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해당되는 글 136건

  1. 2011.11.26 번역서는 공손하다? 12
  2. 2011.11.17 카레라이스를 먹는 두 가지 방법 9
  3. 2011.09.27 휘트니미술관전 13
  4. 2011.08.29 팝업북 자랑 16
  5. 2011.08.25 분노하라 INDIGNEZ-VOUS! 12
  6. 2011.08.18 까탈의 궁극? 15
  7. 2011.08.15 탱고의 추억 12
  8. 2011.08.03 아이디어 좋다 9
  9. 2011.08.02 1
  10. 2011.08.01 지금도 좋아 11

우리나라 소설에는 작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비속어를 사용하는데 왜 번역서엔 그게 허락되지 않을까? 영어로  <son of bitch>는 거의 누구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흔히 쓰는 일상적인 욕이다. 그렇더라도 상황에 따라선 분명 <개새끼>가 정확한 옮김인데 번역서에선 종종 <개자식>으로 순화된다. 그뿐인가. goddamn, damn, fucking, mother fucker, shit... 제 아무리 머리 굴려 나름 기발하게 달리 옮겨봐도 편집 과정에서 그저 <빌어먹을> 아니면 <젠장>, <제기랄> 정도로 순화'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원서로 읽으면 방황하는 십대의 날선 언어와 감정, 욕설이 난무하지만(한 페이지에 욕이 막 두세개씩 나온다), 번역서로 읽어보면 어찌나 공손하고 고상하신지. 일부 오역도 오역이지만 이 책의 경우, 비속어의 일체 순화 및 생략은 확실히 읽는 재미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한다. 김려령의 <완득이>를 킥킥대고 읽으며 <호밀밭의 파수꾼>의 번역도 가끔씩 그렇게 경쾌한 분위기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다. 물론 두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퍽 다름을 잘 안다. 둘 다 남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보니 단순히 예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라를 막논하고 약간 삐딱한 청소년이라면 원래 욕이 일상 아닌가?

암튼 언젠가 범죄소설을 번역하면서 수시로 등장하는 fucking의 뉘앙스를 살려보겠다고 내딴엔 비속어인 '씹할'을 주장했다가 결국 졌다. 단순히 한국 출판계에서 번역어의 공손함과 교양을 추구하기 때문은 아니다. 비속어가 남발된 책은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딴죽을 걸 수도 있고, 그러다 혹 재수없게 19금 판정이라도 받게 되면 비닐로 포장 판매를 해야한단다. 그랬다간 가뜩이나 열악한 시장에서 독자층은 좁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어쩔 수 없이 지레 위축된 편집자와 번역자는 오랜 세월 원서의 비속어를 자체 검열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설을 읽어보면 길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비속어와 욕을 작품에 구사해도 아무 문제 없더구만? (가령,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을 읽으며 '씨발'을 비롯한 비속어의 사용이 매우 자연스러워 놀랐었다) 그런데 왜 번역서는 구태의연하게 계속 공손해야 하는지?

그나마도 요즘엔 번역서에서도 <나쁜년> 정도는 허용되는 추세다(과거엔 <못된 계집>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아직도 <새끼>는 <자식>, <놈>으로 순화하고 있자니 문득 부아가 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가끔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외칠 때 느끼는 희열을 번역서에서도 느끼면 안되는 걸까? 일부러 격 떨어지고 천박한 언어로 번역할 이유는 없지만, 걸핏하면 '원서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독자들의 비수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번역인들에게도 이제는 좀 제대로 비속어를 우리말로 옮길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 이미 그렇게들 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 보수적인 출판사들과만 일을 했던가? -_-;;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작업하는 책에선 나름 원색적인(?) 비속어를 또 한번 디밀어볼 생각이다. 통과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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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이스를 먹는 방법이 어디 두가지 뿐이겠냐마는 대략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밥과 카레를 한꺼번에 다 비벼놓고 균일한 맛을 즐기며 먹는 방법과 카레를 끼얹은 밥을 조금씩 먹을 만큼만 비벼먹는 방법이다. 원래는 빙수를 먹는 두 가지 방법으로 제목을 정하려다 너무 계절과 동떨어진 것 같아서 참았다. 사실은 빙수 먹는 방법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카레라이스야 혼자 먹지만 빙수는 대개 둘이 같이 먹으니 먹는 방법이 다르면 그야말로 '대략난감'이다! 올여름 빙수값이 거의 만원에 육박한 걸 보며 미쳤구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개 둘이 나눠먹으니 다른 음료값과 비교하면 그럴만도 하다고 애써 이해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한 그릇 놓고 퍼먹으려면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아예 먹을 엄두도 낼 수 없는 빙수야말로 같이 먹는 사람의 취향이 중요하다.

나는 카레라이스도 그렇고 빙수도 그렇고 처음부터 섞어먹는 걸 싫어한다. 카레라이스 뿐만 아니라 각종 덮밥은 한꺼번에 비벼놓으면 어쩐지 개밥스러운 것이 먹을 확 맛이 사라지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비벼파'의 주장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짜장면과 비빔밥을 처음부터 다 비벼야 양념맛이 고르게 배듯 덮밥류도 처음부터 죄다 골고루 비벼놓아야 시종일관 일정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 나도 인정한다. 짜장면과 비빔밥은 나도 처음부터 열심히 비벼서 먹는다. 짜장면은 그냥 두면 면이 불어 떡처럼 엉기니 어쩔 수 없이 비벼야하는 것이고, 비빔밥은 이름부터 비비는 행위가 근본임을 밝혀둔 음식인데다 가닥가닥 엉킨 나물과 고추장 양념은 한 숟가락에 따로따로 골라 담기가 어려운 재료다. 하지만 나머지 덥밥은 이미 다른 양념이 다 섞여 있으니 밥에 얹어서 입안에 넣고 음미하면서 얼마든지 씹어서 섞을 수 있다. 오히려 다 비벼놓으면 나중엔 양념수분이 밥알에 다 배어들어 대단히 뻑뻑하고 맛없어 보이는 단계로 변한다. 더욱이 요즘 유행하는 일본식 카레는 어찌나 짠지 처음부터 대뜸 비볐다간 못먹기 십상이다. 혹 양념이 모자라 나중에 맨밥을 먹는 한이 있어도 나는야 '조금씩 비벼파'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빙수는 각종 과일과 연유 단팥, 아이스크림을 죄다 섞어 곤죽을 만들어놓으면 내눈엔 순식간에 시궁창(!)으로 변한 것만 같다. ㅠ.ㅠ 그냥 한쪽 구석에서 야금야금 조금씩 뒤섞어 파먹으면 끝까지 얼마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거늘... 해서 취향이 다른 친구와 빙수를 같이 먹게 되면 처음에 몇번 숟가락질을 하다 이내 숟가락을 놓고 만다. 서로 배려하느라 절반씩 남기거나 섞는 노력을 기울여도 어쨌거나 얼음은 녹기 마련이니까. 지난 여름 몇번 팥빙수를 시도했다가 번번이 취향차로 속상한 일을 겪고는 2인용이라며 마구 가격을 올려버린 제과및 음료업체를 원망했다. 옛날처럼 작은 그릇에 1인분씩 저렴하게 팔면 좀 좋으냐고! 
 
실은 오늘 카레라이스를 해먹었는데 '처음부터 비벼파'이신 엄마와 '조금씩 비벼파'인 나는 서로의 카레라이스 먹는 방법을 매번 못마땅해한다. 엄마는 내가 카레라이스를 깨작거리며 먹는다고 생각하고, 나는 엄마가 비벼놓은 카레라이스가 영 맛없어보인다고 여긴다. 수십년 넘은 습관이니 그러려니 할만도 하건만, 못마땅한 건 못마땅한 거다. ^^; 가끔 밖에 나가 중식집에서 요리 하나에 잡채밥이라도 시켜 같이 먹게 되면 엄마가 얼른 다 뒤적여놓기 전에 잡채밥 접시에 금이라도 긋고 싶어진다! ㅋ 조금 전 식탁에서도 카레를 따로 그릇에 담아 놓았더니 엄마가 설거지 거리만 많아지게 뭐하러 그랬냐고 잔소리를 했다(아 설거지는 내가 하는구만!). 결국 나는 보기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까칠한 외모지상주의자로 또 한번 결론이 났고, 엄마는 겉모양보다 맛이 더 중요한, 무던한 실용주의자였다. 하이얀 얼음과 과일, 연유의 모양새를 최대한 지켜가며 빙수를 먹으려드는 내 모습을 보면(아무리 노력해도 곤죽이 되는 순간은 있다! 다만 비비지 않으면 완전 회색물로 변하지는 않는다;; -_-;) 웃길 수도 있겠으나 어쩌겠나. 취향이 이렇게 고정되어 버린 것을. 그래도 내 주변엔 나처럼 까칠한 사람 많을 거라고 항변하는 의미로 끼적여봤다. 저 말고도 카레라이스랑 빙수 안 비벼서 드시는 분 많죠? 그쵸?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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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미술관전

놀잇감 2011. 9. 27. 22:23

6월부터 시작해 9월 25일까지 석달도 넘게 한 전시를 끝나기 며칠 전에 간신히 다녀왔다. 처음엔 시간 많으니 애들 방학 끝나고 천천히 가지 마음 먹었다가 점점 갈까말까 망설이는 쪽으로 기울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이 미국 미술이다>라는 전시 제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으나 어쩜 이리도 오만하고 건방진 제목을 정했을까 공연히 빈정이 상했다. 아무리 휘트니 미술관의 역사가 유럽 미술 중심의 흐름에 반감을 품고 미국 화가들을 독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겨우 80몇점 그림 빌려와서 보여주며 그게 미국 미술의 전부라고 큰소리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술관을 다 돌고 나서, 진짜로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궁금하여 던지고 싶었던 질문: 에게게... 정말 이게 미국 미술의 전부라고? -_-;)

가기 전부터 이미 고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에드워드 호퍼 딱 세 사람의 그림만 보고 와도 '본전'은 뽑겠다고 생각했던 전시회는 퍽 실망스러웠다. 현대미술과 추상화에 완전 무지한 내 탓일 수도 있고, 무조건 예쁜 그림만 선호하는 내 취향 탓일 수도 있으나, 아무튼 나는 그랬다. 앤디 워홀 작품도 어쩜, 수프 깡통이랑 세제 박스 같은 것만 두어개 가져왔더라. 리히텐슈타인 작품도 딱 두 점. +_+
<아메리칸 아이콘과 소비문화>를 주제로 한 방이었던가? 죄다 앤디 워홀 아류작 같고 그밥에 그나물 타령인 대중적인 상업 미술을 보며

로이 리히텐슈타인,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 1993.

난 아무 감흥도 일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의 경우도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뭔가 더 크고 새롭고 유명한 작품이 왔기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브제와 정체성, 오브제와 인식을 2, 3부로 꾸민 전시실에서도 특별히 마음을 끄는 작품이 없어 몇번이나 방을 돌아다녔어도 관람은 금세 끝이 났다. 휘트니 미술관 가면 반나절 내내 쉬지 않고 그림을 봐도 다 못보고 지친다더만 이게 뭐람! 쳇...

그나마 귀엽다 느꼈던 작품은 축소한 옷을 연결해 놓았던 빨랫줄(사진 못찾았다 ㅎ)과 찰스 레이의 <퍼즐병>.

찰스 레이, [퍼즐병] 1995.

영국에서도 이런 좁은 병안에 엄청나게 정교한 범선을 넣어놓은 작품 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일일이 조립을 하는 걸까? +_+

미국 현대미술이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건과 이미지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건 얼핏 알겠으나, 나는 그래도 뭔가 좀 회화스러운 느낌의 작품을 더 좋아한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오브제를 통해서 미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였다는데(현대미술도 잘 모르지만 오브제 싫다규~!), 스스로도 좀 민망했는지 특별코너로 <20세기 미국 미술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방을 하나 꾸몄고 내가 알현을 바라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바로 이곳에 걸려 있었다. 비록 호퍼의 그림을 딱 한점 볼 수 있기는 했지만, <해질녘의 철로> 그림 앞에서 나는 이미 지나온 3개의 전시실에서 쌓였던 실망감을 어느정도 풀 수 있었다. 사실 호퍼의 그림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간 온갖 책에서 호퍼의 이름과 작품 설명을 만나며 정말이지 궁금했다. 화집이나 사진으로 보는 호퍼의 그림은 얼핏 (무식하다고 욕먹어도 할 수 없다 ㅋㅋ) 약간 <이발소 그림> 같은 느낌을 풍겼고, 인물이 등장하거나 안하거나 늘 황량하고 쓸쓸함이 물씬 묻어났다. 뭔가 아주 복잡하고 기구한 사연이나 황망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도 같고...  어쩌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에서 풍기는 인상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던 누군가의 평론을 보아 생긴 편견 때문일수도 있겠다. 하여간 툭 트인 공간과 여백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무심함이 호퍼 그림의 매력이라고 나름 상상하고 있었는데, 나의 상상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난 것 같았다. 
 

에드워드 호퍼, [해질녘의 철로] 1929.

이전까지는 모두 합해 30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휙휙 작품을 스쳐지나다가 호퍼의 이 그림 앞에서는 정말 넋이 빠진듯 한참이나 감상하고 서 있었다. 노을에 물든 하늘 빛깔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철로변이라는데 나는 이 그림을 본 순간, 문득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파주를 향해 자유로를 달리다 왼편으로 만나게 되는 한강변 철책과 군초소가 떠올랐다. 오래 전 무언가 속이 상한 일로 질질 눈물을 짜다가 통닭 한 마리랑 소주 한 병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엉엉 눈물을 쏟은 뒤 돌아오던 길에 오른쪽 차창으로 이런 노을빛을 본 것도 같고...

암튼 결론은, 그래서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계속 입이 댓발쯤 나와 툴툴거리다가 마지막 전시실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ㅎㅎㅎ 마음이 좀 풀리니 처음엔 조악하게 입구에 재현해 놓은 복제본 작품사진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비웃던 마음도 잊고 나도 한 장 찍어오기까지... ㅋㅋㅋ

마리솔, [여인과 강아지], 1964

마리솔이라는 화가의 작품을 입간판처럼 입구에 세워놓았는데, 실제 작품에선 왼쪽의 저 개 머리가 '박제'라고 해서 좀 놀라고 으스스했다. -_-; 이 사진에서 흥미로운 건 오른쪽 위에 구멍을 뚫어 보이게 해놓은 소화전(?)이다. 전에도 이런 구도로 다른 작품 복제본 세워놓았던 것 같은데, 그 때도 저렇게 구멍을 뚫어놓았던 걸 기억한다. 매번 저것도 작품의 일부 같아 웃기다!







'본전' 안 아깝게 호퍼의 그림을 보고 또 보고 그러다가 미술관을 나왔으나 뭔가 문화생활이 덜 충족된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한 바퀴 덕수궁을 거닐며 밤궁궐의 정취를 느껴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러고 나서야 흡족한 심정으로 대한문을 나설 수 있었다. 갈까말까 망설여지는 전시회는 아예 안가고 아쉬워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교훈을 새삼 하나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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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업북 자랑

놀잇감 2011. 8. 29. 12:31

'팝업북'이라고 제목을 써놓고 '입체책'으로 바꿀까 꽤 고민하다 그냥둔다. 우짜냐. 입체책이라고 하면 책장을 열자마자 팍~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그림들의 느낌이 안 살아나는 기분인 걸. ㅜ.ㅜ 이러면서 남들의 외래어 남용 탓하고 앉았으니 쯧쯧쯧.
암튼 순전히 일하기 싫어서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놀랍게도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아무래도 너무 더워서인듯;;) 일어나 아침밥도 챙겨먹고 컴퓨터 앞에 앉긴 했으나 역시나 일하기 싫어서 헤헤실실 요번에 산 팝업북을 들춰보다 아예 자랑까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팝업북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서점에 갔다가 보고 반한 로버트 사부다의 팝업북 시리즈는 볼 때마다 침을 흘리며 감탄을 했다.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정교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난지! 갖고싶다는 욕망이 불끈 치솟았지만 '어른'이 되가지고 아이들 그림책을 좋아하다 못해 이젠 소장까지 한다는 건 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처음 내 판단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조카들에게 선물을 했다. 심지어는 에라 모르겠다 친구 생일선물로도 안겨주었다. 튀어나오는 그림이 가장 현란해서 아름다운 <오즈의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둘이 제일 먼저 물망에 올랐고 한참 공룡에 심취해 있던 지우한테는 마침 번역서로 나온 <공룡>사전을 골랐다.

어린이날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조카들에게 팝업북을 안기며 내가 더 흥분해서 좋아라했던 것 같은데 정작 녀석들은 시큰둥해 했다. 일단 '영어'라는데서 오는 거부감이었던 듯.. (하지만 당시엔 아직 번역본이 나오질 않았다규~) 대리만족으로 조카들에게 선물해서 시리즈를 죄다 구경 및 소장하고팠던 나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피터팬>이랑 <정글북>까지는 꼭 쓰다듬어 보고 싶었는데...

조카네 집에 갈 때마다 은근슬쩍 꺼내 한번씩 열어보며 좋아라만 하기엔 어쩐지 성이 안찼다. 그렇다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을 계속 억지로 조카들에게 안기긴 싫고. 그러던 차에 문득 요즘엔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에 좀 인색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에라이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며 다른 책과 함께 나도 모르게 <피터팬> 팝업북을 주문하고 있었다. ^^;

결론은 그렇게 해서 요번에 장만한 피터팬 팝업북의 위용을 자랑하겠다는 것. ㅎㅎㅎ
그림체가 아기자기 귀여운 것도 아니건만 기분 처질 때마다 열어보면 효과 즉방이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설계하고 만드는지 원!


 

 

 


이 장면은 웬디 삼남매가 피터를 따라 네버랜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난 숲이다.

아래쪽에 접혀있는 텍스트 책장을 열면 페이지마다 작게 또 다시 팝업되는 거 정말 좋다. *_*











 나무뿌리 아래 있는 아이들의 동굴 보금자리. 빨랫줄에 넣어놓은 양말이랑 웬디가 들고 있는 빨래가 제일 귀여운데 안타깝게도 사진에서 잘 안보인다. 웅...












 
<피터팬>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라하는 팝업인데 돛을 펼친 배의 위용이 잘 안보여 속상.

요즘 유난히 유치해지고 싶은 것 같아서 컴퓨터 바탕화면에도 최근 픽사가 제공한 알로하 토이스토리를 깔아두었더니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아주 딱이다. 룰루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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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를 감전시킨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 때문이라기보다는(띠지에 적힌 글귀다) 애당초 이 책에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표지 포함 34쪽에 불과한 얄팍한 이 원서 한권에 국내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선인세가 만오천 유로까지 올라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게 주효했다(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이 정도 분량의 원서라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감안할 때 선인세는 5천 유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과연 그런 책이 팔리나? 출판사들 미친 거 아냐? 하기야 선인세 몇억도 막 베팅하다가 퍽퍽 부도나 넘어가는 출판사가 어디 한둘인가. 한심하다...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2011

그 상황 그대로였다면 나는 괜스레 심술이 나서 아마도 이 책을 사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원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본 적 없지만[!] 선인세 10억을 주고 사왔다는 말만 듣고도 <1Q84>는 처음부터 독서제외 대상이었다. 참 별스러운 나의 독서취향^^;). 헌데 반전이라면 반전인 소식이 들려왔다. 저자를 설득한 끝에 돌베개 출판사(서경식 선생의 책을 비롯해 나도 돌베개가 내는 책들이 좋고 심지어 어쩜 그런 책들만 내는지 존경스럽다. 물론 출판사와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고 그저 독자로서;;)가 최고액 선인세를 제시한 경쟁사를 물리치고 만 유로로 판권을 따냈다는 것. 만 유로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저항과 행동을 부르짖는 노투사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꺼이 책을 사들여 후딱 읽었다. (원서엔 없는 저자 인터뷰, 추천사, 역자후기를 붙여 프랑스 원서보다 두배 이상 분량을 늘였어도 불과 87쪽이다.ㅎㅎ) 

스테판 에셀은 1917년생이다. 우리나라 나이셈법으로 따지면 무려 아흔다섯.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운동 분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단다.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합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 전쟁 이후엔 외교관으로 활약, 퇴직 이후에도 인권 및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 그의 약력이다. 예술애호가인 어머니 엘렌이 트뤼포 감독의 <쥘과 짐>의 실제 모델이라니, 결혼제도를 비웃는 그런 관계를 지켜보며 살았을 가정환경도 참 자유로운 분위기였을 것 같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학생, 현직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일었을 때 사람들이 외친 구호가 상당수 이 책에서 인용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부당함과 차별에 분노하고 비폭력으로,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어찌보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원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삼 노투사의 당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건 그 이야기가 탁상공론이 아닌 평생 현역에서 활동해온 운동가의 부르짖음이자,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부당함과 차별의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상 정치쇼를 일삼는 딴나라당의 일꾼답게 사퇴 카드와 함께 눈물로 읍소까지 했던 서울시장의 주민투표가 무산된 어제, 사퇴 이야기는 쏙 빼고 딴소리를 하는 인간들의 면면이 하도 환멸스러워, 읽은지 한두달 지난 책을 새삼 꺼내들어 다시 읽었다. 이른바 한나라당 표밭이라는 강남 3구의 투표율과 대단한 차이를 보이는 가난한 자치구의 투표율을 보며, 타워팰리스 내부에 설치된 투표소의 경우엔 투표율이 60%라는 언론 발표를 보며 정말이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 사회엔 희망이 있을까? 왜 우리나라엔 이렇게 존경할만한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든걸까.

화는 본디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는'(出) 것이라 했다. 다른 나라 어르신이긴 해도 분노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격려해주시니 계속 버럭버럭 분노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여기며 다시 책을 덮었다. 사라코지 덕분에 프랑스도 우리나라와 많이 비슷해졌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지만, 참 구구절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같이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 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10쪽)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중략)....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12쪽)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드물었다. (15쪽)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2쪽)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34쪽)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38-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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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탈의 궁극?

투덜일기 2011. 8. 18. 02:47

나이와 상관이 있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예민함이 점점 극에 달해 옷에 달린 라벨을 못견디는 인간이 되었다고 잘 다니는 동호회 게시판에 고백을 했다. 예전엔 가끔 여름 티셔츠 중에 목덜미를 간질이는 것들만 선별해 라벨을 떼고 입는 수준이었다면, 요즘엔 살갗에 닿는 위치에 달린 라벨이 두툼한 새틴을 접어 붙인(옷이 고급일수록 라벨도 고급화되어 금은실로 글씨를 새겨넣거나 말끔히 접어 다림질까지 한 두툼한 라벨이 달리기 마련;) 경우나 봉제에 쓰인 실이 뻣뻣한 경우 예외없이 떼어내야만 마음 편히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옷 안쪽 옆솔기에 달린 케어라벨(섬유 혼용율과 세탁방법이 적혀있으며 가끔은 여벌 단추까지 매달려있기도 하다)도 영 거슬려서 잘라내고야 마는 사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들의 내의엔 상표와 솔기가 바깥쪽에 달려 있는 게 많은데, 내 피부의 연약함이 갓난아기에 필적할 리는 없고 그저 예민함과 까탈스러움이 극에 달했다고밖엔 생각할 수가 없다고.

그랬더니 용기를 북돋아주는(?) 댓글 가운데 누군가는 양말도 뒤집어 신고 다닌다며 피부 민감성은 얼마든지 개인차가 있으니 개의치 말라는 의견이 있었다. 자기만 편하면 됐지 양말 봉제선을 굳이 안쪽으로 감추고 발등에 걸리적거리는 걸 참을 이유가 없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처음엔 그럼 속옷도 뒤집어 입고 다닐 테냐고 비웃었는데, 막상 따라해보니 엄청 편하다나. 이후 그도 계속 양말을 뒤집어 신고 있단다. 오옷 이것이야말로 발상의 전환! 여름들어 몇달째 맨발족이라 최근엔 양말을 신어본 기억이 없으나, 나도 운동화를 신을 땐 양말 솔기 때문에 발등이 불편한 걸 느낀 적이 많다. 양말 안쪽의 솔기 마무리를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스포츠양말처럼 두툼한 면양말은 안쪽으로 꿰맨 솔기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양말을 뒤집어 신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앞으로 양말 신고 다니는 계절이 오면 나도 시도해볼 작정이다.

사실 라벨은 오려내고 잘라낸 다음 편히 입을 수나 있지 최근엔 속옷의 솔기도 영 거슬려 괴로워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비싼 속옷도 왜 솔기가 아예 없는 팬티는 못 만드는 건지?! (설마 있는데 나만 모르는 건 아니겠지?) 요즘처럼 까탈의 궁극을 떨다간 조만간 속옷도 뒤집어입고 살게 생겼다고 한탄했었는데, 어찌 보면 이게 한탄할 일이 아니라 익숙한 습관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입기의 결과로 내가 바보같이 불편을 참아왔다는 의미라는 걸 새삼 느낀다. 속옷을 뒤집어 입으려면 일단 모든 팬티를 면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난점과 함께 밀착되는 얇은 겉옷의 경우 솔기가 도드라져 보일 수 있다는 단점이 지금 퍼뜩 떠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그럼 또 어때? 누가 나만 보는 것도 아니고... -_-; 이참에 사회 곳곳에서 남몰래 괴로워하고 있던 수많은 까탈족을 위하여 당당하게 양말 뒤집어 신기와 속옷 뒤집어 입기 운동을 널리 퍼뜨려볼까나.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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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추억

추억주머니 2011. 8. 15. 23:58

제목이 너무 거창한 감이 있어 좀 찔린다. 얼른 고백하자면 오래 전 울며 겨자먹기로 딱 한달 탱고를 배워봤다는 이야기다. 학교 때 연극을 했었는데, 하필 내가 맡은 배역이 잠깐 탱고 추는 장면이 있었다.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극단 동아리는 아니고 매년 가을 학과 행사처럼 무대에 올리는 원어 연극이라, 순전히 숫기 개발과 영어공부(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발을 들였다가 꼬박 3년이나 코를 꿴 터였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탱고라고는 코미디언들이 우스꽝스럽게 팔을 뻗고서 <라쿰파르시타>에 맞추어 격렬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앞뒤로 오가는 춤 정도가 고작이었다. 헌데 나더러 무대에서 그런 우스운 춤을 추라니, 난감했다. 연출을 맡은 선배는 나와 파트너에게 탱고 추는 장면이 들어간 외화 비디오 하나를 주더니 잘 보고 연구해 따라하라고 명했다. 으악. 비디오를 보고 나니 더욱 막막했다. 전혀 우스운 춤이 아니잖아! 철거 직전의 도시 폐허에서 노숙인처럼 사는 소녀가 꿈속에서 짝사랑하는 우유배달 소년과 탱고를 추는 장면이라 애틋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하는데 탱고 음악과 함께 우리가 엉거주춤 되도 않는 탱고 흉내를 내며 걸어다니면 으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름방학과 함께 본격 무대 연습이 시작되자 보다 못한 기획이 우리를 이끌고 학교 앞 무도학원을 찾아갔다. 노상 회식때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던 중국집 송X원 건물 바로 3층에 무도학원이 있었다. 수완 좋은 기획 선배는 이미 박카스 한 상자 사들고 가서 학원 원장과 강사를 잘 구워삶아 놓았으니 염려 말라고 했지만, 쭈뼛거리며 들어간 허름한 무도학원 분위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우릴 반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빠글빠글 파마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여 기른 퉁퉁한 원장 아줌마의 태도도 시큰둥했지만 앞으로 우리를 가르칠 거라는 강사 아저씨는 어휴... 맥가이버 머리인지 단발머리인지 암튼 뒷머리를 길게 기른데다 '올빽'으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통 넓은 검정바지를 잔뜩 허리춤 위로 끌어올려 입은 '배바지'를 보노라니 한숨이 나왔다. 내심 이 사람들이 진짜 탱고를 가르칠 수나 있는 걸까 의아했다.

첫날 우리 둘에게 기본 스텝을 가르치던 강사는 나와 파트너 모두 뻣뻣한 몸치임을 깨닫고 역시나 한숨을 쉬었을 거다. 둘쨋날 연출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나다시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무도학원엘 다시 가보니 마룻바닥에 분필로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시작하는 발만 제대로 짚으면 그림 따라 번갈아 발만 옮겨도 스텝이 완성될 거라면서. 그러나 문제는 스텝이 아니었다. 상체는 우아하게 뒤로 젖히고 하체는 서로 일직선이 되도록 붙여야 한다는데, 후배였던 우유배달 소년과 나 둘 다 발놀림에 신경을 쓰다보니 당연히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엉거주춤 엉덩이는 뒤로 빠지고... 한쪽 벽면의 거울로 보는 우리의 몰골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스텝 순서는 또 왜 그렇게 안 외워지는지! 무도학원까지 보내주었는데 도통 탱고가 늘지 않자 해병대 출신이었던 연출 선배는 잡아먹을 듯이 길길이 화를 냈고, 나는 3학년이랍시고 바락바락 대들며 정 못봐주겠으면 탱고 장면을 빼라고 항변했다.

몹시도 더웠던 그해 8월, 전체 연극 연습 말고도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허름한 무도학원에서 매일 한시간씩 땀을 삐질삐질 흘렸지만 탱고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알고보니 수업료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었고, 기획선배가 거의 담뱃값 정도를 쥐어주며 한 일주일 기본 스텝만 가르쳐주면 된다고 했다는데 몸치 둘이 꼬박 한달이나 춤 강사를 귀찮게 했으니... -_-; 단신인 나보다 키가 한뼘 정도밖에 크지 않은 느끼한 생김새의 강사 아저씨가 직접 나를 리드하며 가르칠 땐 열심히 배우려는 생각보다 그저 지독한 그의 머릿기름인지 스프레이 냄새와 등에 닿은 손길이 싫기만 했다. 후배였던 나의 파트너도 어쩜 그렇게 춤을 못추는지 원. 강의실에서 둘이 따로 연습을 하면서도 서로 발을 밟다가 웃어대기 일쑤였다. 나중엔 도저히 안되겠는지 학원장 아줌마와 제비 같은 강사가 마지막으로 직접 시범을 보여줄 터이니 분위기만 참고해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손을 떼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그때까지 연습했던 탱고 음악의 테이프를 복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두 사람이 추는 탱고를 지켜보며, 똑같은 스텝인데 어쩜 춤이 우리와 그렇게도 다를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장 아줌마의 푸짐한 몸매도 느끼하게 생긴 강사 아저씨의 제비 같은 손길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우면서 박력있는 두 사람의 스텝과 회전이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당시 난 대사 외우기도 벅차 죽겠는데 무대에서 난데없이 탱고를 추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저 괴롭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빠져 춤도 음악도 음미해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공연일은 다가왔고 얼렁뚱땅 흉내만 낸 탱고 장면도 무사히 넘어갔다. '괴롭고 어려운' 탱고와도 안녕이었다.

물론 지겹도록 들으며 연습했던 <라쿰파르시타>를 비롯해서 탱고 음악을 들으면 비싯 웃음과 함께 진땀이 나는 것 같은 조건반사가 한동안 이어지긴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몇년 뒤엔가 알 파치노가 나온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추는 장면이 나왔을 땐 워낙 영화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불쑥 내가 몸치가 아니어서 탱고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탱고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영화에서 탱고를 처음 춰본다는 여자가 알 파치노의 리드에 맞춰 완벽하게 춤을 춘다는 건 리얼리티가 영 떨어지지만!

요즘 알 파치노의 그 영화와 제목이 같은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역시나 탱고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탱고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 드라마 때문에 또 당분간 탱고 학원에 사람들이 드글드글 하겠군, 중얼거리며 옛날 생각도 함께 떠올라 웃음이 난다. 내게는 난감하고 고통스러웠던 탱고의 추억도 지나고 보니 다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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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좋다

투덜일기 2011. 8. 3. 01:59

주말에 사촌동생네 아기 돌잔치에 갔었는데 답례품으로는 처음 받아본 게 있어서 소개한다. 언제부턴가 돌잔치를 하면 주최측에서 꼭 답례품을 돌리는 게 유행이다. 잔치를 준비하는 엄마들로서는 아가들 한복 준비하랴, 본인 의상 챙기랴, 입구에 세워놓을 사진장식 준비하랴 바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답례품까지 골라 주문하려면 정말 머리깨나 아플 것 같다. 조카들 때도 그렇고 다녀보면 돌잔치 답례품에도 유행이란 게 있는 듯하다.

오래전부터 제일 흔한 건 주방용 작은 수건이나 행주, 아니면 머그잔이다. 돌잔치 답례품이 정민이 때만해도 없었으니 대대적으로 유행한지는 10년 정도밖에 안 된 듯한데, 최근까지도 수건과 머그잔을 받은 기억이 있으니 아직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주방용 수건도 행주도 머그잔도 별로 달갑지 않다. 준비한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미리 슬쩍 확인해서 머그잔이 마음에 안들면 괜히 짐만 되는 걸 알기에 사양해보지만, 고약한 내 심보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건지 그런 답례품은 꼭 두개나 챙겨주더라. ㅠ.ㅠ 버리기도 뭣해서 그런 머그잔을 꺼내놓고 더러 물잔으로 쓰기는 하지만 취향이 다양하니 내 마음에 꼭 드는 디자인일 리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내다버린 답례품 머그잔 꽤 여럿이다. 다 낭비라고!) 주방은 원래 내가 선호하는 공간도 아니니 주방 수건이나 행주는 선물로 받고 싶지 않다! (게다가 우리집 수납장에 들은 행주는 대체 다 어디서 난 건지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쓸 만큼 많고, 돌잔치마다 받아온 주방수건--나는 쓰지도 않는데!--도 골치아프게 여러 개다. -_-;) 역시나 주방용품인 작은 쟁반을 받아온 적도 있는데 이건 꽤나 요긴하게 사용중이다. 일부러 그림 예쁜 걸로 내가 골라오기도 했고. ^^v

암튼 엄마들의 아이디어인지 답례품 전문회사의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계속해서 트렌드가 변해가는 듯한 돌잔치 답례품 가운데 최근 내가 가장 므흣하게 받아온건 앙증맞은 상자에 담긴 수제쿠키였다. 요번에도 상자를 딱 보니 수제쿠키인 것 같아서 입맛을 다시며 두 상자 가져와야지, 라고 욕심을 부렸는데 묵직한 무게로 보아 쿠키가 아닌 듯했다. 그럼 혹시 전에도 받아본 적 있는, 분홍색 하트를 새긴 백설기인가, 짐작했다. 그치만 여름인데! 겨울이나 봄, 가을엔 떡을 답례품으로 받은 적이 있기는 했으나 여름 잔치에 떡 선물은 쉴까봐 조마조마할 것 같다.

궁금증을 못이긴 큰고모가 먼저 차에 오르자 마자 열어보니 뜻밖에도 저 상자 안엔 국산 잡곡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묵직하더라니...
비용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각해보니 일단 건강에 별로 이롭지도 않은 쿠키보다는 잡곡이 훨씬 의미 깊고 좋은 것 같다.


포장을 열면 안에 또 예쁜 레이스 종이를 감은 잡곡 비닐이 들어있고, 혼용율을 적은 스티커가 보인다. 흔히 돌잔치 주최측에서 오래 쓸 수 있는 머그잔이나 주방용품을 선물하는 건 그만큼 오래 첫돌 맞은 아이를 생각해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내 입장에선 그것 또한 귀찮게 늘어나는 살림살이일 뿐, 차라리 떡이나 쿠키처럼 훅 먹어버리면 그만인 답례품이 더 좋았다. 헌데 아무래도 떡이나 쿠키는 열량을 생각하면 건강에 그리 좋은 게 아니랄 수도 있다. 그런데 국내산 잡곡은 우리 농촌에도 이롭고 모두의 뱃속에도 좋은 선택이 아닌가! 전통적으로 이웃에 돌떡을 돌려 나눠먹으며 아이의 무병장수를 비는 풍습과도 일맥상통하면서, 뭔가 건강을 선물 받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암튼 좋은 아이디어, 현명한 답례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이렇게 구구절절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는 과연 쿠키, 잡곡 말고 또 어떤 기발한 돌잔치 답례품들이 나타날지 그것도 궁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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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1. 8. 2. 16:06

진정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섣불리 직업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평생 잊지 않고 꿈을 좇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는 것 같다. 멋지다고 추켜세우거나 현실감 떨어진다고 좀 한심해 하거나. 대부분 현실과 타협하면서 꿈을 포기하거나 잊기 때문이다. 꿈을 잃지않고 끈질기게 좇아 결국 성공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갈채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꿈이란 것이 다분히 허황되고 실현 가능성이 낮을 때, 사람들은 냉혹하게 낙오자라는 도장을 찍고 만다. 인생은 결코 꿈만으론 살 수 없는,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과거 주변에 이상스레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충무로 바닥에서 한동안 연출부 막내부터 경험을 쌓기도 했고 전세금을 뽑아 돌연 유학을 떠난 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조감독 호칭을 받을 때까지 버틴 이도 있으나 결국 영화감독으로 입봉에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판이란 곳이 마약이나 개미지옥인듯, 조감독이 마지막 경력이었던 사람은 좀체 다른 일에 정착하지 못했고 거의 무위도식하며 백수로 늙어가도록 '이감독'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한심스러운 '낙오자',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몇편의 영화 포스터와 엔딩 크레딧에 연출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연봉이 백만원도 안되는 기막한 현실에 질려 충무로 판을 영영 떠난 이들은 이제 확실히 꿈을 버린 것 같다. 영화판은 포기했어도 그나마 얼추 비슷한 영상 쪽을 대안으로 선택한 이(=큰동생 이야기다 ^^;)는 여전히 열심히 영화를 보러다니며 관객으로서 한국 영화계를 응원중이다.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며 늙으막에 유학까지 다녀온 친구는 충무로를 떠나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한 이후로 십수년간 영화관에도 가 본 적이 없단다. 뭔가 아주 심하게 학을 뗀 모양이다. 그 외 친구들은 잘 모르겠다.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마흔살이 넘도록 아직 밴드의 꿈을 못 버린 이도 있다. 스무살 언저리에 부모를 졸라 거금 들여 장만해놓은 온갖 악기와 컴퓨터 기기를 아직도 보물단지 모시듯 껴안고 산다.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연주 실력과 작곡 능력이 얼마나 되기에 그 꿈을 이십여년간 못버리고 백수로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하필 밴드에서 그가 맡은 파트는 드럼이다. 밴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역시나 보컬 아니면 기타 연주자 아닌가? 내가 그 방면에 무지하기도 하지만, 드러머로 이름 높였다는 사람 당최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요즘 우후죽순 많아진 서바이벌 프로그램 가운데 <탑밴드>라는 게 있단다. 그리고 문제의 이 사람도 자기네 밴드와 함께 그 프로그램에 나왔더란다. 보기좋게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말이다.

백발이 성성해서도 근육질의 몸으로 멋지게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을 상상하면 꽤나 멋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이면에 제 밥벌이도 못하고 늙도록 부모님이 주는 용돈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생활고가 감추어져 있다면 슬프기만 하다. 홍대에 가면 기타를 둘러매고 오가는 젊은 음악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이 아무리 밝고 빛나더라도 나는 불쑥 그들이 가엾다. 쟤네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임재범 콘서트에 갔을 때 본 영상이었던가, 천하의 임재범도 <나는 가수다>에 나와 새삼 조명을 받기 전까지 한달 수입이 저작권료로 들어온 7천원돈 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TV에 노상 얼굴을 비추며 돈방석에 앉겠겠다 싶은 부활의 김태원도 그 이전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살을 생각했다니 말해 무엇할까. 이 땅에선 밴드로 밥벌이 해먹고 산다는 게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과연 응원을 해주어야 할까, 정신 차리라고 질책을 해주어야 할까.

따져보면 내 주변에서 현재 그럭저럭 제 앞가림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다 젊어서 꾸던 원대한 꿈을 버렸거나 꿈을 소박하게 변경한 사람들인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으니 이의를 제기하실 분 있으면 언제든 환영! (내 생각이 교정될 수 있도록, 제발이지 나는 꿈을 이루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예 젊어서 품은 찬란한 꿈이 뭐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번역은 그저 7년간의 직장생활이 지겨워질 무렵 평생 직업으로 딱 좋겠다 싶은 하나의 대안이자 선택이었을 뿐, 엄청 선망하는 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단 시작은 했으되 성공할지 말지 알 수도 없고 크게 자신도 없었는데, 하면 할수록 일이 어려워 자신감은 나날이 떨어지고만 있다. 그러니 새로운 꿈은 꿀 여력조차 없는 느낌이다. -_-; 

어린아이들에게, 청소년에게는 끊임없이 니들은 꿈이 뭐냐고 물으며 꿈을 향한 그들의 행보를 한껏 부추기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꿈이란 건 그저 과거의 갈피에 잘 간직해두거나 절대 손닿지 않는 곳에 높이 올려두어야만 빛이 나는 허상 같다. 설사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꿈의 직업이 현실의 무게와 어우러지면 본래의 빛을 잃고 마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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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좋아

투덜일기 2011. 8. 1. 02:00

10년이 넘도록 생일카드에 덕담으로 "올해는 꼭 좋은 분 만나서 결혼하시길 빌게요, 화이팅!"이라는 말을 빠짐없이 적는 친구가 있다. -_-; 해마다 푸하하하 비웃어주는데도 참 끈질기고 열심이다. 주변에 결혼을 굳이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회의파>와 태도가 어중간한 <중도파>, 그래도 결혼은 반드시 하고 봐야한다고 믿는 <결사파>가 있는데 이 친구는 결사파에 속한다. 해서 선과 소개팅에도 열심이다. 말로는 부모님의 성화로 어쩔 수 없다지만 내가 과거 겪어봐서 아는데 몇년 결혼 시장에 끌려다니다 영 싹수가 없어보이면 부모님도 포기하기 마련이다. 본인이 포기를 안했다는 뜻이다. 

여러 모로 나와 공통점이 많은 비혼족이면서 내년이면 꼭 예순이 되는 선생님 한분과 셋이 종종 만나는데, 셋이 다니면 친구 사이가 아니라 두 딸 데리고 외출한 엄마 같아 보일 거라 자조하시는 그 선생님께도 이 친구는 내게 하는 것과 똑같은 덕담을 고수한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인연설을 굳게 믿는 눈치다. 보아하니 내가 예순살, 일흔살이 되더라도 이 친구와 관계를 지속하는 한은 매년 같은 덕담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이 친구가 얼른 결혼을 해서 결혼생활의 비애(행복한 결혼에도 비애는 있기 마련이니까;;)를 뼈저리게 느껴, 다른 기혼 친구들처럼 결혼관에 균열이 생겨 "그래, 혼자 사는 게 속편하지!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거다. ㅎㅎ

어제도 친구는 저보다 한참 나이많은 우리 둘을 앞에 두고 인연설을 강조하며 또 다시 <좋은 분> 타령을 이어갔다. 대개는 킥킥 웃으며 알았다고 얼버무리는 걸로 화제를 종결짓는데, 어젠 그 수법이 안통했다. 결혼이 정 싫으면 애인이라도 꼭 만들어야 한다고 성화(?)였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이 진화에 나섰다. 잊고 살던 본인 나이를 생각하면 참 싫지만, 그 나이의 늙은 남자를 생각 하면 너무 혐오스럽다고. 그러니 애인 따위 전~~~혀 필요 없다고. 까탈스럽지만 우아하고 순수함을 잃지 않은 나이 예순의 비혼녀는 쉽게 그려지는 반면, 예순살의 비혼남이라고 하면 벌써부터 추레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이 상상되지 않나? (나의 비뚤어진 편견이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반색하며 맞장구를 쳐, 우릴 좀 내버려두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려 했으나 친구는 완강했다. 그럼 연하의 젊은 남자친구를 만들라는 것. 우어~~~~!!! >.,<

친구는 진정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임을 알기에 속으로 부아가 나도 화를 낼 순 없다. 그저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다. 비혼을 미혼이라 부르는 건 나이가 어찌됐든 미완성의 인생이자 결핍을 의미한다는 함의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야 그렇게 여기더라도 워낙 보수적인 가치관에 젖어 살았으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만 보면 젊은축에서도 혀를 끌끌 차며 나 같은 처지(?)를 안쓰러워하는 태도를 보인다. 결혼과 자녀를 엄청난 성취로 여기는 기혼자 친구들 중에 더러 그러는 이들이 있는데, 가끔은 이렇게 별종 같은 친구도 존재한다. 내 인생이 <꽃피려면> 반드시 <좋은 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아야한다며, 이제는 울 엄마도 친지들도 감히 안하는 잔소리를 턱턱 해댄다. 

선생님과 나는 둘만 아는 미소를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끄덕, 알았으니 눈씻고 주변을 잘 둘러보겠다고 다짐을 한 뒤에야 그 화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린 정말로 지금 그대로도 별 부족함 없고 좋은데, 참 좋은데 그것 참 말로 설명해줄 수도 없고 안타깝다(나름 광고 패러디 한 거다 ㅋㅋㅋ). 친구가 더 나이를 먹고 생각이 넓어져 우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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