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해당되는 글 58건

  1. 2010.11.01 11월 13
  2. 2010.10.13 양치기 중년 9
  3. 2010.10.09 과거, 망각, 현재 2
  4. 2010.10.02 조금 다른 결혼식 12
  5. 2010.09.18 악 귀찮아 12
  6. 2010.09.04 3분 6
  7. 2010.02.02 무서운 사람 13
  8. 2010.01.12 맥가이버 놀이 17
  9. 2010.01.02 2009 한해 정리 12
  10. 2009.12.26 친구 전화 8

11월

투덜일기 2010. 11. 1. 12:14

변기에서 물이 샌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게 언제더라. 최소한 다섯달은 된 것 같다. 두달에 한번씩 나오는 상하수도 고지서의 금액을 두세번이나 예년과 비교하며 고민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전달보다 만원쯤 더 많아진 금액을 보고도 여름이라 물을 많이 썼을 거라고 위로하며 넘겨버렸다. 그러다 급기야 두배를 넘어선 고지서를 받아들고도 계속 변기 수리를 미루기만 했던 데는 나름 핑계가 있었다.

우선은 동네 어귀에 있던 수리점이 문을 닫았다. 작년에 엄마네 화장실 수리하면서 받아둔 명함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더니만 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연락해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난감해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 잠시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고요한 밤에 유독 크게 들리는 졸졸 새는 물소리를 들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물부족으로 먹는 물도 없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퍼뜩 인터넷으로 변기 출장수리 회사를 알아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한 느낌이 들어 꼬리가 내려갔다.

그러고 또 그간 너무 바빴다. 대체 마감중이 아닐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 주변에서 퉁박을 주기는 하지만 밀린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라 심적으로 어찌나 부담이 됐던지 화장실 변기 수리 따위는 우선순위에서 멀찌감치 밀려나고 말았다. 차라리 변기로 이어지는 수도를 잠가놓고 물을 받아 붓는 쪽을 택하거나 엄마네 화장실을 다닐망정,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고 수리를 맡기는 번거로운 절차를 회피했던 거다.

그러다 문득 오늘 우편물 꺼내러 현관에 내려갔더니 문앞에 명함이 한장 떨어져 있었다. "@@누수탐지수리공사. 출장문의 환영." 유레카! 곧바로 명함을 집어와 전화를 거니 20분 만에 올 수 있다고 했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돈 6만원과 커피 한잔 서비스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ㅠ.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대체 난 몇달 간 끙끙댔던 것인가. 몇달 간 수리비보다 훨씬 더 많이 하수구에 흘려보낸 수돗물 값은 또 어떻고. 친절한 아저씨는 영수증을 끊어주며 수도사업소에 연락해서 팩스로 수리내역을 보내면 그간 더 낸 상하수도비를 얼마간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내가 그런 어려운 일을 시도할 리가 만무하다. 그저 문제상황이 종료되었음이 기쁘고 감격스러울 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요즘 나의 행태를 보면 매사가 이런 식이다. 뭐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 실행에 옮기는 건 하나도 없어 늘 쫓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 머리맡이며 탁자에 읽다가 말고 (내가 지금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때냐!) 던져둔 책이 몇권이며, 이 블로그에도 쓰다가 말고 (시답잖은 신변잡기로 블로그질 할 시간에 일 한 줄이라도 더 하지!)  비공개로 남겨둔 글이 몇개던가. 한숨.

이렇게 어영부영 11월. 올해도 겨우 두달 남았다. 여름부터 질질 새던 변기 문제를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해주고 돌아간, 내게는 슈퍼맨 같았던 누수탐지수리공사 아저씨처럼, 어디론가 전화만 걸면 질질질 흘리고만 사는 내 인생을 바로잡아주는 해결사의 도움이 절실한 게 아닐까. 하기야 변기수리 하나도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몰라 헤맨 기간이 다섯 달이니 그마저도 요원하긴 하다. 우선은 어디로든 전화를 걸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는데, 이놈의 전화공포증이 어딜 가나 문제다. 난 왜 어디든 전화 거는 게 이리도 싫은지 원. 이것 봐라, 또 전화 핑계를 대고 앉았다.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점철된 이놈의 마감인생, 아침부터 얼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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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중년

투덜일기 2010. 10. 13. 16:08

몇달 전 가요계의 폐단을 지적하며 이하늘이 쓴 말인데, 유독 귀에 콕 박힌다. 물론 이하늘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넣은 방송국과 PD를 비난하는 맥락으로 사용한 반면, 내 경우는 스스로 민망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가시방석에 앉은 상황이다. 마감일을 질질 끄는 것이 이 업계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는 하지만, 계약 마감일에서 무려 두세 달이 지난 뒤에도 일주일씩 계속 약속을 어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로 막판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아서 늑대에게 잡혀먹힌 양치기 소년이 떠오른다. 

편집 담당자들이 번역하는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가장 흔히 듣는 거짓말이 "마무리중"이라는 변명이란다. 맞다. 최근들어 나도 몇번이나 써먹었다. 정말로 대강 초벌 번역은 끝났는데 골치아픈 퇴고를 앞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거짓말이 아니지만, 번역분량이 아직 엄청 남았어도 미안해서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마무리 중이긴 한데... 어쩌고 저쩌고. 편집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의 말을 들으면, 저런 구차한 변명을 그들도 다 알아차린단다. 이 인간 또 거짓말 하고 있구나, 하고. 하기야 거짓말이 아니라면 일주일, 이주일 차일피일 원고를 지연시킬 이유가 없겠지.

번역의 질은 둘째치고라도 마감일에 관한 한 '비교적 신용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조만간 고질적인 마감 어기기 대장이라는 악명을 뒤집어 쓰고 매장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두려움이 없지도 않으면서 왜 도대체 매번 마감일을 못 지키고 악순환의 구렁텅이에서 허덕거리는지!?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렇다고 만날 팽팽 놀러다니기만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근거없이 느긋해져 배째라고 여기는 태도, 이것도 일종의 병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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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과 바쁜 일은 원래 떼로 몰려다닌다는 게 맞다. 숨도 못 고르게 바쁠 땐 정말 또 다른 일이 겹친다. 마감에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주엔 설상가상 며칠 간격으로 교정지를 두권이나 넘겨야 했다. 몹시 힘겨워하는 후기도 써야 했고. 덕분에 평균 수면시간이 형편없이 줄었고, 가뜩이나 가을 타는 얼굴 꼬라지는 아주 가관이 되었다.
어쨌거나 새삼스레 교정지와 씨름하며, 며칠 간격으로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린 게 있어서 적어둔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반복할 운명에 놓인다." 조지 산타야나의 말이란다. 기계적으로 번역을 하고, 퇴고를 할 땐 자구에 얽매여 웬만해선 작품을 감상할 여유 따윈 생기지 않는다. 각별히 애정이 가는 책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석달이나 마감일을 어기고 넘긴 책이라 쫓기듯 번역한 소설에서 조지 산타야나의 인용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땐 신기하다 정도만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산타야나의 책을 헉헉대며 번역하다 엎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과거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똑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게 될 거라는데 끄덕끄덕 동의하며 그 주제로 역자후기를 써보냈다. 그런데 워낙 귀가 얇은 인간인지라, 며칠 뒤엔 다른 책의 또 다른 글귀에 시선이 꽂혔다. "망각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어차피 과거의 경험이라는 게 각자의 편견을 거쳐 남은 '반쪽짜리 학습'이므로 연연할 필요 없으니 잊어도 좋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망각을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을 위로하는 맥락인데, 이 또한 진리가 아닌가. -_-;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뒤 carpe diem이 내 삶의 모토라고 주장해왔던 걸 생각하면 후자가 역시 내 취향이긴 하다. 과거에 자꾸만 얽매이는 건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서로 모순인 것 같기도 하고, 잘하면 둘 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두 가지 생각 때문에 갈팡질팡했다. 가뜩이나 온갖 선택 앞에서 우유부단한 인간이 이런 심오한 문제를 어찌 결론 지으랴. 이럴 땐 황희정승 놀이가 최고일 듯. 깜박깜박 까먹는 걸 비롯해 수많은 걸 망각해도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고 마음을 놓으며 살다가, 또 마음 켕기는 순간엔 추억을 쓰다듬을란다. 결국 내 마음대로 펄럭거리며 살겠다는 얘기로군.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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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결혼식

놀잇감 2010. 10. 2. 17:38

어제 외사촌동생의 결혼식엘 다녀왔다. 가기 전엔 정말 가기 싫은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비마마의 운전수가 감히 어딜 앙탈이냐) 무려 7년만에 만나는 사촌동생 k양은 진심으로 보고싶었으며 축하해주고도 싶었다. 제일 싫었던 건 '식' 자체였다고나 할까. 물론 외할머니 돌아가시면서 드러난 외삼촌의 인품도 꺼림칙함에 한 몫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싫은 내색할 수 있는 배포도 못되는 인간이다 내가.

어쨌든 여전히 귀여운 사촌동생을 봐서라도 가길 잘했다는 기분이 든 요번 결혼식은 몇 가지가 좀 달랐고 그래서 처음 생각과 달리 덜 피곤했던 것 같다. 정말로 내가 주최하지 않아 피곤할 이유가 없는 소규모 가족모임에서 실컷 먹고 수다떨다 돌아온 정도의 느낌이다.

우선 예식홀이 작은 곳이었다. 신랑 신부 가족들과 친구만 조졸히 모이는 예식이라며 청첩장도 아예 안 돌리더니 정말로 작은 연회장에 90명의 좌석을 준비해놓았더라. 호텔 결혼식이라고 해도 수백명이 드글대는 대연회실 예식만 보았던 터라 신선했고 상대적으로 친지들의 수도 줄어드니 내가 인사할 사람도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결혼식 같은 데서 테이블마다 먼저 자리잡은 어르신들 찾아뵙고 인사 올리는 건 신랑신부만의 의무가 아니지 않은가(친척 결혼식 가기 싫은 요인 제1위다!). 심지어 올케는 몹시 마음에 드는지 나중에 자기 딸(=정민공주)도 이렇게 보내야겠다고 읊조릴 정도였다. ㅋ 헌데 장본인인 열세살 공주는 '레드 카펫'(사실 호텔 예식장은 레드 카펫이 아니라 화이트 카펫이고, 심지어 요샌 단을 올려 패션쇼 런웨이처럼 무대식으로 꾸며놓는다는 걸 아직 어린 녀석이 까먹었나보다 ^^)이 없어 이상하다고 코멘트 했다.

둘째로는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 물론 아예 안받는 건 아니겠지만 암튼 최소한 뻘쭘하게 방명록을 펼쳐놓고 봉투를 받는 접수대는 없었고, 양가 부모도 밀린 빚 받으려는 사람들처럼 입구에 늘어 서서 하객을 맞는 대신 그냥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친지들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당연히 축의금 봉투를 마련해 갔던 우리들은 식이 다 끝나고 나서 작별인사를 하며 슬금슬금 외숙모에게 봉투를 전했는데, 어쩐지 돌잔치 느낌이 들었다. ^^

셋째로는 주례가 없었다. 신랑신부가 나란히 입장하는 예식은 꽤 여러번 봤지만 주례가 아예 없는 결혼식은 내게 첫 경험이었다. 그냥 서툰 사회자가 (아마도 신랑신부의 아이디어인듯한) 나름의 순서대로 예식을 진행했다. 신랑과 신부는 각자 써온 서약문을 번갈아 읽었고, 반지를 주고받았으며, 사회자가 성혼 선언 직후 "이제 신부에게 키스해도 된다"고 말한 걸 보면 각각 미국에서 유학과 취업 중인 신랑신부가 일부 '어메리칸 스타일'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주례사 대신에 나중에 양쪽 아버지들이 전날 고민 깨나 했을 덕담을 해주었는데(두분 다 적어온 종이를 꺼내 들고 읽었다), 뻔한 주례사보다 그쪽이 나도 더 좋게 느껴졌다.

넷째, 예식이 끝나고 하객들인 우리가 와구와구 뷔페음식을 축내고 있을 즈음 신랑신부가 다시 나타났는데(턱시도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홀 안을 돌며 인사는 이미 마친 뒤의 얘기다) 그야말로 평상복 차림이었다. +_+ 사촌동생은 대체 누구 것일까 몇년이나 된 옷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인 검정색 박스재킷에 (길이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온 데다 그나마도 소매를 숭덩숭덩 접었다) 프린트 티셔츠를 받쳐입고 고무줄치마로 의심할 정도의 편한 주름스커트를 발목까지 질질끌며 나타나 도저히 '방금 예식을 끝낸 신부'로 보이지 않았다. 신랑 역시 청바지에 티셔츠, 등산 조끼 같은 걸 입고, 깔끔한 정장을 하고 온 친구들 사이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으며 담소했다. 당연히 어른들은 난리가 났다. ㅋㅋ 특히 울 엄마는 외숙모가 새색시 한복을 안해줬나 보다고, 한복 입기 싫댔으면 예쁜 옷이라도 한 벌 사주지 인색했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아쉬워했다. 내가 보기에도 신부의 패션센스는 좀 난감할 정도였지만, 과거에도 워낙 착하고 털털했던 k양을 생각하면 나는 그런 파격이 오히려 유쾌했다. (폐백도 당연히 생략했다. 폐백 안하는 예식은 몇번 봤으니 그건 패스~)

다섯째, 무려 7박8일간 떠난다는 신랑신부의 신혼여행지가 글쎄, '제주도'란다. 안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말이 신혼여행이지 둘이 배낭 둘러매고 올레길을 죄다 순례하거나 한라산 등반을 할 거라는데 700원 걸겠다! ㅋㅋㅋ 사실 사촌동생은 가족과 함께 1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여차저차해서 최근 다시 돌아온 외삼촌 내외와 동생과 떨어져 미국에 홀로 남아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했다. 신랑에 대한 정보는 캘리포니아 유학생이라는 것과 사촌동생을 교회에서 만났다는 정도 뿐인데, 왜 하필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냐고 외삼촌에게 물으니 다른 데는 여행 많이 가봤어도 정작 제주도는 못가봐서 애들(=신랑신부)이 정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도가 인기 신혼여행지였던 까마득한 옛날이라면 모를까, 최근 10년 안쪽으로는 외국이 아닌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는 커플을 주변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이 또한 신기했다. 

조금도 엄숙하지 않고 호텔 진행요원의 끼어듦과 요식행위도 과하지 않고, 혹시나 상대편 하객들의 귀에 책 잡힐만한 신랑신부의 험담을 하지나 않을까 입조심에 눈치까지 봐야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명랑한 결혼식이었기 때문일까. 하이힐에다 장시간 운전까지 했는데도 별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간 내가 예식장만 다녀오면 몇시간씩 드러누워 쉬어야했던 건 순전히 사람과 경직된 절차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엔 결혼식이 늘 재미난 구경거리였는데, 언제부턴가 식상해져 구경꾼으로서의 재미가 사라지고 하객으로서의 의무만 남으니 당연히 피곤했다. 하지만 이렇게 새삼 '구경거리'로서의 재미와 개성이 드러나는 결혼식이라면 또 기꺼이 발품 팔아가며 축하해줄 마음이 생겨날 것도 같다. 아 참, '뭐 입고 가나'의 고민만 제외한다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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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귀찮아

투덜일기 2010. 9. 18. 00:06
과연 나한테 필요가 있는가 반문했을 때 별로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결국 아이폰4G를 신청했었고 드디어 오늘 전화기를 받았다. 근데 시작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미리 시간약속까지 하고 찾아간 대리점에선 하필 컴퓨터가 다운되는 바람에 다시 밀고 설치중이라면서 무작정 기다리라고 하지 않겠나. -_-; 팩스로 서류를 보내 본사 같은 데서 대신 개통 노력을 하는 듯하더니 암튼 40분 넘게 기다려 결국 개통에 성공을 하긴 했다.

근데 헐... 역시나 컴맹에다 아날로그 세대인 나는 낯선 휴대폰을 새로 장만했을 때처럼 매뉴얼 읽고 공부 좀 하면 되겠거니 여겼더만 앙증맞은 핸드폰박스 안엔 아예 매뉴얼이 없더라. *_* 간단한 팁 설명만 들어 있고, 나머지는 죄다 온라인으로 공부하라네... 게다가 계속 컴퓨터 문제로 전에 쓰던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옮겨주지 못해 내일 다시 오면 해주겠다니, 완전 황당했다. 왜 하필 내가 개통하기 직전에 그 대리점 컴퓨터가 다운되고 지랄?? 기계도사들이야 택배로 받아서 스스로 유심칩도 끼고 개통에 응한뒤 척척 어플을 내려받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지만, 나는 내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최소한 전화번호부라도 옮겨받으려고 대리점 수령을 택한 거였는데, 맥이 탁 빠졌다.
 
게다가 전화 거는 거야 번호만 누르면 된다지만, 메시지 보내려니 그놈의 터치에 서툴러서 어찌나 글자가 잘못찍히던지! ㅠ.ㅠ 나름 문자는 꽤 빨리 보내는 중년 엄지족이라 여겼건만 이젠 완전히 더듬더듬 세번에 한번은 화살표를 눌러 글자를 지워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조카에게 보낸 첫 문자는 '핸드폰ㅐ'라고만 써서 그냥 날아가버렸다. -_-; 핸드폰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려던 거였는데 그 짧은 문장도 완성 못하고 전송 버튼이 눌리다니...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고 싶더라.

어플이고 자시고 일단 아이튠즈 깔아서 음악이나 담아놓으려는 것이 오늘의 목표량이었으나, 꼬진 컴퓨터로 최대한 추출해서 한시간 가까이 수백곡도 넘게 열심히 전화기에 담았건만 헐...(그나마도 열심히 초보자 가이드 찾아보며 실행한 거다) 음악감상은커녕 휴대폰에 음악파일이 제대로 들어갔는지도 확인이 안된다. ㅠ.ㅠ 악~~ 귀찮아!! 비서 같은 사람이 나에게 필요한 기능만 쏙쏙 다 다운받아 내가 쓰기만 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 우리집에선 당연히 와이파인지 뭔지 안뜨니 이것저것 막 눌러서 접속하기도 겁나고 (그래봤자 요금 이내수준일텐데도!) 일단 용어가 낯설어서 뭘 좀 해보려다가도 진행이 안된다. 우웩~~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시작했나 후회부터 앞섰다. 으휴... 일단 내일 전화번호부라도 좀 옮기고 나면 내 물건 같은 느낌이 들려나. 아직은 순전히 애물단지 같아서 정이 안간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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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투덜일기 2010. 9. 4. 02:05

집에 3분짜리 모래시계가 있다. 화장실에 두고 양치질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한지 한 일년쯤 된 것 같다. 원래부터 양치질 용으로 산 건 아니었고, 그냥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 친구가 뭘 굳이 사주고 싶다고 해서 만만한 모래시계를 집어들었는데 그냥 두고 먼지만 씌우느니 뭣에라도 써먹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화장실엘 갖다 둔 거다. 하루 종일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3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는 것 같지만, 생각외로 3분이란 시간은 퍽 길다.

양치질의 원칙 3-3-3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만 꼬박꼬박 실천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거의 평생 아침저녁 하루 두번 양치질을 고수한 나로서는 직딩 시절(그마저도 첫 직장 3년은 양치질로 유난 떠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시간 이후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치솔을 들고 화장실엘 가는 문화가 거의 충격적이었다. 귀찮음은 둘째 문제였다. 워낙에도 질질 뭐든 잘 흘리는 편이지만, 특히 양치질을 할 때는 얼굴 주변은 물론이고 종종 옷섶에도 치약을 묻히는 인간인 내가 회사에서 정장이나 유니폼을 입은 채로 어떻게 양치질을 하라는 것인지! 양치질을 하고 나면 거의 반 세수는 해야하는 형편인데 화장은 또 어떻게 고치라고?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들 닭벼슬 머리에 진한 아이섀도와 진한 립스틱으로 무장한... 나도 그 무리였다 ㅋㅋ) 그래서 나는 더러운 인간 취급을 받거나 말거나 점심시간 양치질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습관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날은 온종일 세수 및 양치질을 삼가(?)다가 잠자기 전이라든지 졸음을 깨기 위한 방편으로 '큰 맘먹고' 양치질을 시도하는 극강의 게으름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드물게 하는 양치질도 원칙에 맞게 3분간 꼬박 구석구석 닦는데 공을 들이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모래시계가 생긴 후, 평소대로 쓱싹쓱싹 열심히 양치질을 한 뒤 이쯤이면 3분 지났겠지 쳐다보면 대개는 모래가 절반도 안 떨어진 상태였다. 치아가 모두 30개 전후이므로 이빨 한 개당 5, 6초씩 꼼꼼하게 닦으면 3분 양치질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치과의사들의 조언도 모르는 바 아니다. 헌데 이론적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 이빨 한 개당 5, 6초 골고루 문지르기, 이건 성미 급한 나에게 놀라운 인내심을 필요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래시계가 눈에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전체적으로 북북 닦은 이빨을 또 닦고 문지르며 떨어지는 미세한 모래를 거의 째려봐야 한다. 그러면서 매번 느낀다. 3분이 왜 이렇게 길어!?!?

밤참으로 찐 옥수수를 세 자루나 데워먹고 나서 분위기 전환 용으로 방금 어렵사리 3분 모래시계에 맞춰 양치질을 마치고는 생각했다. 3분이란 시간은 포스팅으로 한 번 짚고 넘어가기에 충분한, 놀라운 시간이라고. ㅋ 3분 얘기 쓰느라고 일할 시간 또 30분 허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인터넷 서핑에 허비하는 시간에 비하면 심히 건설적이다. 이 글 마무리 하면 모래시계 꺼내다 엎어놓고 3분간 몇줄이나 번역하나 실험이나 해볼까나... 과연 그 실험은 작업 진도에 고무적인 영향을 미칠까, 아니면 허탈과 자괴감을 안겨줄까. 시간은 휴대폰 스톱워치로도 잴 수 있는데 굳이 모래시계 놀이를 생각하는 걸 보면, 그냥 일이 하기 싫은 거라는 결론이 나오는군.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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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사람

투덜일기 2010. 2. 2. 22:02

아버지가 생전에 늘 그러셨다. "나는 제일 무서운 사람이 쟤(나를 가리키며)"라고. 엄마도 그 말뜻을 이제야 알겠다며, 내가 제일 무섭고 눈치 보인단다. 대외적으로는 소심하지만 가족에게는 해야할 말이나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내 성격 때문일 것도 같고, 또 연로하신 부모님과 동거하는 비혼 자식의 흔한 상관관계 때문일 듯도 하다. 하기야 가끔은 고모님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듣고 살았다. "나는 라니가 제일 무서워!" 병약하고 연로한 울 왕비마마 대신 집안 대소사에 얽힌 의견조율과 결정을 내가 도맡으면서 목소리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기도 한데, 한 몇년 쯤 어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오면 모를까 어느덧 <집안의 최고어른>이 되어버린 왕비마마를 모시고 사는 한은 권한대행 격으로 휘두르는 칼자루를 놓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작은아버지들도 장손인 동생놈과 의논하는 것보다 아직은 형수님 계신 우리집과 먼저 상의하는 게 옳다고 느끼시는 모양이라, 톡 잘라서 손떼겠다는 말이 안나온다. 어쩌면 내심 무서운 사람으로서의 권력을 즐기는 건 아닌지.

암튼 친지들은 내가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는데, 나는 조카들이 제일 무섭다. 특히 섣불리 한 약속을 절대 안 까먹고 들이대는 조카들의 새카만 눈망울을 보면 오금이 저린다. 얼마 전엔 공주한테 이런 말도 들었다. "약속 안지키는 어른들 정말 짜증나! 고모도 똑같아!" 주로 놀러 가겠다거나,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해놓고서 기한을 못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방학엔 은근히 공허한 약속을 남발했다가 덜컥 개학을 맞고 말았다. 게으름 탓에 언제나 마감에 쫓기는 마감인생 고모가 특히 월말월초에 바쁘다는 걸 조카들에게 핑계대기엔 스스로도 민망하지만, 결국 이번 방학 약속은 봄방학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봄방학 동안에는 고모의 신용을 좀 회복할 수 있으려나. 조카들이 조금 더 크고 나면 "고모 놀자!" 소리도 하지 않게 될 거라고, 그 때가 올까봐 벌써부터 속상한 마음은 분명 있는데, 동시에 "고모 놀자!"는 말이 무섭기도 하다. 체력 딸리고 아이디어 딸려서 예전처럼 뛰노는 놀이는 쉬 지치는 데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안기기라도 하면 허리가 휘청~ 자빠질까 겁난다. 마음 한 켠으론 내게 무서운 사람으로서의 짜릿한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녀석들이 그만 자랐으면 좋겠다가도, 팔팔하던 예전보다 고모 노릇을 제대로 못할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다. 에구구. 그나저나 봄방학도 열흘밖에 안남았다. 원고 독촉보다 더 무서운 조카들과의 약속을 위해서라도 더욱 매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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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 놀이

놀잇감 2010. 1. 12. 02:06

어렸을 땐 조립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간감각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 입체그림이든 평면그림이든 이리저리 작은 조각의 방향을 바꾸어 조립해 맞추는 과정이 내겐 상당히 골치아팠다. 그러고 보니 끈기도 부족했던가 보다.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내긴 했지만 들이는 수고에 비해 조악한 조립장난감의 완성품은 별로 성취감도 안겨주지 못했다. 같은 재능인지는 몰라도 루빅스 큐브는 한참 낑낑거려도 한 면 맞추는 게 고작이었다. 하도 짜증나서 완전 분해했다가 색깔 맞춰 다시 조립한 적은 있었어도...

헌데 언제부턴가 그리 복잡하지 않은 생필품의 조립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널빤지 조각에 간단히 나사 몇개를 조여야 만들어지는 수납함을 시작으로 탁자도 만들었고, 나중엔 책꽂이도 겁없이 사들일 수 있었다. 복잡한 컴퓨터 책상은 도면 놓고 오래 끙끙대는 내 꼬락서니를 안쓰러이 여긴 아버지가 나서주셨지만, 혼자 했어도 결국 제대로 완성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그 컴퓨터 책상을 멀쩡히 내다버려야했을 때 꽤나 고민을 했다. 다시 분해를 해서 중고로 팔순 없을까, 아니 팔지 않더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결국 귀찮아서 그냥 내다버리는 걸로 결론을 내리긴 했다. 지금 그 상황이 온대도 이런 게으름으론 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기 십상이지만,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붙이느라 거금까지 들이느니 누구든 쓸 사람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간 후회스럽다. 

어쨌거나 진짜 맥가이버스러우셨던 아버지엔 못미치지만, 이제 집안 여기저기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내가 나서며 맥가이버 놀이를 하는 것 같아 슬며시 뿌듯하다. 그래봤자 형광등, 백열등 갈기, 헐렁해진 서랍장 손잡이 나사 조이기, 스테플러로 지저분한 전선 벽에 고정시키기, 옷걸이로 화분 지지대 만들기, 벽에 못박기 정도이고, 그보다 힘든 일은 당연히 막내동생이 다니러 올 때를 기다리는 편이다. 요번에 왕비마마의 실내 운동을 위한 헬스싸이클을 장만하면서도, 기사가 방문하여 조립 및 설치 해주기를 원하면 출장비 2만5천원이 추가된다는 말에 내가 시도해보고 못하겠으면 동생녀석을 부르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문제의 헬스싸이클이 그놈의 눈폭탄 때문에 꼬박 일주일만에 배달되어 왔다. 비전문가의 솜씨로도 30분에서 1시간이면 된다는 자전거조립은 얼핏 보기에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았고, 나는 즉각 2만5천원 벌기에 돌입했다. 부품을 확인하고 일일이 비닐과 골판지를 벗겨, 작은 렌치 두 개로 설명서 순서대로 조립을 하고 있으려니, 정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난감 같은 렌치로 나사를 끝까지 조이는 게 만만치 않아 40여분만에 결국 조립을 끝내고 완성품에 앉아 시연까지 보이자, 내내 못미더워 잔소리를 해대던 왕비마마도 그제야 "우리 딸 맥가이버였네."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게다가 출장비는 흔쾌히 팁까지 3만원 주시겠단다. ㅋㅋ

왕비마마의 수시 운동 독려를 위해 자전거를 TV앞으로 놓느라 다시 소파를 베란다쪽으로 돌려놓고 화분을 죄다 옮기는 힘쓰기 작업까지 홀로 마친 뒤, 관짝만한 빈 자전거 포장박스를 한 구석에 치워놓고 뿌듯해 하려니 문득 며칠 전 차력을 시도하다 이가 빠진 지붕뚫고 하이킥의 오현경이 떠올랐다.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뭐든 잘할 수 있다는 걸 신애에게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사무실 이사 때 여직원들은 <걸레질이나>하라는 잔소리에 걸레질 싫다면서 굳이 번쩍번쩍 책상을 옮기던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못하는 게 너무도 많은 인간이지만, 그걸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견엔 늘 동조할 수 없어 나름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젠 운전하다 타이어가 펑크 나면 나도 당연히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출장서비스를 부르겠지만, 그런 보험 서비스가 없던 10여년 전 나는 강북강변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서 당당히 타이어를 바꿔 끼우고 가던 길을 간 사람이다! ^^v (물론 그 당시엔 몹시 슬펐었다. 그로부터 불과 2년전 올림픽대로에서 펑크가 났을 때는 여러 대의 차가 멈춰서서 도움의 손길을 자청했었는데, 2년만에 아무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가 아무래도 심히 쇠퇴한 나의 외모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1차 펑크 때는 원피스 차림의 꽃단장 모드였고, 2차 펑크 때는 청바지에 티셔츠, 야구모자 차림이긴 했다.) 

여전히 나는 운동신경이 둔하고 공간감각력과 셈 능력이 떨어지며 몸놀리는 게 귀찮고 무서운 건 죽어도 싫다. 하지만 길눈은 밝고 지도도 볼 줄 알며 완전 기계치는 아니고 못 정도는 거뜬히 박으며 가끔 드라이버와 망치, 렌치 따위를 들고 맥가이버 놀이를 즐긴다. 필요가 만들어낸 적응력일수도 있겠으나, 나도 놀랐던 숨어있는 관심과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언젠가 조립주택 같은 것도 손수 만들어보고 싶다면 너무 원대한 꿈이려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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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한해 정리

놀잇감 2010. 1. 2. 01:39

글 하나에 2009년을 정리해 담는 행위는 퍽 뿌듯하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다. 이른바 삶의 <낙>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싶을 수도 있고, 요것밖에 없었나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실한 기억력으로도 요것밖에 없었나 허망한 느낌이 들 것이라는 데 심증이 가지만, 하여튼 꼽아보자. 나의 2009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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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전화

투덜일기 2009. 12. 26. 15:38

어제 크리스마스라고 LA근처 사는 오랜 친구가 전화를 했다.
"크리스마스인데 너 왜 집에 있니?"
"요란한 날 나가 노는 거 사람 많아 복잡하고 싫다. 조용히 집에 있는 게 상책이지."
"드디어 OOO도 늙었구나. 예전엔 크리스마스 파티 다 따라다니고 종각 종치는 거도 보러 다니더니만."
"그러게, 그땐 미쳤었나봐."
일년에 몇번은 우체국 가야 하는 편지를 주고받던 이 친구와도 요샌 거의 몇달에 한번 전화통화 뿐이다. 그나마도 시간대를 잘 못맞춰서 생각만 하다 세월 다 보내고.

돌아보니 확실히 나이들어가며 매사에 시큰둥하고 게을러진다. 다른 데는 몰라도 멀리 있는 친구들에겐 카드든 선물이든 챙겨보내던 과거의 나는 사라지고 없다. 친구 선물 뿐만 아니라 그 언니들, 아들들, 남편 선물에다 그들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하는 오징어며 쥐포까지 바리바리 선물상자를 포장해 배보다 배꼽이 더 클지언정 꼬박꼬박 기념일을 챙겼던 정성과 에너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미즈키님이 일본서 받은 선물 상자들 사진을 보면서도 아주 살짝 뜨끔했다. 10년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오지랖 넓게 당장 강냉이 챙겨보냈을 텐데, 당연히 무심하고 딱딱해진 심장은 요동도 하지 않더라.
올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딱 한장 쓰고 받았다. 문자는 꽤 여럿 받았는데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좀 뜸들이다 몇시간 지난뒤에 하는 수 없이 답장 보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선배들한테는 내가 먼저 새해인사 문자 날렸던 것 같은데, 이젠 받는 것도 짜증스럽다니! 그때 내 문자 받았던 지금 내 나이 정도의 선배들도 아마 짜증났을 것 같다. 다 귀찮아! 그러면서 ㅋㅋㅋ
 
1, 2년에 한번은 내가 가든 친구가 오든 했던 먼거리 왕래도 벌써 3년이 넘어간다. 미서부로 이민간지 내년이면 25년인데 아직도 뉴욕엘 가보지 않은 친구는 해마다 휴가 때면 뉴욕에서 나와 만나 캐나다까지 다녀오자는 계획을 세워보지만, 친구에게든 나에게든 매번 크고 작은 일이 생겨 그 계획은 여전히 계획 단계다. 작년부턴 이왕 가는 휴가 까짓것 이탈리아에서 만나자는 원대한 꿈을 5개년 계획쯤으로 잡아보자 했는데, 그 친구도 나도 딸린 식구가 있으니 사실 쉽지 않은 꿈임을 잘 안다. 게다가 이놈의 불경기는 왜 이렇게 오래가는지 원! 

이러다 내년, 내년 미루기만 하는 거 아니냐고 풀죽어 하는 나에게 친구는 "설마 10년 안엔 보겠지!"라며 큰 인심쓰듯 말했고, 그 뒤에서 친구 언니는 "고수한테 안부전해줘!"라고 외쳐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통화할 땐 무슨 드라마가 재미있는지 의견교환을 빼먹었다. 지난번엔 일본 드라마를 잔뜩 추천 받았었는데. 다음 통화할 땐 내가 먼저 <미남이시네요>랑 <지붕뚫고 하이킥>을 꼭 보라고 권해줘야겠다. 벌써 봤는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근무시간 끝까지 일하고 퇴근한 친구와 크리스마스날 오후까지 자다말고 전화를 받은 나의 통화는 특별한 일 없이 재미없게 사는 게 어쩌면 <잘> 사는 걸지 모른다며 그렇게 또 잘 지내라는 말로 끝이 났다.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이불속에 누워 한참 멍하니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어쨌거나 요란한 날 빨간날은 무사히 지나갔고 주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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