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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8 서글픈 고백 21
  2. 2009.12.05 혼자서는 못해요 14
  3. 2009.12.03 혓바늘 11
  4. 2009.12.02 안개 도시 9
  5. 2009.11.20 배가 불렀구나 12
  6. 2009.11.19 요가 2주 11
  7. 2009.11.17 인터넷 전화 12
  8. 2009.11.11 그런 날이 올까 17
  9. 2009.11.09 어루만짐 15
  10. 2009.11.06 어렵다 6

서글픈 고백

투덜일기 2009. 12. 8. 16:19

나이가 늘어날수록 자신감도 늘어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확실히 나이와 함께 자신감이 줄어듬을 느낀다. 어쩔 수가 없다. 각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마흔을 넘기고 난 뒤의 나이듦은 성숙을 지나 노화를 향할 수밖에 없나보다.
지난 몇년 새 내 자신감을 특히 좀먹기 시작한 신체적 노화 증상은 바로 노안, 코골이, 흰머리다.

사람에 따라 30대 중반부터 시작되기도 한다는 노안은 <중년안>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어쨌거나 그게 그거다. 노안 대신 <중년안>이라고 박박 우기는 게 더 서글픈 느낌이다. 몇년 전부터 친구들이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최대한 액정 큰 기종으로 바꾸면서, 작은 액정에 뜨는 글씨는 당최 보이질 않는다고 할 때는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문자를 보내면 답 문자 보내는 게 골치아파 대신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들을 늙은이라고 놀리며 그들보다 한두 해 젊은 걸 기뻐했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이 장담했었다. "너도 금방이다! 두고봐라."
아직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게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나도 명함에 박힌 제일 작은 글씨라든가 화장품 상자 구석에 적힌 작은 글씨들을 읽으려면 안경을 벗고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안>이란 안구와 수정체, 각막 따위의 탄력이 떨어져 순식간에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현상을 말할 거다. 처음엔 안경을 벗거나 눈을 찌푸려 애써 초점을 맞춰야 하고, 좀 더 지나면 돋보기의 힘을 빌어야 하는... 
벌써부터 휴대폰 문자를 보낼 때 휴대폰을 코앞에 두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느릿느릿 문자판을 찍는 친구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 거라 생각하면 그야말로 서글프고 괜히 억울하다. 어려서부터 눈이 나빠 고생했으면 노안이라도 건너뛰어야 공평한 거 아닌가!

노안 만큼이나 보편적인 노화현상인 코골이도 나에겐 제법 충격적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누가 옆에 있기만 해도 잠을 못잔다고 타박하던 인간이 코를 골다니. 평소에 코를 골지 않던 사람들도 심히 피곤하면 코를 고는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얌전한 잠버릇으로 유명했다던 내가 자기 코고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코골이는 목젖이 늘어지거나 비강이 좁아져 생기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다. 마흔 넘어 뺨이 쳐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보이지 않는 목구멍 살까지 쳐지고 말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옆에서 확인해줄 사람이 없으니 나의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 또한 코고는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지 궁금해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자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확인하는 마음은 더 무거울 것 같아 관두고 말았다.)
요가 강습은 매번 맨 마지막에 팔다리를 약간씩 벌린 채 힘을 쭉 빼고 가만히 누워있는 자세로 끝이 난다. 어둑한 조명과 따뜻한 열기 속에 낑낑대며 몸을 쓰다 드러누워 있노라면 그 3분에서 5분 사이가 참으로 평화롭게 느껴지긴 한데,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에 잠드는 사람이 (가끔 잠드는 어린 정민공주 말고도!) 있다. 의식적인 호흡에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누군가 까무룩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쌕쌕 숨소리가 달라지고, 간혹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5분 뒤 요가 강사가 손가락발가락을 살살 움직이라고 하면서 휴식에서 일깨워주어도 모른 채 잠들었다가 다들 일어나 앉는 소리에 퍼뜩 깨어나는 이를 보노라면 얼마나 피곤했을까 안쓰럽기 보다는 거기서 코까지 골며 잠들 수 있는 무던함이 부러울 정도다. 그러면서 코골다 깨어난 강습생의 나이를 유심히 가늠하며 나를 위로한다. '그래... 쟤는 20대 후반밖에 안됐는데 벌써 코를 골잖아. 넌 40대에 접어든 중년이야. 코 고는 게 큰 흉은 아닐 나이잖니...' 하지만 아무리 자위해 보아도 슬픔은 가지지 않는다. 
게다가 ㅌㄹ 마을 엠티도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조심스러워서 어디 잠이라도 잘 수 있겠나. 생각 같아선 이번 기회에 나의 코골이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오랜만의 떼 취침에 내가 먼저 잠들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엔 흰머리를 한꺼번에 일곱개나 뽑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보다 네 살 어린 막내동생은 20대 중반에 이미 염색이 필요할 만큼 흰머리가 많았고, 큰동생 역시 이젠 머리숱이 적어져 흰머리를 뽑는 게 아까운 지경이 되었으니 같은 유전인자를 타고났을 동생들에 비해선 내 상태가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새치를 한둘씩 보이는 아이들과 달리 얼마 전까지는 새치 하나 없던 사람에게 생겨나는 중년의 흰머리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몇년 전부터 여기저기 가끔씩 보이는 흰머리를 하나 둘 뽑을 때는,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라고 극구 우겨보았지만 요번에 양쪽 귀언저리에서 집중적으로 서너개씩 흰머리를 뽑고 나니 귀밑머리부터 센다는 전형적인 노화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는 스스로 스컹크가 되었다며 염색을 하지 않고는 절대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성성해졌음을 토로하는 이도 있으며, 흰머리를 뽑기는커녕 한 오라기라도 소중히 보호해야한다면서 두드러진 흰머리를 중후함의 상징이라 자랑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다. 하지만 흰머리에 대처하는 방식이 누구나 다르듯, 몇가닥이든 수십가닥이든 수백가닥이든 본인이 느끼는 충격의 정도는 다를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나이가 어떠하든 누구나 동안을 추구하고 젊고 튼튼한 육체가 아니면 손가락질 받는 연령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 분위기에 편승할 필요는 없다고 나의 이성은 부르짖고 있지만, 두드러지는 노화의 증거 앞에 이토록 맥이 빠지는 걸 보면 속으론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이값>이라는 말이 싫어서 나이와는 상관없이 <나답게> 사는 걸 무모한 철없음과 동격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여겼는데, 이런 두려움은 결국 사십대의 나이값인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내 정신은 아직 중년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내 육신은 이미 앞서 노년을 준비하고 있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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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프다. 헌데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의 나는 혼자선 못하는 게 많은 의지박약 인생이다. 요가강습 한달이 지났다. 일단 시험삼아 다녀본 결과 열두살 공주는 죄다 어른들인 틈바구니 속에서도 꽤 열심히 자세를 익혔고 체중이 1.5킬로그램쯤 내렸으며 깡말랐던 유아시절과 달리 토실하게 살이 올랐던 허리가 살짝 오목해지는 쾌거를 이루었다. 반면에 뻣뻣 무수리는 체중이 오히려 늘었고 특별히 몸이 유연해졌다거나 어딘가 선이 날렵진 느낌 따위는 전혀 없으나 다만 늘 동그랗게 뭉쳐있던 승모근의 통증이 사라졌고 몸을 웅크릴 때의 엉성함이 좀 덜한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해서 고모와 조카 커플은 일단 요가를 계속해보기로 했다. 매달 강습료는 8만원이지만 3개월을 한꺼번에 끊으면 17만원이므로 무려 3개월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공주는 다음주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일주일 간 쉬었다 재등록을 하고, 나는 그나마 풀리기 시작한(?) 몸이 다시 굳지 않도록 계속 강습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근래 들어 꾸준한 운동이라곤 처음이라 나도 그럴 작정이었다.
헌데 막상 어제 홀로 가서 재등록을 하려니 어찌나 귀찮은지... 어제 저녁엔 오늘 2시 수업에 맞춰 가면 된다고 자위하며 핑계를 댔다. 하지만 막상 오늘이 되자 아침 늦게 겨우 잠들어 정오에 맞춰놓은 알람에 눈을 뜨고 보니 요가고 나발이고 우선은 더 자야 살것 같았다.
만일 공주와 함께 강습을 받고 있었다면 단 한 시간을 잤더라도 당연히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을 것이다. 아니, 벌써 전화가 몇번 걸려오는 바람에 자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이틀째 홀로 외출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노라니 참 한심하다. 요가수업뿐만이 아니다. 바람도 쏘일 겸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가려고, 덕수궁으로 배병우 사진전을 보러 가려고, 그 참에 서점에도 좀 들르려고 몇번이나 마음을 먹었지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간 약속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어차피 외출 약속이 있는 날 조금 일찍 나가서 영화를 보든 전시를 보든 서점엘 들르든 해야겠단 결심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약속시간에 맞춰 나간 게 용할 정도.
흉보면서 닮아간다더니만 너무 의존적이라 옆사람 피곤하게 한다고 만날 왕비마마를 구박하면서, 어느새 나도 의존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나 싶어 난감하다.

오늘은 이미 너무 늦었고, 내일은 슬그머니 나가 영화 한편 보고 서점에도 들러야지. 그리고 월요일엔 기필코 혼자서라도 요가학원엘 가야지. 대외적으로 떠벌임으로써 생겨나는 무게감이라도 필요한 것 같아 또 이렇게 끼적끼적 자아반성을 하고 있다. 혼자서도 잘해야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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혓바늘

투덜일기 2009. 12. 3. 02:20

혓바늘: 혓바닥에 좁쌀알 같이 돋아오르는 붉은 살. 주로 열이 심할 때에 생긴다. (출처: 국립국어연구원)

이틀 내리 잠을 좀 못잤더니 혓바늘이 돋았다. 혀를 놀릴 때마다 찌릿하게 아프고 묘하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옛사람들이 참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싶다. 딱 바늘 끝으로 아주 살짝 찌르는 것 같은 통증. 심하면 말도 어눌해지지만 지금은 그 상태는 아니라 은근히 혓바늘을 괴롭히며 놀고 앉았다. 괜스레 입술 안쪽에 혀끝을 비벼 부러 통증을 유발하고 있자니 이것 역시 미약하나마 가학성향이 아닌가 뜨끔하다. 헌데 이건 어려서부터 나의 버릇이다. 혓바늘이 돋으면 이로 마구 짓눌러 평평하게 만들어 없애려는 유아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사전 뜻엔 열을 동반한다고 적혀 있지만, 열감기 따위를 앓는 게 아닌데도 가끔씩 돋아나 몸의 피로 정도를 알려주는 혓바늘처럼 내 삶에도 쉼표를 찍어줄 지표가 있으면 좋겠다. 혓바늘은 푹 자고 과일 많이 먹으면 사라진다는 평범하지만 확실한 비법을 알고 있듯이, 더불어 좀 쉬었다가 건강한 삶으로 되돌아갈 지혜도 세트로 장만해 둔다면 좋을 텐데. 건강한 삶의 비법이야 알 리 없으니 오늘밤에도 우적우적 귤만 까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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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도시

투덜일기 2009. 12. 2. 01:45

겨울엔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전날 뉴스 일기예보를 챙겨보거나 인터넷으로 기온을 확인한다. 공연히 춥게 입고 나갔다가 낭패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인데, 요샌 그나마도 게을러져 이불 갤 때 열어둔 창문으로 스며드는 냉기의 정도로 대강 어림짐작을 하고 만다. 그러고도 못 믿겠으면 우유 꺼내러 잠시 나갔다 오신 왕비마마에게 "오늘 날씨 추워?"라고 묻기도 한다. 그조차도 귀찮으면 남들이 뭐라하든 말든 일단 두꺼운 옷으로 무장을 하고 나서는데, 요 며칠은 너무 두터운 옷 때문에 낭패를 보아 옷입기가 조심스럽다. 추운 것도 못참겠지만 터틀넥에 털옷까지 잔뜩 껴입고 나가서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버스라도 탈라치면 숨이 막혀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다. 몸뚱이는 오래될수록 참을성을 잃는 게 확실하다.

요 며칠 날씨가 꽤 따뜻한 건 알고 있었는데, 저녁무렵 외출을 해보니 높은 기온 때문인지 온 도시에 안개가  자욱했다. 황사 때 못지 않은 잿빛 대기에 휩싸인 하늘을 배경으로 강이 흐르고 그 건너로 보이는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이 예상밖으로 참 멋졌다. 게다가 오늘은 시월 보름. 조금 있으니 일부러 세피아톤으로 보정한 사진 같은 저녁 하늘 위로 동그란 달이 안개속에 빛났다. 원래 그래 보이는 것인지 나만의 착각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달은 초저녁 무렵에 제일 커보인다. 추석이나 대보름날 초저녁 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원래 달이 저리도 컸었나 싶게 무진장 살쪄 보이는데, 그러다 중천으로 올라갈수록 동그라미가 작아진다.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최근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선을 올려봤댔자 나날이 가지가 앙상해지는 가로수 높이 정도였고, 눈길을 잡아끄는 건 거리를 온통 덮은 낙엽이었다. 동네 가로수와 노변 화단엔 벌써 짚을 둘러 겨울 채비를 마쳤고, 지조없이 색도 변하지 않은 채 메마른 잎을 폭탄처럼 떨어뜨리는 플라타너스 군단은 참 을씨년스러웠다. 그래서 더욱 바닥만 쳐다보고 다녔던 듯.


학창시절 엠티의 단골 장소였던 북한강변의 싱그러운 물안개를 제외하면 도시의 안개는 나에게 늘 공해의 이미지와 동격이었다. 스모그로 뿌옇게 변한 도시의 하늘, 그 잿빛 안개 속에선 호흡마저 바튼 느낌이라 축축한 마스크를 끼고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숨을 헐떡이게 되던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 저녁 안개는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눈쌀이 찌푸려지는 플래카드를 내건 성냥갑 아파트의 못생긴 몰골도, 질금질금 움직이는 강변도로의 자동차 홍수도 변함이 없는데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도시가 꽤 멋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사람이든 사물이든 다 드러내는 것보다는 적당히 가릴 때 아름다워 보임을 새삼 깨달은 하루.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안개는 내일도 이어진단다. 안개 도시의 뿌연 아름다움을 하루 더 즐길 수 있음이 기쁘다. 내일도 열심히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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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불렀구나

투덜일기 2009. 11. 20. 16:14

혹시나 물기가 남아 있으려나 싶어 빨래를 쥐어짜듯 머리를 혹사시켜 어렵사리 번역원고를 마감하고 나서 특히 이번엔 슬럼프가 깊었다. 시기적으로 공연히 맥빠지고 무기력한 늦가을이기도 했고, 내년이면 벌써 만 15년을 넘기는 이 직업과 나의 역량에 대해서도 새삼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일 하나 끝낼 때마다 슬럼프 타령을 한건 벌써 작년부터인 것 같다.
예전엔 책 한권을 마치고 났을 때의 성취감이 다음 작업시작을 부추길 만큼 커서, 마감 후유증이라며 한 일주일이나 열흘쯤 널브러져 있다간 얼른 새 일감의 책장을 넘기곤 했다. 그런데 이젠 꼬리에 꼬리를 물듯,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 반복되는 과정이 어쩐지 한심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져 작업 중간에도 돌연 맥이 빠지는 바람에 몇달씩 배째라는 식으로 마감일을 넘기기도 했고, 새로 다시 일을 시작하려면 마음을 추스리는데 한달씩 걸리기도 하는 지경이다.
몇달씩 끙끙거린 작업의 결과물이 따끈한 책의 형태로 주어져도 예전 같은 벅찬 감격은 느껴지지 않는다. 책이 나오면 신간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책구경을 하느라 일부러 서점엘 나가보던 정성 따위는 벌써 10년 전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수없이 쏟아진 책들 사이에 파묻혔다가 소리없이 사라질 그 책의 운명이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해 차마 보기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얼마 전 오랜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가 털어놓았다. "나 요새 일하기가 싫다."
십수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 친구도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며 맞장구를 쳤다. 헌데 주변에 그런 얘기를 털어놓았더니 단박에 "너 배가 불렀구나"하는 반응을 보이더란다. 요즘 일 없어서, 짤려서, 망해서, 팽팽 놀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이 있으면 감사한 줄 알라고 했다나.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건 한편 동의하지만, 동시에 배알이 뒤틀리기도 한다.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애써왔는지 저들이 뭘 안다고!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서 선택한 직업인데 끊임없이 문제만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는 친구와 달리 나는 정말로 내가 선택한 일 자체에 멀미가 나고 회의가 드니 문제다. 분명 평생 하고픈 일을 찾았다고 여기며 들어선 길이었는데, 이 길이 아니면 어쩌나 싶은 느낌.
회사 다니던 시절 성취감이나 뿌듯함은 눈곱만큼일 뿐이고 대부분은 조직사회의 중압감과 심리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괴로웠던 마음에 비하면야 여전히 훌륭한 선택이라 생각되지만, 그 정도 위로만으로는 밤샘을 밥먹듯하면서도 책장을 넘기며 흥을 냈던 열정이 되살아나질 않는다.

친구는 "아마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인가보다."는 결론으로 잘 넘겨볼 것을 권했지만, 이 맥빠짐이 정말로 단순한 나이 탓인지 잘못된 길 탓인지 배부른 투정인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어쩌면 괜한 욕심 부리다 겪는 배고픔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고. 어쨌거나 궁금한 건 해마다 <단군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의 역사 갈아치우기가 내년에도 되풀이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올해도 읽은 책보다 사들인 책이 더 많건만, 대한민국 출판계는 왜 노상 불황인지 원. 혹시라도 내년엔 출판계 호황에 힙입어 불끈 번역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길 빌어봐야겠다. 여러모로 따져봐도 배가 불러서 하는 푸념은 확실히 아니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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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2주

투덜일기 2009. 11. 19. 16:23

뻣뻣녀의 요가수업이 어제로 2주를 넘겼다. 일주일에 세번이니깐 겨우 7번 강습받았다는 의미다.
겨우 2주만에 요가의 참맛을 알았다거나 별안간 몸이 유연해졌을 리는 결코 없다. 여전히 나는 30명 가까이 되는 강습생들 가운데 제일 뻣뻣하고 자세가 어정쩡하여 간간이 너무 터무니없는 몸부림에 스스로 킥킥 웃음이 날 지경인 최악의 몸치로 애쓰는 중이다.
강습이 없는 날에도 집에서 한 가지 동작만이라도 연습을 해보라는 강사의 권유가 있었지만 나는 꿋꿋하고 철저하게 강습 있는 날에만 몸을 못살게 굴 뿐이다. 많은 이들이 다이어트를 위해 핫 요가를 한다는데, 곰탱이 동면모드에 접어들고픈 욕망이 강해진 나는 밤일도 거의 안하면서 이미 뿌리깊은 습관이 되고 만 밤참먹기를 계속하여 밤참으로 인한 식곤증에 기대 곧장 잠드는 나날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체중이 약간 불어나고 있다. 원래 여름보다 겨울에 체지방이 많아야 추위를 잘 견딜 수 있으므로 해마다 겨울맞이 체중 증가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나는 혹시나 요가 덕을 좀 보려나 궁금했는데, 일주일에 세 번의 요가로는 큰 에너지 소모가 없음을 깨닫게 됐다.

몇년전엔가 친구 하나가 살사댄스를 독하게 배우며 스스로 운동신경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악착같이 몸을 찢어대니까 결국 다리가 180도로 벌어지게 되더란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젊은 친구 하나도 매일매일 다리를 벽에 대고 조금씩 찢(?)으면 1도씩 벌어져 1년 안에 180도로 벌어지지 않겠느냐고 호기롭게 장담을 했는데, 그간 온갖 종류의 댄스를 섭렵하고 지금은 발레까지 배우고 있다는 걸 보면 인간(의지력이 뛰어난 인간에 한해서;;)의 몸이 얼마나 적응력이 뛰어난지 감탄스럽다.
하지만 나같은 운동치에다 의지력박약인은 경우가 다르다. 지금은 없어졌다지만 그 옛날엔 체력장 반영점수 20점을 따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반마다 두어명 정도는 있지 않은가. 매달리기는 초시계를 누르자 마자 떨어지고, 100미터 달리기는 20초를 초과하고, 오래달리기를 하고 나면 쓰러져 양호실에 실려가는 부류... 바로 내가 그런 인간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교양필수로 체육과목을 들어야했고 배구와 탁구 따위 실기 때문에 C-학점을 받고 나서 내가 느낀 비감을 그 누가 알까.  

헌데 요즘 요가원에서도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느꼈던 비참함을 자꾸 느낀다. 가령 엎드렸다가 한쪽 다리를 접어 반대편 팔로 잡고 최대한 위로 들어올리는 동작을 하라는데, 팔다리가 짧은 나는 아예 발을 잡는 것조차 어려우니 어떻게 들어올린단 말인가. 그 상태로 옆으로 몸을 굴리라고 하면 나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서 뒤집어진 한마리 바퀴벌레처럼 버둥거리고 있다. -_-; 예전에도 김연아의 스케이트 연기를 보면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지만, 나는 요가매트에 엎드려서 한쪽 발을 당겨 잡는 것도 못하는 판국에 스케이트 날로 서서 빙글빙글 돌며 고무줄처럼 팔과 다리를 나란히 등뒤로 접어 올린 동작을 보노라니 입이 더욱 딱 벌어졌다. 감히 내 몸뚱이를 여신의 몸에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어떻게 같은 인간의 몸이 그렇게 유연할 수 있는지!

요가원에서 강사들이 엄마도 아닌 고모가 조카를 데리고 다니는 걸 몹시 의아해 하며 자꾸 묻길래 하는 수 없이 영문을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뻣뻣조카가 자기보다 더 요가를 못하는 최악뻣뻣고모와 다니고 싶어 했다고. 공주의 엄마는 이미 요가 베테랑이라 비교되기 싫었던 모양이라고. 그나마 요가원이 어둑어둑해서 강습중엔 민망함을 덜 느낄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그 어떤 동작을 해도 어설프고 나도 모르게 숨을 헐떡대고 있으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안쓰던 근육들이 놀라 삭신이 쑤시던 증상은 이제 거의 사라졌음에 기뻐하고는 있지만, 과연 몇달이나 힘써야 몸매도 동작도 어여쁜 강사들의 자세를 절반쯤이라도 따라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 몇달까지 계속 버티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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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전화

투덜일기 2009. 11. 17. 16:09

최근들어 왕비마마는 TV 광고를 보다 비감에 젖는 일이 많아졌다. 당최 무슨 선전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광고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처음엔 나름대로 설명을 해드렸지만 반복되는 설명에도 똑같은 푸념을 늘어놓는 횟수가 잦아지자 급기야 심술무수리는 화를 내고 말았다.
"엄마가 못 알아먹는 광고는 엄마가 몰라도 되는 광고야! 굳이 알려고 하지 마!"라고.
참 못됐다. 나도 안다.

언젠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엄마에 대한 짜증을 늘어놓는 딸에게 넷째 고모가 호통을 쳤다고 했다.
"난 옛날에 할머니가 아무리 똑같은 얘기를 되풀이해도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응, 응 거리면서 다 들어드렸어! 딸년이 돼가지고 엄마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그러면 늙어서 그러시나보다 안쓰러워하지는 못할망정 짜증을 내고 난리니!"
부쩍 심해진 왕비마마의 건망증 때문에 자꾸만 짜증이 심해진다는 내 넋두리에 대한 고모의 위로였던 셈인데, 우리 할머니의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나도 익히 잘 알지만 재미난 이야기의 반복이지 울 왕비마마처럼 <'비비디바비디부'가 무슨 뜻이냐, 뭐하는 선전이냐>는 질문 따위를 광고 나올 때마다 수십번, 수백번(은 과장이겠지만;;) 묻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겐 별 위안이 되질 못했다. 

사실 요즘엔 티저 광고처럼 궁금증을 유발하려고 일부러 감질나게 메시지를 숨기는 광고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무슨 광고인지 통 알 수 없는 <요상한> 광고가 많다. 워낙 문외한이라 나에겐 IT관련 광고가 좀 그런 편인데, 휴대폰으로 인터넷 전화를 쓸 수 있다며 유선전화 선을 가위로 뚝 자르는 광고 같은 건 영문을 몰라 돌연 화가 나기도 한다. 뭘 어쩌라는 거야! 나도 아리송한 광고가 많은 지경이니 늙으신 왕비마마야 오죽하랴!
울 엄마가 아직도 개념파악을 하지 못한 광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쿡>하라는 선전이다. KT에서는 배냇짓을 하는 예쁜 아기 덕분에 새로운 브랜드 광고 효과가 높다고 득의양양하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울 엄만 <쿡>하고 <쑈>하라는 얘기만 나오면 이맛살을 찌푸린다. TV도 보고 인터넷 전화도 하고 휴대폰까지 뭔가 죄다 한꺼번에 어쩌라는 건데, 사실 나도 뭔소린지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뿐이지.

그런데 며칠 전 나는 내 방으로 걸려온 전화국 텔레마케터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넘어가 인터넷 전화를 신청하고 말았다. 유선전화를 쓰고 있기 때문에 <무료>로 인터넷 전화를 설치해줄 것이며 추가 비용도 전혀 없이 무선 전화기도 <공짜로> 주는데 문자메시지도 보낼 수 있는 그 무전전화기의 문자 요금은 휴대폰 문자 요금의 절반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요지였다.
멍청한 나는 전화기를 지저분하게 또 달고 싶지 않다고 계속 발뺌을 하다가 일단 써보고 불편하면 인터넷 전화든 유선전화든 둘 중 하나를 해지해서 치우면 된다고 받아치는 바람에 더 물러서지 못하고 우물쭈물 그러마고 허락을 했는데, 오늘 드디어 인터넷 전화가 설치되었다.

멍청하게도 나는 유선전화와 똑같은 번호로 쓸 수 있는 인터넷 무선전화기만 생기는 줄 알았더니, 070으로 시작되는 인터넷 전화번호가 새로이 따로 주어진댄다. -_-;; 인터넷 전용선 단말기에 뭔가를 푹 꽂아주고는 무선전화기 하나를 두고 갔는데 기분이 영 찜찜하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뭔가 큰일을 지저르고 만 느낌!
추가 기본요금 같은 건 없다고 들었지만, 지금도 방방마다 전화가 너무 많아 걱정인데 (번호 둘에 유선전화 전화기만 모두 네 대였다) 것도 모자라 전화를 또 하나 놓다니... ㅠ.ㅠ
그래도 혹시나 광고에서 본 건 있어가지고,  인터넷 전화를 놓으면 휴대폰으로 무료 인터넷 전화도 쓸 수 있다던데요.. 하고 물었더니 시방 광고는 그렇게 하고 있지만 지금 사업개발이 진행중이고 아직 실행은 되지 않고 있단다.

역시나 과장광고였던 것! 쿡하고 쑈하고 결합해서 어쩌라고 만날 떠들어대는데 나는 아직도 따로따로 쿡하고 쑈하면서 낼돈은 다 내고 별로 편하지도 않게 살고 있는 게 확실하다. 조금 더 잘 알면 정말로 비용절약이 가능하긴 한 건가?? 다 귀찮아서 더 알아볼 엄두는 내지도 않은 채, 새로 달아놓은 인터넷 전화를 계속 째려보고는 있는데 영 불안하다. 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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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올까

투덜일기 2009. 11. 11. 21:20

9월부터 별렀던 요가는 두달이나 지나 이번달부터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번. 뻣뻣 고모와 뻣뻣 조카의 뻣뻣 요가 강습. 강습생 통틀어 "여기서 고모가 젤 못할 거야. 큭큭큭"이라고 했던 조카의 예언대로 역시나 나로선 만만치가 않다. 오늘로 겨우 네번째 강습을 다녀왔는데, 무리하지 말고 되는 데까지만 하라는 강사의 말을 듣고 몸을 사렸음에도 온몸이 다 쑤신다.
여기저기 시설과 시간대를 알아보다 결정한 곳은 32도나 되는 따끈따끈한 실내에서 하는 핫 요가.
신촌 일대를 돌아다니며 알아보다 가본 어느 <정통> 요가 학원에선 절대로 핫 요가는 하지 말라고, 온몸 다 망가져 생리까지 몇달이나 끊긴 사람도 있다며 신신당부를 했지만, 우습게도 그 요가 학원에 강습생이 하나도 안보이는 것에 반해 나와 조카가 다니기 시작한 핫 요가 학원엔 드글드글 시간마다 정원이 거의 다 찬다. 하기야 나도 도인처럼 생긴 그 요가 강사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핫 요가 학원엘 등록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날도 추워지는데 썰렁한 공간보다는 따끈따끈한 실내에서 몸을 푸는 게 더 좋을 것 같고, 시설도 더 깨끗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결정하긴 했지만, 대부분 나긋나긋 몸이 유연한 숙련생들 사이에서 유일한 어린이와 함께 나란히 흔들흔들 비틀비틀 낑낑대며 한시간 동안 애를 쓰다보면 정말 땀이 삐질삐질 난다.
요가 강사야 전문가이니 올바른 자세와 빼어난 몸매를 보아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놀랍게도 나 같은 초보자는 별로 보이질 않는데다 하나같이 원생들의 몸매가 어찌나 뛰어나고 동작도 유연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처음으로 남성동지 둘이 나타나 한발로 서서 균형을 잡을 때 나처럼 비틀비틀 헤매는 모습을 보여 어찌나 위안이 됐는지 모른다. 강습 없는 날에도 혼자서 연습을 하라는데, 요가 하기 전에는 가끔 밤에 스트레칭도 했었건만 학원 다니고부터는 더 안하게 된다. 그간 안쓰던 근육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좀 아껴줘야할 것 같아서...
꾸준히 하다보면 정말로 다리를 접어 척 뒷목에 걸치는 날도 올 거라고 강사는 격려를 해주지만 지금 생각 같아선 도저히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다. 이 짧고 굵은 다리를 어떻게 접어서 뒷목에 걸친다고! 아직은 복식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수준이라 갈 길이 먼데, 뻣뻣 커플의 요가행진이 과연 몇달이나 지속될 것인지 그것이 궁금타. 에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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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짐

투덜일기 2009. 11. 9. 15:23

"나이 들수록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이다. 늙음은 심신의 쇠약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아내나 남편, 정인이 살아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섹스를 포기함과 동시에 어루만짐까지 포기하고 만다. 어루만짐이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어루만짐은 더 나아가, 때로는 죽음으로 이르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몸이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어떤 접촉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이 탓이든 다른 이유로든 외로움을 타는 사람에게 어루만짐은 최고의 약손이다." (235쪽)
                                                        -- 고종석, <어루만지다>, 마음산책, 2009

 
책을 읽을 때도 확실히 당시의 관심사나 고민거리에 따라 눈을 파고드는 구절이 다르다. 여름부터 읽다 던져두기를 반복한 책을 어제 드디어 끝냈는데, 대체로 맛깔스럽게 풀어낸 사랑의 언어와 단상들 가운데 저 부분이 유독 가슴을 울렸다.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한 나의 기질에 굳이 유전인자를 따져본다면 분명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이다. 눈 나쁘고, 키작고, 팔다리 짧고, 머리숱 없는 것까지 죄다 아버지를 닮았으면서 다정다감하고 잘 <어루만지는> 성품은 왜 안 닮았나 알다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소심하고 무뚝뚝한 성격을 물려받으려거든 덩달아 눈 좋고 키 크고 롱다리에다 머리숱도 많은 유전인자를 같이 타고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무뚝뚝 모녀는 결코 먼저 손을 내밀어 부비적거리는 성품은 아니되 다정한 가장 덕분에 평생 넉넉한 어루만짐 속에 살아왔는데, 이젠 그 뚜렷한 부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딸이지 남편이 아니야!>라고 왕비마마에게 소리쳐보지만, 그래도 엄마가 내게 원하는 건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도 조물락조물락 손을 어루만져주고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프다고 하면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던 남편처럼 다정히 굴진 못하더라도 가끔 외로움을 어루만져줄 따뜻한 <약손>이 틀림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덩치 큰 아기가 되어가는 듯한 엄마와 어떻게든 악착같이 철부지 딸노릇을 하고 싶은 나의 갈등은 결국 내가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제대로 어루만지는 역할을 수행할 때 풀릴 것이다. 하지만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도 왜 자꾸 억울함이 고개를 드는지(가령,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팔순 가까운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고 집안일은 한톨도 안하며 사는 진정 캥거루족 지인을 부러워하며 -_-;), 내 마음속의 철부지를 자꾸 달래보아도 잘 모르겠다. 자식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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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투덜일기 2009. 11. 6. 16:45

어제 친구 아버님의 부음을 듣고 밤에 문상을 다녀왔다. 작년에 엄마를 여의고 1년 반만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그 친구에겐 언니오빠가 다섯이나 되는데도 부음을 전하는 전화를 끊으며 퍼뜩 든 생각은 <고아>라는 말이었다. 엄마아빠 다 돌아가셨고 비혼이니 아이는 아니어도 고아인 셈이라는 생각이 든 거다.
여러가지 병치레로 요즘 특히 고통을 겪고 있는 왕비마마가 걸핏하면 빨랑 아버지 따라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버럭 소리치는 말도 비슷하다. <엄마도 없으면 나더러 고아로 살란 말이야?!>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로 느껴지는 유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새삼 네이버 국어사전을 뒤져보니, <부모가 없는 아이> 말고도 두번째 뜻에 <북한어] 예전에 어버이를 잃은 상제가 스스로를 이르던 말>이라고 돼 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니 한편으로 위로가 되지만, 그래도 역시나 <고아>라는 말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어젯밤엔 문상을 다녀와 잠든 엄마의 어깨 위로 이불을 올려주며, 성질 좀 죽이고 좀 더 다정한 딸이 되어야지 결심했는데, 만 하루도 못돼서 오늘 계속 왕비마마랑 티격태격했다. 종종 정적속에 입다물고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딸과, 온종일 틀어놓은 TV소음을 배경으로 치덕치덕 붙어서 만지고 얘기하길 원하는 엄마의 조합은 늘 어렵다. 
원래부터 오늘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는데, 왕비마마는 또 화난 딸의 임시 가출로 여길 게 뻔하다. 특별히 잘못한 것 없는데도 서로에게 뾰족한 말을 날리게 되는 이런 날엔 그냥 침묵의 시간이 약이란 걸 왕비마마는 왜 모르실까. 이럴 때마다 좀머씨가 생각난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 딸 참 못됐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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