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투덜일기 2007. 8. 19. 12:19

지나고 보면 세월은 참 잘도 간다는 걸 느낀다.
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9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절에 올라가 49재를 치렀다.
(참.. 절에선 제사를 지낸다고도 하지만  "'재'를 올린다"고도 표현하므로 어제 우리가 올린 의식은 49재가 맞다. 하지만 49'제'라는 말도 많이 쓰이는 듯...)
불교식으론 고인의 영혼이 49일 동안 아직 멀리 떠나지 않고 이승을 떠돌며 가족들 곁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49재는 정말로 고인을 멀리 떠나보내는 의식.
내가 보기엔 모든 장례 의식이 남은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데 더욱 방점이 찍히지만
그런 절차가 전통과 관습으로 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다시 친지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이 아버지의 옷을 준비했다가 살라드리고
상장과 머리 리본, 상복의 동정을 뜯어 같이 태우고
뜻 좋은 글귀를 함께 읽고 기도하는 의식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사실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어느 종교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좋은 데" 가셨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좋은 데 안 가셨다면 정말로 천국이나 극락 따윈 없는 걸 테니까.
심지어 독실한 천주교인인 친구 하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미 천국에 야훼와 함께 계시다는
신성한 메시지까지 받았단다. ^^

...


아버지의 일기장을 어제 돌려받았다.
1964년부터 두해 동안 군대 시절에 기록한 아버지의 일기장이 할아버지 유품 사이에 끼어 지금껏 보관 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운명 같기도 하다.
12년 전에 아버지가 손수 생겨오셨다면 쑥스러운 마음에 없애셨을지도 모르는데
그 일기장이 우리 손에까지 무사히 전달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할아버지 고서와 유품을 모두 간직했던 막내고모 덕분인 듯하다.  아.. 그 전에 장남의 일기장을 오래도록 소중히 갖고 계셨던 우리 할아버지 덕분도 크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막내고모는 할아버지 유품 사이에서 우리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기록이 있었던 걸 생각해냈고, 그게 우리 아버지 일기장이란 걸 확인하고는 며칠 동안이나 울었다고 했다.
일기장엔 장남으로서 가난한 식솔들을 챙겨야하는 책임감과 애정이 담겨 있고
스무살때부터 연애중이었던 우리 엄마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사실 막내고모는 25살의 청년이 기록한 애틋한 연정의 주인공이 혹시나 우리 엄마가 아니면
울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끝까지 다 읽고 상황을 파악하기 전엔 함부로 일기장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밝히기가 조심스러웠단다.
(설령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대도 우리에겐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고모는 제일 먼저 '이'씨인 울 엄마의 영문 이니셜이 뭐냐고 넌지시 물었더랬다.
나는 어린 시절 이미 부모님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경력이 있던 터라
Rhee로 썼던 울 엄마의 이니셜을 확인해주었고, 고모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우리 부모님이 8년간 연애 끝에 결혼한 순애보 커플이란 걸 다들 알면서도, 젊은 시절 꽤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버지가 혹 바람이나 폈을까봐 염려했던 거다.

고모는 누구보다 우리 식구들이 제일 먼저 아버지 일기장을 읽고 싶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난 10여년 간 큰형님을 부모처럼 여겼던 작은아버지들과 고모들도 읽고 싶어하셨으므로
어르신들부터 돌려읽고 어제야 비로소 우리 손에 일기장이 들어오게 된 것.
일기장을 읽어본 친척 어르신들은 "역시 장남은 다르더라.."고 하셨다.
장남인 큰동생도 남다른 장남의 책임을 실감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아껴읽고 싶은 마음에 동생들과 함께 앞부분만 몇 군데 읽어보다 말았다.

이북에서 월남해 부산에서 피난시절을 보낸 우리 집안에 특별히 오래묵은 골동품 가보 따위는 없지만, 우리가 늘 자랑하는 가보 1호는 부모님이 8년간 연애하는 동안 주고받으신 편지뭉치였는데, 이젠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가보 2호가 생겼다.

여러 권의 앨범 한 가득 젊은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의 추억이 순간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젊다 못해 어리게 느껴지는 스물다섯 살 아버지의 또 다른 추억을 갖게 되어 몹시 기쁘다.
이니셜 R, 또는 子라는 호칭으로 아버지의 일기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인 우리 엄마 역시 아직도 차마 일기장을 읽지 못하겠다 하신다.
내용도 감동이지만 만년필 글씨체는 또 얼마나 유려한지... 글씨를 잘 써서 행정병이 되었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못믿었던 건 아니지만 새삼 놀랍다. 해서, 엄마랑 나랑은 두고두고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듯 읽어볼 생각이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선 당연히 좋은 기억만 남는다지만, 얼핏 들여다본 청년 아버지의 모습 역시 참 멋진 분이었음은 확실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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