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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9.18 바닥 10
  3. 2007.09.17 예상대로 4
  4. 2007.08.19 어제 4
  5. 2007.08.13 8
  6. 2007.08.02 미술관 외출 5
  7. 2007.07.26 두 여자
  8. 2007.07.23 .... 6
  9. 2007.07.14 초하루 2
  10. 2007.07.10 괜찮음 5

달님님

투덜일기 2007. 9. 27. 00:17
전쟁을 치르듯 새벽부터 정신없이 콩콩거려야 했던 추석 날의 마지막 행사는 역시나
친지들 배웅과 동시에 하는 달맞이.
원래 한가위 달맞이는 초저녁에 처음 떠오르는 달을 보며 해야 한다지만
그 즈음엔 늘 수십 명분 저녁식사 준비로 바쁠 때라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니
우리 가족의 달맞이는 해마다 식사 후 느즈막히 귀가하시는 친척분들 배웅하러 따라 나서며 이루어진다.

이번에도 추석날 모인 22명(올핸 큰고모네랑 네째 고모네 식구들이 빠져서 그나마 좀 조촐했다)의 식구들이 몽땅 밖으로 나가 각자 달 보며 소원을 빌라고 하자
제일 신난 건 당연히 어린 조카들이었다.
5살이 되도록 좀처럼 머리칼이 자라지 않아 속상해 했던 정민공주는 그 무렵부터 늘 소원이 "머리칼 빨리 길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이젠 제법 머리가 공주스럽게 자라기도 했고 나이도 무려 '10살'이나 되고 보니 작년부터는 달보며 무슨 소원을 비는지 "절대 비밀"이다. ^^
6살 난 준우는 씩씩하게 "우리 아빠 QMX(나중에 그게 뭐냐고 물어서 알게 된 QMX는 르노 삼성에서 연말쯤 출시한다는 새로운 SUV 모델이란다 -_-;; 짜식.. 차 이름을 고모보다 백 배쯤 많이 알고 실물 구분도 할 줄 안다)로 빨랑 차 바꾸게 해주세요!"라고 소리질렀는데
가장 압권은 5살 난 지환이가 뜬금없이 외친 소원이었다.
"달님님! 달님님! 애기 동생 잘 낳게(?) 해주세요! 아멘!"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외쳐대는  지환이의 반복되는 소원에 우린 모두 깔깔깔 웃어댔고, '달님'에 '님'자를 하나 더 붙여 새로운 극존칭을 만들어낸 데다, 수녀원 부설 어린이집을 다녀 기도엔 일가견이 생겼다는 지환이의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지나 함께 지켜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
(큰 동생은 늘 자식이 셋은 있어야 한다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지만, 올케는 또 다시 지긋지긋한 육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형편이라 지환이가 동생을 볼 가능성은 현재 지극히 낮다 ㅋㅋ)

나 역시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기는 했지만
조카들처럼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런저런 민속 풍습을 미신이라고 코웃음 치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재미삼아서, 또는 '혹시 모르니까' 대보름날이나 한가위날의 달맞이며, 유성우 내리는 날의 소원빌기에 열심히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때 열심히 빌었던 소원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루어지기도 했던 것 같다. ^^;;  

대학원 다니던 시절, 논문학기 앞두고 종합시험에 꼭 붙게 해달라고 빌었다든지,
여행을 계획하던 해엔, 부디 엄마가 무사히 환절기를 넘겨 마음 편히 내가 먼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든지...

물론 반복해서 빌어도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소원도 있긴 하지만
아마도 난 앞으로도 장단기기억력상실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답게 꿋꿋이 소원을 빌어댈 게 틀림없다.
이루어지면 좋은 거고, 안 이루어져도 어차피 내가 손해볼 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정작 가장 둥근 보름달은 추석 다음날에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오늘은(시간상 벌써 어제지만) 밤하늘을 내다볼 생각도 못하고 지내고 말았다.

지금쯤은 집 뒤쪽으로 많이 기울었을 '달님님'에게 마음속으로나 또 한 번
소원을 주절거려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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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투덜일기 2007. 9. 18. 17:42
비가 와서 커피향 그윽하다며 좋아라할 땐 언제고
오늘은 또 비 핑계로 계속 기분이 바닥이다.
아무래도 명절증후군의 전초증상인 것 같기도 하다.
추석에 대거 손님을 치르려면 대청소부터 해야할 형편이라
요 며칠 아버지 옷가지를 거의 정리해 박스에 담아두었다가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등산복 욕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옷가지는 커다란 박스 3개에 담고도 남아 푸대자루와 큰 비닐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왜 하필 이리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기증품을 가지러 왔는지...
아버지가 용띠라서 움직이실 때마다 비가 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생전에 여행 가셨을 때도 종종 그랬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건대병원으로 옮기던 날도,
발인 날 장례식장에서 화장터로, 다시 납골당으로 모시던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렸다.
어제는 구름 한점 없이 날이 화창하더니만...


어제 오늘 온 집안 커튼을 떼서 빨고 말려 다시 매달았더니 어깨와 목이 아프다.
사촌동생들이랑 동생네 와서 잘 때 덮을 이불이랑 요도 왕창 빨아야 하는데 날씨가 왜 이런다냐.
원래 이런 건 지난주쯤 해치웠어야 하는 일이건만 꾸물럭거리며 게으름에 젖어 있다 마음이 바빠지니 또 기분만 바닥을 친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 신경쓰고 가족 대소사 챙기는 '주부'로 사는 삶이 죽도록 싫다는 게
어린시절부터 나의 표면적인, 그리고도 "중대한"  독신 지향 사유였는데 -_-''
벌 받았는지 철들고 나서부턴 아픈 엄마 대신 대리 '주부'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점점 많아져
이젠 아예 돈 못받는 파출부가 되어버린 내 신세도 오늘따라 몹시 처량하다.
주부노릇에 직장 일까지 슈퍼우먼이 되려고 자진해서 선택한 저들이야 그렇다치고
자유롭고 싶어 조직도 떠난 내 꼬라지는 만날 왜 이런가 말이다.
원래 쓸데없는 푸념과 한탄에 사로잡히면 끝없이 맥떨어져 헤어나올 수가 없는 법.
소용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온종일 모든 것에 앙탈을 부렸더니
괜스레 옆구리만 결린다.
그 여자 성질 참 못됐다.

그나마 바닥을 차고 오르기 위한 위로용 혼잣말 하나.
확실히 가족은 멍에지만, 그래도 나는 한쪽 가족만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양쪽 가족 다 거느리고 있는 유부녀들--가령 울 올케들 같은--봐서 참아보자...고 생각하지만 남들의 불행을 담보로 느끼는 위안은 그리 설득력도 없고 별로 달콤하지 아니하다)

아무래도 이번 추석은 몹시 힘들고 슬프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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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투덜일기 2007. 9. 17. 23:29
조카들은 고모의 헤어스타일 변신을 마구 비웃어댔다. ㅜ.ㅜ
하필 작은올케도 미용실에 가서 추석맞이 파마를 했다는데
작은엄마는 예쁘지만 고모는 이상하다고 정민공주 등이 깔깔대며 놀렸다.
심지어 짖궂은 정민공주는 "이상한 꼬불꼬불 머리를 한 아줌마 같은 고모!"라고
부르기까지...
늘어지는 귀고리와 목걸이, 은색 반짝이 의상으로 최대한 머리를 커버하려고 했던 나의
노력에 대해서도 "머리가 이상하니까 큰 귀고리랑 목걸이를 했구나! 근데 다 보여, 고모!"라고 일갈했다. 흑..

사실 동생들은 일주일전까지 내 몰골이 하도 추레했기 때문에 훨 나아졌다고 위로했으나
그 역시 나에겐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5살된 조카 지환이는 나를 이런 모습으로 묘사했었다.

아이들 눈에 비친 내 머리가 과연 얼마나 이상한지 파악해보고자
세 조카들에게 제발 고모 좀 그려달라고 부탁했더니
정민공주는 아예 보이코트, 6살된 녀석은 차마 그림이랄 수도 없는 낙서를 해놓고는 이상해진 고모라고 킬킬댔는데, 5살난 지환이가 그나마 고모 머리가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위로해주면서 그림도 꽤나 귀엽게 그려주었다.


결국 나는 다음날까지 샴푸하지 말라는 미용사의 말을 무시하고
미용실에서 돌아온 날부터 마구 감아주고 있는데, "탄력있는 컬"을 위해 단백질 파마를 권한 때문인지 별로 잘 안펴졌다. 쳇...

한동안은 계속해서 화려한 의상과 악세사리로 가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을듯;;
그놈의 빌어먹을 미용사 추석 연휴동안 배탈이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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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투덜일기 2007. 8. 19. 12:19

지나고 보면 세월은 참 잘도 간다는 걸 느낀다.
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9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절에 올라가 49재를 치렀다.
(참.. 절에선 제사를 지낸다고도 하지만  "'재'를 올린다"고도 표현하므로 어제 우리가 올린 의식은 49재가 맞다. 하지만 49'제'라는 말도 많이 쓰이는 듯...)
불교식으론 고인의 영혼이 49일 동안 아직 멀리 떠나지 않고 이승을 떠돌며 가족들 곁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49재는 정말로 고인을 멀리 떠나보내는 의식.
내가 보기엔 모든 장례 의식이 남은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데 더욱 방점이 찍히지만
그런 절차가 전통과 관습으로 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다시 친지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이 아버지의 옷을 준비했다가 살라드리고
상장과 머리 리본, 상복의 동정을 뜯어 같이 태우고
뜻 좋은 글귀를 함께 읽고 기도하는 의식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사실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어느 종교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좋은 데" 가셨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좋은 데 안 가셨다면 정말로 천국이나 극락 따윈 없는 걸 테니까.
심지어 독실한 천주교인인 친구 하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미 천국에 야훼와 함께 계시다는
신성한 메시지까지 받았단다. ^^

...


아버지의 일기장을 어제 돌려받았다.
1964년부터 두해 동안 군대 시절에 기록한 아버지의 일기장이 할아버지 유품 사이에 끼어 지금껏 보관 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운명 같기도 하다.
12년 전에 아버지가 손수 생겨오셨다면 쑥스러운 마음에 없애셨을지도 모르는데
그 일기장이 우리 손에까지 무사히 전달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할아버지 고서와 유품을 모두 간직했던 막내고모 덕분인 듯하다.  아.. 그 전에 장남의 일기장을 오래도록 소중히 갖고 계셨던 우리 할아버지 덕분도 크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막내고모는 할아버지 유품 사이에서 우리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기록이 있었던 걸 생각해냈고, 그게 우리 아버지 일기장이란 걸 확인하고는 며칠 동안이나 울었다고 했다.
일기장엔 장남으로서 가난한 식솔들을 챙겨야하는 책임감과 애정이 담겨 있고
스무살때부터 연애중이었던 우리 엄마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사실 막내고모는 25살의 청년이 기록한 애틋한 연정의 주인공이 혹시나 우리 엄마가 아니면
울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끝까지 다 읽고 상황을 파악하기 전엔 함부로 일기장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밝히기가 조심스러웠단다.
(설령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대도 우리에겐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고모는 제일 먼저 '이'씨인 울 엄마의 영문 이니셜이 뭐냐고 넌지시 물었더랬다.
나는 어린 시절 이미 부모님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경력이 있던 터라
Rhee로 썼던 울 엄마의 이니셜을 확인해주었고, 고모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우리 부모님이 8년간 연애 끝에 결혼한 순애보 커플이란 걸 다들 알면서도, 젊은 시절 꽤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버지가 혹 바람이나 폈을까봐 염려했던 거다.

고모는 누구보다 우리 식구들이 제일 먼저 아버지 일기장을 읽고 싶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난 10여년 간 큰형님을 부모처럼 여겼던 작은아버지들과 고모들도 읽고 싶어하셨으므로
어르신들부터 돌려읽고 어제야 비로소 우리 손에 일기장이 들어오게 된 것.
일기장을 읽어본 친척 어르신들은 "역시 장남은 다르더라.."고 하셨다.
장남인 큰동생도 남다른 장남의 책임을 실감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아껴읽고 싶은 마음에 동생들과 함께 앞부분만 몇 군데 읽어보다 말았다.

이북에서 월남해 부산에서 피난시절을 보낸 우리 집안에 특별히 오래묵은 골동품 가보 따위는 없지만, 우리가 늘 자랑하는 가보 1호는 부모님이 8년간 연애하는 동안 주고받으신 편지뭉치였는데, 이젠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가보 2호가 생겼다.

여러 권의 앨범 한 가득 젊은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의 추억이 순간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젊다 못해 어리게 느껴지는 스물다섯 살 아버지의 또 다른 추억을 갖게 되어 몹시 기쁘다.
이니셜 R, 또는 子라는 호칭으로 아버지의 일기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인 우리 엄마 역시 아직도 차마 일기장을 읽지 못하겠다 하신다.
내용도 감동이지만 만년필 글씨체는 또 얼마나 유려한지... 글씨를 잘 써서 행정병이 되었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못믿었던 건 아니지만 새삼 놀랍다. 해서, 엄마랑 나랑은 두고두고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듯 읽어볼 생각이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선 당연히 좋은 기억만 남는다지만, 얼핏 들여다본 청년 아버지의 모습 역시 참 멋진 분이었음은 확실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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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07. 8. 13. 01:33

언제부턴가 몸 구석구석에 붉으레하게 뭔가 불쑥 솟기 시작했다.
이른바 '종기'라고 이름 붙일 만큼 커다란 녀석도 있지만
흔히 얼굴에 솟아나는 뾰루지처럼 작은 녀석들도 있는데
원래부터 두피가 얇아서 머릿속엔 그런 것들이 자주 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뜬금없이 등 한복판, 옆구리, 귓불, 이마 같은데서 솟아나는 데는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그닥 기름진 음식을 먹어대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평소보다 더 푸성귀만 먹고 사는데;;)
더워서 매일 안씻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대체 이유가 뭔가 아리송해 하고 지냈는데
내 얘길 들은 지인 하나가 명확하게 원인을 짚어주었다.
몸 안의 열과 화 때문이란다.
나도 스트레스 때문이겠거니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그 스트레스가 열기와 화기로 뭉쳐
견디지 못하고 살갗을 뚫고 나오는 거란 얘길 들으니 좀 섬뜩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괜히 쎈 척, 밝은 척, 안 힘든 척, 생각 안하는 척 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펑펑 울고, 소리치고 싶을 때 소리치고, 그리우면 마음껏 그리워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이젠 매일 안울어도 될만큼 마음이 다독여졌다고 믿었는데
그 말 듣고 생각해보니 다른 건 몰라도 울음은 그간 좀 많이 참았던 것 같다.

처음엔 내가 울면 엄마도 덩달아 따라울기 때문에 주변에서 자꾸 만류했었고,
엄마도 부실한데 나까지 정신을 놓아버릴까 염려한 동생들이 하도 걱정을 해대는 바람에
마음껏 우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다.
요즘도 조카들은 자기도 모르게 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가는 얼른 내 눈치를 본다.
그러면 제일 머리 굵은 정민공주는 할아버지 얘기를 꺼낸 녀석에게 "너 때문에 고모 또 울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하다. 울보 고모 때문에 어린 조카들까지 신경을 쓰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가족들이 너무 많이 슬퍼하면 고인이 좋은 데 못간다는 얘기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얘기일까. 아니, 사후에 천국이든 극락이든 고통이나 불행 따윈 없는 곳으로 절대자의 곁으로 갔으니 슬퍼할 필요 없다는 종교적인 관점은 도대체 어떻게 비롯됐을까.

하지만 내가 우는 건 그저 아버지가 곁에 안계시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위한 이기적인 슬픔이고 눈물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까 관습과 통념을 빌미로 하여 스스로를 위한 연민과 서러움까지 남들이 간섭하고 만류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인 것 같다. 물론 그들이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염려해서 하는 배려라는 건 알지만, 내 마음은 물론이고 몸까지도 종기를 앞세워 반기를 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블로그에도 아버지 얘기는 그만 써야지 생각했었다.
처음부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는 삼가려던 공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들은 좀처럼 공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슬픔을 노출된 공간에 자꾸 드러는 게
방문자들에 대한 일종의 폭력일 것도 같았다.
그런데 요즘도 내 사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아버지 이외의 주제로 뭔가 글을 써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낸다는 것은 역시 불가능했고, 그 자체로도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됐던 듯하다.
그러니 그냥 하던 대로 헛소리든 참소리든 주절주절 끼적이는 쓰레기통 같은 낙서장으로 삼는 수밖에 없겠다.

펄럭이는 감정에도, 생각에도 좀 더 솔직해지다보면
차차 온몸에 치솟는 열기와 화기도 차츰 가라앉지 않을까...
이것도 너무 뜬구름 잡는 식의 희망일까.

두고봐야지 별 수 있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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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외출

투덜일기 2007. 8. 2. 00:36
8월이 시작된 첫날...
복작거리는 시장통 같은 미술관엘 다녀왔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친구와 두 딸을 만나 함께 그림이나 공연을 보기도 하고
그냥 만나 수다를 떨다가 문방구 순례를 하는 것이 습관처럼 자리잡은 지 몇년째인데
올 여름엔 그들이 방학숙제로 시립미술관에 모네 전시회를 보러 온다고 했다.

처음엔 전시를 보고 나온 세 모녀와 잠깐 만나 수다나 떨려던 계획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나도 덩달아 전시관엘 들어갔고, 내가 가장 꺼려하는 미술관 분위기라고 할 수 있는 '시장판 북새통'이나 다름없는 시끄럽고 어수선한 전시장에서 최대한 빨리 그림을 둘러본 터라 별 감흥없이 전시장을 나서야 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뿌듯했던 것 같다.
역시나 변하지 않은 나의 문화적 허영심에 약간이나마 콧바람을 불어넣었기도 하고
늘 즐거운 친구 모녀와의 연례만남이 어쨌든 성사되었으므로.

고흐의 노랑
샤갈의 빨강에 이어
모네의 작품 이미지는 나에게 늘 연보라색으로 떠오른다.
가장 유명한 시리즈인 '수련' 시리즈 때문일 거라 생각하는데
이번 전시에도 수련 시리즈가 가장 집중 조명을 받았고 제일 큰 작품도 수련이었는데
말년에 시력이 흐려져 형체마저 흐트러진 '등나무'그림 같은 것에서도 나에겐 유독 연보라색이 마음에 남았다.

아쉽게도 내가 좋아하는 모네의 '예쁜' 그림들은 많이 찾아볼 수 없었고
생각보다 작품 수도 많지 않은 듯했지만
9월 26일까지 전시라니
애들이 바글거리지 않는 한가한 어느 때쯤 한 번 더 찬찬히 그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모르고 그냥 갔는데 GS 칼텍스 보너스 카드가 있으면 천원 할인을 해준대고
포인트 점수가 있으면 2천원을 추가로 할인해준단다.
정말로 다음에 또 가게 되면 꼭 할인받아서 봐야지... -_-;;

사실 같은 인상파라도 나는 역시 모네보다 고흐에 대한 편애가 심해서
모네의 작품에 대한 인상보다는 전시실 맨 마지막에 11월부터 시작되는 고흐 전시회의 예고편으로 걸어놓은 모조 작품들이 더욱 깊은 잔상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지금 미술관 구경이나 다닐 때인가.. 하는 자조보다
외출의 기꺼움이 더 큰 걸 보면 확실히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긴 한가 보다.
비록 그게 나의 이기심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다.
한 여자가 앞장서다보면 나머지 한 여자도 따라오지 않겠나.
그렇게 믿을란다.
내일은 더 모질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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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투덜일기 2007. 7. 26. 23:29

한 집안에 사는 두 여자의 행보가 슬슬 달라지고 있다.
한 여자에겐 슬픔과 허허로움이 대책없는 허기로 달려드는 모양이다.
끼니를 잘 챙겨먹는 것은 물론이고 냉장고 안 과일이며 간식이 어느 순간 싸그리 없어지는 날들이 이어짐과 동시에 체중이 계속해서 불어난다.
또 한 여자에겐 슬픔과 공허함이 주체할 수 없는 짜증으로 증폭되는 듯하다.
말 한마디도 곱게 나가는 법 없이 사사건건 발끈발끈 하다 보니 대조적으로 계속해서 체중이 빠지는 것도 같다.

물론 두 여자 모두 감정의 펄럭거림 때문에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말고, 또는 무슨 일을 하다 말고 울먹일 때도 있지만
다행히도 한 사람이 울어도 나머지 한 사람의 눈가는 건조한 경우가 많다.

한 여자는 한시도 혼자 있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듯,
엄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집구석 어딜 가든 졸졸 따라다니는데
한 여자는 이제 슬슬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한 여자는 여러모로 꽤 대단한 의지력을 발휘하여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반면, 한 여자는 여전히 무력감에 발목을 잡혀 허우적대고 있다.

어느덧 장마는 끝났대고, 여름은 깊어가고 폭염은 시작되었는데
살뜰하고 정성어린 손길을 대신한 어설픈 물주기만으로도 아직 화분들도 멀쩡하다.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물주기 따위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한 여자는 가신 분이 하늘에서도 초록 식물들을 보살피고 있기 때문인가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암호문처럼
산세베리아, 금전수 = ☆
스파트필름, 마리안느 = ◎
고무나무 = △
라고 적혀 진열장 앞에 붙어 있는 메모지를 보고 머리를 쥐어짜 날짜 세어가며 물주기를 책임지고 있는 여자는 그러다 어느 순간 화분들이 한꺼번에 죽어나갈까봐 그저 노심초사 중이다.

그래도 두 여자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천만다행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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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덜일기 2007. 7. 23. 04:56
잠이 안온다.
온종일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그러던 날도 있었는데
요샌 다시 식욕도 없고 밤엔 통 잠이 오질 않는다.
다행히 엄만 잘 주무시는데, 그 옆에서 질질 눈물 흘리며 뒤척거리다가 들키면
오히려 엄마 잠을 깨게 만드는 짓이라
영 잠이 안오면 일 핑계로 컴퓨터방에 앉아 있는다.
하지만 일은 단 한톨도 하질 않고... 아빠가 온종일 즐겨하시던 프리셀 카드놀이를 대신 하면서 또 빌빌 눈물을 흘리다 아침을 맞는다.

컴퓨터방 바닥엔 아빠가 담뱃불을 떨어뜨려 만들어놓은 탄 자국이 남아 있다.
따져보니 못마땅한 구석도 많은 아버지였다.

매일 저녁마다 반드시 참이슬 한 병을 식전에 반주로 드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얇다란 담배를 필터에 끼워 피우시긴 해도 하루 흡연량이 한갑 반을 넘기는 것도 못마땅했고
2000년 은퇴 이후 점점 잔소리 많은 할아버지처럼 변해가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이틀이 멀다하고 장을 봐다가 냉장고를 채워 나에게 새로운 반찬 만들기를 은근히 종용하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사소한 증상으론, 아니 몸이 대단히 불편하시지 않고는 절대로 병원에 안가는 고집도 못마땅했고
정치적으로 꽉 막혀 대화조차 불가능한 보수주의자인 것도 못마땅했고
비가오나, 눈이 오나, 몸살 기운이 있을 때조차도 등산 중독자처럼 일주일에 두번 가시는 등산을 반드시 고집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마흔 넘은 딸을 여전히 신데렐라로 불리게 만드는 아버지의 통행금지 시간도 못마땅했고...

특히 하루 네다섯 번도 넘는,
엄마가 약먹을 시간이 되면 엄마가 직접 챙기기 전에 먼저 당신이 컵에 물 떠와서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봉지까지 찢어준 뒤 엄마가 약을 삼키고 난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까지 대신 하시는 것도 못마땅했다.

아빠에게 못마땅한 걸 내가 꾹 참고 말하지 않았을 리 없었으니, 늘 투덜투털 지랄지랄...
해댄 바람에 난 자타공인 아빠에게 언제나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다.

반면에 나에게 아빠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었다.
귀가를 독촉하는 아버지의 문자 메시지나 전화는 차츰 귀엽게 생각될 정도였고
간혹 정치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순간이 와도 맨 마지막에 꽥 큰 소리를 치는 건 대부분 나였던 것 같다.
세 식구가 사는 집에서 우리 엄마는 왕비마마고, 나는 무수리고 아빠는 머슴이라는 농담을 곧잘 했었는데, 정말로 우리 모녀는 그간 아버지를 머슴 부리듯 했다는 걸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명절 때처럼 차가 필요할 정도로 큰 장을 볼 때가 아니면 반찬거리며 생활용품 사오는 장보기는 거의 아빠 몫이어서, 이삼일에 한 번씩 장바구니를 들고 집앞을 오가는 울 아버지가 천하의 애처가라는 건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아버지가 채워놓은 냉장고 안엔 사실 새로 요리해야 할 반찬거리보다 밤중에 내가 먹을 밤참거리와 과일이 더 많았고
엄마나 내가 졸지에 옥수수나 순대, 떡볶이 같은 먹거리가 먹고 싶다고 말 한 마디만 하면 득달같이 일어나 마을버스 타고 전철역 앞까지 가서 사다 나르신 분도 우리 아빠였고
쓰레기 봉투를 사오는 것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것도 늘 아빠가 하시던 일이었고
운동하기 싫어하는 엄마 손을 잡고 억지로라도 집앞 산책로로 끌고 가는 것도 아빠 몫이었고
화분 물주기, 거실 청소, 하물며 최근엔 마감에 바쁜 딸 대신 세탁기 돌리고 빨래 걷어 말리는 것까지 모두 담당이셨고
마감 핑계로 까칠해진 딸이 잠든 아침엔 손수 아침상 차려 엄마랑 같이 드시고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해놓고는 행여나 잠든 내가 깰세라 조심조심 발뒤꿈치 들고 내 방앞을 지나셨는데...
그런 자상한 아빠가 더는 우리 곁에 없다는 게 정말로 믿어지질 않는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억울하다.
모든 죽음엔 준비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졸지에 아버지를 도둑맞은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가 미치도록 슬픈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책임이 버거워서 더욱 슬퍼하는 건 아닌가 돌이켜보며 못된 딸은 가슴이 더 아프고 쓰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아버지 생각이 종일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데, 야속하게도 잠이 들면 꿈속에선 절대로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뻐근한 슬픔이 밀려들 땐 잠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잠도 잘 찾아오질 않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잃고 나면 잘해드린 기억보다 못해드린 기억만 남는다더니만
나 역시 수많은 죄책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런데 또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오랜 침묵을 지키다
돌연 이런 횡설수설을 하게 된 건, 잡다한 끼적임으로라도 아버지께 사죄하고 싶은 마음에 더하여 무슨 이야기든 가슴에서 풀어내야만 더 깊은 우울과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이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생전에도,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못된 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나는
아버지가 미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흐느껴 우는 것밖에 없으니 참으로 무기력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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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루

투덜일기 2007. 7. 14. 15:09
오늘은 음력으로 유월 초하루.
울 아버지는 양력으로 칠월 초하루에 돌아가셨는데...
불교 방식대로 따지면 오늘이 이칠일, 두번째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과거에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머니 상 치르면서 49재까지 7일마다 온가족이 절에 가 제사를 지내며 너무 고단하고 슬퍼서, 아버지 영정을 집 근처 엄마 다니시는 절에 모셔놓고는
주지스님께 매주 제사지내러 올라가진 않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냥 49재만 올리는 것으로 하고, 간간히 마음 허허로울 때만 절에 올라가겠노라고.

스님은 어디서든 간절히 마음을 담아 49일동안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올리면 되는 것이니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고, 어쨌거나 스님들은 매일 울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올리겠다 하셨다.

오늘 엄마는 당연히 초하루 법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나는 또 주체할 수 없이 울게 될까봐
절에 올라가는 걸 망설였는데, 특별히 등산복 입으신 사진으로 내가 골라 만든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뵙고 싶어서 결국 따라 나섰다.

사실 열심히 절에 다니는 사람은 우리 엄마였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등산길에 들른 산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 풍경소리, 염불소리,
종소리를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삼우제날 아버지 사진을 절에 모셔놓고 내려오며 우린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오늘 다시 아버지 사진과 위패가 놓인 법당에 들어서면서부터 당연히 눈물이 났는데
그래도 잘 다녀왔다 싶다.
어차피 모든 제례절차는 돌아가신 분보다 산 사람을 위한 위로방식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도 각자의 종교와 상관 없이 모두들 간절히 기도를 올렸듯이, 친척과 지인들은 여전히 교회에서 성당에서 절에서 집에서 울 아버지의 명복과 남은 가족의 행복을 빌고 있단다.
사실 나는 아버지를 잃으며 신에 대한 회의가 더욱 강해졌지만, 그래도 내 오만함 때문에 누구에게든 누를 끼치면 안되니까 여전히 열심히 기도를 올리긴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결국 내 마음 편해지려는 이기적인 행동 같아 민망하다.

하지만...
산 사람들이나 종교가 다르고 이념이 달라 선을 긋고 편 나누기를 할 뿐
영의 세계에선 모두가 하나라서 궁극의 선한 마음만 갖는다면 종교가 조금 다르다고 문제 될 것 없다는 오늘 주지스님의 말씀을 그냥 묵묵히 믿고 싶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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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음

투덜일기 2007. 7. 10. 01:15
전화로, 조심스러운 문자 메시지로 다들 묻는다.
괜찮냐고...
잘 지내고 있느냐고...

당연히 괜찮치 않을 걸 짐작하면서도 염려하는 마음으로 묻는다는 걸 알기에
모녀는 괜찮다고 대답한다.
사실 괜찮기도 하고, 썩 잘 지내고 있다.

무력감 때문인지 자도자도 또 잠이 오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 약 핑계로 끼니끼니 잘 챙겨먹고,
한달간의 공백 때문에 스토리가 좀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낯익은 일일연속극도 쳐다보고,
어린 조카들의 재롱에 간혹 웃기도 한다.
내 경우, 머리와 마음이 텅 빈 것만 같던 시기가 지나고 슬슬 밀린 일 걱정도 되기 시작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끄적일 여유가 생긴 걸 보면 정말로 괜찮은 게다.

그런데...
나는 엄마와 내가 아빠 없이도 너무 괜찮고 잘 지내서 더 속상하고 슬프다.
오히려 중환자실 앞을 지킬 땐 허기도 모르겠더니 이젠 끼니 때가 지나면 어김없이 배가 고프고,
한달 이상씩 모두 연이어 늦어지게 생긴 원고마감에 신경이 쓰이고,
옆에 누가 있으면 좀체 깊이 잠들지 못하던 인간이 버젓이 엄마 옆 아빠 자리에 누워
쿨쿨 잠을 잔다.
엄마가 약기운을 빌어서라도 코를 골며 주무시는 게 너무도 감사한데, 동시에 또 그게 섭섭하다.

수시로 울컥 울음이 터져나오는 거야 당연한 것일 테고,
그 밖에 우리가 너무 괜찮고 잘 지내는 건 아빠에 대한 배신 같다.
이제 겨우 9일이 지났을 뿐이니 몹시 안괜찮아야 정상이지 않겠나.

아무튼
아버지가 우릴 배신하고 떠나셨듯
남은 우리들도 배신자 가족답게 꽤 괜찮게,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래서 더욱 슬플따름이다.

그리고
막연한 걱정뿐이지 아직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게 내 유일한 변명이다.
참 알량한 딸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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