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투덜일기 2007. 9. 18. 17:42
비가 와서 커피향 그윽하다며 좋아라할 땐 언제고
오늘은 또 비 핑계로 계속 기분이 바닥이다.
아무래도 명절증후군의 전초증상인 것 같기도 하다.
추석에 대거 손님을 치르려면 대청소부터 해야할 형편이라
요 며칠 아버지 옷가지를 거의 정리해 박스에 담아두었다가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등산복 욕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옷가지는 커다란 박스 3개에 담고도 남아 푸대자루와 큰 비닐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왜 하필 이리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기증품을 가지러 왔는지...
아버지가 용띠라서 움직이실 때마다 비가 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생전에 여행 가셨을 때도 종종 그랬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건대병원으로 옮기던 날도,
발인 날 장례식장에서 화장터로, 다시 납골당으로 모시던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렸다.
어제는 구름 한점 없이 날이 화창하더니만...


어제 오늘 온 집안 커튼을 떼서 빨고 말려 다시 매달았더니 어깨와 목이 아프다.
사촌동생들이랑 동생네 와서 잘 때 덮을 이불이랑 요도 왕창 빨아야 하는데 날씨가 왜 이런다냐.
원래 이런 건 지난주쯤 해치웠어야 하는 일이건만 꾸물럭거리며 게으름에 젖어 있다 마음이 바빠지니 또 기분만 바닥을 친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 신경쓰고 가족 대소사 챙기는 '주부'로 사는 삶이 죽도록 싫다는 게
어린시절부터 나의 표면적인, 그리고도 "중대한"  독신 지향 사유였는데 -_-''
벌 받았는지 철들고 나서부턴 아픈 엄마 대신 대리 '주부'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점점 많아져
이젠 아예 돈 못받는 파출부가 되어버린 내 신세도 오늘따라 몹시 처량하다.
주부노릇에 직장 일까지 슈퍼우먼이 되려고 자진해서 선택한 저들이야 그렇다치고
자유롭고 싶어 조직도 떠난 내 꼬라지는 만날 왜 이런가 말이다.
원래 쓸데없는 푸념과 한탄에 사로잡히면 끝없이 맥떨어져 헤어나올 수가 없는 법.
소용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온종일 모든 것에 앙탈을 부렸더니
괜스레 옆구리만 결린다.
그 여자 성질 참 못됐다.

그나마 바닥을 차고 오르기 위한 위로용 혼잣말 하나.
확실히 가족은 멍에지만, 그래도 나는 한쪽 가족만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양쪽 가족 다 거느리고 있는 유부녀들--가령 울 올케들 같은--봐서 참아보자...고 생각하지만 남들의 불행을 담보로 느끼는 위안은 그리 설득력도 없고 별로 달콤하지 아니하다)

아무래도 이번 추석은 몹시 힘들고 슬프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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