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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07. 7. 23. 04:56
잠이 안온다.
온종일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그러던 날도 있었는데
요샌 다시 식욕도 없고 밤엔 통 잠이 오질 않는다.
다행히 엄만 잘 주무시는데, 그 옆에서 질질 눈물 흘리며 뒤척거리다가 들키면
오히려 엄마 잠을 깨게 만드는 짓이라
영 잠이 안오면 일 핑계로 컴퓨터방에 앉아 있는다.
하지만 일은 단 한톨도 하질 않고... 아빠가 온종일 즐겨하시던 프리셀 카드놀이를 대신 하면서 또 빌빌 눈물을 흘리다 아침을 맞는다.

컴퓨터방 바닥엔 아빠가 담뱃불을 떨어뜨려 만들어놓은 탄 자국이 남아 있다.
따져보니 못마땅한 구석도 많은 아버지였다.

매일 저녁마다 반드시 참이슬 한 병을 식전에 반주로 드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얇다란 담배를 필터에 끼워 피우시긴 해도 하루 흡연량이 한갑 반을 넘기는 것도 못마땅했고
2000년 은퇴 이후 점점 잔소리 많은 할아버지처럼 변해가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이틀이 멀다하고 장을 봐다가 냉장고를 채워 나에게 새로운 반찬 만들기를 은근히 종용하시는 것도 못마땅했고
사소한 증상으론, 아니 몸이 대단히 불편하시지 않고는 절대로 병원에 안가는 고집도 못마땅했고
정치적으로 꽉 막혀 대화조차 불가능한 보수주의자인 것도 못마땅했고
비가오나, 눈이 오나, 몸살 기운이 있을 때조차도 등산 중독자처럼 일주일에 두번 가시는 등산을 반드시 고집하는 것도 못마땅했고
마흔 넘은 딸을 여전히 신데렐라로 불리게 만드는 아버지의 통행금지 시간도 못마땅했고...

특히 하루 네다섯 번도 넘는,
엄마가 약먹을 시간이 되면 엄마가 직접 챙기기 전에 먼저 당신이 컵에 물 떠와서 약상자에서 약을 꺼내 봉지까지 찢어준 뒤 엄마가 약을 삼키고 난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까지 대신 하시는 것도 못마땅했다.

아빠에게 못마땅한 걸 내가 꾹 참고 말하지 않았을 리 없었으니, 늘 투덜투털 지랄지랄...
해댄 바람에 난 자타공인 아빠에게 언제나 '제일 무서운 사람'이었다.

반면에 나에게 아빠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었다.
귀가를 독촉하는 아버지의 문자 메시지나 전화는 차츰 귀엽게 생각될 정도였고
간혹 정치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순간이 와도 맨 마지막에 꽥 큰 소리를 치는 건 대부분 나였던 것 같다.
세 식구가 사는 집에서 우리 엄마는 왕비마마고, 나는 무수리고 아빠는 머슴이라는 농담을 곧잘 했었는데, 정말로 우리 모녀는 그간 아버지를 머슴 부리듯 했다는 걸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명절 때처럼 차가 필요할 정도로 큰 장을 볼 때가 아니면 반찬거리며 생활용품 사오는 장보기는 거의 아빠 몫이어서, 이삼일에 한 번씩 장바구니를 들고 집앞을 오가는 울 아버지가 천하의 애처가라는 건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아버지가 채워놓은 냉장고 안엔 사실 새로 요리해야 할 반찬거리보다 밤중에 내가 먹을 밤참거리와 과일이 더 많았고
엄마나 내가 졸지에 옥수수나 순대, 떡볶이 같은 먹거리가 먹고 싶다고 말 한 마디만 하면 득달같이 일어나 마을버스 타고 전철역 앞까지 가서 사다 나르신 분도 우리 아빠였고
쓰레기 봉투를 사오는 것도,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것도 늘 아빠가 하시던 일이었고
운동하기 싫어하는 엄마 손을 잡고 억지로라도 집앞 산책로로 끌고 가는 것도 아빠 몫이었고
화분 물주기, 거실 청소, 하물며 최근엔 마감에 바쁜 딸 대신 세탁기 돌리고 빨래 걷어 말리는 것까지 모두 담당이셨고
마감 핑계로 까칠해진 딸이 잠든 아침엔 손수 아침상 차려 엄마랑 같이 드시고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해놓고는 행여나 잠든 내가 깰세라 조심조심 발뒤꿈치 들고 내 방앞을 지나셨는데...
그런 자상한 아빠가 더는 우리 곁에 없다는 게 정말로 믿어지질 않는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억울하다.
모든 죽음엔 준비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졸지에 아버지를 도둑맞은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가 미치도록 슬픈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책임이 버거워서 더욱 슬퍼하는 건 아닌가 돌이켜보며 못된 딸은 가슴이 더 아프고 쓰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아버지 생각이 종일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데, 야속하게도 잠이 들면 꿈속에선 절대로 아버지를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뻐근한 슬픔이 밀려들 땐 잠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잠도 잘 찾아오질 않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잃고 나면 잘해드린 기억보다 못해드린 기억만 남는다더니만
나 역시 수많은 죄책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그런데 또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오랜 침묵을 지키다
돌연 이런 횡설수설을 하게 된 건, 잡다한 끼적임으로라도 아버지께 사죄하고 싶은 마음에 더하여 무슨 이야기든 가슴에서 풀어내야만 더 깊은 우울과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이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생전에도,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못된 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나는
아버지가 미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흐느껴 우는 것밖에 없으니 참으로 무기력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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