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아버지는 설날 전에 은행에 가서 꼭 만원짜리 신권을 바꿔다가 세뱃돈을 주셨다. 95년부터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참 공교롭게도 꼭 한해 간격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설날 세배드릴 어른들이 확 줄어든 것도 슬펐지만 천원짜리 몇장 푼돈이라도 재미삼마 받던 세뱃돈을 주실 분은 부모님 뿐인 것도 못내 섭섭했다. 직장인이 되고부터 어른들께는 세뱃돈을 드리면서 세배하는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마치 물물교환이라도 하듯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에게도 주섬주섬 쌈짓돈 챙겨주시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하여간 아버지는 머리 큰 자식들에겐 빳빳한 만원짜리 한장 세뱃돈으로 건네면서 '종돈'(種돈)으로 지갑에 넣고 다녀라, 하셨고 정말로 나는 그 씨앗 돈이 무럭무럭 새끼를 치면 좋겠다고 바라며 늘 다음해 설날까지 지갑에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첫 설날, 엄마는 손주들 세뱃돈 봉투만 챙길 뿐 삼남매와 조카들에게 주는 '종돈'은 준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딨어!! 나도 세뱃돈 받고 싶단 말이야! 늙은 딸은 앙탈을 부렸고, 아들 며느리들도 아빠가 하시던 일 엄마가 그냥 이어가기를 바랄 거라고 계속 꼬드겼다. 엄만 어차피 세뱃돈 남는 장사잖아! 협박도 좀 하고...

 

그 덕에 올해도 설날 빳빳한 만원짜리 한장이 든 봉투를 받았고, 작년에 받은 종돈 옆에 나란히 지갑에 넣어두었다. 종돈이 두 장이면 새끼를 더 많이 칠 지도 몰라, 이러면서 ㅋㅋ.

 

어쩐지 미신덩어리가 되어버린 듯한 내 지갑엔 요번 입춘 부적도 새 걸로 개비되었다. 정작 입춘 날엔 낙상 후유증으로 절에도 못가고 끙끙 앓느라 식구들 부적 챙겨놔 달라고 전화만 한 뒤, 노친네가 며칠 지나고 찾아오더니 내껀 작년부터 특별히 삼재 부적이라며 시뻘겋고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아오, 진짜...  교회 다니는 둘째 며느리 것만 빼고 본인이며 자식들 부적을 갯수대로 다 받아와서는 다들 빨랑 바꿔줘야 하는데... 전전긍긍하는 노친네를 보자면 짜증스럽다가도 결국 피식 웃음이 난다. 동생들도 다들 별 군말 없이 부적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이유는 미신을 믿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노친네 마음 편하시라고 그러는 거겠지.

 

작년에는 절에서 입춘첩도 받아와 현관문에 붙여두었던 터라, 문 여닫고 드나들 때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한문으로 적혀 있는 한지를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았으나, 올핸 입춘첩 받아오면 엄청 추웠으니까 거꾸로 붙여야지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부적만 챙겨준 모양이다. 한해 무사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이는 입춘첩이나 부적이나 지갑에 돈 많이 들기를 바라는 종돈이나 어떻게 보면 다 터무니 없는 미신이고 허튼 짓인데, 또 한편으론 재미나고 정겨운 풍습이니 손가락질 할 것만도 아니다. 종돈이든 아니든, 이 나이에도 새배하고 세뱃돈 받으면 그저 흐뭇한 걸 어쩌겠나.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