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행위

삶꾸러미 2013. 3. 12. 17:04

두달 반이나 되는 교육기간에 비해 수강료 15만원은 싼 편이라 여겨 덜컥 나도 신청을 하기는 했지만, 수업을 들으러 다니며 보게되는 광경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다들 참 열심히도 사는데 그간 나만 탱자탱자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내가 놀란 첫번째 이유는 100명이나 되는 수강인원. 대체 다 뭐하는 사람들이기에 평일저녁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꼬박 그토록 학구열을 불태우는지? 두번째는 교육 끝까지 변함없었던 앞자리 다툼. 마지막날 수료증 받으며 알게 된 건데, 맨 앞자리를 거의 안놓치셨던 반백의 어느 아저씨는 대전에서 매번 올라왔단다. 강사의 열강으로 수업이 늦어져서 어쩔 때는 밤 10시가 다 되어 끝나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그 아저씨가 매몰차게 일어나 먼저 나가버리기에 지겨웠나보다고만 생각했더니 막차 시간 때문에 그랬던 거였다. 학창시절 방학때 대규모 특강 같은 거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 백여명씩 수업을 듣기 시작했더라도 마지막 즈음에 남은 인원은 기껏해야 2, 30명도 안됐던 거 같다. (스펙 쌓기 경쟁 심한 요즘은 또 달라졌으려나? 그건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절반이나 되려나..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헌데 그것 역시 나의 오산. 시험을 볼까말까 나처럼 막판까지 고민을 하다가 나타났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날까지 8,90명 정도되는 인원수는 처음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 대체 뭣하는 사람들이기에! 

 

내심 시험공부는 별로 못했어도 설마 떨어지기야 하겠나, 싶은 생각에(그간 궁궐 구경다닌 경력이 얼만데! 수강인원의 절반에서 3분의 1쯤 정도 떨어뜨린다는데 설마!) 시험을 보기로 막판결심을 하고 강당 밖에서 또 다시 교재를 뒤적거리며 초치기에 힘쓰고 있던 나는 또 한 번 다른 사람들의 열기에 놀라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아 무슨 논술대비도 아니고! 정갈하게 프린터로 뽑은 예상문제를 한뭉치씩 움켜쥐고서 여기저기 웅성웅성 떼로 모여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주워섬기는 내용은 내가 단편적으로 암기에 힘쓰고 있던 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방색과 풍수의 접목이 어떻고, 창덕궁 어느 정자 주련에 적힌 한시의 내용이 어떻고... 궁궐 이름은 물론이고 웬만한 전각 이름이며 사대문, 사소문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둥... +_+ 아웅, 나는 전각 이름을 한글로도 죄다 못 외웠는데 쩝...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한 사람들의 시험열기에 나는 은근히 주눅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던 사람들만 믿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앞세운 게 잘못이었나 싶어지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우 괜히 망신당하는 거 아냐. 될대로 되라 하는 마음이라 떨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암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놀라움은 시험장 안에서도 이어졌다. 자리배치를 다시 한다기에 번호대로 앉히려나 했더니만, 그게 아니라 부정행위 방지를 위하여 한줄씩 띄어 줄 맞춰 앉으라는 얘기. 작년에도 바닥에 책을 펼쳐놓고 부정행위를 시도한 사람이 있었단다. 부디 올해는 그러는 분이 없길 바란다면서... 아니 안되면 마는 거지, 무슨 '이깟' 시험에 부정행위를 한대?

 

그러나 역시 놀랍게도 시험 도중 휴대폰 사용하지 마라, 옆사람과 대화할 필요 없지 않느냐 따위의 주의가 들려왔고 결국 누군가 시험지를 빼앗기는 듯했다. 오마나. 궁궐 답사 갔을 때도 놀라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긴 했다. 지킴이 자원봉사 하겠다는 사람이 궁궐에서 가래침을 뱉질 않나, 문짝과 난간을 마구 흔들어보질 않나, 제사 때 지금도 깎아 쓰는 향나무라니깐 돌아서면서 가지를 꺾어 냄새를 맡아보질 않나... @.,@ 실로 머릿속이 궁금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험에 붙자고 부정행위까지!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다. 돈(지킴이 하려면 약소하지만 다달이 만원씩 회비도 내야한다)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며 문화재를 지키는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의 태도와 부정행위가 어떻게 어울릴 수가 있지? 단지 자신이 원하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해도 된다는 무한경쟁논리가 여기서도 적용되는 건가? 혹시 자격증 같은 게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수강한 사람도 있었던 걸까? 좀 무섭기까지 했다.

 

주관식 두 문제는 손도 못대고 공란으로 두어야 했고, 객관식도 아리까리 해서 마구 찍어댔으며, 한자로 답을 쓰라는 문제는 뻔뻔하게 한글로 답을 적어두고 후다닥 시험장을 나와 집으로 향한 나와 달리, 열공에 힘쓴 사람들은 얌전히 밖에 앉아 시험 끝나고 발표된다는 정답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 끝까지 놀라운 사람들! 마지막 면접대상자 발표 공지에는 선발기준이 대략적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출석과 시험성적, 그리고 수험태도(부정행위)를 감안하여 선정하였다고. 흐음... 시험감독이 세 사람이나 되더라니, 부정행위를 한 사람이 여럿이라 걸러냈다는 뜻인가. 나의 합격이 어쩌면 그 사람들 덕분은 아닐까? ㅎㅎ 

 

어린시절 시험볼 때 고개를 들거나 쓸데없이 움직이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계속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가 목 통증에 시달리거나, 지우개를 떨어뜨리고도 한참 고민하다 선생님한테 주워도 되느냐고 물었던 고지식한 학생이었던 나도 딱 한 번 고3 마지막 시험 때는 부정행위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학력고사도 끝났겠다 어차피 내신에 들어갈 성적도 아니니 반 전체가 컨닝페이퍼를 돌려 보기로 모의가 되었던 것. 시험지 귀퉁이를 찢어 답을 순서대로 적은 뒤 주변에 돌리는 임무를 맡은 몇 사람 중 하나였는데, 어찌나 떨렸던지 뒤에 앉은 친구가 여러번이나 쿡쿡 찔러댄 다음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쪽지를 건냈다. 아마 내 답에 자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부정행위에 관한 한 양심에 찔리는 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암튼 늙으나 젊으나 시험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열공파와 컨닝파, 배짱파, 소신파 등 변함이 없다는 깨달음 역시 이번 교육에서 얻은 신기한 경험이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내가 더는 벼락치기의 여왕이 아니라는 사실 뿐.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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