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일기'에 해당되는 글 503건

  1. 2009.03.08 가지치기 13
  2. 2009.03.03 한풀이 16
  3. 2009.02.21 졸업식 6
  4. 2009.02.12 타임머신 20
  5. 2009.02.10 독촉전화 23
  6. 2009.01.29 두통 15
  7. 2009.01.19 소심 20
  8. 2009.01.09 악몽 9
  9. 2008.12.24 짜증 22
  10. 2008.12.22 억울 13

가지치기

투덜일기 2009. 3. 8. 17:34
몇그루 되지도 않는 나무이건만 2년간 방치했더니 작년 여름 집앞 꼴이 완전 밀림스러웠다.
집이 나무로 가려져 골목어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 나('진짜' 마당 있는 집을 꿈꾸는 자)로선 괜히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키큰 나무가 서로 맞닿아 하늘을 가린 건 멋져보일지 몰라도 입구에 선 작은 사철나무와 라일락이 서로 가지를 이어 놓은 건 흉가 느낌이 났고, 작년에 앵두가 열렸을 때 보니 가엾게도 너무 길게 자란 가지가 무거워 비가 올 땐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쳐졌다. 게다가 나뭇가지가 무성하면 여름에 모기들이 어찌나 많이 꼬이는지!
더욱이 내가 제일 꼴보기 싫어하는 무궁화 나무는 엄청나게 가지를 뻗고 자라, 여름 내내 세차도 잘 안하는 내 차에 더럽게 뭉쳐 떨어지는 꽃뭉치를 퍽퍽 뿌려댔다. 원래도 무궁화꽃 예쁜 줄 모르겠고, 벌레꼬이기 대장인데다 심지어 차위에 떨어져 누렇게 썪는 꽃뭉치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무궁화나무는 예전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확 베어버리시라고 요구했던 나무다.
해서 올해는 봄되면 꼭 가지치기를 해야지 마음먹고, 가지치기의 적당한 시기도 인터넷으로 검색해놓았었다.
가장 중요한 앵두나무의 경우는 2월말에서 3월초에 꽃눈 나기 전에 하는 거라고.
2월말엔 워낙 노느라 바빴기 때문에 3월초에 하지 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일주일을 다 보낸 어제 며칠을 별러 잡은 날이었기에 전정가위와 톱을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우리집 앵두나무는 심한 편은 아니지만 약간은 해걸이를 한다. 한해씩 번갈아가면서 앵두가 많이 열리고 덜 열린다는 얘기다. 재작년 앵두철은 워낙 경황이 없었던 터라 기억나질 않는데, 작년엔 가지치기도 하지 않았는데 앵두가 정말로 많이 열렸다. 그나마도 다 따먹기 전에 엄마의 입원으로 다 말려버렸지만 말이다.
과실나무들이 다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무학(?)을 전공한 막내동생에 따르면 원래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줘야 열매가 많이 맺힌단다. 어차피 열매는 나무들이 후세를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라, 가지치기를 하면 자기가 죽는 줄 알고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얘기. 그걸 노리고 가지를 잘라버리는 인간들의 심보가 끔찍하긴 하지만 아무렇게나 뻗어 길어진 가지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내가 가지치기의 요령에 대해 아는 것도 아니니, 막상 나무 앞에 서긴 했어도 막막했다.
작년에 읽은 책의 구절을 염두에 두긴 했었다.

가지치기를 할 때 절대로 무턱대고 가지를 잘라선 안된다. 우선 부러지거나 죽은 가지를 먼저 잘라낸 다음 웃자란 가지를 잘라주는데, 이때는 반드시 눈의 위치를 파악하고 눈 바로 위를 눈의 반대방향이 되도록 사선으로 잘라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빗물이 눈속으로 들어가 얼거나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오경아, <소박한 정원> 121쪽)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언제나 난감할 만큼 거리감이 있다. 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어느 눈의 방향을 확인하란 말인지? 가지가 단단해서 전정가위로 잘 잘리지도 않는데 사선인지 직선인지 신경쓸 겨를이 어디 있나? 톱으로 우툴두툴 자르는 건 절대 안된단 말씀?
젠장. 내 마음대로 손길 닿는대로 <무턱대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작년 초여름에 심하게 늘어졌던 기억이 있는 앵두나무의 긴가지들을 우선적으로 잘라내며 보니 아뿔싸, 이미 꽃눈이 다 돋아났더라. 분홍색 기운이 완연해 보이는 꽃눈이 다닥다닥 달린 가지들을 마구 잘라내며 올해는 앵두를 맛보기 글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앵두나무는 생각보다 꽤나 단단했다. 새끼손가락 굵기도 안되는 가지들도 가위로는 잘 잘리지 않았다. 전정가위를 두손으로 잡고 힘주어 잘라도 잘 안 잘릴 정도로 단단했는데, 상대적으로 무궁화와 사철나무는 꽤나 무르더군. 앵두나무는 가는 가지에 톱질을 해도 잘 안잘라지던데, 무궁화와 사철나무는 난생 처음 해보는 가지치기 톱질임에도 슥삭슥삭 굵은 가지가 잘려나갔다.
생각 같아선 무궁화 가지들을 더 많이 쳐내고 싶었는데 신장의 열세로 손닿는 부분만 자르고 보니 나란히 서서 서로 가지를 얽고 있는 세 그루 나무들의 전체적인 꼬락서니는 꽤나 우스웠다. 그런데도 전정가위와 톱을 들고 나와 망설임없이 쓱쓱 가지를 쳐내는 내 모습이 대단히 전문적으로 보였는지 이웃분들이 나와 한마디씩 거들면서 신기해 했다. -_-a
물론 높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전체적인 나무의 모양새를 잡는 일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사다리가 집에 있기야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나무 가꾸기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고, 금세 힘도 딸렸다. 이번엔 그저 지저분하게 뻗은 가지들을 시원하게 이발시켜 준 것에만 만족하기로 했다. 초보 나무이발사의 솜씨로 헤어디자이너 같은 스타일을 기대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어쨌거나 좁아터진 마당 한구석이 조금은 훤해져 속이 시원했다.
다만 그것도 일이라고 톱질에 힘쓴 어깨와 가위를 잡았던 오른손아귀가 오늘까지 꽤나 아프다.
아무렇게나 톱질과 가위질을 해놓은 만신창이 앵두나무에서 과연 올해는 수확을 얼마나 보려나, 그것이 궁금하다. 
그리고 어제의 교훈: 마당 있는 집에서 예쁜 정원 감상하며 살려면 우선 집을 살 돈도 많이 벌어 놓아야겠지만 꾸준히 정원 가꾸는 인력을 고용할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 정원 가꾸는 솜씨가 있는 사람을 데리고 살거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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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풀이

투덜일기 2009. 3. 3. 14:11

설날 이후론 계속 마음이 바빴다. 막다른 벼랑끝에 몰리듯 원고독촉을 받는 상황인데도 내 정신상태는 초절정마감모드로의 전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잘 지키는 번역가의 평판은 이미 3년전부터 흐지부지 무너져버렸으니 배째라는 고약한 심보가 더 발동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어서 지인들이 만남을 청하면 <어차피 밥은 먹어야하니까...>라는 핑계로 아무 때나 짬을 내 외출을 시도하는 일을 마구 저지를 순 없었다. 이런저런 집안 행사로 이미 미루고 또 미뤄줬던 나의 친교생활은 결국 원고마감과 함께 한풀이를 하듯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개강, 개학이 맞물려 있으니 그 전에 만남과 놀이를 <해치워야>한다는 의무감도 불타올랐다. 신학기의 시작인 3월엔 아무래도 다들 학업이든 작업이든 초심을 잡아야한다는 새해결심 비슷한 다짐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말이다(물론 나는 빼고;;) 

결국 지난주는 월요일부터 꼬박 일주일을 넘겨 다시 월요일까지 단 하루도 집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은 무려 점심과 저녁으로 나누어 약속을 두탕(!)씩 뛰어야 했다. 연일 집에 틀어박혀 붙박이처럼 지냈던 저질 체력으론 당연히 무리가 왔다. 여드레 동안, 10명의 친구를 거의 각각 만났고(한 친구는 두번이나!) 조카 입학전에 가기로 약속했던 그림책 전시를 봤고, <워낭소리>와 끝났다고 포기했던 영화 <쌍화점>을 봤고, 그 가운데 생일 모임은 네번이나 되었다. 서대문, 서초동, 강남역, 압구정동, 신촌, 홍대앞, 이태원, 일산, 파주, 광화문, 오이도, 다시 홍대앞까지 마치 홍길동이라도 된 양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돌아다녔던 터라 매일 외출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다리허리가 아팠고 연일 기름진 음식을 과식하여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그렇게 매일 거의 대중교통수단으로 돌아다녔으니 억지로라도 운동이 되었을 법도 한데, 어제 전철을 두번이나 갈아타고 오이도에 갔던 게 주효했는지 10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눈이 붙어 잘 떨어지질 않는다. 아참... 오이도엔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조개구이는 역시 을왕리가 훨씬 낫더라. 가격은 비슷해도(새우+조개구이+칼국수 세트 중간크키 = 7만원) 조개와 새우의 양도 작고 일단 양념맛도, 곁다리 반찬도 형편없었다. 고현정과 천정명이 드라마를 찍었다는 원조뚝방집이 그 모양이니 다른 집은 오죽할까 -_-;; 늘 가던 을왕리 조개구이집에선 조개도 막 더 갖다주고, 공짜로 주는 떡볶이랑 파전도, 조개 찍어먹는 양념도 엄청 맛있었는데 속상했다. 바다냄새라도 맡겠다는 원래 목적에도 을왕리쪽이 훨씬 더 낫다. 오이도는 갯벌위로 솟은 둑방길에서 철조망 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밖엔 없지만, 을왕리는 그래뵈도 해수욕장이니 찰랑거리는 바닷물도 직접 신발에 묻힐 수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아무리 노는 게 좋아서 광분했더라도 마감폭풍후의 한풀이는 이쯤에서 한 이틀 맥을 끊어야겠다. 
에구구 삭신이야.
봄맞이 체력강화에 힘쓰려면 어서 자전거에 바람부터 넣어야하는데 에구구 고되다.
간간이 놀아주며 슬슬 다시 초반 작업모드를 가동해야 할 때이지만 지금 생각 같아선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다. 에구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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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투덜일기 2009. 2. 21. 14:38

꽤 넓은 오지랖 때문에 몇년 전까지도 지인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일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졸업식에 가는 게 아니라 졸업식 날 졸업식장 주변에 가는 것이었다고 해야 옳다.
공식적인 식장에 진득하니 앉아 있었던 적은 좀체 없으니 하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본인의 졸업식 때도 몰려 다니며 사진 찍은 기억 밖엔 없으니, 국민의례부터 시작해 지루한 누군가의 말씀, 학위나 상장 수여, 송사, 답사, 졸업노래로 이어지는 졸업식순을 꼬박 지켜보는 건 드물게 조카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때뿐이다. 요식적인 행사의 뼈대는 참 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멍하니 있다가 간만에 그런 걸 겪게 되면 참 뻘쭘하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것은 국민의례.
난데없이 우루루 주섬주섬 일어나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려니 계속 킥킥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바뀌었더군. 친절한 유치원 원감 선생님의 말로는 2007년부터 바뀌었단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종소리 따라 무조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20여년 이상 쓸 일도 없었는데 아직도 내 입에서 술술 외어 나오는, 마치 공산당 당원 서약 같은 저 구절 대신에 바뀐 문구도 그다지 멋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나.
게다가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라니!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유치원 아이들에게 애국가 가사를 죄다 익히게 하려는, 또는 그간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는지 자랑하려는 유치원 원장의 욕심 때문임이 단박에 느껴지긴 했는데,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과 달리 우물쭈물 웅얼거리는 어른들의 모양새가 얼마나 우습던지. 놀라운 건 그간 애국가 부를 일이 <전혀> 없었던 나도 4절까지 가사를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더라는 것! 역시 주입식 세뇌교육의 힘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간 월요일마다 빠짐없이 거쳐야했던 월요조회의 잔재였을 테니 말이다.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유치원을 졸업하는 아이들에게 가운을 입히고 학사모를 씌우는 유행이다.
유치원은 상류층 아이들이나 가뭄에 콩 나듯 다녔던 나의 어린시절과 달리 언제부턴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필수적인 취학전 교육 코스가 된 것이나 원복을 입히는 건 이해하겠는데, 유치원 졸업식에 가운을 입히는 건 정말이지 우스꽝스럽다. 우리나라 학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이나 학벌주의에 생색 내기 좋아하는 성향이 더해져 비롯된 또 하나의 관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역시나 나의 조카답게 준우군은 졸업식 끝나고 나서 원하면 다시 입고 사진 찍으라고 비치해둔 가운과 학사모를 무시하고 그냥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마 쑥스러워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한복에 학사가운이라니 어휴 그 원장의 취향 참 촌스럽기도 하다.
조카의 유치원에서 강요한 졸업식 한복차림은 졸업식이 2부까지 이어지는 장기전이었던 데다
2부에서는 아이들이 엄마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고 다례를 올리는 순서에 직접 쓴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취학 전에 자기소개문을 써 발표시키는 건 참 잘한 짓인데, 왜 그걸 굳이 졸업식에서 해야만 하는지?? 더욱이 부모에게 올리는 효도 다례를 왜 하필 졸업식에서??
워낙 컨디션이 바닥이기도 했지만, 장장 2시간 반에 걸쳐 진행된 <지루한> 졸업식을 지켜보느라 비조직적인 인간인 나는 거의 손바닥 만한 유치원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_-;;
올케한테 어디로든 투서를 보내서 다시는 유치원 졸업식에 그딴 이상한 짓 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여나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다.

암튼...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유치원 교사의 송사 때 한복 입은 우리 조카 담임이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요새 부쩍 늙었는지 남들 울 때 따라울기 잘하는 나는 그만 과거 내 졸업식에서조차 눈물을 흘린 적이 없건만 하마터면 같이 울 뻔했다. ;-P
이제 제도권 교육에 시달리느라 고생문이 훤한 조카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일 거라고 나중에 혼자 변명을 하긴 했지만 졸업식 참석은 어쨌거나 고된 일이더라. 에구구 삭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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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투덜일기 2009. 2. 12. 16:50

발등에 떨어진 불이 심하게 활활 타고 있을 땐, 후회로 땅을 치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가고 싶어진다. 시간여행과 관련된 책을 보면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더라도, 그때부터 되돌리는 모든 사건은 또 다른 시간의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한편에서 이미 벌어진 일을 교정할 수는 없다고 하던데, 물론 내가 바라는 시간여행은 당연히 현재를 교정할 수 있는 과거로의 회귀다.
딱히 신나게 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일처리는 지지부진 했던지.
딱 일주일 전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ㅠ.ㅠ
저작권 계약상 무조건 3월에 책이 나와야한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주 안으로 원고를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원고 꼬라지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이다.
게으름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함을 알면서 매번 제 발등을 찍는 나 같은 인간에겐
미래를 교정할 수 있는 과거로 날아가는 타임머신의 개발이 필수적이 아닐까!
정신은 멍하고 진도는 안나가고... 역시나 쉰소리만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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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전화

투덜일기 2009. 2. 10. 15:39

사람마다 죽어라 하기 싫은 일이 다르겠지만
워낙에도 먼저 전화하기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뭔가를 독촉하는 전화가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 축에 들지 않을까 싶다. 거기다 금전 문제의 독촉전화라면 더더욱.

아주 가끔 몇년씩 원고료 지불로 속을 썩이는 출판사가 있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면
힘깨나 쓰는 지인들이 당장에 나선다.
"내가 대신 받아다 줄까?"
과연 그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찾아가 단박에 받아낼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상상을 해보면 즐겁기는 하다. 요리조리 뺀질뺀질 결제를 미루는 악덕 담당자의 멱살을 쥐고 위협해
당장 원고료를 받아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나의 하수인이라니.
다만 그러고 나면 출판계에 소문이 자자해지겠지.
깡패를 동원해 밀린 원고료를 받아내는 무시무시한 번역가이니 나와는 웬만하면 상종하지 말라고. ㅎㅎ

가끔 정말로 사장의 개인 주머니는 배불리면서 결제에 인색한 출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들이민 후 해마다 최악의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다는 출판계 사정을 빤히 아는 나로선
무작정 배째라 원고료 독촉을 해댈 배짱도 없고 담당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웬만해선 독촉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것.
다행히 최근 꾸준히 거래하는 출판사들은 때가 되면 다들 알아서 결제를 해주는 양상이라
죽어라 싫은 독촉전화를 할 일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문제는 친분관계가 쌓이기 이전에 순전히 단발성 작업으로 연결되었는데 계약 및 번역 이후 차일피일
결제가 미뤄지다 담당자들이 모두 퇴사하고 나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경우다.
그나마 책이라도 출간되었으면 상황이 나은데
중간에 기획이 엎어져 출간은 물 건너 가고 흔적도 남지 않은 책의 경우, 담당자마저 없으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딱 2년전에 번역 원고 넘기고 마냥 기다리다가 작년에 드디어 출간포기 결정을 들은 책이 있는데
얼굴 익힌 담당자들은 다 떠나고 그나마도 전화 통화하던 후임자마저 퇴사한 후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이 없으니 가뜩이나 출간도 안 된 책의 결제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럴 땐 나라도 나서서 자꾸 독촉질을 해야하는데, 뼛골 빠지게 작업해서 넘긴 원고료 달라는 것임에도 나는 왜 그리도 결제 독촉전화 하는 게 싫은지. ㅠ.ㅠ
전화 해야지 전화 해야지, 작년에도 몇달을 벼르다 새로운 편집부 팀장과 통화를 했더니 넌지시 관리부 담당자와 직접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들었다. 마침 그날 관리부 차장은 자리에 없었고....
나는 또 꼬박 한달을 넘게 벼르고 별러 겨우 오늘 전화 걸 용기를 냈다.

그러나.
관리부 차장은 내가 2년 전에 그런 번역원고를 넘겼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_+
사실을 확인해봐야겠단다.
미치겠다. 
왜 진작 독촉질을 하지 않은 건지, 이럴 땐 우유부단하고 행동력 떨어지는 내가 정말 짜증스럽다.
여기에 이런 창피한 푸념을 적어 놓는 것은 수일 내로(가능하면 내일!) 추후 독촉전화를 해야겠다는 뒤늦은 의지의 표현이다.

결심 1. 이번 결제 건이 해결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독촉전화를 한다.
결심 2. 내키지 않는데도 부탁을 거절 못해 억지로 맡는 일은 반드시 탈나게 되어 있으니 앞으론 확실히 거절하자.
결심 3. 계속되는 출판불황에 원고를 넘겨도 결제일이 불확실하니 큰소리 치려면 마감일이라도 잘 지켜 원고를 넘기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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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

투덜일기 2009. 1. 29. 23:48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이느라 종일 커피마실 시간이 없었다.
카페인 중독자임이 분명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갈망을 오래 느끼는 경우 특히나 심한 두통에 시달리는데
이미 두통이 시작되고 난 이후엔 커피를 마셔도 소용이 없다. 그 또한 카페인 중독의 전형적인 증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하루쯤 커피를 멀리한 대가로는 너무 혹독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두통을 잠재우려고 다 저녁때 커피를 마셔보았지만 결국엔 두통약을 삼키고도 아직 앞머리가 깨질것 같은 편두통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두통이 가시면 일해야지 마음먹고 계속 방바닥을 뒹굴어도 소용이 없기에
모니터를 보려면 왼쪽눈을 살짝 감아야할 정도로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는 이 상황에도 컴퓨터 앞에 앉기는 했으나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번역작업은 도저히 시작할 수가 없겠다.
내일까지 잠을 못자든 말든 이 밤중에 진하게 커피를 한잔 더 마실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컨디션이 무너지면 안되는 초절정 마감모드에 돌입해야 하므로 참는 대신
스킨과 사진이라도 커피 냄새나게 바꿔보자고 전격 손을 댔다.
블로그 스킨을 바꿀 때마다 컴맹답게 몇시간씩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며 고민을 하는 편인데
이번엔 워낙 머리가 아프다 보니 5분도 안돼 모든 선택이 끝났다.
타이틀 배경그림이 너무 빨개서 아래쪽과 전혀 안어울리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커피잔의 최면이 나의 편두통에 작용하게 되지나 않을까.
내일 제 정신 차리고 봐서도 보기 불편하면 또 바꿔야지 큭.
아... 머리아픈 거 참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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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투덜일기 2009. 1. 19. 15:23

블로그를 시작한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익명의 허울에 무작정 기대어 사적인 일기장에나 써야할 넋두리들을 적어놓고는
그저 홀로 느끼는 배설의 희열이라 여기기엔 너무 많이 왔고 드러냄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듯하다.
그래도 천성적으로 숫기가 없다보니 온라인 세상에 익명으로 차지한 이 공간의 노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어차피 티스토리에 세를 들었으니 관련 사이트에서 추적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을 테고,
내 실력이나 게으름의 정도로는 일부 이웃블로거들처럼 독립계정으로 블로그를 옮겨 주요 검색엔진을 아예 막아놓는 치밀함을 발휘할 수도 없으니 그냥 눈 질끈 감고 버티는 것이 장땡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여행을 앞두었을 때나 괜찮은 음식점을 찾을 때, 요리 레시피가 필요할 때 나 역시 인터넷 검색으로 다른 이들의 블로그 덕을 보기도 하므로, 이곳 또한 누군가에게 일말의 <쓸모>가 있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공간은 특별히 무엇이라 특징지울 수 없는, 그야말로 흔한 수다와 넋두리의 장이다.
멋진 사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영화나 책 리뷰를 멋지게 올리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주제로 심도 있는 논의를 풀어내는 건 더더욱 아니며, 많은 이들의 방문을 염원하며 기발한 아이디어나 생활의 지혜를 풀어내는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쩍 늘어난 방문자수는 나에게 부담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매일 달라지는 곡선이 그려낸 모양이 재미있다는 지인의 얘기에 팔랑귀를 펄럭이며 덩달아 방문자수 그래프를 달아놓고 뿌듯해하긴 했으나 그 덕분에 예전과 달리 방문자수에 시선이 자꾸 가는 것이 신경에 거슬려 그래프를 다시 없앨까도 고민 중이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얼결에 재작년 우수블로거에 드는 바람에 일시에 방문자가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봤자 백명, 2백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난주 들어선 계속 7백을 오르내린다.
내 푸념을 가상히 들어주는 현실과 가상의 지인들, 그리고 그 중간쯤에 자리한 듯한 블로그 이웃들을 독자로 여기고는 있는데, 내가 감당하기엔 수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겁이 덜컥 났다.
훌륭한 블로거들은 방문자가 많아지면 거의 매일 쓸만한 포스팅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긍정적인 동기로 작용하여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훌륭한 인품과 근면성을 갖춘 인간이 아니다. 퍽 자주 블로그에 글을 끼적이는 이유는, 일을 한답시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꾸만 딴짓을 하고 싶기도 하고 태생적으로 내가 수다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방문자들이 많아지면, 내가 무슨 얘기를 했기에 이러나 싶어 겁부터 나는 소심이 유형에 속한다.
어떻게 하면 방문자수가 다시 조촐한 수준(조촐한 수준은 과연 몇명일지 그것도 잘 모르지만)으로 떨어질 수 있을것인가, 한 열흘쯤 블로그를 방치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러기엔 만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손과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을 반큼 이미 블로그 중독증이 심하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구시렁구시렁 하찮은 투덜거림과 사적인 고민이며 흔한 자랑질로 블로그를 이어갈 테지만 바라건대 더는 방문자가 늘지 않으면 좋겠다.
나처럼 일하기 싫고 심심해서 같은 사람들이 두세번씩 블로그에 드나든다고 계산해도 7백은 너무 많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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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투덜일기 2009. 1. 9. 06:38
이상한 불면이 또 찾아오는 바람에 이틀 꼬박 예민하게 날선 신경으로 지내야 했는데 
어제 저녁엔 고맙게도 밀린 잠의 공격을 받았다.
잠을 몹시 즐기는 사람이지만 며칠만에 빚 독촉 온 채권자처럼 가혹하게 찾아온 잠의 경우엔 사실 별로 편안하질 않아서 이런저런 꿈을 많이 꾸게 된다. 깜짝 놀라 까무룩 깨어났다가 스르르 다시 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 꿈을 연속적으로 꾼 것 같은데, 결국엔 확연한 악몽에 시달리다 새벽에 소스라치며 깨어나 더는 잠이 오질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끔찍한 꿈도 아니건만, 꿈속의 나는 너무도 괴로웠고 깊은 절망감으로 숨을 헐떡였던 것 같다. 현실에서도 가끔 맞닥뜨리는 주차장의 두려움이 꿈속에서도 나를 괴롭혔는데, 우리나라에선 잘 볼 수도 없는 드넓은 주차빌딩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차를 찾아 헤매도 끝내 내가 세워둔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 열쇠를 손에 들고 끊임없이 사방을 향해 자동열림 단추를 누르며 혹시나 비상등을 반짝이는 자동차가 있는지 살피며 층층이 주차빌딩을 돌아다니던 꿈속의 나는 호흡곤란을 느끼며 울부짖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나는 소용돌이에 휩쓸리듯 좁고 굽은 통로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내려갈 때마다 아득한 현기증을 느낀다. 건물 지하라는 공간이 주는 폐쇄적인 느낌도 싫지만 드넓은 지하 주차장에 고만고만한 생김새로 서 있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제대로 차를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그러니까 차를 세워둔 곳을 까먹으면 어쩌나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공간지각력이라고 하던가. 평면 도형의 좌우를 바꾸고 회전시켜 놓은 모양을 찾아내거나, 입체 도형 조각을 조립하여 특정한 형태를 만드는 아이들의 놀이를 대할 때도 나는 언제나 막막함을 느낀다. 사람마다 이런저런 능력이 제각각이듯 공간지각력이 크게 떨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어렵사리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고 볼일을 본 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이미 미로에 내던져진 실험용 쥐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피할 수가 없다.
실제로 주차 위치를 찾지 못해 오래도록 미친듯이 드넓은 주차장을 헤맨 적도 있었다. 실내 놀이공원과 백화점이 연결된 대형 쇼핑몰에 처음 차를 몰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차의 위치를 기억해둔답시고 제 나름대로 기둥에 그려진 주황색 동물 모양을 알아두긴 했지만 나중에 지하주차장에서 한 시간 넘게 자동차를 찾아 헤매다 주차장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자 형광색 모자를 쓴 주차요원은 딱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코끼리 주차장 면적만 해도 수백 평이 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입구도 여러 군데라 기둥에 표시된 글자와 숫자를 모두 알아 놓으셔야 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만 되풀이 하며 주차요원은 짜증스럽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친구와 미친듯이 지하주차장을 헤매던 그날의 기억은 그 쯤에서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분명 자동차를 찾긴 찾았을 터인데...
그 때의 낭패를 경험삼아 복잡하고 넓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울 땐 기둥에 적힌 번호와 글자를 어디에든 메모해두지만, 막연한 공포로 이성이 마비되면 메모해둔 내용도 소용이 없다. 'A동 라06'이라고 적힌 메모를 빤히 보면서도 엉뚱하게 B동 지하에서 헤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지하주차장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자동차와 함께 논리적인 사고도 삼켜버리는 미지의 검은 공간.
자주 다니는 대형 할인매장이나 대학병원의 지하주차장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 출입구가 빤히 보이고 미로 같은 구획도 없어 헤맬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나선형 진입로로 빨려들듯 깊이 뚫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며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익사자가 된 느낌으로 숨을 헐떡거리게 된다. 그나마도 차에 동행이 있을 땐 괜찮지만 혼자 운전할 땐 증세가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 일찍 엄마 모시고 병원에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불러온 꿈인 모양이다. 아무리 자주 다녀도, 본인이 환자가 아니어도 병원과 지하주차장의 결합은 결코 유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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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투덜일기 2008. 12. 24. 20:17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무조건 기분좋게 보낼 수야 없는 일이고 사실 나와는 별 무관한 날이니깐
그냥 평소 까칠한 성격대로 혼자 구시렁거리며 털어버려야겠다.

소소한 짜증의 원인이야 누구에게나 늘 있으며 얼마간 마음 끓이다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요 몇주일 증폭되는 짜증의 원인은 결국 내가 뿌린 씨앗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단기간에 끝날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속이 곯는다.

첫번째는 지난번에도 자아비판이랄까 제발등 찍기랄까 민망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던 번역건.
4권짜리 시리즈물을 두 권 번역한 뒤 세번째 책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을 때 담당자들이 바뀌면서 트집을 잡혀 이후 계약이 무산되었던 일이 있다. 그  사람들이 제 아무리 예의나 출판개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소하든 말든 내가 빌미를 제공하여 일이 불거졌으니 다 내 잘못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들과는 두번다시 상종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앞으론 바쁜 마감에 시달리더라도 번역에 좀 더 신경쓰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였으니까.
그것으로 그냥 덮어두고 잊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상황이 또 여의치가 않다.
처음 상하 두권으로 냈던 소설을 단권으로 재출간하고 내가 번역한 두번째 시리즈가 출간된 뒤,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출판사에선 영화개봉과 더불어 특별판을 제작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말에도 몇년 전 내가 우리말로 옮겨 출간된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워낙 흥행이 안되는 바람에 곧장 극장에서 내려와 주변에서 아무도 알은체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꽤나 흥행에 성공한 모양이다. 비수기인 요즘 관객수 백만을 넘어섰다나 어떻다나, 뉴스에서도 다뤄지는 상황이니 뭐.
설상가상, 영화나 드라마가 뜨면 원작도 덩달아 팔리는 법이어서 책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는 눈치다.
그걸 배 아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세계약도 아닌 책이 수십만 부(실제로 수십만 부가 팔렸을 거란 얘기는 결코 아니다!) 팔린들 나한테 더 돌아오는 금전적 이득은 없으니까.
아 그런데, 속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인사랍시고 그 책과 영화에 대해서 알은체를 하며 축하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짜증스럽다는 얘기다!
별 문제 없었던 책이라면, 그런 연락을 받더라도 후후 낮게 웃으며 "많이 팔리고 장사 잘 되도 저랑은 상관 없는 거 아시잖아요"라고 한 마디 대꾸하면 그뿐이겠는데 이번 책은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잖아!
더욱이 고약한 출판사에서는 재출간된 첫권과 나중에 출간된 2권의 증정본도 보내주지 않았다. 2권의 경우 계약철회 통보와 출간일정이 얽히면서 역자교정도 없었고 심지어 역자후기도 싣지 않은 채 출간된 상태.
당시에 기가 막히고 열이 받쳤지만, 내 의무는 다하려고 역자후기와 교정 문제를 문의했지만 저들은 내 이메일에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예의없는 인간들과 더는 상종하고 싶지가 않아서 나중에 서점에 나온 책을 보고도 증정본을 요구하는 대신 나는 씁쓸하게 한권씩 주문을 해서 책꽂이에 꽂아두었으며,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는 의미로 책과 함께 받은 휴대폰 액정클리너도 달고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주 내내 몇번이나 영화흥행과 더불어 예약판매까지 하고 있는 세번째 시리즈(다른 사람이 번역한!) 출간 때문에 덩달아 나한테 공연히 축하전화 비슷한 것이 걸려오니 그야말로 짜증스럽다. 출판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책 잘 팔린다고 옮긴이가 떼돈 버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는 걸 잘 알 텐데 왜들 그러는지 원!!
(제목 언급을 교묘히 회피하긴 했지만 이쯤하면 내 정체가 다 드러난 걸까?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국내외 흥행에 힘입어 이미 할리우드에선 2번째 시리즈 영화 제작을 결정했다고 하니, 돌아가는 꼬락서니로 봐서는 다음 영화개봉 때도 나 역시 덩달아 일부인들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제는 또 있다. 단권으로 출간된 1, 2권 원고를 아무래도 출판사측에서 나의 동의 없이 문장에 손을 댄 모양인데, 대체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번역문장이 훼손되었을 확률이 더 높고 그에 대한 욕도 내가 먹어야한다는 사실이다.
출판사에서 애당초 문장 스타일로 꼬투리를 잡아 옮긴이를 <잘랐>으니 지들이 고쳐놓은 문장에 대한 비난 역시 내 탓으로 돌릴 거라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 분노가 치민다. 으으으.

두번째 짜증의 원인 역시 일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중견 출판사들과 일을 하지만 초창기엔 나도 당연히 작은 출판사에서 번역을 시작했고 경력 없는 번역자를 키워주다시피한 곳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랜 출판불황을 겪으며 안타깝게도 그 출판사는 몇년 전 부도를 맞았고 사업등록은 유지하고 있지만 사장님 혼자 고군분투하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 회사에서 알게 된 편집자며 기획자, 번역자들은 지금까지도 친한 친구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끔 모이면 그 회사와 사장님 걱정을 잊지 않았고, 가능하다면 조금씩 일을 거들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되는 대로 번역이든 편집이든 디자인이든 도와드리자는 식으로.
그러다 나는 정말로 몇년 전 운좋게 작업스케줄이 비는 틈에 그 출판사를 위해 얇은 책 한권을 번역해주었다. 언제 출간될지 기약도 없는 일이었고, 원고료는 혹시 책이 대박나면 주세요, 라고 흔쾌히 제안할 정도로 처음엔 순수하고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새삼 그 일의 뒤치다꺼리를 짬짬이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니 왜 이리 짜증이 날까. 그때도 긴급하게 출간일정을 잡겠다 하여 몇날몇일밤을 홀딱 지새워 번역을 마치고, 힘겹게 역자후기까지 써서 보냈는데 몇년이나 소식이 없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더욱 미적지근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
몇년 새 간사하게 변해버린 내 마음도 부끄럽고 잔뜩 밀린 다른 일은 어떻게 하나 한숨이 나오면서 과연 얼마나 걸릴지 모를 <공짜 일>의 순서를 어떻게 잡아야할지 갈피가 안잡히고,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짜증스럽기만 하다. 

이달들어 걸핏하면 "나 요즘 슬럼프인가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좋아하는 일이고 재미있게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어서 선택했는데 왜 요샌 만사가 다 시큰둥하고 열정이 일지 않을까.
결국 가장 큰 짜증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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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

투덜일기 2008. 12. 22. 18:45
(두글자 제목에 또 맛들였나보다)

내가 정식으로 조직에 속해 마지막으로 갑근세를 냈던 해는 1994년이었다.
1994년 12월 말 기준으로 회사를 관두고 1995년 새해부터는 불확실한 미래에 약간 불안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번역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었다는 얘기다.
1995년 여름 첫 번역서가 나오긴 했지만 초반부 나의 삶은 백수나 진배없었고, 나의 처지에 맞게 온갖 세금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요샌 퇴직을 한 뒤에도 계속 연계된다는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직장을 관두면 다달이 내던 국민연금도 얼마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번역료에서 3.3%의 원천징수세를 떼고 받기는 했지만, 그거야 출판사에서 신고하는 것이니 내가 세무서와 관계될 일은 전혀 없었고 프리랜서 번역가는 곧 무직으로 인식되는 탓인지 건강보험은 즉각 아버지 밑으로 회복되었으니 별도로 내가 자잘한 세금을 낼 일은 오래도록 없었다.
1996년에 지금 터서 살고 있는 이 작은 집 한귀퉁이를 내 이름으로 사들였음에도 재산세, 토지세 말고는 다달이 낼 세금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2001년이던가, 국민연금 사무소에서 연락이 와 전년도에 소득이 잡혀 연금징수대상이긴 한데 현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생이었고, 공부에 벅차 학기중엔 절대로 번역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곧이 곧대로 대답을 했었다. 그랬더니 국민연금 담당자는 흔쾌히 면제사유가 된다며 별다른 서류제출 요청도 없이 대학원 졸업때까지는 연금징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다시 말해 1994년 퇴사후 무려 2003년까지 10년 가까이 국민연금에서 자유로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5, 6년 전부터는 세무서에서 종합소득세를 신고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 이전까지는 세무행정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었는지, 내 수입이 그만큼 미미했다는 의미인지 잘은 모르지만
세무서직원들의 레이다망에서 자유로웠던 시대가 드디어 끝나버린 것.
통지서의 내용은 출판사와 잡지사 등지에서 한 3.3% 원천징수세 신고로 나의 모든 소득이 세무서에 보고되었으니 그에 대한 확인과 함께 소득세 신고를 다시한 번 하라는 식이었다. 
단지 귀찮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는 나에게 번역 일을 하는 친구가 일러주길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단순경비 비용 계산 요율이 높아서 환급받을 돈이 더 많으니 잔말말고 얼른 신고를 하라고 했다.
실제로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보니, 연간소득이 적을수록 환급되는 돈은 더 많았고 내가 미리 낸 돈을 돌려받는 것임에도 어쩐지 공돈 같아 수십만원씩 통장에 입금되는 환급금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연금공단에서도 집요하게 의무가입을 강요하는 전화가 걸려왔고
당시 팽배했던 국민연금 거부 정서를 앞세워 말싸움을 해보았지만 결국엔 일정 소득이 있는 경우 무조건 가입이 <국민의 의무>라는 막무가내의 협박과 설득에 넘어가 최저 수준으로라도 국민연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 건강보험은 예외였다.
아버지의 퇴직 후 우리 식구는 몽땅 큰동생 명의의 건강보험증에 이름이 올라갔고 (아버지 밑에 있는 것과 동생네 식솔 밑에 그것도 조카들 이름 아래 내 이름이 박힌 건강보험증이 좀 민망하긴 했으나, 병원 갈 일도 없는데 뭐 어떠랴 싶었다!) 종합소득세 신고 후엔 건강보험이 따로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한 예상을 뒤엎고 나는 그뒤로 몇년이나 캥거루족의 양상을 이어올 수 있었다.
보호자로서는 한달에도 서너번씩 병원을 들락거리지만, 내 몸 때문에 병원을 찾는 일은 워낙 싫어하기 때문에 어쩌면 건강보험공단에서 청구를 누락시킨 것이 아닐까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세무행정과 건강보험공단의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니, 나라 살림을 생각한다면 그저 좋아라 할 일만도 아니었지만 일단 내 주머니에서 억울한 돈 나갈 일이 없으니 나로선 기쁠 뿐이었다.

허나, 유가환급금을 겨우 4만원 환급해주겠다는 열딱지 나는 전화를 받고 난 뒤 얼마 안 있어서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서류가 왔는데 피보험자에서 나의 자격을 박탈시키고 별도로 지역 건강보험료 징수자로 재편한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던 것.
코딱지 만하든 말든 집도 있고, 소득도 있으니 내가 단독으로 건강보험료를 내야한다는 <원칙>에 적용될 수밖에 없음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 원칙이 어째서 자그마치 12년이나 흐른 뒤에야 적용된단 말인가?
며칠 전 드디어 날아온 내 이름으로 된 단독 <건강보험증>과 안내장을 보니, 여러가지 점수(소득수준과 집에 점수를 매긴단다)를 집계한 결과 예상 보험금액이 12만원에 육박한단다. +_+
일년내내 병원 한번 안 가는 나더러 매달 12만원씩 건강보험료를 내라고!!!
왜 이리 억울할까.
물론 울 엄마는 한달에도 몇번씩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타오며 수없는 혜택을 받고 있으니
그 재정을 나 같은 젊고(?) 건강한 사람이 쌩돈을 각출하여 메워야하는 체계임을 알지만 그래도 너무 억울하다.
생각같아선 늙어서도 절대 병들지 않아 건강보험 공단의 도움 따위 안받고 나도 안도와주는 쪽을 택하고 싶지만 서민들한테 악착같이 세금 걷어들여 나라 살림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니 내가 무슨 힘이 있으랴.
보험료 고지서 나오면 속 쓰리게라도 내는 수밖에.
국민연금 때도 그랬지만 괜히 억울해서 자동이체 신청은 몇달 버티다가 할 게 뻔하다.
젠장젠장...
직장 다닐 때는 그래도 회사에서 절반 부담해주는 데다 월급에서 떼고 나오니 건강보험료 내는 것도 그러려니 했는데 피같은 원고료 털어서 내 손으로 내려니 정말 아깝고 억울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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