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투덜일기 2009. 1. 9. 06:38
이상한 불면이 또 찾아오는 바람에 이틀 꼬박 예민하게 날선 신경으로 지내야 했는데 
어제 저녁엔 고맙게도 밀린 잠의 공격을 받았다.
잠을 몹시 즐기는 사람이지만 며칠만에 빚 독촉 온 채권자처럼 가혹하게 찾아온 잠의 경우엔 사실 별로 편안하질 않아서 이런저런 꿈을 많이 꾸게 된다. 깜짝 놀라 까무룩 깨어났다가 스르르 다시 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 꿈을 연속적으로 꾼 것 같은데, 결국엔 확연한 악몽에 시달리다 새벽에 소스라치며 깨어나 더는 잠이 오질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끔찍한 꿈도 아니건만, 꿈속의 나는 너무도 괴로웠고 깊은 절망감으로 숨을 헐떡였던 것 같다. 현실에서도 가끔 맞닥뜨리는 주차장의 두려움이 꿈속에서도 나를 괴롭혔는데, 우리나라에선 잘 볼 수도 없는 드넓은 주차빌딩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차를 찾아 헤매도 끝내 내가 세워둔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 열쇠를 손에 들고 끊임없이 사방을 향해 자동열림 단추를 누르며 혹시나 비상등을 반짝이는 자동차가 있는지 살피며 층층이 주차빌딩을 돌아다니던 꿈속의 나는 호흡곤란을 느끼며 울부짖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나는 소용돌이에 휩쓸리듯 좁고 굽은 통로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내려갈 때마다 아득한 현기증을 느낀다. 건물 지하라는 공간이 주는 폐쇄적인 느낌도 싫지만 드넓은 지하 주차장에 고만고만한 생김새로 서 있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제대로 차를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그러니까 차를 세워둔 곳을 까먹으면 어쩌나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공간지각력이라고 하던가. 평면 도형의 좌우를 바꾸고 회전시켜 놓은 모양을 찾아내거나, 입체 도형 조각을 조립하여 특정한 형태를 만드는 아이들의 놀이를 대할 때도 나는 언제나 막막함을 느낀다. 사람마다 이런저런 능력이 제각각이듯 공간지각력이 크게 떨어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어렵사리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세우고 볼일을 본 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이미 미로에 내던져진 실험용 쥐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피할 수가 없다.
실제로 주차 위치를 찾지 못해 오래도록 미친듯이 드넓은 주차장을 헤맨 적도 있었다. 실내 놀이공원과 백화점이 연결된 대형 쇼핑몰에 처음 차를 몰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차의 위치를 기억해둔답시고 제 나름대로 기둥에 그려진 주황색 동물 모양을 알아두긴 했지만 나중에 지하주차장에서 한 시간 넘게 자동차를 찾아 헤매다 주차장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자 형광색 모자를 쓴 주차요원은 딱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코끼리 주차장 면적만 해도 수백 평이 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입구도 여러 군데라 기둥에 표시된 글자와 숫자를 모두 알아 놓으셔야 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만 되풀이 하며 주차요원은 짜증스럽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친구와 미친듯이 지하주차장을 헤매던 그날의 기억은 그 쯤에서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분명 자동차를 찾긴 찾았을 터인데...
그 때의 낭패를 경험삼아 복잡하고 넓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울 땐 기둥에 적힌 번호와 글자를 어디에든 메모해두지만, 막연한 공포로 이성이 마비되면 메모해둔 내용도 소용이 없다. 'A동 라06'이라고 적힌 메모를 빤히 보면서도 엉뚱하게 B동 지하에서 헤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지하주차장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다. 자동차와 함께 논리적인 사고도 삼켜버리는 미지의 검은 공간.
자주 다니는 대형 할인매장이나 대학병원의 지하주차장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 출입구가 빤히 보이고 미로 같은 구획도 없어 헤맬 이유가 없는데도 나는 나선형 진입로로 빨려들듯 깊이 뚫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며 깊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익사자가 된 느낌으로 숨을 헐떡거리게 된다. 그나마도 차에 동행이 있을 땐 괜찮지만 혼자 운전할 땐 증세가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 일찍 엄마 모시고 병원에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불러온 꿈인 모양이다. 아무리 자주 다녀도, 본인이 환자가 아니어도 병원과 지하주차장의 결합은 결코 유쾌할 수가 없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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