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일과 바쁜 일은 원래 떼로 몰려다닌다는 게 맞다. 숨도 못 고르게 바쁠 땐 정말 또 다른 일이 겹친다. 마감에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주엔 설상가상 며칠 간격으로 교정지를 두권이나 넘겨야 했다. 몹시 힘겨워하는 후기도 써야 했고. 덕분에 평균 수면시간이 형편없이 줄었고, 가뜩이나 가을 타는 얼굴 꼬라지는 아주 가관이 되었다.
어쨌거나 새삼스레 교정지와 씨름하며, 며칠 간격으로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린 게 있어서 적어둔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반복할 운명에 놓인다." 조지 산타야나의 말이란다. 기계적으로 번역을 하고, 퇴고를 할 땐 자구에 얽매여 웬만해선 작품을 감상할 여유 따윈 생기지 않는다. 각별히 애정이 가는 책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석달이나 마감일을 어기고 넘긴 책이라 쫓기듯 번역한 소설에서 조지 산타야나의 인용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땐 신기하다 정도만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산타야나의 책을 헉헉대며 번역하다 엎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과거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똑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게 될 거라는데 끄덕끄덕 동의하며 그 주제로 역자후기를 써보냈다. 그런데 워낙 귀가 얇은 인간인지라, 며칠 뒤엔 다른 책의 또 다른 글귀에 시선이 꽂혔다. "망각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어차피 과거의 경험이라는 게 각자의 편견을 거쳐 남은 '반쪽짜리 학습'이므로 연연할 필요 없으니 잊어도 좋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망각을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을 위로하는 맥락인데, 이 또한 진리가 아닌가. -_-;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뒤 carpe diem이 내 삶의 모토라고 주장해왔던 걸 생각하면 후자가 역시 내 취향이긴 하다. 과거에 자꾸만 얽매이는 건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서로 모순인 것 같기도 하고, 잘하면 둘 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두 가지 생각 때문에 갈팡질팡했다. 가뜩이나 온갖 선택 앞에서 우유부단한 인간이 이런 심오한 문제를 어찌 결론 지으랴. 이럴 땐 황희정승 놀이가 최고일 듯. 깜박깜박 까먹는 걸 비롯해 수많은 걸 망각해도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고 마음을 놓으며 살다가, 또 마음 켕기는 순간엔 추억을 쓰다듬을란다. 결국 내 마음대로 펄럭거리며 살겠다는 얘기로군. 흐흐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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