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생각만 하며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리는데 딸깍. 현관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엄니 벌써 나갔다 들어오시누만. 점심 때나 되서야 일어나는 게 민망해 얼른 이불을 벗어났다. 점심상 차려바치려면 서둘러야겠군. 근데 현관 자물쇠가 열리고도 도무지 노친네 올라오시는 소리가 안들렸다. 뭐지? 꾸물꾸물 우편물 챙기시나? 어랏, 현관문 앞에 보여야할 그림자가 사라졌다. 우편물도 아니고 뭐람? 마당 쓰는 소리도 안들리는데...

 

오랜 정적에 호기심을 못 이기고 베란다 창으로 내다보니 귀가하던 노친네가 다시 집앞 계단 아래 골목에 서서 야쿠르트 아줌마랑 소곤대고 있었다. 뭐래... 또 우유 바꿔먹으라고, 혹은 야채주스 배달해 먹으라고 설득당하시는 중인가? 암튼 왜 안올라오나 알았으니 부리나케 우동을 끓였다. 새벽에 밤참을 대충 먹은 탓인지 일어나 돌아다니자 마자 돌연 허기가 느껴졌다. 설마 우동 다 끓이기 전에는 올라오시겠지...

 

그릇에 우동을 담아 점심상 차리기를 마쳤는데도 노친네 기척이 없어 공복으로 인한 분노가 버럭 치밀려는 찰나,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을 헐떡거리던 노친네는 숨도 채 고르기 전에 방금 들은 정보를 내게 쏟아놓았다. 하도 드나드는 기색이 안 보여, 남자는 밤근무를 하는 사람이고 아마도 여자는 지방에서 오가는 젊은 주말부부일 거라고 나름대로 우리가 상상했던 아래층 남녀에 대한 정보였다. 나는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여자는 '조기 언덕 너머 아랫집'에 사는 아무개네 딸이고, 남자는 그 여자의 남자친구인 모양이다. 안 그래도 말 많고 참견 많은 야쿠르트 아줌마는 동네 창피하게 어떻게 애인을 몰래 이웃에 불러들여 동거를 하느냐고, 잔뜩 흉을 봤다는데(울 노친네도 맞장구를 친 눈치;;), 남자친구 자기네 동네로 이사하게 한 게 뭐 어떻다고 난리?

 

남자친구 집에 드나드는 게 무슨 동거냐, 설사 동거라 쳐도 요샌 살아보고 결혼하는게 추세인 걸 모르냐, 젊은이들 너도나도 세상 팍팍해 결혼 안하는 게 유행인데 동거라도 하면 땡큐지 뭘, 대부분 수십년씩 붙박이로 살고 있는 이웃 사정 너무 잘 안다고 오히려 흉보고 다니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나쁜 거다, 라고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노친네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야쿠르트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방금 여자가 개 안고 들어갔으니 확인해보라고;;) 우편물 핑계로 아래층 여자와 대면을 하고 온 듯, 노친네는 아래층 여자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둥, 아니 마당에 매어둔 개도 건사 못하면서 집안에서 개를 또 키우면 어쩌냐는 둥 다시 구시렁거렸다. 엄밀히 아래층 남녀가 울집 노친네에게 미운털이 박힌 건 바로 그 하얀 개 때문이었다. 올케가 집에 다니러 올 때마다 귀엽다고 자지러질 만큼 예쁘게 생긴, 삽살개를 닮은 하얀 개가 작년 가을부터 다시 우리집  뒷마당에 터를 잡았는데, 아래층 남자 출퇴근이 일정하질 않은 건지 암튼 울 엄니가 볼 때마다 그 귀여운 개가 똥이 가득 깔려 발 디딜 틈도 없는 펜스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는 것. 며칠 째 사료와 물이 바닥 나 없을 때도 많고! 하지만 서로 얼굴을 봐야 뭐라고 한마디 할 텐데, 통 마주칠 수가 없어 노친네가 전전긍긍하는 걸 (애완견 굶기고 똥 안치워주는 건 학대라고 신고할 수 없는 거니? 냄새나게 개똥은 왜 안치워?! 뒷마당이 지네 혼자 쓰는 건가?)  보다 못해 내가 또 다시 '메모지' 신공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악취 문제로 괴로우니 개똥은 제발 수시로 치워주길 바란다고 적어서 문앞에 붙여놓았던 것. (차마 개 밥 잘 챙겨주라는 참견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개는 통 짖는 법도 우는 법도 없이 얌전해서 드나들며 문득 없어졌나 들여다봐야할 정도인데다 축 쳐진 귀가 생긴 건 또 얼마나 귀여운지 큰올케는 마당 있는 집에 살면 자기가 당장 데려다가 기르고 싶다고, 족보 있는 개 같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잘 생긴 개를 관리 통 안 해줘서 털은 회색으로 변해 마구 엉키고... 얼마 전 겨울엔 글쎄 아래층 남녀가 직접 개털을 확 깎아놓은 적도 있었다. 깎은 털을 치우지도 않고 마당 한 구석에 수북하게 쌓아놓아 우린 눈이 온 줄 알았음. ㅠ.ㅠ 털을 깎았으면 옷이라도 입혀주지 분홍 살갗 비치게 그냥 놔뒀다고, 엄동설한에 얼어죽으면 어쩌냐고 노친네는 개 근처에 얼씬도 못하면서 나더러 개집에 담요를 더 깔아주라는 둥, 우리라도 강아지 옷을 사다 입혀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둥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나더러 어떻게 개 옷을 입히라고? 더구나 그 개 이름도 모르는데... +_+

 

아무려나 계속 그 집 개 때문에 속을 끓였던 터라, 아랫집 여자가 안고 있는 강아지를 보자마자 엄니는 "어머나, 개가 또 있네요..."라고 말했다나. 그나마 고무적인 정보는 곧 마당의 큰개를 어디론가 보낼 거라는 예고였다. 그나마 다행. 그런 인간들은 개를 키울 자격도 없다고, 개 혐오자를 자처하면서도 노친네는 한동안 또 개 걱정을 했다. 짖지도 않는 똘똘한 개가 주인 잘 못만나 생고생한다고... 그에 비하면 파랑이(조카네 개)는 엄청 호강하는 거라고.  

 

그러고는 개를 마당에 묶어놓고 거의 방치하는 주제에 또 개 훔쳐갈까봐 염려되는지 개집 앞에 CCTV는 달아놓았다고, 아래층 남자가 타고다니는 호피무늬(!) 오토바이(정확히 말하면 스쿠터다)도 그게 뭐냐고 날나리 같다고, 정화조 청소했다고 말한 지가 언제인데 가구당 분담금 만오천원 아직도 안 내놓았다고, 우편물도 왜 꼭 챙겨서 문앞에 꽂아줘야 들여가냐고, 노친네는 끊임없이 아래층 남녀를 흉봤다. 내가 보기엔 다 그들이 하얀 개를 제대로 건사 못한 잘못에서 비롯된 미운털 값이다. 그러니 하얀 개가 없어지고 나면 노친네의 미움도 사그라들겠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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