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도시

투덜일기 2009. 12. 2. 01:45

겨울엔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전날 뉴스 일기예보를 챙겨보거나 인터넷으로 기온을 확인한다. 공연히 춥게 입고 나갔다가 낭패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인데, 요샌 그나마도 게을러져 이불 갤 때 열어둔 창문으로 스며드는 냉기의 정도로 대강 어림짐작을 하고 만다. 그러고도 못 믿겠으면 우유 꺼내러 잠시 나갔다 오신 왕비마마에게 "오늘 날씨 추워?"라고 묻기도 한다. 그조차도 귀찮으면 남들이 뭐라하든 말든 일단 두꺼운 옷으로 무장을 하고 나서는데, 요 며칠은 너무 두터운 옷 때문에 낭패를 보아 옷입기가 조심스럽다. 추운 것도 못참겠지만 터틀넥에 털옷까지 잔뜩 껴입고 나가서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버스라도 탈라치면 숨이 막혀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다. 몸뚱이는 오래될수록 참을성을 잃는 게 확실하다.

요 며칠 날씨가 꽤 따뜻한 건 알고 있었는데, 저녁무렵 외출을 해보니 높은 기온 때문인지 온 도시에 안개가  자욱했다. 황사 때 못지 않은 잿빛 대기에 휩싸인 하늘을 배경으로 강이 흐르고 그 건너로 보이는 여의도의 스카이라인이 예상밖으로 참 멋졌다. 게다가 오늘은 시월 보름. 조금 있으니 일부러 세피아톤으로 보정한 사진 같은 저녁 하늘 위로 동그란 달이 안개속에 빛났다. 원래 그래 보이는 것인지 나만의 착각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달은 초저녁 무렵에 제일 커보인다. 추석이나 대보름날 초저녁 하늘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은 원래 달이 저리도 컸었나 싶게 무진장 살쪄 보이는데, 그러다 중천으로 올라갈수록 동그라미가 작아진다.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최근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선을 올려봤댔자 나날이 가지가 앙상해지는 가로수 높이 정도였고, 눈길을 잡아끄는 건 거리를 온통 덮은 낙엽이었다. 동네 가로수와 노변 화단엔 벌써 짚을 둘러 겨울 채비를 마쳤고, 지조없이 색도 변하지 않은 채 메마른 잎을 폭탄처럼 떨어뜨리는 플라타너스 군단은 참 을씨년스러웠다. 그래서 더욱 바닥만 쳐다보고 다녔던 듯.


학창시절 엠티의 단골 장소였던 북한강변의 싱그러운 물안개를 제외하면 도시의 안개는 나에게 늘 공해의 이미지와 동격이었다. 스모그로 뿌옇게 변한 도시의 하늘, 그 잿빛 안개 속에선 호흡마저 바튼 느낌이라 축축한 마스크를 끼고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숨을 헐떡이게 되던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 저녁 안개는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눈쌀이 찌푸려지는 플래카드를 내건 성냥갑 아파트의 못생긴 몰골도, 질금질금 움직이는 강변도로의 자동차 홍수도 변함이 없는데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도시가 꽤 멋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사람이든 사물이든 다 드러내는 것보다는 적당히 가릴 때 아름다워 보임을 새삼 깨달은 하루.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안개는 내일도 이어진단다. 안개 도시의 뿌연 아름다움을 하루 더 즐길 수 있음이 기쁘다. 내일도 열심히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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