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불렀구나

투덜일기 2009. 11. 20. 16:14

혹시나 물기가 남아 있으려나 싶어 빨래를 쥐어짜듯 머리를 혹사시켜 어렵사리 번역원고를 마감하고 나서 특히 이번엔 슬럼프가 깊었다. 시기적으로 공연히 맥빠지고 무기력한 늦가을이기도 했고, 내년이면 벌써 만 15년을 넘기는 이 직업과 나의 역량에 대해서도 새삼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일 하나 끝낼 때마다 슬럼프 타령을 한건 벌써 작년부터인 것 같다.
예전엔 책 한권을 마치고 났을 때의 성취감이 다음 작업시작을 부추길 만큼 커서, 마감 후유증이라며 한 일주일이나 열흘쯤 널브러져 있다간 얼른 새 일감의 책장을 넘기곤 했다. 그런데 이젠 꼬리에 꼬리를 물듯,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 반복되는 과정이 어쩐지 한심하고 짜증스럽게 느껴져 작업 중간에도 돌연 맥이 빠지는 바람에 몇달씩 배째라는 식으로 마감일을 넘기기도 했고, 새로 다시 일을 시작하려면 마음을 추스리는데 한달씩 걸리기도 하는 지경이다.
몇달씩 끙끙거린 작업의 결과물이 따끈한 책의 형태로 주어져도 예전 같은 벅찬 감격은 느껴지지 않는다. 책이 나오면 신간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책구경을 하느라 일부러 서점엘 나가보던 정성 따위는 벌써 10년 전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수없이 쏟아진 책들 사이에 파묻혔다가 소리없이 사라질 그 책의 운명이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해 차마 보기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얼마 전 오랜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내가 털어놓았다. "나 요새 일하기가 싫다."
십수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 친구도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며 맞장구를 쳤다. 헌데 주변에 그런 얘기를 털어놓았더니 단박에 "너 배가 불렀구나"하는 반응을 보이더란다. 요즘 일 없어서, 짤려서, 망해서, 팽팽 놀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이 있으면 감사한 줄 알라고 했다나.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건 한편 동의하지만, 동시에 배알이 뒤틀리기도 한다.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애써왔는지 저들이 뭘 안다고!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서 선택한 직업인데 끊임없이 문제만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는 친구와 달리 나는 정말로 내가 선택한 일 자체에 멀미가 나고 회의가 드니 문제다. 분명 평생 하고픈 일을 찾았다고 여기며 들어선 길이었는데, 이 길이 아니면 어쩌나 싶은 느낌.
회사 다니던 시절 성취감이나 뿌듯함은 눈곱만큼일 뿐이고 대부분은 조직사회의 중압감과 심리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괴로웠던 마음에 비하면야 여전히 훌륭한 선택이라 생각되지만, 그 정도 위로만으로는 밤샘을 밥먹듯하면서도 책장을 넘기며 흥을 냈던 열정이 되살아나질 않는다.

친구는 "아마 우리 나이가 그런 나이인가보다."는 결론으로 잘 넘겨볼 것을 권했지만, 이 맥빠짐이 정말로 단순한 나이 탓인지 잘못된 길 탓인지 배부른 투정인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어쩌면 괜한 욕심 부리다 겪는 배고픔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겠고. 어쨌거나 궁금한 건 해마다 <단군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출판계의 역사 갈아치우기가 내년에도 되풀이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올해도 읽은 책보다 사들인 책이 더 많건만, 대한민국 출판계는 왜 노상 불황인지 원. 혹시라도 내년엔 출판계 호황에 힙입어 불끈 번역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길 빌어봐야겠다. 여러모로 따져봐도 배가 불러서 하는 푸념은 확실히 아니란 말이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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