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를 감전시킨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 때문이라기보다는(띠지에 적힌 글귀다) 애당초 이 책에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표지 포함 34쪽에 불과한 얄팍한 이 원서 한권에 국내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선인세가 만오천 유로까지 올라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게 주효했다(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이 정도 분량의 원서라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감안할 때 선인세는 5천 유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과연 그런 책이 팔리나? 출판사들 미친 거 아냐? 하기야 선인세 몇억도 막 베팅하다가 퍽퍽 부도나 넘어가는 출판사가 어디 한둘인가. 한심하다...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2011

그 상황 그대로였다면 나는 괜스레 심술이 나서 아마도 이 책을 사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원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본 적 없지만[!] 선인세 10억을 주고 사왔다는 말만 듣고도 <1Q84>는 처음부터 독서제외 대상이었다. 참 별스러운 나의 독서취향^^;). 헌데 반전이라면 반전인 소식이 들려왔다. 저자를 설득한 끝에 돌베개 출판사(서경식 선생의 책을 비롯해 나도 돌베개가 내는 책들이 좋고 심지어 어쩜 그런 책들만 내는지 존경스럽다. 물론 출판사와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고 그저 독자로서;;)가 최고액 선인세를 제시한 경쟁사를 물리치고 만 유로로 판권을 따냈다는 것. 만 유로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저항과 행동을 부르짖는 노투사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꺼이 책을 사들여 후딱 읽었다. (원서엔 없는 저자 인터뷰, 추천사, 역자후기를 붙여 프랑스 원서보다 두배 이상 분량을 늘였어도 불과 87쪽이다.ㅎㅎ) 

스테판 에셀은 1917년생이다. 우리나라 나이셈법으로 따지면 무려 아흔다섯.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운동 분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단다.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합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 전쟁 이후엔 외교관으로 활약, 퇴직 이후에도 인권 및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 그의 약력이다. 예술애호가인 어머니 엘렌이 트뤼포 감독의 <쥘과 짐>의 실제 모델이라니, 결혼제도를 비웃는 그런 관계를 지켜보며 살았을 가정환경도 참 자유로운 분위기였을 것 같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학생, 현직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일었을 때 사람들이 외친 구호가 상당수 이 책에서 인용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부당함과 차별에 분노하고 비폭력으로,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어찌보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원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삼 노투사의 당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건 그 이야기가 탁상공론이 아닌 평생 현역에서 활동해온 운동가의 부르짖음이자,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부당함과 차별의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상 정치쇼를 일삼는 딴나라당의 일꾼답게 사퇴 카드와 함께 눈물로 읍소까지 했던 서울시장의 주민투표가 무산된 어제, 사퇴 이야기는 쏙 빼고 딴소리를 하는 인간들의 면면이 하도 환멸스러워, 읽은지 한두달 지난 책을 새삼 꺼내들어 다시 읽었다. 이른바 한나라당 표밭이라는 강남 3구의 투표율과 대단한 차이를 보이는 가난한 자치구의 투표율을 보며, 타워팰리스 내부에 설치된 투표소의 경우엔 투표율이 60%라는 언론 발표를 보며 정말이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 사회엔 희망이 있을까? 왜 우리나라엔 이렇게 존경할만한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든걸까.

화는 본디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는'(出) 것이라 했다. 다른 나라 어르신이긴 해도 분노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격려해주시니 계속 버럭버럭 분노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여기며 다시 책을 덮었다. 사라코지 덕분에 프랑스도 우리나라와 많이 비슷해졌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지만, 참 구구절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같이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 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10쪽)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중략)....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12쪽)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드물었다. (15쪽)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2쪽)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34쪽)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38-39쪽)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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