나 동그란 손잡이에 실뜨개로 짠 망이 달린 장바구니를 가져갔다. 닭을 사도, 생선을 사도, 돼지고기를 사도, 하다못해 콩나물이나 풋고추를 사도 그 옛날 시장에선 다들 신문지 두어장에 내용물을 둘둘 말아 장바구니 안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시장터 가게마다 신문 전지를 4등분한 크기의 신문지를 몇뼘이나 되는 높이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학교에서 폐품을 걷을 때도 신문지가 제일 인기 품목이었고.

환경 문제로 비닐봉지 사용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이 요새 다시 일고는 있지만, 장바구니를 가져가더라도 마트를 가든 시장엘 가든 여전히 모든 먹거리는 기본적으로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것이 정석으로 굳어졌다. 무게를 담아 파는 채소를 살 때도 일단은 작은 비닐에 담아야 가격이 적힌 스티커가 나오는 판국이니까. 게다가 이젠 종이 신문 보기가 거의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재활용도가 높은 신문을 옛날처럼 쓰라고 해도 다량으로 구할 수가 없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신문지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는 포장재였던 모양이다. 주말에 이모가 다니러 오며 빨간 플라스틱 대야를 맞붙여 노끈으로 묶은 딸기를 들고 오셨다. 마트에서 파는 딸기는 대개 스티로폼이나 투명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지만, 과일 도매상에 가보면 그렇게 광주리 만한 빨간 대야에 수북하게 담아놓은 딸기를 팔기도 한다. 둘이 다 언제 다 먹나 싶게 걱정이 앞설 만큼 엄청난 딸기 대야를 여니 안엔 신문지 한장이 덮여 있었다. 아래쪽 대야 맨 안쪽에도 마찬가지로 신문지 한 장이 깔려 있었고.

그런데 싱싱해 보이는 딸기를 일부 씻어 먹으려니 희미하게 석유냄새 같은 것이 났다. 입맛이 무뎌진 왕비마마는 아무 말씀 안하셨지만 나는 이내 고민에 빠졌다. 딸기를 물에 덜 담갔다 씻었나? 혹시 보일러 난방유가 불완전 연소되는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딸기라 기름 냄새가 밴 걸까? 과일가게 주변에서 혹시 기름사고 같은 게 있었나? 주말 내내 별별 가능성을 다 상상하며 찝찝한 마음으로 딸기를 먹던 나는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범인은 바로 신문지다.

어느 신문사였던가 인체에 좋은 콩기름으로 인쇄한다는 홍보를 한참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신문사들도 다 그렇게 휘발유 냄새가 안나는 잉크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갓 배달된 신문에서 풍기던 휘발유 냄새를 맡으면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면서 멀미 비슷한 증상이 생겼다. 그래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조간신문을 꼭 다 저녁때 본다고, 신문이 아니라 '구문'을 보는 거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 뒤적여놓아 그나마 휘발유 냄새가 희미해진 다음에야 두통 없이 신문을 볼 수 있는 걸 어쩌랴.

옛날 신문지는 워낙 오래된 것들을 폐지 도매상에서 떼어다가 썼을 테니 휘발유 냄새가 다 날아간 다음이었겠지만, 요즘처럼 종이 신문이 많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최근 신문을 활용했을 것 같다. 게다가 수익성이 날로 떨어지는 주요 신문사든, 사방에서 남발되는 무가지든 고가의 인쇄용 기름을 썼을 것 같지는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신문지 특유의 매캐한 기름냄새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그리고 워낙 과육이 무른 딸기에 그 미세한 휘발유 냄새가 온통 배어들었을 테고.

어쨌거나 식탐꾼답게 먹거리의 미묘한 맛에도 까탈스러운 나는 아직도 꼬박 닷새는 더 먹어야 할 만큼 많이 남은 딸기가 돌연 먹기 싫어졌다. 아무리 물에 오래 담가 놓아도 사라지지 않는 석유냄새를 나로선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다. -_-; 물론 아주 옛날 과일가게 좌판에 둥그렇고 큰 '다라이'에 담긴 딸기를 근으로 달아 팔 때도 양은인지 주석인지 알 수 없는 쇠다라이 바닥엔 딸기 물크러지지 말라고 신문지가 깔려 있었다. 그래도 딸기에서 석유냄새를 맡은 적은 없었는데 우째 이런 일이. 짐작컨대 이모는 아마도 과일가게를 오래 하고 있는 어느 주인에게서 딸기를 사왔을 것 같다. 신문지로 딸기를 포장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때부터 과일가게를 해온 주인장으로부터. 그렇지 않았다면 신문지 대신 과일상자 위에 흔히 덮여 있는 얇은 스티로폼이나 투명 비닐을 대신 덮지 않았을까나.

건강에 해로울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내 추측이 맞는지 틀리는지 자신도 없지만 암튼 방금 결심했다. 남은 딸기는 생으로 먹지 말고 쨈을 만들기로. 내 아무리 딸기를 좋아하기로서니 석유냄새 나는 딸기는 못먹겠다. 현재로선 팍팍 끓이면 휘발성인 냄새가 다 사라질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쨈으로 만들어도 그 냄새가 안 가시면 어쩌나? 작년엔가 귤쨈을 만들어본 경험에 따르면 한시간 가까이 서서 계속 저어줘야 하던데 으으윽. 괜히 시간낭비하며 일감만 만드는 거 아닌가 걱정도 앞서지만 하는 수 없다. 암튼 과일가게 주인 여러분, 딸기는 웬만하면 최근 신문지로 덮지 말아주세요. 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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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추억주머니 2011. 3. 11. 23:12

이번에 중학생이 된 조카가 배정된 학교는 공교롭게도 나의 모교다. 무려 30년도 더 차이나는 동문이 된 셈이다. 아무리 같은 학교라도 30년이 더 흘렀으니 내가 아는 선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 놀라워라. 내가 중3때 막 대학을 졸업하고 솜털인지 수염인지 보송보송한 얼굴로 부임했던 한문 선생이 요번 조카네 담임이란다. 담임들 이름도 얼굴도 다 까먹은 내가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면 몹시 치 떨리게 싫어했거나 퍽 괜찮게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다행히도 후자쪽이다. 어눌하고 착하고 순박한데다 어리바리 부임 첫 해라 중3인 우리들에겐 간혹 '밥'이 되기는 했지만, 한문을 정말로 유려한 필체로 잘 썼고 서예반 담당이라 미술반에서 힘 쓸 일이 있을 땐 자주 일꾼으로 불려다녔다. 환경미화나 채점 도우미 같은 일로 늦게 집에 가게 됐을 때 하굣길에 만나면 혼자 집에 가서 밥해먹기 싫다면서 우리들과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 김밥, 우동 같은 걸 사주기도 했다. 출석부로 머리통을 찍는 선생이 없나,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퍽퍽 때리는 선생이 없나, 조각분필 담아놓은 플라스틱 통으로 뒤통수를 쳐 깨뜨리는 선생이 없나, 여학생에게도 살벌한 체벌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선생도 기다란 나무 막대를 꼭 가지고 다니긴 했지만(그 학교 교사들 사이에선 일종의 패션이었을까?), 그건 어디까지나 칠판 가리키기 용이었을뿐 체벌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친개, 똥싼바지, 변태, 복부인, 입걸레, 싸롱화, 손버릇 따위의 부정적인 별명이 대세인 학교에서 그 선생의 별명은 상당히 우호적이고 귀여운 구석마저 있는 '도날드덕'이 되었다. 단지 입술이 좀 투툼하고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조카가 대번에 지네 담임 별명 뭐였냐고 묻기에 안 가르쳐줬다. 저절로 알게 되면 모를까.. 30여년 전 별명으로 아직도 불리는 거 싫을지도 모르잖아;;) 애들이 막 장난치고 떠들어도 그냥 담임이 허허 웃는다는 조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별로 안 변하신 것 같기는 한데, 진실이야 알 수 없어도 어쨌든 다행이다 싶다.   

재단이 부유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그 사립학교는 원래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에선 언감생심 절대 배정되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졸업하던 해 처음으로 우리 동네 아이들을 꽤 많이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몇몇 선생들이 가끔가다 한 마디씩 학생들 들으라고 가시돋친 소리를 해댔다. 출신학교 성분이 과거와 달라져서 학교 '질'이 떨어졌다나. 가뜩이나 산꼭대기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학교에 정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건 되먹지 않은 일부 선생들 때문이었다. 인근 구와 달리 아무래도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OOO구' 출신 아이들이 많아져 자기네 '부수입'이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했으리라는 건 나중에야 알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선생들 가운데 누구누구가 돈봉투를 특히 밝히는지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들은 성적과 상관없이 같은 재단의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을 드러나게 예뻐하는 분위기였다. 사립 국민학교 학비를 댈 정도면 퍽 부유한 집안이니 '당연히' 때마다 상당 금액의 촌지 봉투를 상납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고등학교까지 그 재단 학교로 진학하고 말았는데, 거긴 더 심했다. 그 학교 고3 담임을 연이어 3년만 하면 집 한채를 거뜬히 살 수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 들으니, 사업가 아버지를 뒀던 친구 하나는 고3때 담임(나도 같은 반이었다 -_-;;)이 진학조언을 핑계로 한달에 한번씩 집으로 찾아와 '정기수금'을 했다고 고백하며 치를 떨었다. 내가 졸업 후 완전히 학교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도, 교생실습을 모교로 정해 나가는 애들을 보며 '미친 거 아닌가' 생각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런 학교지만 더러 의롭고 '착한' 선생들이 없지는 않았다.(학교 축제 때 액자 값도 안 낸 나의 그림을 걸어준 미술반 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 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풋풋한 신참 선생들이었다. 스승의날 두당 정해진 돈을 내서 담임에게 고가의 전기밥솥을 선물했는데(선물 품목도 학급 서기를 통해 넌지시 지시된 사항이었다) 색깔과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다시 바꾸러 다니게 만들었던 닳고 닳은 아줌마 선생이 있는가 하면(자기가 바꾸지! 지금 생각해도 화난다;), 꽃과 편지만 받고 선물은(스카프였던가 그랬다;;) 굳이 돌려주며 나무라던(너희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비싼 걸 사느냐고)  해맑은 풋내기 담임 선생도 있었다. 세속에 찌들지 않은 그런 선생들을 반기긴 했지만, 이미 시니컬해진 우리는 그들도 지금 젊어서 그렇지 몇년 더 지나면 탐욕스러운 다른 선생들이랑 똑같아질지 모른다고 씁쓸해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총각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사춘기 여학생 특유의 무대포 감수성으로 짝사랑을 불태우는 아이들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성적을 올려보겠다고 선생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영악한 학생은 있었을망정.  

모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서 통 모르고 살다가, 악연 때문인지 학교와의 고리를 끊지 못해 지금까지도 끌려다니는 친구의 말을 듣자니 탐욕스럽기로 유명했던 선생들은 하던 가락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벌써 오래 전에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있고, 정년 이전에 관두고 음식점 같은 걸 차린 선생도 있는데 불쌍한 그 친구는 개업식에 화분을 보낸 것도 모자라서 간간이 그 집에서 모이는 퇴물 남녀 선생들 모임(역시나 유유상종이다)에 불려나가 음식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30년전 제자를 여전히 봉으로나 여기는 선생들이라니 에잇! 전화번호를 확 바꾸고 다시는 이용당하지 말라는 나의 충고에, 친구는 하필 퇴물 선생 하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공교롭게 동네 마트에서 만났을 때 예의상 장본 비용을 한번 내줬더니만, 그 담에 만났을 땐 잘 나가는 제자(친구는 전업주부라고!!!) 덕을 수십년째 본다고 마트 점원에게 마구 자랑하면서 또 내달라는 식으로 뻔뻔함을 보이더란다. 아니 왜?!?! 게다가 만나는 동창들 있으면 다음번 모임에 어디 한번 데려와보라고도 하더라나. 정말로 애정을 쏟으며 사제지간을 다진 것도 아니고, 순전히 촌지로 얽힌 악연을 그들은 왜 계속 누리려고 하는지 원! 나는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 흥분하며 욕을 하다가, 앞으로 또 그런 속물퇴물들한테 연락오면 시댁이든 친정이든 우환이 생겨 지방에 내려갔다고 거짓말 하라고 시켰다. -_-"
 
교수에 대한 나의 인상이 나쁘듯, 안타깝게도 교사에 대한 나의 인상도 그리 좋지 않다. 간혹 정말로 아이들의 인성교육과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기는 하지만, 내가 겪어보고 주변에서 전해들은 교사의 모습은 교육자가 아니라 그냥 월급쟁이 조직원에 가깝다.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 교사가 무능하다고 무시하고, 선생들은 선생들대로 학생들이 걸핏하면 교육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협박이나 한다며 교권이 땅에 떨어졌느니, 말세니 운운한다. 나도 한때 잠깐 교사가 천직이 아닐까 상상한 적이 있지만, 역시 그 길을 안 가길 잘했다 싶다.

내가 교생실습을 나갔던 모 중학교엔 마침 엄마와 이래저래 아는 분이 영어과 주임 선생님이었다. 교생실습을 하던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라서, 실습 점수에 부당한 이득을 누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실습이 끝나고 나서 세상 참 좁다며 웃어 넘긴지 몇달 후, 나에겐 그분과 엄마를 통해 모종의 교직 협상안이 들어왔다. 교생실습을 나간 그 학교에 영어교사 충원 계획이 있는데, 이미 서로 안면도 있고 시범수업도 해보았고 하니 '천만원'의 기부금을 내면 나를 곧장 취직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에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도 엄마는 그분의 설득에 약간 넘어가서 (빚을 내서라도 일단 취직을 하고 나면 평생 '우량 직업'이 생기는 거고, 그 정도 돈은 금세 만회할 수 있다고 했다나;) 아버지까지 포섭할 기세였다. 그러나 당시가 어느 때인가, '압제와 굴종'을 깨치고 나아가 투쟁해야 한다고 노상 나라와 대학가가 들썩이고 있었다. 불의와 타협하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말로만 듣던 교직비리라며 당장 고발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엄마의 지인의 안위까지 걸린 사안이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내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한 뒤에도 엄마는 교직에 대한 미련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졸업한 다음해였던가, 걸핏하면 철야에 야근에 시달리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엄마는 심지어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덜컥 임용고사 시험에 접수를 해놓고 아무 준비도 없이 내게 "혹시 아니? 한번 시험이나 봐  봐라."고 종용했다. 서울/경기 지역에 영어교사를 세 명인가 뽑는 그 시험에 내가 합격할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 암튼 그 이후 직장을 옮겨다니면서 간혹 나도 가지않은 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교직비리에 응해 그때 천만원을 내고 영어교사 자리를 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긴 했다. 설마 그 천만원을 단기간에 벌어들이느라고 부임 첫해부터 부잣집 애들 학부모 면담하며 노골적으로 촌지를 달라고 하진 않았겠지? 라고 킥킥거리면서.

살기 좋은 나라인지 아닌지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국민소득이 아니라 사회의 투명성과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우하는 시스템을 보면 된다고 했다. 겉으로는 학교 체벌도 사라지고 촌지도 불법이고 교직비리도 없는 사회가 된 것 같지만, 주변의 학부형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여전히 백화점 상품권을 스리살짝 담임교사에게 건네고 티 안나게 집으로 택배선물을 부친다. 작년 배추파동 때는 몇몇 엄마들이 아예 담임선생의 김장김치까지 책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 자기 자식을 잘 보이기 위한 극성 엄마들의 몸부림 같아서 씁쓸하지만, 30년 전에도 촌지 수금하러 다녔던 선생이 존재했듯 지금도 여전히 백화점 상품권 수십장 들고 다니며 바리바리 쇼핑하는 '일부' 교사 목격담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더러 오가는 걸 보면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어디나 썩은 구석은 있다지만, 그런 몰상식한 교사들이 존재하는 한 학교 현장에서 피해를 보는 학생들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고, 학부모 교육열은 어디에 내놔도 최고라는 이 나라 교육의 현실은 확실히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이제 궁금한 건 딱 하나다. 30년 넘게 한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쳐온, 젊은 시절 청렴하고 곧아 보였던 조카네 담임 선생님의 현재 성품은 어떠할까. 사람은 좀체 안변한다는 게 진실이듯, 사람은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진실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한낱 인간이 30년간 어떻게 안 변하겠나. 너덜너덜해져서 버릴까말까 하다가 못 버리고 그냥 서랍장에 들어있던 중학교 졸업앨범을 새삼 꺼내 '도날드 덕'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간절히 빌었다. 휙휙 갈겨쓰듯 칠판에 적어도 멋드러졌던 선생의 한문 필체가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듯이, 착했던 선생님의 인품은 안변했기를. 그리고 이젠 최고참 교사에 속할 그분의 조용조용한 카리스마로 촌지 밝히던 속물 선생들이 끼리끼리 목청 높이던 학교 분위기는 확 바꾸어 놓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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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약 테라플루

투덜일기 2010. 12. 21. 01:44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병원도 안 가고 약도 안먹고 버티며 '잘 먹어서 낫는' 식탐 요법을 주로 찾는 나지만 '레몬차처럼'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감기약이 있다니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제부터 콧물이 심해 줄줄 흘러내리지 않으면 코가 꽉 막혀 제대로 호흡이 곤란한 지경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먹어보겠단 생각도 안했겠지만 말이다.

요즘 그 감기약이 유행(?)이라지만 과연 우리 동네 약국에서도 팔려나 약간 의아했는데, 확실히 인기품목인지 "테라플루라는 감기약 혹시 있나요?"라고 예상 질문까지 연습하고 간 것이 무색하게도 약사 바로 앞 카운터에 가격표까지 붙은 채 따로 진열되어 있어 말 한 마디 없이 살 수 있었다. 밤과 낮 용으로 나뉘어 한 상자에 각각 6천원.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종합감기약 종류는 10알 한 상자에 2-3천원쯤이면 살 수 있는 데 반해 차 형태라서 아무래도 좀 비싸군 싶었다. 

어쨌거나 얼른 물을 끓여 찻잔에 담아 한 봉지 타 마셔본 첫 소감은 '맛없다!'였다. 레몬차 맛이 나기는 하는데 뒷맛이 몹시 쓰고 떫은 느낌. 인공적인 단맛에 뒤이어 섬뜩한 쓴맛이 파고드는 애들 감기약 시럽과 비슷한 맛이랄까. 으윽. 큼지막한 알약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도 못할 노릇이지만, 나로선 그 달달씁쓸텁텁한 감기약을 차로 한 잔 다 마시는 것도 꽤나 고역이었다. (차라리 한번에 꿀꺽 삼키는 알약이 낫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음) 하지만 벨로도 처음엔 맛 없어서 외면했다가 두번째 다시 시음한 뒤 맛있다고 여겼다니 나도 첫인상에 너무 얽매이진 않기로 마음 먹었다. 첫술에 배부르랴. 내가 걸린 감기의 주요 증상은 어제부터 두통과 콧물, 코막힘이었는데 약을 먹고 나선 일단 코막힘 때문에 입으로만 숨을 쉬어야 했던 상황은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콧물은 금세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4-6시간 간격으로 먹으라는 복용 설명에 맞춰 인상을 팍팍 써가며 두잔째 마시고난 지 세 시간쯤 지난 지금, 한 시간 전부터 주체할 수 없는 콧물의 공격으로 계속 팽팽 코를 풀어대고 있다. 나에겐 별로 맞지 않는 감기약인가? -_-;; 실은 제약회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나의 심리가 약효를 방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 약을 타서 마시기 전에 복용 안내를 확인하다 보니 제약회사가 하필 '노바티스'였다. 일찌기 장 지글러 선생께서 탐욕스러운 다국적 제약회사의 선봉으로 고발한 바로 그 회사란 걸 알고 나니 어찌나 기분이 찝찝하던지. 하기야 유명 제약회사 치고 탐욕스럽지 않은 데가 없지만, 노바티스는 특히 백혈병 치료약 글리벡으로 전세계적으로 치사한 짓을 벌이고 있는 곳인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백혈병 환자들이 청원한 가격 인하 청구 때문에 소송중일 거다.) 약에 대한 믿음이 발휘하는 플라시보 효과가 최소한 30퍼센트나 된다는 걸 감안하면, 노바티스에 대한 불신과 마뜩찮음이 약효에 어느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ㅋ (언제부터 그렇게 정치적인 걸 그리 꼼꼼히 따졌다고!)

하긴 아래 포스팅한 네스프레소 기계도 말 나온김에 정말 확 질러? 싶은 충동에 좀 더 알아보니 네슬레에서 만든 거라고 했다. 네슬레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분유로 장난 치고 노동자 핍박하는 악덕 다국적 기업이라는데, 정치적으로 상당히 진보 성향을 띠고 있는 클루니가 그런 회사 광고를 찍었다니 급 실망스럽기도 하고, 과연 모르고 찍었을까 알고도 그냥 찍은 걸까 마구 궁금해졌다. (하기야 나도 <탐욕의 시대>를 읽기 전엔 인스턴트 커피 땡길 때 맥심 커피 대신 꼭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를 샀었으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으니 훗날 캡슐형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게 되더라도 네스프레소는 사지 못할 거다. 조지 클루니와 광고만 소비해 주는 수밖에. -_-; 

트랙백할 욕심에 감기약 얘기 쓰다가 갑자기 장 지글러 선생 타령하고 있는 걸 보면 코를 하도 풀어대 정신이 없는 건 분명하다. ㅎ 암튼 겨우 두 봉다리 마셔본 결과로는 별로 쓸만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며, 특히 가격 대비 효용을 따진다면 괘씸할 정도다. (병원 거부증을 참아내고 차라리 동네 의원엘 갔더라면 진료비와 약값을 다 포함해도 4-5천원 안쪽이었을 텐데! 아깝다, 만이천원 -_-;; 그리고 더더욱 아깝다, 매달 내는 나의 건강보험료 십몇만원 ㅠ.ㅠ)  그래도 이왕 산 거, 끝까지 마셔볼 작정이긴 하다. 밤 약은 잠 올까봐 아직 못 마시고 있는데 그건 좀 약효가 다르려나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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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가 있다. 19살부터 알고지냈으니 이 친구와도 모르고 지낸 인생보다 알고 지낸 인생이 더 길다. 고등학생 때 지루한 수업시간에 쪽지를 보내던 버릇이 대학 때도 이어져 이 친구랑도 어쩌다 보니 강의실에서 시답잖은 쪽지를 주고받았다. 친구는 악필로 유명하면서도 연습장이나 공책 한 가득 적은 기묘한 일기나 만화 같은 것을 보여주기도 했고 (정말 싫었다 -_-;;), 당시 유행대로 시집을 끼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보고서 용지에 적어 주기도 했다. 친구가 군에 간 뒤엔 당연히 위문편지를 써주었다. 카투사라 용산에 배치돼 수시로 휴가를 나오기는 했지만. 

학교 졸업후 각자 회사에 들어가선 전화가 유일한 연락방법이었다. 몇달에 한번씩은 만나서 맛있는 걸 먹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친구가 덜컥 영국 지사로 발령이 났다. 다시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같은 때는 서로 선물도 보냈다. 내쪽에선 주로 영국에서 몹시 비싼 '담배' 같은 걸 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내가 회사를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며 팩스 기계를 장만한 뒤로는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대신 감열지가 삐직삐직 기어나오는 팩스가 이용되었다. 친구를 지사로 보내며 주재원들의 품위유지를 위해 좋은 집과 BMW 5시리즈를 내주었던 한국 대기업이 망해 그 무렵엔 영국 회사로 옮겼기 때문에 친구 이름만 영어로 쓰면 편지 내용을 아무도 몰랐으니 상관 없었다.

(중간에 '새롬 데이터맨'을 사용하던 pc 통신 시절이 있기는 했는데, 한때 주말이면 그 불안한 전화모뎀으로 밤샘 채팅에 열을 올리기도 했으나 이 친구와는 거리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 것 같다.)

어느덧 세월이 바뀌어 이메일이 일상화되었으므로, 친구와의 소통은 팩스에서 이메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뒤로는 휴대폰도 이용됐으나, 친구도 나도 전화를 그리 자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집이든 회사든 노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위한 MSN 메신저라는 유용한 물건이 나타났다. 친구와도 메신저 채팅이 주요 창구가 되었다. 그 즈음이었던가 그보다 먼저였던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싸이월드에도 대학동기들 클럽이 생겨났다. 내가 수없이 도토리를 사들여가며 미니홈피도 열심히 꾸밀 때였다. 대학시절 연습장이나 보고서 용지에 서너장씩 빼곡하게 채워 편지를 써보내던 친구는 여전한 '글빨'로 클럽 게시판에 주옥같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나는 열심히 댓글을 달았다. 

한때는 MSN와 네이트온을 동시에 로그인해놓고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지인들과 수다떠는 것이 낙이었지만, 쓸데없이 방만한 인간관계로 나는 금세 피곤해졌다. 급기야 나는 메신저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 '오프라인 표시'라는 훌륭한 기능이 있기는 했지만, 싸이월드 '일촌' 사이에도 등급이 필요하다고 느꼈듯이 어설프게 알려준 메신저 아이디로 아무 때나 뜬금없이 "올만요! 안녕하삼. 방가방가!"라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슬그머니 두려웠다.

내가 메신저질을 '끊은' 이후, 전화 통화보다는 글로 쓰는 수다가 더 편했던 친구와 나는 확실히 소통이 뜸해졌고, 이젠 가끔 안부 문자를 주고 받거나 클럽 게시판의 댓글로, 드문 통화로 지금껏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블로그다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뱁새 주제에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인 나와 달리 친구는 스마트폰을 장만했으니 발을 들여보겠다던 소셜네트워크 세상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신상이 위험해진다나 뭐라나. -_-;

'집요하고 무섭다는' 페이스북까지는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바다 건너 있는 지인들의 권유로 얼마전 시작하고 보니 신상이 위험해질 거라는 친구의 말이 차츰 실감난다. 트위터도 노상 추천 친구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팔로우' 하고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데 반해, 페이스북은 '너 얘랑 아는 사이 아니냐'고 의외의 인물까지 수시로 사진까지 보여주며 옆구리를 찔러댄다. 일부러 입학이나 졸업 년도 같은 정보는 올리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는 무서워라 싶어서 계속 무시하고 있었으나, '미아니'의 헐벗은 사진을 계속 보여주면서 '너 얘랑 아는 사이일걸!'이라며 부추기는데는 나도 모르게 '넵!' 하며 친구 추가를 클릭하고 말았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이폰에 페이스북 어플리케이션을 깔고 난 이후로는 딩동딩동 친구들이 뭔가를 끼적일 때마다 친절하게 또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과 다른 시간에 자는 나에게 아무 때나 날아오는 문자와 전화는 미움의 대상이거늘, 이젠 페이스북까지! 카카오톡 어플은 또 어떻고! 암튼 휴대폰 알림이야 설정을 모두 바꾸면 되는 것 같기는 하다만, 1억명 이상이 하고 있다는 페이스북의 절묘한 관계찾기는 좀 으스스하다. 아직은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은 친구들 열명 뿐이라 '관리 가능' 수준이지만 멍하니 있다가 또 메신저 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조심해야지.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암흑 세계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고, 염려대로 중독 수준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럽단 말이닷.

돌아보면 정말 세상은 놀랍도록 변하고 있다. 누가 우스개 소리로 십년 뒤면 스마트폰이 작아져 머릿속에 마이크로칩으로 심어지게 될 거라던데, 앞으로 소셜 네트워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두려우면서 약간 궁금하긴 하다. 아무려나 현재로선 두려움이 더 크다는 의미로 티스토리의 '소셜네트워크 플러그인 3종세트'는 설정 보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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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얼흥얼

놀잇감 2010. 10. 15. 17:35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하루를 시작하며 들은 음악은 이상스레 하루종일 흥얼거리게 된다. 엠피3이나 오디오, 라디오를 늘 가까이 하는 사람은 오히려 한 가지 음악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나처럼 드물게 음악을 듣는 사람은 며칠씩 한 가지 노래나 음악에 얽매일 때도 있다. 물론 흥엉흥얼 콧노래를 부를 마음의 여유가 아예 없을 땐 한없이 삭막하게 지낼 때도 많다.

지난주엔 차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헨델의 <울게 하소서>가 나오는 바람에 같잖게도 며칠 내내 가사도 잘 모르는 오페라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변화무쌍하게도 이번주의 주제가는 <개똥벌레>. 지난 주말에 다녀간 막내조카가 콘서트 놀이(방에서 불 꺼놓고 야광봉과 손전등을 휘두르며 "우윳빛깔 @@@!"를 외쳐대고 열광한다)에서 다섯 번도 넘게 불러준 노래였기 때문이다. 쪼끄만 녀석이 어떻게 그 헷갈리는 가사와 음정을 다 외웠는지 자꾸 순서를 바꿔 부르는 나한테 막 가르쳐줬다.
 
그 이전에는 TV의 영향으로 한동안 <넬라 판타지아>를 흥얼거렸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합창대회를 할 때마다 그렇게 연습을 지겨워하며 이런 쓰잘데기 없는 행사를 왜 하나 투덜거렸건만, <남자의 자격>에서 합창대회 준비하는 과정을 보니 심지어 그때가 막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오래 전 교생실습 나갔을 때 반 아이들 합창대회 거들던 생각도 떠올랐고. 인간의 목소리가 정말로 훌륭한 악기라는 것도 실감했다. 내 악기는 그리 쓸만하지 않지만서도...

일주일 내내 자꾸만 <개똥벌레> 멜로디가 튀어나오는 게 지겨워져서 시방은 일부러 스팅 노래를 틀어놨다. 내가 계속 흥얼흥얼 따라하기엔 좀 역부족이지만, 이 가을엔 정말로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닌가. 중고등학교 시절엔 꼭 라디오를 틀어놓고 공부를 했었는데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냥 배경일 뿐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젠 예민해진 건지 까칠해진 건지 음악을 틀어놓으면 완전히 집중할 수가 없다. 멀티플레이어라야 살아남는 현대엔 참 어울리지 않는 인간형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내가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흥얼흥얼거리며 단순 노동을 하는 거다.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곡조도 맞지 않는 콧노래를 부르며 뭔가 일을 하고 있으면,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는 이도 있어 당황한다. 꼭 기분이 좋아서 흥얼거리는 건 아닌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뇌리에 박혀 어느 순간  흘러나오는 흥얼거림은 어쩌면 기분 상승을 위한 일종의 정신작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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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휴대폰

투덜일기 2010. 9. 26. 17:12

왜 요새는 휴대폰을 새로 장만할 때 헌 휴대폰과 충전기를 반납하는 의무규정이 없을까? 몇년씩 쓰던 휴대폰을 막상 내놓으라고 하면 뭔가 소중한 걸 빼앗기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헌 휴대폰을 반납하지 않으니 중고이긴 하지만 멀쩡히 잘만 쓰던 물건이 무용지물이 된 마당에 새삼 어째야 하나 처치곤란이다.

휴대폰을 바꾸면서 헌 휴대폰을 반납했던 건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 한두 번 뿐이었고, 그 이후로는 대리점에서 매번 선심쓰듯 '기기 반납 안하셔도 됩니다'고 얘기했다. 뭐든 물건을 잘 내다버리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는 나는 또 그 안에 든 전화번호와 사진들이 찜찜해서 휙 내다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고 최근 쓰던 휴대폰 두 개는 혹시나 조카들이 휴대폰 잃어버리면 개통해서 쓸지 모른다며 충전기는 물론이고 박스와 설명서까지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헌 휴대폰이 대체 몇개인지 모르겠다! 엄마 것까지 치면 대여섯 개는 될 듯.. -_-; 공통이 된 충전기는 아예 뜯지도 않은 박스째로 여러개다.

헌 휴대폰도 중고로 수출하거나 부품을 추출해 재이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지만 대체 어떤 경로로 그 대열에 참여해야 하는 건지?? 조카네 학교에서 언젠가 집에 굴러다니는 헌 휴대폰을 모아 내 자원활용을 유도하는 캠페인을 벌였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당장 학교 다니는 아이도 없는 우리집의 경우는 어쩌란 말인지.

아이폰으로 바꾸기 직전에 쓰던 휴대폰에는 유심칩도 들어 있었고 워낙 메모해둔 것들도 많아 당분간은 계속 충전해두고 전화번호부와 메모장 용으로 써야할 것도 같다. 사진들도 죄다 컴퓨터에 옮겨두긴 했지만 전화번호부에 입력해둔 사진들은 또 그럴 수도 없으니 정보를 죄다 지워버리기도 찜찜하고. 그러고서 생각해보니, 중국 등지에 완전히 노출되어버렸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락처와 신상정보 일부는 함부로 내다버리거나 반납했다가 수출한 중고 휴대폰에 남았던 정보일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가끔 "고장난 가전제품, 컴퓨터 삽니다"라고 방송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트럭이 있던데, 휴대폰은 안 가져가나?? +_+ 하기야 몇년전에 필요 없어진 감열지 팩스랑 잉크젯 프린터 가져가시라고 했더니만, 돈을 주고 사가기는커녕 나더러 처리비용을 내라는 식이어서 좀 기막혀 하다가, 복합기까지 얹어서 그냥 다 '거저' 가져가는 쪽으로 흥정을 마친 적이 있었다(쓸모 없어진 물건 치워버려서 속은 시원했지만 어쩐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휴대폰이야 무게로 따지는 고물값으로 치면 몇푼 되지도 않을 터이니 아예 취급하려들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건전지도 따로 버릴 데가 없어서 동사무소 갖다 준다고 모아둔 게 한 보따리라 이젠 들지도 못할 정도인데, 휴대폰도 동사무소나 구청에 갖다 주면 재활용을 하려나? 나 같은 게으름뱅이가 어느 천년에 그런 착한 짓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우리집 말고도 집집마다 지천으로 깔려 있을 헌 휴대폰 처리법이나 좀 알려주면 좋겠다. 이제는 쓸모 없을지 몰라도 살 때는 분명 기십만원씩 했던 고가품이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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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 다 걱정하는 울 왕비마마가 거의 고정으로 틀어놓는 TV 채널에는 저녁 무렵 일반인들이 나와서 억울한 사연 같은 걸 호소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행정적으로 피해를 보았다거나, 민사상 손해를 보았는데 증거가 확실해도 법제도가 부실하거나 지자체의 외면으로 구제받지 못해 애를 태우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등장해 변화를 촉구한다. 그 프로그램에 심심찮게 나오는 사연이 뭐가 있는고 하니, 자기 땅, 자기 집인 줄 알고 수십년간 살았는데 국유지였다고 판명이 됐다면서 수십년간 밀린 점유권에 대한 범칙금이 엄청나게 나와 억울해 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심지어 자기 집인 줄 알고 평생 살다가 국유지 개발로 졸지에 집을 잃게 된 사람들도 나온다.

그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왕비마마는 특유의 염려증에 더하여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당신 명의로 된 지금 사는 집이 아마 자기 집으로 되어있지 않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곧장 배우자 상속으로 명의변경을 한 '집문서'까지 있는데도 좀처럼 의심은 가시지 않는다. -_-; 이 세상엔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워낙 비일비재하기도 하지만, 왕비마마의 근원적인 불안감의 요인에는 자꾸만 짜증스럽게 바뀌는 이 동네 주소도 크게 한몫을 한다.

행정구역의 변화야 과거에도 조금씩 있어왔고 작은 규모의 동네가 하나로 통합되기도 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이 동네도 과거엔 **1동부터 **4동까지 나뉘어 있다가 10여년 전쯤에 개편되면서 3동까지만 있었는데, 그마저도 얼마전 또 바뀌어 **3동이던 우리 동네가 다시 **2동이 되었다. 사실 이건 뭐 큰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다. 어차피 주민등록증엔 1, 2, 3동 구분 없이 번지수만 적혀있지 않은가. 1, 2, 3동 구분은 그냥 동사무소 관할구역을 나누고 우편물 배달 편의를 위한 방편이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못마땅했던 건 몇년 전 뜬금없이 얼굴 간지러운 이름으로 골목마다 새로운 주소를 만들어 홍보를 하더니 구청에서 알아서 제 마음대로 초록색 주소표지판을 만들어 집집마다 붙였던 사실이다. 서울시와 구청에서 날아오는 각종 고지서엔 옛날부터 써온 현재 주소와 함께 '개나리길 00-0'라는 새주소가 늘 괄호 안에 적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운전을 하고 돌아다녀 보면 그렇게 새주소와 거리, 골목 이름이 큰길 표지판 밑에도 죄다 붙어 있었다. 헌데 얼마전부터 지자체에서 보내오는 고지서엔 또 다른 주소가 등장했다. 심지어 우리 동네 이름도 아니고, 옆동네 이름을 넣은 도로명으로 '**로 OO길 OO-O'이라고 되어 있었다. 왕비마마의 불안은 다시 고조되었다. 이러다 집을 빼앗기는 게(누구한테???) 아니냐는 걱정이었다. 나는 서울시에서 하는 짓인지 구청에서 하는 짓인지 몰라도 지난번 '개나리길' 사태 때처럼 이번에도 또 누군가 삽질하다 관두게 될 거라고 장담하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왜 자꾸 주소를 바꾸는 건데???

그러다 며칠 전엔 아래층 똥개가 대낮에 거의 30분 넘게 쉬지않고 짖어대는 일이 발생했다.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위층에서 내려다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전주에 올라가 케이블을 설치하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아래층 개는 하도 짖어대서 거의 쉰 목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똥개가 드디어 미쳤나보다고 생각하다가 너무 시끄러워 하는 수 없이 내려가 원인을 살펴보았더니, 이상한 사람이 있기는 했다. 골목을 이리저리 오가며 망치질을 하다가 또 사진을 찍다가 이리저리 살피는 아저씨 한분이었다. 차마 묻지는 못하고 계단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노라니, 이어 우리집에도 망치질을 한 뒤 사진을 찍었다. 얼마전까지도 분명히 집앞에 붙어있던 '개나리길 00-0'이라고 적힌 초록색 표지판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그 대신 ' **로 OO길 OO-O'이라고 들어간 새 주소 명판이 남색으로 떡하니 걸려 있었다.

짜증이 버럭 밀려왔다. 지난번 개나리길 주소도 그렇고, 이번 새 주소도 그렇고 당국은 왜 자꾸 쓸데없이 세금 처들여가며 주소를 바꾸고 주소명판을 갈아붙이는 것일까? 과거 주소 체제가 외국과 달리 주소만 달랑 하나 들고는 집 찾기 힘들게 되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런다고 당국에서 무조건 바꿔라 명령하면 그냥 쉽사리 바꿔지는 게 주소인가?? 정말 궁금하다. 또 다시 은근슬쩍 바뀌어 버린 행정상의 주소는 누구의 머리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며, 또 언제 슬그머니 다른 걸로 바뀌게 될지. 4년마다 휙휙 바뀌는 지자체장의 정책으로 과연 수십년간 장기적인 행정개편 같은 게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한건지. 어쩌면 뭔가 '야로'가 있어서 멀쩡히 살던 집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울 왕비마마의 염려가 뜬금없는 망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요즘 저들이 해대는 한심한 짓거리를 보면 말이다. 대체 누구를 위한 변화이고 혁신인지, 아님 그냥 또 한번의 '돈지랄'인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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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투덜일기 2010. 9. 4. 02:05

집에 3분짜리 모래시계가 있다. 화장실에 두고 양치질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한지 한 일년쯤 된 것 같다. 원래부터 양치질 용으로 산 건 아니었고, 그냥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 친구가 뭘 굳이 사주고 싶다고 해서 만만한 모래시계를 집어들었는데 그냥 두고 먼지만 씌우느니 뭣에라도 써먹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엘 갖다 둔 거다. 하루 종일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3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는 것 같지만, 생각외로 3분이란 시간은 퍽 길다.

양치질의 원칙 3-3-3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꼬박꼬박 실천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거의 평생 아침저녁 하루 두번 양치질을 고수한 나로서는 직딩 시절(그마저도 첫 직장 3년은 양치질로 유난 떠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시간 이후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치솔을 들고 화장실엘 가는 문화가 거의 충격적이었다. 귀찮음은 둘째 문제였다. 워낙에도 질질 뭐든 잘 흘리는 편이지만, 특히 양치질을 할 때는 얼굴 주변은 물론이고 종종 옷섶에도 치약을 묻히는 인간인 내가 회사에서 정장이나 유니폼을 입은 채로 어떻게 양치질을 하라는 것인지! 양치질을 하고 나면 거의 반 세수는 해야하는 형편인데 화장은 또 어떻게 고치라고?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들 닭벼슬 머리에 진한 아이섀도와 진한 립스틱으로 무장한... 나도 그 무리였다 ㅋㅋ) 그래서 나는 더러운 인간 취급을 받거나 말거나 점심시간 양치질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온종일 세수 및 양치질을 삼가(?)다가 잠자기 전이라든지 졸음을 깨기 위한 방편으로 '큰 맘먹고' 양치질을 시도하는 극강의 게으름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드물게 하는 양치질도 원칙에 맞게 3분간 꼬박 구석구석 닦는데 공을 들이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모래시계가 생긴 후, 평소대로 쓱싹쓱싹 열심히 양치질을 한 뒤 이쯤이면 3분 지났겠지 쳐다보면 대개는 모래가 절반도 안 떨어진 상태였다. 치아가 모두 30개 전후이므로 이빨 한 개당 5, 6초씩 꼼꼼하게 닦으면 3분 양치질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치과의사들의 조언도 모르는 바 아니다. 헌데 이론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 이빨 한 개당 5, 6초 골고루 문지르기, 이건 성미 급한 나에게 놀라운 인내심을 필요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래시계가 눈에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전체적으로 북북 닦은 이빨을 또 닦고 문지르며 떨어지는 미세한 모래를 거의 째려봐야 한다. 그러면서 매번 느낀다. 3분이 왜 이렇게 길어!?!?

밤참으로 찐 옥수수를 세 자루나 데워먹고 나서 분위기 전환 용으로 방금 어렵사리 3분 모래시계에 맞춰 양치질을 마치고는 생각했다. 3분이란 시간은 포스팅으로 한 번 짚고 넘어가기에 충분한, 놀라운 시간이라고. ㅋ 3분 얘기 쓰느라고 일할 시간 또 30분 허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인터넷 서핑에 허비하는 시간에 비하면 심히 건설적이다. 이 글 마무리 하면 모래시계 꺼내다 엎어놓고 3분간 몇줄이나 번역하나 실험이나 해볼까나... 과연 그 실험은 작업 진도에 고무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허탈과 자괴감을 안겨줄까. 시간은 휴대폰 스톱워치로도 잴 수 있는데 굳이 모래시계 놀이를 생각하는 걸 보면, 그냥 일이 하기 싫은 거라는 결론이 나오는군.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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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언론인과 사진작가 부부가 있다. 언론인인 남자의 취재 도구는 볼펜과 작은 수첩, 소형 녹음기가 전부다. 남자는 가방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 뭔가 기록할 일이 있으면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과 볼펜, 소형 녹음기를 꺼낸다. 가끔은 노트북 컴퓨터를 소지하고 다닐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땐 기사를 바로 송고하거나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경우이고, 대부분은 양손을 자유롭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와 동반 기사를 취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언론인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촬영도구가 많은 여자는 작은 체구에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렌즈가 들어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늘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다. 본격적인 촬영이 있는 날 쫓아다녀본 적이 있는데, 웬만한 택배상자보다도 큰 카메라 가방엔 각종 카메라와 렌즈, 빛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찍어본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들어 있어 무게가 20킬로그램은 족히 될 듯 했다.

특별히 전문적인 취재나 촬영이 있는 날은 아니지만 둘이 같이 관련된 행사 때문에 두 부부가 같이 외출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남자는 맨몸에 빈손이고, 여자는 예의 그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남편은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들어주어야 할까, 아닐까? 더욱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남자는 185센티미터의 장신에 100킬로그램은 나가는 거구인 반면,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아내는 150센티미터의 단신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둘과 동행하게 됐을 때 나는 빈말로라도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 한 마디 안하는 남자의 태도에 분개했고, 복잡한 인사동을 함께 거닐며 나 역시 비슷한 단신임에도 사진작가 친구에게 가방을 같이 들자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헌데 친구는 괜찮다며 내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깨가 아파 가방 매는 쪽을 자주 바꾸면서도.  

가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나는 반나절을 지켜보다 참다못해 덩치 큰 남편에게 왜 부인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느냐고 묻고 말았다. 넌 짐도 하나 없으면서, 가냘픈 아내가 끙끙거리며 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혼자 들고 다니는 게 가엾지도 않냐고. 남자는 오히려 내 질문을 의아하게 여겼다. 사진작가로서 무거운 촬영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당연한 일인데, 왜 자기가 간섭해야 하느냐고. 자기 아내가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땐 그에 수반되는 모든 수고로움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므로, 온전히 본인의 책임이라고. -_-; 논리적으로 너무도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쿨'한 사고방식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 부부였다면 둘 다 아무리 '프로'다운 직업인이라고 해도, 둘이 같이 움직일 땐 상대적으로 힘 센 남편이 아내의 짐을 잠시라도 들어주지 않았겠나 말이다.

이번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열일곱 살의 늦둥이 딸이 있다. 역시나 이들도 미국인이다. 방학을 맞아 이혼한 아버지의 집에 다니러온 십대의 딸은 올 때보다 더 빵빵해진 큼지막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는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딸은 걸음걸이가 휘청거릴 정도다. 아버지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딸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의 배웅은 아파트 현관에서 끝이 난다. 주차장까지 함께 나가는 건 아버지 본인도, 딸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순 살이라고는 하지만 깡마른 십대 딸보다는 그래도 아버지가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다주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 장면은 지금 작업중인 소설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몇년 전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고 확실히 내가(심히 비약하자면 한국인이) 의존적이구나 하고 느꼈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무거운 딸의 짐을 스스로 옮기도록 내버려두는 장면은 그의 매몰찬 성격이나 무정함을 묘사하려는 뉘앙스가 전혀 없고, 그저 자연스러운 작별의 장면일 뿐이었다. 물론 유별난 딸의 독립심과 괴력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 안에서도 개인주의가 통용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났을 뿐이다. 부녀 사이에도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원칙상 옳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틈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같으면 당연히 나 대신 짐을 옮겨다 줬을 텐데, 라고. 위에 적은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에서 내 주변 남자들 같으면 당연히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고 다녔을 텐데, 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무겁든 가볍든 남자들이 여자의 핸드백을 대신 들고 다니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며(다만 책가방은 인정 ^^;), 사사건건 "여자는 약하니까 이런 건 못해!"라고 핑계대는 여자들을 줄곧 혐오하며 집밖에선 늘 괴력을 발휘해온 이른바 돌쇠형 여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묵직한 아기 캐리어와 기저귀 가방, 시장바구니 따위는 남편이 매고 들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편이 아내보다 더 힘이 세다는 전제 하에. 요즘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별로 그런 커플이 눈에 띄지 않지만 몇년 전까지도 흔하게 보았던, 아내에게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모두 들게 하고 본인은 빈손으로 한가로이 걸어가는 뻔뻔한 남편들의 뒤통수를 내가 얼마나 째려보며 욕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양성평등과 성별역할 구분의 철폐를 집밖에서만 엄중이 부르짖었던 것 같다. 집안은 마치 그런 원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마음껏 응석을 부리거나 편협한 태도를 취해도 용서될 수 있다는 듯이. 물리적인 힘을 쓰는 부분에서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건, 무조건 남녀 공히 군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어린이든 성인이든 하나의 인간 개체임은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사회적 의무를 똑같이 져야 한다고 우겨대는 억지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쩐지 집 안과 밖에서 성별 문제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모순처럼 느껴지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험악하게 운전하는 것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 타파와 양성평등을 향한 내 나름의 노력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정작 집안의 영역에선 상당히 '연약한' 여자라 '특별히'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특권을 자임했다. 물론 나의 이런 태도는 맏딸이면서 고명딸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두 남동생들은 나 때문에 역차별을 당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체중과 체구에 상관없이 어느덧 집안에서 '힘쓰는' 인물이 되면서, 그리고 '딸이고 첫째'이라서 더 예쁨을 받는 건 엄연한 '차별'임을 눈 동그랗게 뜨고 지적하는 똘똘한 조카들 덕분에 집안에서도 성 역할의 경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또 불쑥 걱정이 든다. 가족적 온정주의는 양성평등과 꼭 상충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제대로 공부는 안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는 현실로만 나름의 원칙과 이론을 정립하려니 생겨나는 부끄러운 헷갈림이다. 언제고 제대로 여성학 공부 좀 해봐야할 터인데, '과연' 언제나... 만날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한탄만 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 모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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