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결혼식

놀잇감 2010. 10. 2. 17:38

어제 외사촌동생의 결혼식엘 다녀왔다. 가기 전엔 정말 가기 싫은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비마마의 운전수가 감히 어딜 앙탈이냐) 무려 7년만에 만나는 사촌동생 k양은 진심으로 보고싶었으며 축하해주고도 싶었다. 제일 싫었던 건 '식' 자체였다고나 할까. 물론 외할머니 돌아가시면서 드러난 외삼촌의 인품도 꺼림칙함에 한 몫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싫은 내색할 수 있는 배포도 못되는 인간이다 내가.

어쨌든 여전히 귀여운 사촌동생을 봐서라도 가길 잘했다는 기분이 든 요번 결혼식은 몇 가지가 좀 달랐고 그래서 처음 생각과 달리 덜 피곤했던 것 같다. 정말로 내가 주최하지 않아 피곤할 이유가 없는 소규모 가족모임에서 실컷 먹고 수다떨다 돌아온 정도의 느낌이다.

우선 예식홀이 작은 곳이었다. 신랑 신부 가족들과 친구만 조졸히 모이는 예식이라며 청첩장도 아예 안 돌리더니 정말로 작은 연회장에 90명의 좌석을 준비해놓았더라. 호텔 결혼식이라고 해도 수백명이 드글대는 대연회실 예식만 보았던 터라 신선했고 상대적으로 친지들의 수도 줄어드니 내가 인사할 사람도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결혼식 같은 데서 테이블마다 먼저 자리잡은 어르신들 찾아뵙고 인사 올리는 건 신랑신부만의 의무가 아니지 않은가(친척 결혼식 가기 싫은 요인 제1위다!). 심지어 올케는 몹시 마음에 드는지 나중에 자기 딸(=정민공주)도 이렇게 보내야겠다고 읊조릴 정도였다. ㅋ 헌데 장본인인 열세살 공주는 '레드 카펫'(사실 호텔 예식장은 레드 카펫이 아니라 화이트 카펫이고, 심지어 요샌 단을 올려 패션쇼 런웨이처럼 무대식으로 꾸며놓는다는 걸 아직 어린 녀석이 까먹었나보다 ^^)이 없어 이상하다고 코멘트 했다.

둘째로는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 물론 아예 안받는 건 아니겠지만 암튼 최소한 뻘쭘하게 방명록을 펼쳐놓고 봉투를 받는 접수대는 없었고, 양가 부모도 밀린 빚 받으려는 사람들처럼 입구에 늘어 서서 하객을 맞는 대신 그냥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친지들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당연히 축의금 봉투를 마련해 갔던 우리들은 식이 다 끝나고 나서 작별인사를 하며 슬금슬금 외숙모에게 봉투를 전했는데, 어쩐지 돌잔치 느낌이 들었다. ^^

셋째로는 주례가 없었다. 신랑신부가 나란히 입장하는 예식은 꽤 여러번 봤지만 주례가 아예 없는 결혼식은 내게 첫 경험이었다. 그냥 서툰 사회자가 (아마도 신랑신부의 아이디어인듯한) 나름의 순서대로 예식을 진행했다. 신랑과 신부는 각자 써온 서약문을 번갈아 읽었고, 반지를 주고받았으며, 사회자가 성혼 선언 직후 "이제 신부에게 키스해도 된다"고 말한 걸 보면 각각 미국에서 유학과 취업 중인 신랑신부가 일부 '어메리칸 스타일'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주례사 대신에 나중에 양쪽 아버지들이 전날 고민 깨나 했을 덕담을 해주었는데(두분 다 적어온 종이를 꺼내 들고 읽었다), 뻔한 주례사보다 그쪽이 나도 더 좋게 느껴졌다.

넷째, 예식이 끝나고 하객들인 우리가 와구와구 뷔페음식을 축내고 있을 즈음 신랑신부가 다시 나타났는데(턱시도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홀 안을 돌며 인사는 이미 마친 뒤의 얘기다) 그야말로 평상복 차림이었다. +_+ 사촌동생은 대체 누구 것일까 몇년이나 된 옷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인 검정색 박스재킷에 (길이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온 데다 그나마도 소매를 숭덩숭덩 접었다) 프린트 티셔츠를 받쳐입고 고무줄치마로 의심할 정도의 편한 주름스커트를 발목까지 질질끌며 나타나 도저히 '방금 예식을 끝낸 신부'로 보이지 않았다. 신랑 역시 청바지에 티셔츠, 등산 조끼 같은 걸 입고, 깔끔한 정장을 하고 온 친구들 사이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으며 담소했다. 당연히 어른들은 난리가 났다. ㅋㅋ 특히 울 엄마는 외숙모가 새색시 한복을 안해줬나 보다고, 한복 입기 싫댔으면 예쁜 옷이라도 한 벌 사주지 인색했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아쉬워했다. 내가 보기에도 신부의 패션센스는 좀 난감할 정도였지만, 과거에도 워낙 착하고 털털했던 k양을 생각하면 나는 그런 파격이 오히려 유쾌했다. (폐백도 당연히 생략했다. 폐백 안하는 예식은 몇번 봤으니 그건 패스~)

다섯째, 무려 7박8일간 떠난다는 신랑신부의 신혼여행지가 글쎄, '제주도'란다. 안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말이 신혼여행이지 둘이 배낭 둘러매고 올레길을 죄다 순례하거나 한라산 등반을 할 거라는데 700원 걸겠다! ㅋㅋㅋ 사실 사촌동생은 가족과 함께 1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여차저차해서 최근 다시 돌아온 외삼촌 내외와 동생과 떨어져 미국에 홀로 남아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했다. 신랑에 대한 정보는 캘리포니아 유학생이라는 것과 사촌동생을 교회에서 만났다는 정도 뿐인데, 왜 하필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냐고 외삼촌에게 물으니 다른 데는 여행 많이 가봤어도 정작 제주도는 못가봐서 애들(=신랑신부)이 정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도가 인기 신혼여행지였던 까마득한 옛날이라면 모를까, 최근 10년 안쪽으로는 외국이 아닌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는 커플을 주변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이 또한 신기했다. 

조금도 엄숙하지 않고 호텔 진행요원의 끼어듦과 요식행위도 과하지 않고, 혹시나 상대편 하객들의 귀에 책 잡힐만한 신랑신부의 험담을 하지나 않을까 입조심에 눈치까지 봐야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명랑한 결혼식이었기 때문일까. 하이힐에다 장시간 운전까지 했는데도 별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간 내가 예식장만 다녀오면 몇시간씩 드러누워 쉬어야했던 건 순전히 사람과 경직된 절차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엔 결혼식이 늘 재미난 구경거리였는데, 언제부턴가 식상해져 구경꾼으로서의 재미가 사라지고 하객으로서의 의무만 남으니 당연히 피곤했다. 하지만 이렇게 새삼 '구경거리'로서의 재미와 개성이 드러나는 결혼식이라면 또 기꺼이 발품 팔아가며 축하해줄 마음이 생겨날 것도 같다. 아 참, '뭐 입고 가나'의 고민만 제외한다면.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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