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추억주머니 2011. 3. 11. 23:12

이번에 중학생이 된 조카가 배정된 학교는 공교롭게도 나의 모교다. 무려 30년도 더 차이나는 동문이 된 셈이다. 아무리 같은 학교라도 30년이 더 흘렀으니 내가 아는 선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 놀라워라. 내가 중3때 막 대학을 졸업하고 솜털인지 수염인지 보송보송한 얼굴로 부임했던 한문 선생이 요번 조카네 담임이란다. 담임들 이름도 얼굴도 다 까먹은 내가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면 몹시 치 떨리게 싫어했거나 퍽 괜찮게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다행히도 후자쪽이다. 어눌하고 착하고 순박한데다 어리바리 부임 첫 해라 중3인 우리들에겐 간혹 '밥'이 되기는 했지만, 한문을 정말로 유려한 필체로 잘 썼고 서예반 담당이라 미술반에서 힘 쓸 일이 있을 땐 자주 일꾼으로 불려다녔다. 환경미화나 채점 도우미 같은 일로 늦게 집에 가게 됐을 때 하굣길에 만나면 혼자 집에 가서 밥해먹기 싫다면서 우리들과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 김밥, 우동 같은 걸 사주기도 했다. 출석부로 머리통을 찍는 선생이 없나,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퍽퍽 때리는 선생이 없나, 조각분필 담아놓은 플라스틱 통으로 뒤통수를 쳐 깨뜨리는 선생이 없나, 여학생에게도 살벌한 체벌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선생도 기다란 나무 막대를 꼭 가지고 다니긴 했지만(그 학교 교사들 사이에선 일종의 패션이었을까?), 그건 어디까지나 칠판 가리키기 용이었을뿐 체벌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친개, 똥싼바지, 변태, 복부인, 입걸레, 싸롱화, 손버릇 따위의 부정적인 별명이 대세인 학교에서 그 선생의 별명은 상당히 우호적이고 귀여운 구석마저 있는 '도날드덕'이 되었다. 단지 입술이 좀 투툼하고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조카가 대번에 지네 담임 별명 뭐였냐고 묻기에 안 가르쳐줬다. 저절로 알게 되면 모를까.. 30여년 전 별명으로 아직도 불리는 거 싫을지도 모르잖아;;) 애들이 막 장난치고 떠들어도 그냥 담임이 허허 웃는다는 조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별로 안 변하신 것 같기는 한데, 진실이야 알 수 없어도 어쨌든 다행이다 싶다.   

재단이 부유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그 사립학교는 원래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에선 언감생심 절대 배정되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졸업하던 해 처음으로 우리 동네 아이들을 꽤 많이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몇몇 선생들이 가끔가다 한 마디씩 학생들 들으라고 가시돋친 소리를 해댔다. 출신학교 성분이 과거와 달라져서 학교 '질'이 떨어졌다나. 가뜩이나 산꼭대기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학교에 정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건 되먹지 않은 일부 선생들 때문이었다. 인근 구와 달리 아무래도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OOO구' 출신 아이들이 많아져 자기네 '부수입'이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했으리라는 건 나중에야 알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선생들 가운데 누구누구가 돈봉투를 특히 밝히는지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들은 성적과 상관없이 같은 재단의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을 드러나게 예뻐하는 분위기였다. 사립 국민학교 학비를 댈 정도면 퍽 부유한 집안이니 '당연히' 때마다 상당 금액의 촌지 봉투를 상납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고등학교까지 그 재단 학교로 진학하고 말았는데, 거긴 더 심했다. 그 학교 고3 담임을 연이어 3년만 하면 집 한채를 거뜬히 살 수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 들으니, 사업가 아버지를 뒀던 친구 하나는 고3때 담임(나도 같은 반이었다 -_-;;)이 진학조언을 핑계로 한달에 한번씩 집으로 찾아와 '정기수금'을 했다고 고백하며 치를 떨었다. 내가 졸업 후 완전히 학교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도, 교생실습을 모교로 정해 나가는 애들을 보며 '미친 거 아닌가' 생각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런 학교지만 더러 의롭고 '착한' 선생들이 없지는 않았다.(학교 축제 때 액자 값도 안 낸 나의 그림을 걸어준 미술반 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 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풋풋한 신참 선생들이었다. 스승의날 두당 정해진 돈을 내서 담임에게 고가의 전기밥솥을 선물했는데(선물 품목도 학급 서기를 통해 넌지시 지시된 사항이었다) 색깔과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다시 바꾸러 다니게 만들었던 닳고 닳은 아줌마 선생이 있는가 하면(자기가 바꾸지! 지금 생각해도 화난다;), 꽃과 편지만 받고 선물은(스카프였던가 그랬다;;) 굳이 돌려주며 나무라던(너희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비싼 걸 사느냐고)  해맑은 풋내기 담임 선생도 있었다. 세속에 찌들지 않은 그런 선생들을 반기긴 했지만, 이미 시니컬해진 우리는 그들도 지금 젊어서 그렇지 몇년 더 지나면 탐욕스러운 다른 선생들이랑 똑같아질지 모른다고 씁쓸해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총각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사춘기 여학생 특유의 무대포 감수성으로 짝사랑을 불태우는 아이들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성적을 올려보겠다고 선생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영악한 학생은 있었을망정.  

모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서 통 모르고 살다가, 악연 때문인지 학교와의 고리를 끊지 못해 지금까지도 끌려다니는 친구의 말을 듣자니 탐욕스럽기로 유명했던 선생들은 하던 가락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벌써 오래 전에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있고, 정년 이전에 관두고 음식점 같은 걸 차린 선생도 있는데 불쌍한 그 친구는 개업식에 화분을 보낸 것도 모자라서 간간이 그 집에서 모이는 퇴물 남녀 선생들 모임(역시나 유유상종이다)에 불려나가 음식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30년전 제자를 여전히 봉으로나 여기는 선생들이라니 에잇! 전화번호를 확 바꾸고 다시는 이용당하지 말라는 나의 충고에, 친구는 하필 퇴물 선생 하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공교롭게 동네 마트에서 만났을 때 예의상 장본 비용을 한번 내줬더니만, 그 담에 만났을 땐 잘 나가는 제자(친구는 전업주부라고!!!) 덕을 수십년째 본다고 마트 점원에게 마구 자랑하면서 또 내달라는 식으로 뻔뻔함을 보이더란다. 아니 왜?!?! 게다가 만나는 동창들 있으면 다음번 모임에 어디 한번 데려와보라고도 하더라나. 정말로 애정을 쏟으며 사제지간을 다진 것도 아니고, 순전히 촌지로 얽힌 악연을 그들은 왜 계속 누리려고 하는지 원! 나는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 흥분하며 욕을 하다가, 앞으로 또 그런 속물퇴물들한테 연락오면 시댁이든 친정이든 우환이 생겨 지방에 내려갔다고 거짓말 하라고 시켰다. -_-"
 
교수에 대한 나의 인상이 나쁘듯, 안타깝게도 교사에 대한 나의 인상도 그리 좋지 않다. 간혹 정말로 아이들의 인성교육과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기는 하지만, 내가 겪어보고 주변에서 전해들은 교사의 모습은 교육자가 아니라 그냥 월급쟁이 조직원에 가깝다.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 교사가 무능하다고 무시하고, 선생들은 선생들대로 학생들이 걸핏하면 교육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협박이나 한다며 교권이 땅에 떨어졌느니, 말세니 운운한다. 나도 한때 잠깐 교사가 천직이 아닐까 상상한 적이 있지만, 역시 그 길을 안 가길 잘했다 싶다.

내가 교생실습을 나갔던 모 중학교엔 마침 엄마와 이래저래 아는 분이 영어과 주임 선생님이었다. 교생실습을 하던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라서, 실습 점수에 부당한 이득을 누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실습이 끝나고 나서 세상 참 좁다며 웃어 넘긴지 몇달 후, 나에겐 그분과 엄마를 통해 모종의 교직 협상안이 들어왔다. 교생실습을 나간 그 학교에 영어교사 충원 계획이 있는데, 이미 서로 안면도 있고 시범수업도 해보았고 하니 '천만원'의 기부금을 내면 나를 곧장 취직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에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도 엄마는 그분의 설득에 약간 넘어가서 (빚을 내서라도 일단 취직을 하고 나면 평생 '우량 직업'이 생기는 거고, 그 정도 돈은 금세 만회할 수 있다고 했다나;) 아버지까지 포섭할 기세였다. 그러나 당시가 어느 때인가, '압제와 굴종'을 깨치고 나아가 투쟁해야 한다고 노상 나라와 대학가가 들썩이고 있었다. 불의와 타협하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말로만 듣던 교직비리라며 당장 고발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엄마의 지인의 안위까지 걸린 사안이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내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한 뒤에도 엄마는 교직에 대한 미련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졸업한 다음해였던가, 걸핏하면 철야에 야근에 시달리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엄마는 심지어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덜컥 임용고사 시험에 접수를 해놓고 아무 준비도 없이 내게 "혹시 아니? 한번 시험이나 봐  봐라."고 종용했다. 서울/경기 지역에 영어교사를 세 명인가 뽑는 그 시험에 내가 합격할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 암튼 그 이후 직장을 옮겨다니면서 간혹 나도 가지않은 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교직비리에 응해 그때 천만원을 내고 영어교사 자리를 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긴 했다. 설마 그 천만원을 단기간에 벌어들이느라고 부임 첫해부터 부잣집 애들 학부모 면담하며 노골적으로 촌지를 달라고 하진 않았겠지? 라고 킥킥거리면서.

살기 좋은 나라인지 아닌지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국민소득이 아니라 사회의 투명성과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우하는 시스템을 보면 된다고 했다. 겉으로는 학교 체벌도 사라지고 촌지도 불법이고 교직비리도 없는 사회가 된 것 같지만, 주변의 학부형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여전히 백화점 상품권을 스리살짝 담임교사에게 건네고 티 안나게 집으로 택배선물을 부친다. 작년 배추파동 때는 몇몇 엄마들이 아예 담임선생의 김장김치까지 책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 자기 자식을 잘 보이기 위한 극성 엄마들의 몸부림 같아서 씁쓸하지만, 30년 전에도 촌지 수금하러 다녔던 선생이 존재했듯 지금도 여전히 백화점 상품권 수십장 들고 다니며 바리바리 쇼핑하는 '일부' 교사 목격담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더러 오가는 걸 보면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어디나 썩은 구석은 있다지만, 그런 몰상식한 교사들이 존재하는 한 학교 현장에서 피해를 보는 학생들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고, 학부모 교육열은 어디에 내놔도 최고라는 이 나라 교육의 현실은 확실히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이제 궁금한 건 딱 하나다. 30년 넘게 한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쳐온, 젊은 시절 청렴하고 곧아 보였던 조카네 담임 선생님의 현재 성품은 어떠할까. 사람은 좀체 안변한다는 게 진실이듯, 사람은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진실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한낱 인간이 30년간 어떻게 안 변하겠나. 너덜너덜해져서 버릴까말까 하다가 못 버리고 그냥 서랍장에 들어있던 중학교 졸업앨범을 새삼 꺼내 '도날드 덕'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간절히 빌었다. 휙휙 갈겨쓰듯 칠판에 적어도 멋드러졌던 선생의 한문 필체가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듯이, 착했던 선생님의 인품은 안변했기를. 그리고 이젠 최고참 교사에 속할 그분의 조용조용한 카리스마로 촌지 밝히던 속물 선생들이 끼리끼리 목청 높이던 학교 분위기는 확 바꾸어 놓았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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