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즐겨보는 퀴즈 프로그램 <일대백>을 보다가 의외의 순간이 있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소망을 적은 <버킷 리스트>의 유래를 찾는 문제였는데, 1) 양동이를 걷어차다 2) 양동이에 물을 담다 3) 양동이에 구멍을 뚫다(;;였던가? 그새 보기 까먹었음) 세 보기 중에 답을 골라야 했다. 도전자로 나온 중년의 탤런트는 찬스를 요청했고, 출연자 가운데 정답자와 오답자 둘이 자신이 고른 답의 이유를 설명했다. 공교롭게 두 출연자 모두 명문대(!) 재학생이었는데, 중년의 탤런트가 '버킷'의 뜻이 뭔지 가르쳐달라고 묻자 두 청년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다. 엥? 설마, 그 유명한 '바께스'를 탄생시킨 '버킷'을 둘 다 모른다고? 진짜? 방송이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 잠깐 생각이 안났을 수 있을 거라고 최대한 양보해보았지만, 보기 세 개에 죄다 '양동이'가 나왔는데, 설사 어쩐지 사람 이름 같은 <버킷 리스트>의 '버킷'이 'bucket'이고 뜻이 '양동이'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보기를 보는 순간 뜻을 유추하지도 못했다고? 그런 재치도 없으면서 퀴즈 예심은 어찌 통과해 거길 나갔을꼬!
옛날 서양에서 교수대에 양동이를 엎어 놓고 그 위에 올라선 죄수에게 올가미를 씌운 뒤 양동이를 걷어 차 교수형을 거행했기에, 'kick the bucket, 양동이를 걷어차다'가 '죽다'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거기서 <버킷 리스트>가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까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퀴즈 문제로 출제되었을 것이고, 따지고 보면 영어로 밥벌이 하고 있는 나도 까맣게 모르는 영어 상식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이, 그것도 사학의 양대산맥(?)인 명문대생들이 '양동이'를 모른다는 사실이 나에겐 퍽 의아했다. bucket이 수능단어에 안 들어가나? +_+
프로그램이 끝난 뒤 문득 궁금해진 나는 포털사이트 사전에 bucket을 쳐 확인해보았다. 영어공부에 열심인 나의 초딩 조카들도 아는 단어일 것만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1, 중3 단어라고 나왔다. '바께스'가 '버킷'에서 나온 말이라는 건 내가 우리말과 일어의 잔재에 관심이 쓸데없이 많은 사람이라 드물게 아는 걸 수도 있다. 일제시대를 겪으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래 산 덕분에 그 외에도 '고뿌(컵/cup), 바나(버너/burner), 보께또(포켓/pocket), 도라이바(드라이버/driver), 도란스(트랜스/trans.), 라이방(레이밴/Ray Ban' 따위의 일본식 발음이 영어에서 비롯됐음을 커가며 알고나서 유독 신기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유행된 '라이방'이 선글래스를 통칭하는 외래어가 아니라 순전히 브랜드 이름이란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란!
수능 보고 대학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영어로 '양동이'를 모를 수가 있느냐고, 잠깐 깜빡 했거나 아예 몰랐더라도 보기를 보면 생각을 해냈어야 마땅하다고 괜히 씩씩대다가 문득 민망해졌다. 상대가 명문대 생이라니까 무조건 엘리트주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입시 시스템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영어는 하나도 공부 안하고 다른 과목 특기생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bucket이 너무 쉬운 기본단어라서 수능 영어에선 안 다루어졌을지도 몰라. 아니, 수능 끝내고 나서 쓸데없는 입시 지식은 머리에서 샥 지워버렸을수도 있지. 게다가 영어단어 좀 모르면 어때! 전국민이 모두가 영어공부에 매달리는 사회가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그렇게 잠깐의 혼란을 정리하며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시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공부하는 시간도 훨씬 길고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투자하고 있지만, 오히려 지적인 능력과 지식 수준은 과거보다 현저히 떨어져 이른바 명문대생이라는 아이들도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는 생각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대학생 두명 겨우 본 거 가지고 내가 섣부르게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아니면 어떡한다.
'문안한 선택, 어의가 없다, 명의회손, 회개망칙, 주최할 수 없는 슬픔...' 따위의 말을 철썩같이 맞다고 생각해 반복해 쓰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내게 '축하들여요'란 메시지를 벌써 여러 번이나 보내 기겁하게 한 후배 하나도 시방 교수가 되려고 공부중이다. 학교에서 발제문 같은 거 만들어 돌릴 때 맞춤법은 제대로 확인하는지 몹시 염려스럽지만 차마 물어볼 수도 없다. <죽기 전에 해야할 OO가지> 어쩌구 하는 책도 한참 유행이었고,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도 유행이라 <버킷 리스트>가 뭔지는 알면서, <양동이> <바께스>가 뭔지는 잘 모르는 상황은 과연 괜찮은 걸까. 예나 지금이나 주입식 교육은 하나도 변함이 없고,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 공부를 강요당하는데 전체적인 지식수준은 하향평준화하고 있다는 혹자들의 개탄은 그냥 기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떫더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