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의 추억

추억주머니 2011. 8. 15. 23:58

제목이 너무 거창한 감이 있어 좀 찔린다. 얼른 고백하자면 오래 전 울며 겨자먹기로 딱 한달 탱고를 배워봤다는 이야기다. 학교 때 연극을 했었는데, 하필 내가 맡은 배역이 잠깐 탱고 추는 장면이 있었다.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극단 동아리는 아니고 매년 가을 학과 행사처럼 무대에 올리는 원어 연극이라, 순전히 숫기 개발과 영어공부(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발을 들였다가 꼬박 3년이나 코를 꿴 터였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탱고라고는 코미디언들이 우스꽝스럽게 팔을 뻗고서 <라쿰파르시타>에 맞추어 격렬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앞뒤로 오가는 춤 정도가 고작이었다. 헌데 나더러 무대에서 그런 우스운 춤을 추라니, 난감했다. 연출을 맡은 선배는 나와 파트너에게 탱고 추는 장면이 들어간 외화 비디오 하나를 주더니 잘 보고 연구해 따라하라고 명했다. 으악. 비디오를 보고 나니 더욱 막막했다. 전혀 우스운 춤이 아니잖아! 철거 직전의 도시 폐허에서 노숙인처럼 사는 소녀가 꿈속에서 짝사랑하는 우유배달 소년과 탱고를 추는 장면이라 애틋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하는데 탱고 음악과 함께 우리가 엉거주춤 되도 않는 탱고 흉내를 내며 걸어다니면 으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름방학과 함께 본격 무대 연습이 시작되자 보다 못한 기획이 우리를 이끌고 학교 앞 무도학원을 찾아갔다. 노상 회식때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던 중국집 송X원 건물 바로 3층에 무도학원이 있었다. 수완 좋은 기획 선배는 이미 박카스 한 상자 사들고 가서 학원 원장과 강사를 잘 구워삶아 놓았으니 염려 말라고 했지만, 쭈뼛거리며 들어간 허름한 무도학원 분위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우릴 반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빠글빠글 파마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여 기른 퉁퉁한 원장 아줌마의 태도도 시큰둥했지만 앞으로 우리를 가르칠 거라는 강사 아저씨는 어휴... 맥가이버 머리인지 단발머리인지 암튼 뒷머리를 길게 기른데다 '올빽'으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통 넓은 검정바지를 잔뜩 허리춤 위로 끌어올려 입은 '배바지'를 보노라니 한숨이 나왔다. 내심 이 사람들이 진짜 탱고를 가르칠 수나 있는 걸까 의아했다.

첫날 우리 둘에게 기본 스텝을 가르치던 강사는 나와 파트너 모두 뻣뻣한 몸치임을 깨닫고 역시나 한숨을 쉬었을 거다. 둘쨋날 연출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나다시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무도학원엘 다시 가보니 마룻바닥에 분필로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시작하는 발만 제대로 짚으면 그림 따라 번갈아 발만 옮겨도 스텝이 완성될 거라면서. 그러나 문제는 스텝이 아니었다. 상체는 우아하게 뒤로 젖히고 하체는 서로 일직선이 되도록 붙여야 한다는데, 후배였던 우유배달 소년과 나 둘 다 발놀림에 신경을 쓰다보니 당연히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엉거주춤 엉덩이는 뒤로 빠지고... 한쪽 벽면의 거울로 보는 우리의 몰골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스텝 순서는 또 왜 그렇게 안 외워지는지! 무도학원까지 보내주었는데 도통 탱고가 늘지 않자 해병대 출신이었던 연출 선배는 잡아먹을 듯이 길길이 화를 냈고, 나는 3학년이랍시고 바락바락 대들며 정 못봐주겠으면 탱고 장면을 빼라고 항변했다.

몹시도 더웠던 그해 8월, 전체 연극 연습 말고도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허름한 무도학원에서 매일 한시간씩 땀을 삐질삐질 흘렸지만 탱고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알고보니 수업료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었고, 기획선배가 거의 담뱃값 정도를 쥐어주며 한 일주일 기본 스텝만 가르쳐주면 된다고 했다는데 몸치 둘이 꼬박 한달이나 춤 강사를 귀찮게 했으니... -_-; 단신인 나보다 키가 한뼘 정도밖에 크지 않은 느끼한 생김새의 강사 아저씨가 직접 나를 리드하며 가르칠 땐 열심히 배우려는 생각보다 그저 지독한 그의 머릿기름인지 스프레이 냄새와 등에 닿은 손길이 싫기만 했다. 후배였던 나의 파트너도 어쩜 그렇게 춤을 못추는지 원. 강의실에서 둘이 따로 연습을 하면서도 서로 발을 밟다가 웃어대기 일쑤였다. 나중엔 도저히 안되겠는지 학원장 아줌마와 제비 같은 강사가 마지막으로 직접 시범을 보여줄 터이니 분위기만 참고해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손을 떼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그때까지 연습했던 탱고 음악의 테이프를 복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두 사람이 추는 탱고를 지켜보며, 똑같은 스텝인데 어쩜 춤이 우리와 그렇게도 다를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장 아줌마의 푸짐한 몸매도 느끼하게 생긴 강사 아저씨의 제비 같은 손길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우면서 박력있는 두 사람의 스텝과 회전이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당시 난 대사 외우기도 벅차 죽겠는데 무대에서 난데없이 탱고를 추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저 괴롭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빠져 춤도 음악도 음미해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공연일은 다가왔고 얼렁뚱땅 흉내만 낸 탱고 장면도 무사히 넘어갔다. '괴롭고 어려운' 탱고와도 안녕이었다.

물론 지겹도록 들으며 연습했던 <라쿰파르시타>를 비롯해서 탱고 음악을 들으면 비싯 웃음과 함께 진땀이 나는 것 같은 조건반사가 한동안 이어지긴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몇년 뒤엔가 알 파치노가 나온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추는 장면이 나왔을 땐 워낙 영화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불쑥 내가 몸치가 아니어서 탱고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탱고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영화에서 탱고를 처음 춰본다는 여자가 알 파치노의 리드에 맞춰 완벽하게 춤을 춘다는 건 리얼리티가 영 떨어지지만!

요즘 알 파치노의 그 영화와 제목이 같은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역시나 탱고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탱고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 드라마 때문에 또 당분간 탱고 학원에 사람들이 드글드글 하겠군, 중얼거리며 옛날 생각도 함께 떠올라 웃음이 난다. 내게는 난감하고 고통스러웠던 탱고의 추억도 지나고 보니 다 그리움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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