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투덜일기 2012. 10. 6. 16:20

얼마전 친구가 자기랑 딸을 하룻밤 재워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고3딸이 수시입학원서를 넣었는데 수리논술고사를 보러 아침일찍 와야한단다. 근데 경기 신도시에 있는 그 집에서 오기엔 너무 멀다고... 당연히 그러마고 했다. 재워도 주고 라이드도 해줄게. 다만 궁궐처럼 넓은 새아파트에 살던 아이가 30년 넘은 낡은 집에 와 방바닥에서 자는 것이 좀 낯설겠지만서도, 라고 토를 달았더니 둘 다 머리만 닿으면 자는 유형이라 염려 없단다. 수십년 전인 대학 1학년때 친구가 딱 한번 놀러온 적이 있었는데, 맙소사 바로 그 동네 그 집으로 수험생 딸을 데리고 오다니 그 세월을 붙박이로 산 내가 참 징하다 싶었다.

 

문제의 논술고사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어젯밤 광역버스와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도 넘게 걸려 온 친구와 딸을 버스정류장으로 마중 나갔다. 친구는 결혼 전 살던 친정도 천호동이었던 지라, 간만에 보는 강북의 구불구불한 도로와 언덕길과 언덕배기에 서 있는 주택 단지 구경을 신기해 했다. 대범하고 진중해서 늘 부모에게 아무런 걱정도 끼치지 않는 아이는 그래도 심적인 부담이 컸던지 밤중에 체기가 있었다. 손과 등을 주물러주다가 결국엔 찬바람 쏘이러 밤동네를 걸어다니다 편의점에서 물약 소화제를 사먹였다. (그나마 '의약외품'이라며 이름이 '가스 활'로 끝나는 소화제를 팔아서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간단한 소화제나 감기약은 진짜 편의점 판매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규!! 의사, 약사들은 쫌!!)

 

시험시작은 8시 반이라는데 입실제한은 7시 50분. 차로 가면 우리집에서 늦어도 15분이면 가니깐 염려 말라고 해도 집에서 6시 반에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두 모녀는 걱정이 컸다. 작년 수시때 학교앞 도로가 완전 꽉 막혀서 4.5km 가는데 한시간 반이나 걸려 결국 눈썹 휘날리게 뛰는 아이들이 엄청 많았다나 뭐라나. 후문으로 질러 들어갈 거라서 그럴 염려 없다고 큰소리는 쳤어도, 결국 다섯시 반을 기상시간으로 정했다. 아침은 6시에 먹는 걸로.

 

6시에 아이를 깨워 (나름 심혈을 기울인) 밥상을 안기고 6시 50분에 집을 나섰다. 늦는 것보다는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게 낫단다. 후문을 들어섰을 때만 해도 간간이 안내하는 ROTC와 경비원 아저씨들이 보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너무 일찍 왔다 싶었는데 웬걸, 본관 앞 인문관 근처부터는 길 몰라 헤매는 차들이 벌써 엉켜 빌빌대고 있었다. 7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구름처럼 몰려 걸어들어오고 있는 인파, 인파들... @.,@ 등교시간에도, 졸업식 날에도 캠퍼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건 본 적 없었는데, 정말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기야 친구 딸이 원서를 넣은 학과만 따져도 시험보는 애들이 무려 3천명이란다. 이과라서 오전 시험이지, 문과는 11시 반까지, 사회과(?)는 1시까지 나누어 등교시켰으니, 첫 시험 끝나고 나가는 아이들 들어오는 아이들 겹쳐지는 시간 무렵엔 인파가 더욱 어마어마할 거라고 했다. 어휴... 벌써부터 인근 호텔에 방을 잡아놓은 친구들이 더러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 시험장에서 만난 아이의 반친구는 방을 구하지 못해 엄마와 함께 찜질방에서 자고 왔다고 했단다. 그간 대학 입시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그 치열한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니 아이들의 무한경쟁이 실감났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수시로 뽑혀 그 학교에 다닐 아이들은 과연 몇이나 되려는지...

 

수리논술은 워낙 대학에서 낸 출제 문제가 어려워서 80%가 0점(!)이고, 1문제만 풀어 18점만 맞으면 합격이 보장된다고 했다. 시험장인 공학관 바로 앞에 친구와 딸을 내려주고 행운을 빌었다. 평소 실력대로만 해! 후문과 달리 아수라장으로 변해 경찰 수십 명이 빨간봉을 휘두르고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정문을 어렵사리 빠져나와 집으로 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 학력고사 보던 옛날엔 대학입시도 참 간단했는데 요즘엔 뭐든 참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다. 수시 입학원서는 여섯 군데로 제한이 있고, 수시 합격생에게도 학교별로 수능 과목 등급 제한이 있으며, 정석검사니  특기니 해서 모집 분야도 다양하단다.

 

아까 시험 끝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일부러 시험 잘봤더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수능인데 뭣하러 나까지 스트레스를 주나 싶어서. 이제껏 나는 '수시' 얘기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스시' 생각이 나면서 군침이 돌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수시'란 낱말과 함께 오늘 아침에 본 그 어마어마한 인파가 떠오를 것 같다. 옛날에 입시 치러서, 옛날에 취직해서 좋았었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일이 점점 잦아지는데, 그렇다고 '요즘'을 살지 않을 수도 없으니 참, 이래저래 맥이 빠진다. 과거를 황금기로 추억하는 것보다는 지금 여기 현재를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새삼 떠올려야 하나. 10년, 20년 후에 또 오늘을 떠올리며 그때가 팔팔하고 좋았지, 그럴 인간이 분명하므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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