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에 해당되는 글 64건

  1. 2013.06.25 다시마의 용도, 정말일까? 9
  2. 2013.03.25 궁궐이 좋아서 3
  3. 2013.03.12 부정행위 14
  4. 2012.11.23 잘 될까 15
  5. 2012.09.20 의문 11
  6. 2012.01.20 옛날 이야기 6
  7. 2011.08.31 풀이름 11
  8. 2011.06.27 ??? 9
  9. 2011.05.10 어떻게 팔릴까 11
  10. 2011.04.29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9

제사 장을 보러 가면서 먼저 건어물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달랬더니 금액이 꽤 나왔다. 아주머니가 그밖에 제사에 필요한 물건 빠뜨린 거 없느냐고 막 챙겨주면서 탕국에 넣을 다시마는 있나? 하고 물었다. 마침 집에 다시마는 똑 떨어지고 없었기에 도리질을 했더니, 하나 '서비스'로 챙겨 봉투에 담아주며 중얼중얼 읊조리듯 말했다. 탕국엔 왜 꼭 다시마를 맨 위에 얹나 몰라...

 

엇, 그러고 보니 뼈대있는 집안도 아니고 제사 전통도 대충 이어온 우리집에선 탕국에 딱히 다시마를 얹지 않는다. 근데 다시마 조각을 얹은 탕국을 본 기억은 대단히 또렸했다. 어디에서 봤더라...(종묘 답사 갔을 때 본 것도 같고;;;) 궁금해하며 집에 돌아와, 서비스 다시마 얻어온 사연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며 왕비마마한테 물었다. 탕국엔 다시마를 얹는 거라던데 이유가 뭐냐고. 왕비마마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아 글쎄, 조상신이 제사음식 묶어가라고 다시마를 좀 기름하게 잘라 탕국 위에 올리는 거란다. 푸핫. 푹푹 끓인 다시마로 어떻게 음식을 묶어간다고! 게다가 우리집 탕국엔 다시마를 올려놓아본 적이 없는데!

 

근데 쇠고기 무국 끓이면서 생각해보니 참 재미있는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비마마의 말이 맞다면 옛날 사람들 진짜 아기자기하지 않나? ㅋㅋㅋㅋ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전주이씨 XXX파 후손이신 왕비마마가 질문을 듣자마자 1초도 안돼서 내놓은 답이니 상당히 신빙성이 있을 것 같긴 한데, 폭풍검색을 해보아도 탕국 다시마의 유래에 대해선 잘 확인이 안된다. 지방마다 탕국에 넣는 재료도 좀 다르고 해서...

 

어쨌거나 나는 킬킬대며 얻어온 다시마를 좀 길게 잘라 넣고 국을 끓였고, 탕국을 풀 때 제일 두툼한 다시마 조각을 하나 골라 수북하게 쌓은 고기와 무 위에 척 얹어 들여보냈다. 종교도, 영혼의 존재도, 사후세계도 믿지 않지만 어쨌든 제사를 빙자해 친척들 모여서 다 같이 밥먹는 데 깊은 의미가 있다는 쪽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짧은 다시마로 음식을 묶어간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신묘한 귀신이 뭘 못하겠어! 라지만 창살도 문도 못 뚫고 들어와 제사 전에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건 어쩌라고? ㅎㅎ) 앞으로도 탕국에 다시마 올리는 건 재미 삼아서라도 빼놓지 말아야겠다. 누군가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일러주더라도 뭐, 다시마 넣으면 국물 맛이 깊어지는 거야 진리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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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 좋아서

삶꾸러미 2013. 3. 25. 18:00

혹시 나처럼 궁궐이, 또는 한옥이 좋아서 궁궐 전각 청소라도 하면서 가까이서 보고 싶어한다거나 궁궐 한옥과 관련된 공부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어쩌면 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번에 내 경우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일을 저지르고 났더니만 공부할 땐 좋았는데, 이젠 뭔가 막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좀 당황스럽다. 원래 원했던 것이 이거였나 싶기도 하고, 궁극적인 목표(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는 궁궐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를 달성할 때까지 일단 참으며 계속 따라가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 줄곧 의문이 든다.

 

내가 멍청해서 그렇지, 요즘 사람들이야 검색 능력이 워낙 뛰어나므로 마음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잘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겪어보니 단체와 경로도 워낙 많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뭐가 뭔지 아리송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야 좀 알게 된 문화재 관련 민간활동의 차이와 접근법을 좀 적어놓을까 한다.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면 다행이고,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뭔가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볼 때 한 쾌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속셈도 있다. 

 

하여간에 궁궐이나 문화재, 박물관에 관심이 있고 그것과 관련된 교육을 받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보아야 할 곳은 문화재청(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홈페이지다. 궁궐과 한옥, 기타 문화재, 유적지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망라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연계된  NGO와 재단에 대한 링크와 소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 관련 자원봉사 공지는 대부분 문화재청 게시판에도 동시에 올라온다. 종종 무료 인문강좌 안내도 올라와서 나는 그걸 노리고 들락거리다 그만 궁궐을 '지키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받는 교육을 알게 되었다. ^^

 

처음 내가 알고 있던 단체는 아름지기(http://www.arumjigi.org/). 

창덕궁이 워낙 내가 좋아하던 궁궐이라 거길 청소하려면 아름지기 자원봉사 회원이 되는 수밖에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회원을 연중내내 모집하는 게 아닌데다 대체 언제 모집하는지 통 잘 모르겠고(알아보면 늘 모집 끝났다고 나왔다. 흥!) 연회비(12만원)도 내야한대서 일단 마음을 접었었다. 처음에 어느 대기업이 세운 재단이라는데 내가 별로 안좋게 보는 대기업이란 것도 마이너스 요인.

하지만 현재는 후원기업의 목록이 상당히 많고 문화재 주변 환경정리사업 뿐만 아니라 한옥 보급, 한옥 운영 같은 것도 함께 한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함양한옥이 바로 아름지기가 운영하는 곳이다. 아무래도 '재단'이다보니 영리사업도 하는 게 아닐까. 회원이 되면 함양한옥 숙박비도 약간 할인된다는 것 같다. 헌데 여기선 문화재나 역사 관련 교육도 매번 돈을 내고(1만원 정도) 신청해서 들어야 한다. 그나마도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일반인 상대 교육을 요샌 거의 안하는 것 같다. 요즘 질 좋은 무료강좌가 얼마나 많은데 돈까지 내가며 듣겠나. ㅎㅎ

 

알고보니 자원봉사를 청소수준에서만 그치고 싶었다면 내가 찾아갔어야 하는 단체는 따로 있었다. 바로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한문화재 한지킴이'(http://jikimi.cha.go.kr/community_new/newCafeMainList.action)

주요 문화재를 하나씩 기업체 하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가족 지킴이 신청도 받는다. 문제가 있다면 관심 있는 문화재를 딱 한 군데 지정해서 활동해야한다는 점(하기야 궁궐해설사가 된다해도, 궁을 한군데만 정해서 해야한다. 몇년쯤 경력이 쌓인 다음에 소속을 바꿀 수야 있겠지만;;). 게다가 문화재 지킴이를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서 통보를 해준다고 한다. 창덕궁 같은데는 바로 옆에 있는 현대에서 맡아서 지킴이 봉사한다고 들었는데 개인이 신청한다고 창덕궁 청소활동에 붙여주기나 할지 그건 미지수다(그러고 보니 창덕궁 도배랑 청소 같은 건 아름지기 전담이라던데, 어떻게 활동영역을 나눴는지는 알수 없다). 하여간에 이 제도는 자기가 사는 곳 주변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아끼고 보호하는 활동을 권장하기 위함이란다. 정부 주도의 커뮤니티 활동이므로 유료회원제도는 아닌 것 같다만 끝까지 가입해보질 않아 확실하지 않다. ^^; 내가 궁궐 전각 청소를 빌미로 문화재에 좀 들어가볼 작정으로 공부 시작했다니깐, 다들 그럼 한문화재 한지킴이를 했어야 했다고 조언해주었다. 쩝;;

 

다음으로는 '우리궁궐지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http://www.rekor.or.kr/)이 있다. 4대궁궐과 종묘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주 활동으로 하고, <우리문화사랑방>이라고 해서 한달에 한번(매월 셋째주 토요일 3시-5시) 일반인 대상으로 무료 인문강좌도 여는 단체다. 이곳에서 두어달 간 소정의 교육을 받고(교육비 15만원) 6개월 수습활동까지 거치면 궁궐 해설사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한달에 만원씩 회비도 내면서... (아름지기 연회비가 12만원인 걸로 보아 유사 단체들 모두 그게 적정 회비 수준이라고 정했나보다. 혹시 이것도 담합? ㅋㅋㅋ) 궁궐과 종묘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 담당 요일은 금요일과 토요일. 지원자격은 18세-65세 사이,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연말에 있는 듯. 정식으로 궁궐해설사가 되어 자원봉사를 하게 되면, '한복'이나 최소한 '생활한복'을 입고 활동해야 한단다. 궁궐을 안내하는 자원봉사자에 대한 문화재청의 요구사항이라고. (헌데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경복궁의 경우 문화재청 소속일 듯한 해설사 직원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가만보니 검은색 코트를 유니폼으로 입는다. 창덕궁 해설사들은 다 한복을 입던데, 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유무의 차이일까? 암튼... 유료 해설사들은 한복 안입고 설명하는데 자원봉사자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웃긴다! 흥)  

 

궁궐지킴이의 종류는 또 있었으니, '궁궐길라잡이(http://www.palaceguide.or.kr/)'라고 원래 한국청년연합(KYC)에서 운영하던 NGO인데 따로 독립했다는 것 같다. 암튼 여기도 똑같이 15만원의 교육비를 낸 뒤 총 8개월간 이론교육과 실습교육을 마친 다음에 무료 궁궐해설사로 활동한다. 활동 요일은 일요일. KYC에서 시작한 터라 궁궐지킴이보다 상대적으로 궁궐길라잡이의 연령대가 낮다고 들었다. ^^; 그러나 교육생 지원자격은 '성인'으로만 되어 65세로 제한이 있었던 한국의 재발견보다 오히려 더 탄력적이다.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같은 시기가 아닌듯, 올해는 2, 3월에 모집 공고가 났고 최근 60명을 선발했다. 여기도 교육 마치고 해설사로 활동하려면 회비를 내야하는데 학생 5천원, 성인 만원. (오, 학생한테 유리하군! 그러나 방학도 아닌데 어찌 교육을 받으라고 쯧쯧쯧;;). 여기도 정식 궁궐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할 때는 생활한복을 입어야 한다. 궁궐지킴이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한복과 생활한복을 입는 반면, 궁궐길라잡이들은 생활한복 유니폼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내 눈엔 심히 안 예쁘다. 내가 변형한복을 마뜩찮게 여기기 때문일 수도;;)

 

뿐만 아니라 궁궐문화원(http://gungstory.com/common/main.asp)도 있다. 여긴 어린이와 청소년 궁궐학교와 체험학습을 좀 더 세밀하게 운영하고 있는 듯, 청소년 궁궐기자단 같은 것도 모집한다. 궁궐에서 자원봉사할 문화해설사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역할은 위 단체들과 똑같다. 창경궁 내에 궁궐문화원이 있다고 하는데, 교육받는 공간이나 사무실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사회적 기업이라서 무려 궁안에 사무실을 차리게 해준 건가? ^^

어쨌거나 여기도 지난달엔가 궁궐 해설 자원봉사자 교육생을 모집했다. 00명이라고 공고가 났던데, 신청인원이 적었는지 최종 선발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다. 똑같이 10주 정도 기본교육을 받은 뒤 6개월 현장 수습기간을 거쳐, 궁궐해설사로 활동하는데, 종묘를 제외한 4대 궁궐에서 매주 목요일에 자원봉사를 하게 된단다. 역시나 지정 복장을 해야한다는 걸 보니, 자원봉사 활동시에는 한복을 입어야하는 모양이다(맞다, 문화재청의 권고사항이랬지;; ㅋ). 자원봉사 이외에도 여기는 '문화유산 체험학습지도사', '궁궐숲해설사' 같은 자격증을 따기 위한 전문가 양성과정도 있고, 관련 자격증도 발급하는 모양이다. 자원봉사가 아니라 나중에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쪽으로 접근해야 할 듯.

 

그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민속박물관, 서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과천현대미술관... 기타등등 온갖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자원봉사 해설사를 모집하고 있으며, 간간이 유무료 인문강좌를 연다. 왕릉에 대한 수업도 있고, 기획전시 일정에 따라 특정 시기의 유물에 대한 강좌도 있다. 시간과 에너지만 허락된다면 찾아다니면서 들어볼만한 인문강좌가 참 많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각종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인문강좌도 많고, 아예 문화해설사 과정도 따로 있더라. 인문학이 외면을 받고 죽어간다고 한쪽에선 난리지만(흔한 말로 "요즘 인문학을 공부하면 하버드 학위가 있어도 취직이 안돼!"라고들 한다.) 현실에선 분명 인문강좌에 대한 수요가 꽤 많다는 얘기다. 이 또한 내겐 좀 의아하고 신기했다. ^^

 

나로선, 아니, 내 돈 내고 생고생하는 자원봉사를 빡세게 교육까지 받아가면서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먼저 들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참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나보다. 타인을 위한 봉사가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어쩐지, 나는 아직 그런 숭고한 이념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라 기묘하기만 한데 눈 씻고 찾아보면 자신의 흥미에 맞게 찾아할 '봉사할' 일은 널려있는 듯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할 일을 시민에게만 떠맡기는 건 아닌가 나 같은 삐딱이는 좀 의심스럽지만 뭐 다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데 어떡하겠나. 너도나도 재능기부가 유행인 것을. 나처럼 깊은 생각 없이 기웃대는 사람은 오래 버텨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지만 암튼 당분간은 재미난 구경 다니는 셈치고 지켜볼 작정이니 앞날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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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행위

삶꾸러미 2013. 3. 12. 17:04

두달 반이나 되는 교육기간에 비해 수강료 15만원은 싼 편이라 여겨 덜컥 나도 신청을 하기는 했지만, 수업을 들으러 다니며 보게되는 광경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다들 참 열심히도 사는데 그간 나만 탱자탱자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놀란 첫번째 이유는 100명이나 되는 수강인원. 대체 다 뭐하는 사람들이기에 평일저녁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꼬박 그토록 학구열을 불태우는지? 두번째는 교육 끝까지 변함없었던 앞자리 다툼. 마지막날 수료증 받으며 알게 된 건데, 맨 앞자리를 거의 안놓치셨던 반백의 어느 아저씨는 대전에서 매번 올라왔단다. 강사의 열강으로 수업이 늦어져서 어쩔 때는 밤 10시가 다 되어 끝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그 아저씨가 매몰차게 일어나 먼저 나가버리기에 지겨웠나보다고만 생각했더니 막차 시간 때문에 그랬던 거였다. 학창시절 방학때 대규모 특강 같은 거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 백여명씩 수업을 듣기 시작했더라도 마지막 즈음에 남은 인원은 기껏해야 2, 30명도 안됐던 거 같다. (스펙 쌓기 경쟁 심한 요즘은 또 달라졌으려나? 그건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절반이나 되려나..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헌데 그것 역시 나의 오산. 시험을 볼까말까 나처럼 막판까지 고민을 하다가 나타났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날까지 8,90명 정도되는 인원수는 처음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 대체 뭣하는 사람들이기에! 

 

내심 시험공부는 별로 못했어도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나, 싶은 생각에(그간 궁궐 구경다닌 경력이 얼만데! 수강인원의 절반에서 3분의 1쯤 정도 떨어뜨린다는데 설마!) 시험을 보기로 막판결심을 하고 강당 밖에서 또 다시 교재를 뒤적거리며 초치기에 힘쓰고 있던 나는 또 한 번 다른 사람들의 열기에 놀라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아 무슨 논술대비도 아니고! 정갈하게 프린터로 뽑은 예상문제를 한뭉치씩 움켜쥐고서 여기저기 웅성웅성 떼로 모여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주워섬기는 내용은 내가 단편적으로 암기에 힘쓰고 있던 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방색과 풍수의 접목이 어떻고, 창덕궁 어느 정자 주련에 적힌 한시의 내용이 어떻고... 궁궐 이름은 물론이고 웬만한 전각 이름이며 사대문, 사소문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둥... +_+ 아웅, 나는 전각 이름을 한글로도 죄다 못 외웠는데 쩝...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의 시험열기에 나는 은근히 주눅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사람들만 믿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앞세운 게 잘못이었나 싶어지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우 괜히 망신당하는 거 아냐.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라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암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놀라움은 시험장 안에서도 이어졌다. 자리배치를 다시 한다기에 번호대로 앉히려나 했더니만, 그게 아니라 부정행위 방지를 위하여 한줄씩 띄어 줄 맞춰 앉으라는 얘기. 작년에도 바닥에 책을 펼쳐놓고 부정행위를 시도한 사람이 있었단다. 부디 올해는 그러는 분이 없길 바란다면서... 아니 안되면 마는 거지, 무슨 '이깟' 시험에 부정행위를 한대?

 

그러나 역시 놀랍게도 시험 도중 휴대폰 사용하지 마라, 옆사람과 대화할 필요 없지 않느냐 따위의 주의가 들려왔고 결국 누군가 시험지를 빼앗기는 듯했다. 오마나. 궁궐 답사 갔을 때도 놀라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긴 했다. 지킴이 자원봉사 하겠다는 사람이 궁궐에서 가래침을 뱉질 않나, 문짝과 난간을 마구 흔들어보질 않나, 제사 때 지금도 깎아 쓰는 향나무라니깐 돌아서면서 가지를 꺾어 냄새를 맡아보질 않나... @.,@ 실로 머릿속이 궁금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험에 붙자고 부정행위까지!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다. 돈(지킴이 하려면 약소하지만 다달이 만원씩 회비도 내야한다)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며 문화재를 지키는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의 태도와 부정행위가 어떻게 어울릴 수가 있지? 단지 자신이 원하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해도 된다는 무한경쟁논리가 여기서도 적용되는 건가? 혹시 자격증 같은 게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수강한 사람도 있었던 걸까? 좀 무섭기까지 했다.

 

주관식 두 문제는 손도 못대고 공란으로 두어야 했고, 객관식도 아리까리 해서 마구 찍어댔으며, 한자로 답을 쓰라는 문제는 뻔뻔하게 한글로 답을 적어두고 후다닥 시험장을 나와 집으로 향한 나와 달리, 열공에 힘쓴 사람들은 얌전히 밖에 앉아 시험 끝나고 발표된다는 정답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 끝까지 놀라운 사람들! 마지막 면접대상자 발표 공지에는 선발기준이 대략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출석과 시험성적, 그리고 수험태도(부정행위)를 감안하여 선정하였다고. 흐음... 시험감독이 세 사람이나 되더라니, 부정행위를 한 사람이 여럿이라 걸러냈다는 뜻인가. 나의 합격이 어쩌면 그 사람들 덕분은 아닐까? ㅎㅎ 

 

어린시절 시험볼 때 고개를 들거나 쓸데없이 움직이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계속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가 목 통증에 시달리거나, 지우개를 떨어뜨리고도 한참 고민하다 선생님한테 주워도 되느냐고 물었던 고지식한 학생이었던 나도 딱 한 번 고3 마지막 시험 때는 부정행위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학력고사도 끝났겠다 어차피 내신에 들어갈 성적도 아니니 반 전체가 컨닝페이퍼를 돌려 보기로 모의가 되었던 것. 시험지 귀퉁이를 찢어 답을 순서대로 적은 뒤 주변에 돌리는 임무를 맡은 몇 사람 중 하나였는데, 어찌나 떨렸던지 뒤에 앉은 친구가 여러번이나 쿡쿡 찔러댄 다음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쪽지를 건냈다. 아마 내 답에 자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부정행위에 관한 한 양심에 찔리는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암튼 늙으나 젊으나 시험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열공파와 컨닝파, 배짱파, 소신파 등 변함이 없다는 깨달음 역시 이번 교육에서 얻은 신기한 경험이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내가 더는 벼락치기의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 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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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될까

투덜일기 2012. 11. 23. 22:54

이젠 어느 동네엘 가도 잘 찾아볼 수 없는 소형 서점이 최근 우리 동네에 생겼다. 제법 큰 플래카드를 두어 군데나 붙여놓고 개업을 알리는 서점이 걱정스럽고도 신기해서 일부러 언덕을 넘어 구경을 갔었다. 옛날 내가 다니던 학교앞 책방처럼 학습지 교재와 잡지가 주요품목이고, 잘은 모르지만 베스트셀러 신간 정도는 갖추어 놓은 것 같았다. 늦은 오후, 비좁은 책방에 당연히 손님은 한명도 없어서 차마 들어가도 될까, 인사 받고 들어가서 구경만 하고 나오면 안될텐데, 누구든 손님이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야지 마음먹고 버스 기다리는 척 한참을 기다렸으나 손님이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괜히 들어갔다가 읽지도 않을 책이나 잡지를 집어오기도 뭣하고, 딱히 사고픈 책(있느냐고 물어볼;;)도 생각나지 않아서 결국 줏대없이 그냥 돌아섰다.

 

얼마전엔 오래도록 비어있던 동네 입구 상가 한 귀퉁이에 '이탈리아 수제 버거'집이 생겼다. 응? 햄버거가 이탈리아 음식이었나? 의문도 잠시, 입구에 나무데크를 깔고 인테리어에도 꽤나 신경을 쓴 그 가게가 걱정스러워서 나는 오갈 때마다 안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주민이라고는 노인들이 대부분인 강북의 오래된 주택가가 하루 중 활기를 띠는 때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 여학생들이 등하교를 할 때 뿐이고, 하나 있는 치킨집마저도 장사가 잘 안될 지경인데 햄버거집이라니. 마치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듯 매번 부지런히 빈 테이블을 닦거나 주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두 여인을 슬쩍 훔쳐보며 안타까웠다. 이미 '수제 햄버거'로는 동생이 뜨거운 맛을 본 뒤라 남일 같지가 않았다. 여중생들이 먹어봤자 떡볶이랑 김밥일 텐데 대체 누굴 대상으로 가게를 열었을까?

 

처음 한달은 통 손님이 든 모습을 못보겠더니 그래도 두어달 지난 요즘엔 커피잔을 앞에 두고 수다를 떠는 사람이나 유치원 끝난 아이를 데리고 들른 엄마 손님 한 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가끔 보였다. 나만큼이나 그 햄버거집을 염려하던 울 엄니('수제' 햄버거집은 웬만해선 곧 망한다고 굳게 믿고 계심;;)는 오지랖 넓게도 바로 옆에 있는 미용실 아줌마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왔다. '수제' 햄버거가 '단돈 천원'부터라 여중생들이 곧잘 사먹긴 하는데 그래봤자 임대료나 나오겠느냐고, 인건비까지 뽑긴 어려울 거라고. 커피는 맛있다더냐는 내 질문에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하기야 나도 커피 한 잔 안팔아주면서 말로만 걱정은!  

 

부디 내가 볼 때만 유독 그런 것이라면 좋겠으나 대부분 '개점 휴업' 상태가 분명한 두 가게를 보며 요즘 내 상황과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주로 자고 먹고 놀고 쉬고를 반복하는 나날을 본격적으로 즐긴지 한달이 좀 넘었다. 말로는 거창하게  나도 안식년이라는 것 좀 누려보자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개점휴업, 그냥 일이 없어 노는 것과 뭐가 다른가?

 

굳이 변명을 하자면 친구의 휴가에 맞춰 일을 빼느라 꼼수를 부리긴 했다. 허나 휴가가 한두달도 아니고 겨우 2주였으니 핑계거리밖에 안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고는 순전히 일을 하기가 싫어서, 이미 너무 늦어버린 계약마감에 쫓기는 게 숨막혀서, 아니 나도 나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출판 담당자만 계속 물먹이는 상황이 죄스러워서, 결국 두 건은 계약금 돌려주고 일을 포기했다. 사실 한권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라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멀미가 나서 다시는 부실한 원고륻 들춰보고 싶은 마음도 안드는 상황을... 과연 누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출판 담당자에겐 천인공노할 죄를 진 셈이지만 암튼 그땐 그랬다.

 

 그런데 그러고도 이상스레 마음은 편했다. 막연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17년간 번역일을 해오면서 한번도 사라지지 않은 조바심과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내게 일을 주겠다고 찾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과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모든 프리랜서의 숙명적인 고민이 아니겠나. 원숭이 줄타기의 법칙을 아무리 고수한들 언제고 한두 번은 떨어지게 돼있다. 더욱이 단군이래 최대불황이라는 출판계의 비명은 그저 엄살이 아니라 해마다 변함없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걸 왜 모르겠나. 그런데도 이 엄혹한 마당에 안식년을 즐겨보겠다는 용기가 참 가상할 지경이다. 

 

잠자리에 들어서 오늘 과연 뭘 했나 돌이킬 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무위도식하며 사는데도(어쩌면 그러기 때문에;;), 생각보다 하루는 참 빨리도 지나간다. 컴퓨터와 인터넷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것 같더니만, 일하기 싫어서 게으름 부릴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며칠씩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아무렇지가 않다. 대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긴 하지만, 부쩍 심해진 노안 덕분에 작은 화면으론 뭘 오래 보기도 어려우니 그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됐다.

 

뭘 좀 배울까, 운동을 할까, 텅빈 머리는 어떻게 채울까, 여행을 갈까, 빈한기의 삶은 어떻게 유지해야 좋은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허투루 하는 생각들은 당연히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우리 동네 서점과 동네 수제햄버거집처럼 나의 안식년도 과연 잘 될까, 하고. 그러고는 이내 눈을 질끈 감는다. 잘 되겠지 뭐. 서점과 햄버거집 주인들도 아마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결국엔 죽지만 죽으려고 사는 사람은 없듯이, 잘 안되려고 뭔가를 벌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나. 나는 다만 뭔가를 '벌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되는 일이다. 해보니 그건 퍽이나 쉽다. 무위도식, 이게 딱 내 적성이었는데 그간 몰랐던 게 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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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삶꾸러미 2012. 9. 20. 21:18

어느덧 또 2년이 흘러 얼마전 자동차 검사 안내장이 날아왔다. 느낌으론 작년에 한 것 같은데 벌써 2년이라니, 귀찮음보다 놀라움이 먼저였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나는 동네 카센터에 검사 대행을 맡겼다. 검사 안내장엔 대행 의뢰하지 말고 직접 검사소로 예약하고 찾아오라고 적혀 있었지만 흥, 안속는다 안속아.

 

처음 자동차가 생기고 종합검사 안내장이 나왔을 땐 당연히 차를 맡겨 대신 검사를 맡게할 수밖에 없었다. 차 유리에 선팅을 했었는데 당시엔 그게 불법 개조에 속하는 금지품목이었다(요샌 너무 심하게 깜깜한 것만 아니면 법적으로도 선팅이 허용되므로 벗겨낼 필요가 없다). 그러니 카센터에서 선팅을 다 벗겨내고 검사를 받은 뒤 다시 선팅을 해주어야 했던 것.

 

그렇게 2년에 한번씩 검사 안내장이 나오면 당연하게 카센터에 대행을 의뢰했던 나는 문득 대행비가 아까워졌다. 두번째 자동차로 갖게된 하얀색 세피아를 몰 때였다. 아는 분에게 중고로 넘겨받긴 했어도 워낙 마일리지도 높지 않은 새차에 가까웠고, 얼마 전 엔진오일이며 웬만한 점검도 했겠다 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15년쯤 전이라 당시 검사비가 얼마였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나 요새나 검사 대행을 맡기려면 암튼 거기다 3만원쯤을 더 얹어주어야 한다. 물론 미리 차를 점검해 보완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수리비는 당연히 별도. 허나 그때까진 수년째 자동차 검사 대행을 맡기면서 문제 있어서 추가로 수리 비용 지불해 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만만하게 여겨질 수밖에.

 

어차피 선팅 필름은 떼어내고 갔다가 다시 맡겨야 했지만, 밥벌이 시원찮은 초보 번역가 시절이라 몇만원이라도 절약하려는 마음이었다. 선팅 필름은 스티커 잡아떼듯 죽 잡아당기면 쉽게 떨어진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 문제 없었고, 죄다 아저씨들 투성이인 검사장으로 당당히 들어가 서류를 접수하고 검사를 받는 것까진 좋았는데... +_+

 

문제 없이 검사를 통과할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내 차는 배출가스 불량 및 전조등 각도 불량(?!! 난생처음 들어보는 사유였다;;)이라며 결격사유가 두 가지나 되어 재검에 걸렸다. 헐...  진땀이 삐질삐질 났다. 이런 걸 긁어 부스럼이라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결국 인근 공업사를 찾아가 불합격 항목을 알리고 쌩돈을 들여 수리를 받은 뒤, 다음날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자동차 검사따위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며,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가 기가 팍 죽어 돌아온 나에게 당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주변에 자동차 검사 받으러 직접 갔다는 사람 한 명도 못 들어봤다. 다 대행시킨다더라. 마일리지 10만 킬로미터 넘은 똥차도 대행시키면 그냥 통과라더라. 다들 돈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카센터와 검사소 사이에 모종의 야로가 있다는 뜻이다, 이 헛똑똑아.

 

해서 그 이후 나는 자동차 정기검사에 관한 한 잘난 척을 관두고 매번 동네 카센터에 가져다준다. 대행료 몇만원 더 내는 거? 하나도 안 아깝다. -_-; 혼자서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망신당했던 그해로부터 딱 2년 뒤, 나는 카센터 아저씨한테 다시 차를 맡기고 연락을 기다렸다. 2년 전에도 배출가스로 걸린 승용차라면, 마일리지도 더 늘어나고 2년 더 노후된 차라서 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재검 판결이 나는 건 아닐까 궁금했다. 하지만 차는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종합검사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새차도 직접 검사 받으러 가면 어딘가 걸릴 수 있지만, 검사대행 맡기면 헌차도 전혀 문제없다는 불패의 진리를 믿을 수밖에. 흥!

 

정규 검사소보다 몇몇 지정 공업사에서 하는 출장 검사소가 융통성을 더 발휘하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고, 검사를 의뢰하는 거래 카센터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느라 모종의 눈감아주기가 자행되는지 어쩐지도 나로선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운이 없었든 아니든, 직접 자동차 검사받으러 갔다가 퇴짜맞은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한번의 경험으로도 <뭔가 야로 있음>을 굳게 믿으며, 앞으로도 주욱 검사 대행 쪽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마일리지는 청년이되 연식은 12년이나 묵은 내 차는 요번 검사를 받기 전에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아 돈을 꽤나 잡아먹고 검사에 임했으니 당연히 무사통과했다. 하지만 카센터에서 다 점검 받은 차를 가지고 내가 직접 검사소에 갔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오래 전 단 한번의 경험으로 불신이 너무 깊은가? 누가 좀 반박 사례를 알려준다면 감사하겠음. 설마... 일정한 불합격률을 유지하기 위한 무작위 복불복에서 나만 재수없게 걸렸던 건 아니....겠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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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추억주머니 2012. 1. 20. 21:53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전해 해주시던 이야기들이 나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방되던 해와 그 이듬해 이북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만주 생활을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90년대까지 사신 두분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개인의 역사로 지니고 계셨다. 물론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다 그러했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기운이 장사라 단오날 씨름대회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는 이야기, 할머니가 꽃가마 타고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오던 이야기, 손기정 옹이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뜀박질을 정말 잘해서 노상 심부름을 시켜먹었다는 이야기, 만주에서 여각하며 돈을 막 궤짝으로 벌어들였는데 밤마다 돈 세기가 싫어 큰고모 둘이 서로 미뤘다는 이야기,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다른 사람들처럼 집 살 생각은 안하고 곧 고향 돌아갈 거라 여겨 그 많은 식구가 여관에서 지내며 갖고 온 돈을 다 탕진했다는 이야기, 결국 평생 한량으로 사신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광주리 이고 나가 생선장수를 하며 생계를 꾸렸던 고생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신 덕분에 서른살 무렵까지 두분의 옛날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으며 나는 우리 조부님 세대가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다. 두분 역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열살 무렵 전쟁통에 피난살이 했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라디오와 전축에 이어 흑백TV와 컬러TV, 자동차, 컴퓨터 따위의 등장을 지켜보셨다. 젊어선 지금은 사라진 전차를 타고 다니며 통학 및 데이트를 했다고 하고, 서울이라도 동네가 높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부모님은 결혼 이후에도 한참 물을 지게로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또 울 엄만 공병호 타자기라나 뭐라나 해서, 국내에서 최초의 국가공인 타이피스트 자격증을 딴 몇 명에 속한 덕분에 일터에서 콧대높은 '미쓰 리'로 불리며 그 옛날 출산휴가와 복직을 거듭하며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10년도 넘게 검찰청엘 근무했다고 들었다. 타이피스트들이 서류를 타이핑해주지 않으면 사건을 못넘긴다나 뭐라나. 그때 엄마의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위쪽에 '후까시'를 잔뜩 넣어 부풀리고 아랫머리를 밖이나 안으로 살짝 꼬부려 '고데'(일명 '소도마끼'라고 하던가?-_-;)를 한 모습이다. 그땐 일주일에 한번 머리를 감고 월요일 아침 일찍 미장원엘 가서 그 머리를 하고는 얌전히 자면서 일주일을 버텼다나! 

엄마는 옛날부터 TV를 보다가는 뉴스에 얼굴을 비치는 유명 정치인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그때는 '새파란 검사보'였다는 둥, '부장검사'였다는 둥 알은체를 했다. 막내 낳고 퇴직을 했으니 일을 관둔지가 4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그때 검찰청 동료 아줌마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만난다.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국가정책을 무시하고 셋이나 애를 낳았다며 주변의 눈치를 꽤나 받았다는데, 엄마는 막내를 낳아 아들이 둘 되니까 그제야 마음이 턱 놓이더라고 했다. 이왕 산아제한 정책 무시한 거 딸 하나 더 낳지 그랬느냐고,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계속 툴툴댔다. 아들들은 다 소용없고(!) 딸 하나는 너무 불리해!

실제로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형제들이 대부분 많아서 보통 네다섯은 되었다. 제 밥 그릇은 지가 알아서 쥐고 태어난다면서. 그런 친구들 집에 가보면 우리 할머니가 내 이름 부를 때 고모들 이름을 먼저 두어번 부르고 나서야 성공하듯, 친구네 엄마도 자식들 이름을 부를 때 몇번씩 헷갈려했다. 울 엄만 그러는 일 없던데. 어쨌든 얼마전 <무한도전>에서 추억의 골목놀이가 종류별로 나오며, 맨 마지막에 엄마들이 저녁밥 먹으라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들여가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짠했다. 요즘엔 그렇게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엄마들이 골목어귀에서 "OO야 밥먹어라!"고 소리치며 아이를 찾는 일도 더는 없으니 말이다. 대신에 학원 간 아이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뿐...

더불어 내 나이와 역사도 만만칠 않음을 느낀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은 거의 흑백사진이다가 열살 무렵에야 겨우 컬러사진이 등장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리. 그뿐인가, 나도 동네를 돌아다니던 물지게, 똥지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고 ㅠ.ㅠ 나무로 짜인 장식장에 들어 양쪽으로 문을 드르륵 열게 되어 있던 흑백TV가 집에 생겨나, 학기초 <가정생활환경 조사서>에 드디어 '텔레비죤' 항목에 표시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누런 육성회비 봉투의 추억이 없나, 교복자율화 세대라서 사복입고 고등학교엘 다닌 경험이 없나, 7,8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 ㅠ.ㅠ 대학시절 좀 깨어 있는 친구들은 교양과목으로 컴퓨터 기초를 수강했지만, 나는 거금주고 산 <클로버> 타자기만 믿고 신기술을 외면했다. 먹끈이 돌아가고 자판을 아주 세게 쳐야 글씨가 새겨지는 수동 타자기만 사용해보다가, 회사에 취직해 처음 전동타자기를 접하고는 너무 힘주어 치는 바람에 한번에 알파벳이 세개씩 다다다 쳐져서 당황했던 건 또 어떻고! 사무실에 컴퓨터가 등장한 건 두번째 회사로 옮긴 이후였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나는 주로 수십 종류의 서류양식 인쇄물에 기안서, 보고서, 영업계획서 따위를 손글씨로 쓰느라 끙끙대야 했다.
 
컴퓨터에 그나마 좀 익숙해진 건 90년대 중반이었던 직장생활 막바지. 개통하는데만 당시 돈 150만원쯤 들었던 무전기 만한 모터로라 휴대폰과 '임원진' 자동차에만 부착되어 있던 카폰을 신기해하던 나도 그 무렵 공중전화 옆에서만 통화가 되는 <시티폰>을 거쳐 PCS폰을 개통했다. 그때부터 썼던 번호를 3년전까지도 고수했으니 참 놀랍다. 그간 바꾼 핸드폰은 또 몇개나 될까. +_+ 아주 어릴 땐 집에 전화도 없어서 10원짜리 챙겨들고 공중전화 걸러 나가 까치발을 들고 다이얼을 돌렸는데, 이젠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다. 아버지 학교로 전화를 걸면 친절한 교환수 언니들이 자리 비운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어떻게든 연결해주었고, 교복 입고 놀러가면 아버지가 교환실에 넣어놓고 퇴근시간까지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면 교환수 언니들은 간식으로 중국집에서 군만두랑 잡채밥을 시켜주었는데, 그 때 먹은 잡채밥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잡채밥은 중국집 음식에 대한 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 극장 간판화가, 버스 차장과 더불어 교환수도 이젠 오래전에 사라진 직업이다.

이웃 블로그에서 공포 영화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 땐 골목 담벼락에 주르륵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포영화는 예고편도 못보는 겁쟁이라,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글씨체로 쓰인 <캐리>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는 골목은 잘 지나지도 못했다. 방학이면 꼭 종로에 데려가 <로보트 태권브이> <똘이장군> <칠칠단의 비밀>따위의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시던 삼촌 덕분에 나의 형제들은 꽤 어려서부터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 스카라, 국도, 대한 극장 같은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외화의 등장인물까지도 거의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극장 간판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시내 개봉관 극장간판은 참으로 사실적인데, 동네 3류극장 쯤 되면 배우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장간판 그림의 질이 달랐던 것도 기억난다. 오랜 독재 끝에 총맞아 죽은 대통령과 계엄령을 겪은 것이 중학생 때이니 참 나도 오래 살았구나 싶어 입만 열면 자꾸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꼰대스럽게도 아, 옛날엔 말이지... 그러면서. @.,@

굳이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민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냥 지난 이야기 회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아직 어린 조카들도 자신의 '옛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 너 어릴 때 이러저러했노라고 걔들은 기억도 못하는 아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또, 또, 또... 그러면서 자꾸 옛날 이야기를 들춘다. 생각해보니, 어떤 시대를 살든 어느 세대에 속하든 인간의 수명이 워낙 길어 평생 따져보면 누구나 드라마틱한 삶과 역사를 겪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내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월간지를 보던 시절 21세기엔 쉽사리 우주여행을 다니고 다른 행성의 우주인과 교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 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조카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그만큼 변해 나중엔 오늘의 현실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회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남은 생엔 또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남은 날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팔팔한 순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중년은 중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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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름

투덜일기 2011. 8. 31. 15:30

노상 지하 주차장으로 드나들어 통 모르고 있다가 동생네 집주변 나무와 풀들이 꽤나 예쁘단걸 알게됐다. 배롱나무도 세 가지 색(분홍, 보라, 흰색)으로 꽃을 피우고 맥문동도 연보라색 꽃을 피웠다. 그중 젤 내 시선을 끈건 현관 옆 화단을 뒤덮은 하트 모양의 연약한 풀잎!! '하트모양'을 키워드로 며칠째 검색해도 이름을 모르겠다. ㅡㅡ;



토끼풀, 괭이밥의 일종일까? 주변에서 흔히 보는 꽃과 풀의 이름 정도는 척척 댈 수 있으려면 대체 내공을 얼마나 쌓아야하는 걸까.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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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덜일기 2011. 6. 27. 00:11

사흘째 032 지역번호로 시작되는 전화가 휴대폰으로 계속 걸려왔다. 이상하게도 받으면 곧장 뚜뚜뚜 거리며 끊어져, 새로운 신종 스팸형 전화피싱인가보다고 짐작했다. 궁금해서 이쪽에서 전화를 걸면 요금이 엄청 나온다든지 하는. 그간은 계속 번호가 달라지는 것 같더니 오늘은 줄곧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 전엔 급기야 네 통화째 같은 번호로 전화가 울리다 받자마자 끊어지니 정말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받았다. 대체 이유가 뭔지 따져보려고 내쪽에서 유선으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혹시 10초에 몇천원씩 부과된다는 전화피싱이면 확 끊고 신고하려고. 그러나 이번엔 그쪽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피싱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나는 얼른 휴대폰 스팸차단 서비스에 접속해 그간 걸려온 032 번호를 죄다 등록했다. 그러고선 안심하려는 찰나, 곧이어 휴대폰 문자가 날아왔다.
<엄마 공중전화로 전화할테니깐 받아>라고. -_-;;
나는 얼른 배려랍시고 답장을 보냈다. <문자 잘못보내신듯 저는 자식이없습니다만;;>.

그러나 저쪽에서는 계속해서 진짜 자기 엄마가 화가 나서 자식을 부인한다고 여기는 듯 032-814-**** 번호로 또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우웩~~!! 스팸번호로 등록했는데 어떻게 전화가 오는 거냐??? 차라리 통화가 돼서 오해를 풀어줄 수나 있으면 좋으련만 받기만 하면 끊어지니 원 어쩌란 말인지. ㅠ.ㅠ 전화는 내가 "여보세요"라고 하는 사이에 곧장 끊어지기도 하고, 저쪽에서 "아~"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에 끊기기도 했다. 
 

전전긍긍하며 황당사건으로 포스팅이나 해야겠다고 문자를 캡쳐하고 있으려니 방금 전엔 또 다른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통화에 성공. 저쪽에선 대뜸 앳된 남자 목소리가 내게 "엄마!" 했다. @.,@
나도 모르게 "누구세요?"라고 대화를 시도한 순간, 아... 3%밖에 남지 않았던 배터리 탓에 전화는 다시 끊어지고 말았다. 젠장!!

전화 꺼진 사이에 또 한번 전화가 걸려왔음을 알리는 문자를 보며, 내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오해를 풀어주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는 중이다. 밤도 늦었는데;;;  대체 어떤 사연일까.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다 싶으면서, 또 전화올까봐 내심 걱정스럽다. 아는 사람한테도 전화 잘 못하는 인간이 모르는 번호로 모르는 사람한테, 저 댁의 엄마 아니거든요, 라면서 순전히 오해를 풀어줄 요량으로 전화를 거는 건 더욱 못할 노릇이고... 흑..

누군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로 당신의 엄마가 아니랍니다. 저는 맹세코 숨겨놓거나 버린 자식 같은 건 없는 사람이라구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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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팔릴까

책보따리 2011. 5. 10. 18:32

꾸준히 책을 읽은 감상을 올리는 블로거와 달리 독후감 못쓰는 지병을 탓하며 가뭄에 콩나듯 독서 후기를 올리면서 한 가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파워 블로거도 아닌 주제에 마치 내가 후기를 올리면 조금이라도 책 판매에 도움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같은 타령이다. 하루 접속 인원이 수백 명, 수천 명 되는 도서 전문 블로거라면 몰라도 행여나!

하여튼 출판계에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단군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푸념이 한해도 빠지지 않을 만큼 열악한 이 업계의 구조적 한계를 알고 있기에 나와는 별 상관없는 희소식에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나는 신간, 구간 따지지 않고 내키는 대로 책을 사기 때문에 나온지 몇년 지난 책을 처음 접할 때도 꽤 많은데, 그럴 때 찾아본 서지정보에서 5쇄, 10쇄 이상 발행됐다는 내용이 눈에 띄면 괜스레 기쁘다. 또한 베스트셀러를 일부러 기피하는 성향이 있으면서도 100만부를 넘겨 팔렸다는 책이 뉴스에 등장하면(물론 이제 100만부 넘겨 팔리는 책이 드물어 뉴스거리가 되고 만 현실이 서글픈 것과는 별개로) 역시나 아직도 책을 읽거나 사는 사람이 깡그리 사라지진 않았다는 생각에 슬몃 안심이 된다.

처음 번역에 발을 디디면서 깨달은, 출판기획은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나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스캔들에 휩싸였던 전직 큐레이터의 자서전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같은 책의 판매 호조도 내겐 그저 놀랍다. 일단 탄성이 붙어 화제에 오르고 난 다음엔, 뇌화부동하는 군중들이(워낙 이 나라 사람들은 집단주의에 휩쓸리는 경향이 많다고 생각한다. 언론에도 꽤 오르내리고 주변인들이 좀 아는 체 하면 따라 읽는 심리;;) 너도너도 덩달아 사보는 분위기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궁금한 건 어쩌다가 탄성이 붙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이다.

과거엔 주요 일간지에 서평이 실리는 게 책 판매실적을 크게 좌우했다. 조중동 서평난에 실리면 기본 1만부는 거뜬히 넘긴다고 장담하던 때도 있었다. 내가 번역으로만 밥벌이하기가 힘들어 출판사 외서기획을 돕던 시절, 서로 친분이 두터운 소규모 출판사 사장님들은 주기적으로 돌아가며 그 주요 일간지 서평 담당 기자들을 불러다가 깍듯이 '접대'했다. 한번은 나도 그들과 얼굴을 익혀두는 것이 좋겠다며 인사동으로 불려나간 적이 있었다. 기쁨조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앉은 내 심사를 파악한 사장님은 어차피 저 사람들 2차로 보낼 데도 있으니 밥만 먹고 일어나라고 달랬다. 그날 따라 몸이 좋지 않아 2차까지 '수행'하지 못하게 된 사장님은 동석했던 다른 출판사 사장님에게 한껏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준비해간 돈봉투를 은밀하게 기자들에게 하나씩 찔러주었다. 그 봉투에 얼마가 들었는지 나는 이미 경리직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빳빳한 만원권 100장씩이었다. 늘상 있는 일인 듯 그걸 받아드는 기자들은 몹시 태연자약 여유로웠고, 나는 속으로만 부르르 치를 떨었다.

벌써 십수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 작고 이름없는 출판사의 경우는 그렇게 밥과 술과 돈과 여흥으로 서평 담당 기자를 접대해도 조만간 일간지에 서평이 실린다는 보장이 없었다. '나름' 괜찮은 책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대규모 출판사는 특별히 기자 접대를 하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서평이 실렸다. 자금력이 확보되어 있으니 대형 화제작을 언제든 터뜨릴 수 있지 않겠나. 출판계에도 통용되던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 내게 기획자 명함을 파주었던 그 출판사의 서평이 드디어 일간지에 실린 건, 직접 목도했던 돈동투 사건으로부터 1년이나 지나서였다. 로열티도 꽤 많이 주고 계약한 경제경영서를 출간했을 때였다. 일간지 서평 덕에 과연 그 책의 손익분기점을  넘겨 혜택을 보았는지 결과는 알지 못한다. 내가 곧 그 출판사 기획일을 때려치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작컨대 분명 '밑지는' 장사였을 것이다. 1, 2년 꼬박 기자들에게 그런 접대를 해야 했다면 들인 돈이 대체 얼마인가! 기가 막혀서... 

웃기는 건 서평 담당 기자들 가운데 실제로 책을 꼼꼼히 읽고 기사를 쓰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고, 출판사에서 자체 제작한 홍보자료를 순서만 약간 바꾸어 서평을 올려놓고는 그 기사의 저작권을 신문사에서 주장한다는 점이었다. 그 시절엔 나도 종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고 비상근이긴 해도 출판사에 나가보면 주요 일간지가 매일 수북하게 쌓여있었는데, 거기서 가끔 실제로 책을 읽고 쓴 게 틀림없는 서평을 발견하면 우와 놀라며 감동할 정도였다. 그때 만난 서평 담당 기자들에 대한 인상이 너무도 나빴던 나머지, 요즘도 인터넷으로 일간지 서평을 보게 되면 못내 궁금하다. 책을 직접 읽고 쓴 걸까, 홍보자료를 읽고 쓴 걸까? (화제작에 대해서 일간지 별로 대동소이한 서평이 올라오면 십중팔구 출판사 홍보자료라고 장담한다 ^^;) 아직도 서평 담당 문화부 기자들은 출판사의 깍듯한 접대를 받을까?

일간지 서평과 함께 당시엔 일간지 4, 5단 통광고나 전면광고가 '꽤 먹히던' 시절이었다. 물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전면광고, 통광고 좋아하다가 마케팅 비용에 들인 돈 만큼 책이 팔리지 않아 결국 부도를 내거나 크게 손해를 본 출판사들이 쎄고 쎘지만 말이다. 요샌 종이 신문을 본 적이 거의 없어 경향이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과거만큼 영향력이 없는데도 여전히 일간지에 4, 5단 통광고나 전면광고를 턱턱 내는 출판사들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설마 옛날보다 광고비가 싸졌을 리는 없는데 미약하기는 해도 여전히 효과가 있기 때문일까? 그 또한 궁금하다.

이제는 인터넷 서점의 엄청난 위용 때문에 오프라인 서점의 힘이 날로 줄어들고는 있지만, 옛날엔 대형서점의 진열대도 책의 판매실적을 좌우했다. 그래서 영업사원들은 서점 직원들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며 유리한 진열 위치를 선점하려 했고, 따로 돈을 내야 하는 특별 판매부스 코너도 종종 설치했다. 서점에 영업을 나가선 슬쩍 경쟁사의 책을 구석쪽으로 밀어두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과연 그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서점에 나가서도 베스트셀러는 눈으로만 구경할 뿐 괜히 못마땅해하는 나와 달리,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라며 수북하게 쌓여 있으면 선뜻 손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일부 출판사에서 책 사재기까지 해가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려고 안달을 하는 게 아닐까.

출판계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전과 달라진 현실 때문에 책 영업에도 고충이 많다. 요즘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입소문과 온라인 서점의 판매지수, 거기 올라간 독자 서평이라는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한 출판사들은 책이 나오면 으레 온라인 북카페나 자체 출판사 회원 사이에서 서평단을 모집한다. 무료로 책을 나눠주고 자신의 블로그와 온라인 서점 게시판에 서평을 올리는 것이 조건인 것 같다. 그걸 알기에 나는 책이 출간된 후 후딱 올라온 온라인 서점의 후한 서평을 믿지 않는다. 출판사의 입김이 닿은 서평단의 글일 확률이 백프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닌 경우도 더러 있을 텐데 그들에겐 좀 미안타;;) 출판사에서 굳이 서평단을 모집하지 않더라도, 지은이 쪽에서 사람을 풀기도 하는 것 같다. 영어교사를 하고 있는 선배가 종종 교재를 출간하는데, 책이 나오면 어김없이 단체문자가 날아온다. 온라인 서점에 별 다섯개짜리 서평을 책임지고 두개씩 올리라고. -_-; 학교 제자들한테도 그러라고 시켰다는 후문이고, 나중에 선후배 모이는 자리에선 출석확인 하듯 서평 올렸나 안 올렸나 따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과연 인세 대박이 났는지 그건 또 잘 모르겠다. 최근 이삼 년 간은 조용한 걸 보면 인기 교재 집필자는 아닌 것 같다. ㅋㅋ

얼마전 신간 소설 읽고 올린 후기 때문에 출판사의 검색망에 딱 걸려든 적도 있었지만, 확실히 출판사에선 1인 미디어시대라는 요즘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 소셜미디어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웬간한 출판사는 공식 사이트뿐만 아니라, 장르별 북팬카페를 운영하기도 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을 다 열어두고 어떻게든 독자들과 소통하려 한다. 또한 출간 기념회 같은 행사에도 주요 블로거와 북카페 회원들을 반드시 초청해 기념품과 책 선물을 안긴다. 어느 정도 위상이 높은 서평 전문 블로거나 북카페 회원의 경우 공짜로 책을 받았다고 해서 터무니 없이 호의적이기만 한 서평을 올릴 리는 없다고 믿는다. 애서가로서 자신의 신뢰도에 금이 가는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출판사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지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부정선거가 판을 치던 시절 울 엄마는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불려 다니며 공짜밥을 먹었다. 어쩔 때는 누가 내는 밥인지도 모르고 갔다가 나중에 집에 와서야 전화로 어느어느 후보가 낸 밥이라는 통보와 한 표 부탁한다는 인삿말을 듣기도 했다. 울 엄마는 밥은 얻어 먹되 안 찍어주면 그만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순진하게도 나중엔 양심이 있지 어떻게 그러느냐며 그놈을 찍어주었다. 그렇게 뒷구멍으로 돈을 쓴 놈은 나중에 당선되면 선거비용을 죄다 뽑으려고 부정부패를 일삼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내가 길길이 뛰며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요새는 부정선거운동이 발각되면 당선무효가 되는 데도 여전히 뇌물성 선심을 쓰거나 밥을 내는 지자체 선거 후보자가 사라지지 않는 걸 봐도 사람들은 아직 뇌물에 약한 것 같다.

나 역시 애서가 이웃 블로거들의 리뷰를 보고 따라 읽으려고 책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짜로 받은 책이나 아는 사람의 책에 근거 없이 후한 평가를 내리는 분들이 아니다. 또한 책에 대한 내공이 깊어 팔랑귀에다 변덕 심한 나의 감상과는 평가수준도 다르다. 어차피 책 또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책을 많이 읽은 분들의 평가는 대체로 옳다. 그렇다면 나는? 독서량이 일천하여 비교대상이 현저히 적은 나로서는 그때그때 즉흥적인 감상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좀 괜찮다 싶으면 어떻게든 좀 더 '팔아줄' 방법이 없나 고심하게 된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리도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지 원. 그나마 위안은 이제껏 올린 후기치고 빌려본 책은 있을망정 출판사나 지은이, 번역자에게 홍보용으로 받아 읽은 책은 없다는 것 정도다. 

독서 후기 자체의 충실함보다 이런저런 책의 판매에 먼저 관심을 쏟는 나의 태도는 어쩌면 인세 대박을 향한 흑심의 다른 모습일 것이다. 물론 번역료의 인세/매절 계약 여부를 내 쪽에서 정하는 건 아니고 출판사의 원칙을 따르는 것 뿐이다. 별로 안 팔릴 것이 너무도 뻔한 책을 인세로 계약할 땐 속으로 꿈을 꾼다. 아는 언니가 <체게바라 평전>을 인세로 낼 때만 해도 그렇게 많이 팔릴 줄 상상도 안했다잖아 결과는 모르는 거야, 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괜한 동병상련이랄까, 지은이든 번역가든 약간이라도 괜찮은 책은 인세로도 혜택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거다. 하지만 출판은 도박이라, 어떻게 팔리는지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요지경이다. 수천만원을 들여 일간지 전면광고를 낸 만큼 수익을 뽑으려면 책을 최소한 수만부는 팔아야 할 텐데, 온라인 서점 반값 할인으로 수익구조는 나날이 열악해지는 가운데 일간지 전면광고, 버스 광고를 계속해서 해대는 출판사가 나는 더 신기하다. 베스트셀러 내고 광고 빵빵 쳐대다가 망하는 출판사를 그간 하도 많이 봤어야지. 

사실 책이 어떻게 팔릴지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닌데 책으로 밥벌이를 할 운명을 선택하고 보니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다. 언젠가 쓴 포스팅에 당신이 읽는 책 한권이 이 나라의 출판계와 라니의 밥줄을 지킵니다, 라고 눙쳤던 게 생각난다. 어디까지나 목표대로 예순 살까지 번역으로 먹고 살기 위한 안간힘이라고 생각하면 한편 눈물겹다. 누군가 책이 어떻게 팔릴지 걱정하지 말고, 마감일이나 잘 지켜 일감이나 짤리지 말라고 충고할 것만 같다. 암, 그래야 하고 말고.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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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쓰던 북리뷰는 계속 안 쓰는 게 좋겠고 특히 따끈한 신간 후기는 검색망에 걸려들기 쉬워 괜히 난감(?)할 수도 있으니 안하겠다고 선언한지 얼마나 됐다고, 손바닥 뒤집듯 또 독후감을 쓴다. 의지력 박약 및 우유부단, 내가 그렇지 뭐.

폴 콜린스 지음/홍한별 옮김/양철북

일단 옮긴이의 블로그에서 이 표지와 제목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낚인 게 틀림없다. 전작 <밴버드의 어리석음>을 읽고나서 폴 콜린스라는 사람 참 대단하고 신기한 사람이구나, 역자가 소신껏 밀어줄만한 작가로구나 생각은 했지만, 토머스 페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번에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으니 제목 한번 잘 지었다 싶다. 거기다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끌기 충분하다. (다 읽고 보니 중의적이다. 그 옛날 18세기에 이미 토머스 페인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이 지극히 '상식'이라고 주장했고, <상식>이라는 책도 펴냈다) 역사가 외면하고 잊어버린 기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두는 폴 콜린스의 취향은 이번 책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지는데, 전작 <밴버드의 어리석음>보다 대중적이고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 읽는 재미도 훨 낫다. 

토머스 페인. 미국 건국의 아버지란다. 심지어 미합중국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냈으며, 자기 주머니 돈을 털어 미국 연방준비은행(뉴스에서 자꾸 '연준'이라고 해서 내가 못 알아먹었던 그곳의 역사가 이리도 오래됐구나!) 종잣돈을 마련했고, 미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한 책 <상식>을 써서 '독립선언문'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영국에서 군주제 폐지를 부르짖다 반역자로 조국에서 쫒겨나 프랑스에서 혁명운동을 하다 투옥됐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끊임없이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던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비난하는 <이성의 시대>라는 책 하나 때문에 독립영웅 대신 혐오스런 무신론자로 배척 당하다 끝내 가난과 고독에 허덕이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어쩜.. 이름도 하필 Pain, '고통'이람. 나중엔 끝에 e를 넣었다지만 영어로는 고통, 한국말로는 '폐인'의 어감이 난다. 혹시 그의 수난은 작명탓이 아닐까 잠시 딴 생각이 들었다만, 뭐 그의 일족이 죄다 그런 일생을 살았을 리는 없겠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면 벤저민 프랭클린 아닌가?(그러니까 무려 100달러짜리 지폐에 얼굴이 새겨진 게 아니었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면 나도 한번쯤 들어봤을 텐데(물론 내가 상식이 풍부하거나 세계사를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금시초문인 걸 보면 뭔가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책은 토머스 페인의 '전기'가 아니다. 토머스 페인이라는 인물은 그저 대 전제로 존재할 뿐 이야기의 골자는 어디까지나 그의 '사라진 유골'이다. 프랭클린의 장례식에는 2만명의 조문객이 참석했다는데, 페인이 매장될 때 참석한 인원은 달랑 6명이었다. 퀘이커 교도였던 그는 교회 묘지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그 어디서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결국 그의 시신은 살던 오두막 근방의 마당 한구석에 묻혔다. 

10년 뒤, 한밤중에 누군가 그의 유골을 파내 영국으로 가져간다. 살아생전 토머스 페인을 사사건건 트집잡고 비난하고 논쟁을 벌이고 조롱했던 골수보수주의자 윌리엄 코빗의 소행이다. 페인이 죽은 뒤 개처럼 버려져 묻혀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던 코빗은 뜬금없이 페인의 기념비를 제대로 세워줄 목적으로 그의 유골을 파내 대서양을 건너왔다. 긴 세월을 거친 뒤에야 페인이 주장하던 진보적인 진리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허나 영국에서 그런 일을 호락호락 허가할 리는 없다. 통관부터 문제가 되었던 페인의 유골은 기금 마련에도 어려움이 생기면서 계속 방치되어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떠돈다. 금서였던 그의 책은 다시 용기 있는 젊은이와 서적상 덕분에 암암리에 유통되고, 페인의 생애도 재조명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시각은 부정적이므로 페인의 유골은 계속해서 '뜻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별로 힘은 없는 이상주의자, 진보주의자들에게나 관심의 대상이다. 

이 책은 그렇게 추종자들의 관심망에 따라 페인의 유골이 정처없이 떠돈 흔적을 뒤쫓아가며,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리도 페인의 유골에 관심이 많았는지 결국 페인의 유골은 어디에서 안식을 취했는지(또는 영영 떠돌고 마는 것인지) 독자의 궁금증을 잔뜩 부추기며 대서양을 오간다. 급기야 두개골 따로, 뇌 따로, 왼손과 일부 유골 따로, 몸 따로 흩어진 페인의 자취를 좇는 과거(페인의 유골을 손에 넣었거나 유통한 사람들의 역사)와 현재(옛날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지은이의 행적)의 시선이 공존한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나 싶으면 유골은 또 파산이나 몰락의 이유로 또 다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간 뒤인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아낀다. 설마 찾겠지, 어디든 페인의 유골이 방황을 멈춘 곳이야 있겠지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책의 후반부다. 그래서 폴 콜린스가 분실된 페인의 유골을 결국 추적하는데 성공했느냐고? 물론 그건 나도 알려줄 수 없다. ^^;;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기를! 지금 생각하면 엽기적으로 생각되는 19세기 영국인들의 각별한 유골 사랑(아 글쎄, 밀턴의 유골도 일부 도난당했다네!)과 기이한 수집벽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토머스 페인도 낯선 마당에 그를 추종한 영미권의 수많은 사람들 이름은 책장을 덮고 나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가운데 남부출신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였다가 사상이 완전히 바뀌어 페인의 추종자가 된 몬큐어 콘웨이는 워낙 독보적이라 두드러진다. 골통보수라고 할 수 있는 순회목사였던 콘웨이는 에머슨 목사(우리가 아는 그 랠프 왈도 에머슨 맞다)의 글을 읽고 신학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하는데, 에머슨을 찾아가 만나면서 계속해서 소개받고 만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대단하다. 짐작하다시피 호수 근처 이웃은 소로이고, 인쇄공으로 일하는 노동자 시인을 소개받아 만나고 보니 휘트먼인 식이다. 그 뿐만 아니다. 페인의 자취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선 또 테니슨 경, 새커리, 로버트 브라우닝, 다윈과 교류한다. 마크 트웨인, 해리엇 비치 스토 부인, 찰스 디킨스까지, 전부 다 콘웨이의 '지인'들이다. 우와, 역시 유유상종이로다.

콘웨이가 그 유명한 지인들과 주고받는 대화는 거의 선문답이다. 이를테면,
"정신이 일단 어떤 상태에 다다르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열매가 맺히는 법이지."(p144)
<블랙우즈 매거진>에 실린 에머슨의 글을 읽고 콘웨이가 얼마나 감동을 받고 삶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는지 고백했을 때 에머슨이 겸손하개 해준 말이란다. 또한 에머슨은 목사의 존재 이유가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면서 "학교 회의에 양심적인 사람 한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하고, 지역사회 모임을 돕고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있기는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파리 한 마리가, 존재하는지 않는지 불분명한 천사보다 더 중요하네."(p145)라면서.
하버드 재학 시절, 남부 출신으로 노예문제에 이견을 갖고 있는 콘웨이가 양측의 공격을 받을 때 에머슨은 또 이렇게 충고한다.  "위대하다는 것은 (...) 오해 받는 것일세."(p154)

"약간 쌉싸래하죠. (...) 하지만 그게 경험입니다."(p156)
월든 호수를 같이 산책하며 소로가 콘웨이에게 풀잎을 씹어보라고 한 뒤 한 말이다.

워낙 유명인들과 교류한 콘웨이가 내 기억에 유독 남았을 뿐이지 페인의 유골 행방을 좇은 사람들은 대부분 흥미로운 개인사를 갖고 있다. 당시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주장(여성에게 피임법을 알리거나,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등;;)을 펼치거나 실천하려던 그들이 토머스 페인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페인의 사상은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펄떡거린다.

"관용은 불용의 반대가 아니라, 불용을 아닌 척 위장하는 것이다. (...) 둘 다 전제주의다. 불용은 양심의 자유를 억압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관용은 양심의 자유를 허가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p198)

페인은 자기 묘비명에 단 한 구절 "<상식>의 작가"라고 새겨달라고 했단다. 46쪽에 달하는 소책자에 불과하지만 그의 사상이 축약되어 있고 책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그만큼 깊다는 의미다. 책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으로도 나 역시 페인의 팬이 될 것 같다.
"어떤 그릇된 것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오래 굳어지면 겉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p35)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시 시작할 힘이 있다."(p40)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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