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1.05.13 오이김치 2
  2. 2011.01.06 자리 9
  3. 2010.11.22 비가 와서 7
  4. 2010.09.02 고백 유감 5
  5. 2010.08.27 콩밭 4
  6. 2010.08.21 토이스토리 3 8
  7. 2010.07.29 기억 7
  8. 2010.06.26 까마중 9
  9. 2010.06.06 뒷북으로 하하하 11
  10. 2010.02.18 동화의 배신 22

오이김치

식탐보고서 2011. 5. 13. 01:53

음식으로 환기하는 기억에 대해서라면 프루스트가 제일 유명하겠지만, 프루스트가 처음 발견 한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유독 식탐이 강하지 않은 사람도 음식과 연결되어 추억으로 남는 게 어디 드문 일인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친구들에게 옥수수와 동격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옥수수 노점상은 절대 지나치지 못하고 꼭 사먹어야 직성이 풀리는데다가, 굳이 먼지 풀풀 나는 길거리에서 와구와구 뜯어먹으며 행복해했기 때문이라나.

계절따라 제철음식을 찾아먹는 일도 원래는 가난과 필요가 낳은 습관이겠지만, 그 습관이 반복되어 세대를 거듭하다 결국 전통이자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봄이 되면 진달래 따다 부쳐먹던 화전이랑 쑥버무리 같은 게 관련 인물들과 같이 떠오르는 식이겠지. 음식이 그리운지 사람이 그리운지 콕 찝어낼 순 없어도 그냥 그 음식을 먹으면 마음 한 구석이 달래지는 기운 같은 게 있다. 그걸 못해 결핍되면 못내 아쉽고 공허해질 테고.

얼마전부터 자꾸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었다. 그냥 흔한 오이소박이가 아니라 우리 외할머니표 오이소박이. 보통 오이소박이라고 하면 오이를 서너토막 잘라 한쪽에 칼집을 내 부추양념 소를 넣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외할머니표 오이소박이는 달랐다. 부추는 지저분해진다고 넣지 않는다. 대신에 조선오이 끝동 부분을 손가락 두어마디 쯤 잘라내 채를 썰어 양념에 버무려 소를 만든다. 오이는 통째로 길게 가운데 칼집을 넣어 소를 넣는둥마는둥하게 넣는다. 어려서 엄마가 만들어준 오이소박이의 경우 부추 소는 죄다 긁어내고 오이만 먹었는데, 할머니표 오이소박이는 양념을 긁어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전국방방곡곡 풍광 좋은 사찰로 성지순례와 방생 다니실 때 수십년 간 모아온, 납작하고 큼지막한 돌멩이로 눌러놓았다가 그 돌멩이째 우리집으로 날라오는 할머니표 오이소박이는 어찌나 아작아작 시원하고 깔끔하게 맛있는지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말년에 꽤 오래 모시고 살며 병수발을 들었던 막내이모가 젓갈 없이 소금으로만 깔끔하고 슴슴하게 맛을 내는 할머니표 김치는 그럭저럭 전승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오이소박이만은 아무리 애써봐도 도저히 그 맛을 낼 수가 없다고 손을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입퇴원을 반복하던 마지막 무렵에도 손수 오이소박이를 담가 자식들 집집마다 나눠주셨다. 울 엄마는 칠순에도 이미 입맛이 무뎌져 간을 잘 모르는데 할머니는 여든다섯에도 어떻게 한결같은 김치맛을 내셨는지 불가사의하다. 이모는 할머니 때랑 똑같이 가락동 시장에 가서 늘 사던 그 집에서 오이를 사다가 똑같이 한다고 해봐도 맛이 나질 않는다며 속상해하신다. 그래봐야 어쩌겠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함께 사라져버린 할머니의 그리운 손맛 여러가지 가운데 하나로 아쉬워할 수밖에.

토막썰기를 해서 칼집을 넣은 오이소박이도 밥상에서 잘라 먹으려면 꽤 불편한데, 통째로 길게 오이소박이를 담그면 사실 그릇에 낼 때부터 아예 잘라야 하므로 더욱 성가시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평생 그 방법을 고수하셨던 걸 보면 그래야 제맛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우스에서 재배한 오이가 사시사철 장에 나오긴 하지만, 할머니가 거의 열흘 간격으로 꼭 스무개, 서른개씩만 담가 보내던 오이소박이 행렬이 시작되는 건 확실히 요맘때였던 게 틀림없다.  뜬금없이 눈앞에 할머니표 오이소박이가 어른어른거리면서 먹고 싶어진 걸 보면 말이다.

반찬코너에서 한 그릇 사다먹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고춧가루 범벅에다 내가 싫어하는 당근까지 채썰어 소를 박은 꼬라지를 보니 당최 내키질 않았다.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열정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는 결국 오이 여섯개를 사다가 직접 오이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어차피 외할머니표 오이소박이의 맛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처음부터 먹기 좋게 오이도 조각조각 잘라 절이고 부추도 넣었다. 오이김치 요리법을 찾아 참고한 대로 멸치액젓도 넣고 매실청도 넣어(둘 다 할머니는 절대 안 넣으셨을 양념이다) 대충 버무렸다. 당연히 할머니표 오이소박이와는 아주 동떨어진 오이김치가 탄생되었다. 버무리자마자 한 보시기 담아 우적우적 밥 한그릇을 다 먹고 나니 그래도 마음 속 결핍이 어느정도 채워진 듯했다.

음력사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외할머니가 부지런히 오이소박이를 담가 보내신 이유는 물론 잘 알고 있다. 이가 부실한 맏사위가 배추김치보다 오이소박이를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매운 것도 잘 먹지 못하는 아버지에겐 양념과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아 말간 생김새의 오이소박이가 딱이었다. 그리고 마침 아버지의 생일은 음력 사월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의 생일은 이제 제삿날이라는데 나는 4년이 지난 지금도 요맘때면 오이소박이를 먹어야 하는 습관이 밴 몸을 지니고 있으니 참 징하고 서글프다. 할머니랑 아버지가 겨우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어서 그리움 타령이냐고 타박하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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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추억주머니 2011. 1. 6. 14:14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버스에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뒤에서 두번째 줄,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요샌 거기도 두 좌석이 놓여있는 버스가 많지만, 몸체가 낮고 하차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신형 버스에도 맨뒤에서 둘째 줄엔 한 좌석짜리 버스들이 더러 있어서 드물게 거기 앉을 수 있는 날이면 몹시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나는 모든 공간에서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모양으로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한가운데보다는 주로 모퉁이에 콕 박혀 있는 게 좋다. 요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연코 내가 원하는 자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아도 되는 벽쪽 가장자리 자리다. 하지만 공주마마를 보필하고 다니는 무수리로선 가장자리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벽쪽은 언제나 낼름 조카가 앉는다. 그래서 둘이 티격태격할 때도 있는데 내가 차지하고 싶은 요가매트는 가장자리 중에서도 버스 자리처럼 뒤에서 둘째 줄이다. 사람들이 꽉 차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뒤에서 둘째 줄에 앉아도 뒷사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워낙 촘촘하게 요가매트를 깔아놓았기 때문에 맨끝줄에선 구르기 같은 동작을 할 때 잘못하면 벽에 부딪친다. 하지만 공주는 무조건 맨끝줄에만 앉으려고 든다. 앞쪽은 나도 절대 사절이지만 맨끝줄에 앉아서 설렁설렁 딴짓하며 동작도 어설프게 하다가 걸핏하면 잠들어버리는 조카녀석을 보노라면, 과거 맨뒷줄에 앉아서 노상 꾸벅꾸벅 졸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_-; 

학창시절 내 자리는 거의 언제나 앞쪽이었다. 국민학생 때는 그나마도 키와 상관없이 중간쯤까지 진출했었고,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십몇번대라 둘째 줄이었으나 고등학교 올라가선 가차없이 맨앞줄에 앉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고2땐 키와 상관없이 제비를 뽑아 자리를 정하는 바람에 나중엔 슬쩍 번호표를 바꿔 친구들끼리 앉을 수 있었고, 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대로 맨 뒷자리를 몇달간 경험할 수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따로없다며 친구들끼리 다닥다닥 앞뒤로 옆으로 붙어앉아 지냈던 그 시절엔 정말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게 즐거웠다. 맨앞줄에선 등잔밑이 어두운 교탁 바로 코밑자리(거기선 교탁에 교과서를 기대놓는 척하고 딴 책을 숨겨보는 게 가능했다)아니고서야 딴 책 읽기가 불가능했지만, 맨뒷줄에 앉으니 온종일 교과서에 숨겨 만화책을 비롯한 딴 책을 읽어대도 걸릴 염려가 없었다. 돌아가며 망보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 선생들이 필기를 시켜놓고 교실 앞뒤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우린 교실이 좁다는 핑계로 의자를 벽에 바짝 대놓고 우리 뒤쪽으론 못다니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당시엔 아직 과외금지령이 내려져 있을 때라 학원이니 과외니 하는 것도 전혀 없었고 순전히 학교 공부로만 버텨야 하는 시대였다. 나는 예습복습을 거의 하지 않고 수업중에 바짝 정신차려 집중하는 걸로만 대충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맨 뒷줄에 앉아서 그렇게 노상 딴짓만 하다보니 성적에도 당연히 티가 날수밖에 없었다. 단순암기, 찍기의 여왕이 되려면 일단 수업중에 선생이 중요하게 언급한 부분에 형광펜이라도 칠해놓아야 하는데 그 몇달간은 망보는 임무를 맡은 수업이 아니고선 교과서며 요점정리 유인물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사실 딴짓하는 친구들을 위해 망을 보느라 대표로 수업을 들을 때도 맨뒷줄에선 앞줄에 앉았을 때와는 공부의 질이 달랐다. 선생에게 시선을 집중해 보아도 시야에 들어와 거슬리며 움직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을 빼앗겼고(맨앞줄에선 선생과 나의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중간에 없다! ㅋㅋ ) 목소리가 작은 선생의 설명은 맨뒤까지 잘 들리지도 않아 수시로 졸렸다. 키가 커서 늘 뒷자리에만 앉아 지냈던 친구들은 아마도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수업에 집중하는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왔을지 몰라도, 앞줄 붙박이였던 나는 암튼 그랬다. 그렇다고 친구들 배신하고 다시 맨앞줄로 갈 수도 없으니, 공부엔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그래도 고2때 아니면 언제 놀아보겠냐며, 고3 올라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3때 다시 맨앞줄로 회귀한 뒤에도 그랬지만, 대학엘 가서도 강의실에서 내 자리는 거의 앞쪽이었다. 맨앞줄은 단호히 거부했어도 거의 두세째 줄에 늘 앉았던 이유는 워낙 거구의 친구들이 많아서 뒤쪽에 앉으면 아예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200명씩 듣는 합동강의실이든 영문과 단독 강의실이든 뒤쪽엔 요란하게 사투리를 쓰는 '무섭고 시끄러운' 남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가끔 졸릴 때면 일부러 덩치 큰 친구 뒤에 앉아 잘 가리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싫어하던 교직과목의 경우엔 가려주는 사람 없이도 뒷줄에서 빌빌 졸았지만.

사실 고2때 찍은 저 기념비적인 사진 속엔 뒷줄에 앉았든 아니든 전교1등 하던 친구도 있었으니 교실에서 앞줄과 뒷줄 여부로 공부나 집중도의 차이를 단정할 순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처럼 얼치기 범생에겐 확실히 지리적인 차이가 성적과 수업집중도에 분명 영향을 미쳤으니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도 할 수없다. 요가원 원생들을 봐도 그렇다. 언제나 맨앞쪽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늘이고 유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수업 맨 마지막에 편하게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자세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쿨쿨 잠을 자다가, 그만 휴식에서 깨어나라는 요가 강사의 말을 못듣고 끝까지 누워 있다가 얼떨결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나의 조카를 비롯해 꼭 뒷줄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도 이젠 확실히 어떤 자리든 뒷줄이 편하고 앞장서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뒷자리에서 구시렁거리는 걸 즐기는 사람이지만, 벌써부터 맨 뒷자리만 고집하는 조카의 기호는 너무 일찍 자리잡은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학교에서도 만날 맨뒷자리에 앉아 딴짓하고 조는 거 아니니, 공주야? ㅠ.ㅠ 물론, 맨 뒤에 앉아 빌빌 졸거나 만화책만 읽어대도 행복하고 바른 아이로 잘만 자라준다면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다 부질없는 욕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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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추억주머니 2010. 11. 22. 03:38

일기예보를 안 봐서 비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새벽에 난데없이 요란하게 비가 내린다. 아파트도 그렇고 콘크리트로 지은 요즘 집에 살면서 밖에 비오는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유독 빗소리에 민감한 이유는 오래된 우리집 뒷베란다 쪽으로 덧씌운 섀시 때문이다. 알루미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지붕을 후두두둑 때리는 빗소리가 좀 요란해야지. 빗줄기가 가늘면 제 아무리 예민한 귀를 지녔대도 나 역시 비오는 걸 못 알아차릴 때가 많지만, 지금처럼 빗줄기가 굵을 땐 옛날 '슬레이트' 지붕을 덧댄 기와집에 살 때처럼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보안등에 비친 빗줄기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확실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요란한 빗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셋방을 전전하며 살 때 가끔 자다말고 물난리를 겪는 경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어딘가 깨진 기와 때문에 천장에서 똑똑 떨어진 물이 이불을 흠씬 적신 다음에야 한밤중에 깨어난 부모님이 삼남매를 깨워 이부자리를 한 구석으로 치우고는 물 떨어지는 곳에 대야를 받쳐 놓아야 했다. 어린 우리야 잠자리를 구석으로 옮기고는 곧장 잠이 들었지만나 부모님은 걸레로 물기를 닦고 나서도 대야가 넘칠까봐 밤새 불침번을 서셨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곧장 지붕에 올라가 기와 깨진 곳을 확인하셨는데, 그런 일이 워낙 다반사인지 집집마다 마당 한구석엔 기왓장이 몇장씩 쌓여있었다. 어린 눈엔 그냥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기와를 가져다가 소꼽놀이라도 할라치면 어른들에게 혼이 났다. 그래도 몰래 한장쯤 기와를 훔쳐다가 냅다 깨뜨려서 망까기와 비석치기에 쓸 괜찮은 판판한 돌멩이를 만들어 나눠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옛날 빗물 떨어지는 천장 아래 대야와 양은 그릇을 받쳐놓으며 부모님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셨지만 어린 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똑똑 번갈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저 재미있기만 해서 자꾸 손을 갖다 대며 물놀이를 하려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지붕이 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양은 그릇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재미있는 건 여전해서 처마 밑에 일부러 양동이를 가져다놓은 기억도 있다. 혹시 빗물을 받아서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함이었던가? 빗물을 받아 며칠 두었다가 어항에 넣어주었던 것도 같고...

아파트에 살면 다달이 관리비 내는 것으로 집안팍의 유지관리와 관련된 모든 수고를 남에게 일임할 수 있으니 그건 제일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집은 몇년에 한번씩 해야 하는 외관 페인트칠도 그렇고 지붕 방수도 그렇고, 매년 해야하는 정화조 청소도 그렇고 일일이 사람을 불러다가 의뢰를 해야한다. 일년에 한번쯤은 사다리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방에서 날아온 낙엽이 혹시 배수구를 막고 있지는 않은지도 확인해야 하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던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제 그런 것들도 모두 내 책임인데, 과태료 운운하며 구청에서 매년 업체 연락처가 적힌 안내장을 보내오는 정화조 청소 말고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던 터라 사실 비만 오면 불안불안하다.

아직은 아래층에서도 어디 비새고 물샌다는 얘기도 없고 방방마다 멀쩡하긴 한데 원래 문제 생기기 전에 올해쯤 미리미리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장마철 지나고도 수시로 비가 많이 왔던 지난 여름 내내 지붕에 올라가서 낙엽 치우고 배수구 확인했어야 하는데 어쩌냐고 계속 불안해하시는 왕비마마에게 막내녀석 다니러 오는 날 시키면 된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는 매번 까먹고 그냥 넘어갔다. 여름도 잘 지났으니 올 겨울은 무사히 넘어가주지 않을까. 

갑자기 내린 비는 소나기였나보다. 옛 추억에 골몰해 자판을 두들기는 사이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쓸데 없는 생각 그만하고 일이나 더 하라는 배려인가. 흐흐흐. 암튼 이렇게 월요일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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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유감

투덜일기 2010. 9. 2. 15:40

초등학교 앞 문방구의 최고 인기품목이 하나에 이천원짜리 커플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줄곧 어여쁜 조카 공주의 로맨스를 기다려왔다. (어쩌면 약간은 두려워하면서... 아니 왜? -_-;;)  헌데 유치원 시절에 몇몇 남자아이들의 이름을 대며 좋아한다고, 나중에 결혼할 거라는 결심을 토로했다가 금세 마음을 바꾼 시시한 해프닝 이후로 지금껏 6, 7년째 공주는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없다. 은근히 유도심문을 해봐도 전교생 중에 썩 괜찮은 남자애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이성에 큰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 눈도 높고 어려서부터 워낙 도도한 편이라 그건 그러려니 할 수 있겠는데, 내가 보기엔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고모 특유의 콩깍지 모드임은 나도 안다) 공주를 어째서 남자애들이 그냥 두는 것인지 그건 좀 이상했다.

물론 1학년 때부터 공주에 대한 순정을 6년째 이어오고 있다는 '땅꼬마' 남자애가 하나 있다는 건 알지만(현재 이 남자애는 공주와 다른 반이다), 제 친구들이 벌써 몇 번이나 커플이 되었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별다른 연애사건이 없으니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좀 아쉽다. 하다못해 심히 연애인자가 부족한 나조차도 국민학교 다닐 때 몇번이나 스캔들이 있었는데 말이지!

그러던 차에 얼마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컵스카우트인가 뭔가에서 공주는 요번 방학동안 중국엘 다녀왔는데 그때 같이 갔던 5학년짜리 남자애가 5박6일의 여행에서 돌아온 뒤 공주에게 문자를 보냈단다. '우리 사귀자'고!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공주에게 물었더니 그냥 문자를 씹었단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느꼈나보다. ㅋ 헌데 생각할수록 그녀석이 괘씸하다. 제 아무리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 유행이라지만, 5학년 땅꼬마 주제에(공주 키가 부쩍 자라는 바람에 남자애들은 동급생들도 거의 내려다본단다) 6학년 누나를 마음에 품었으면 사귀자고 달려들기 전에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부터 해야하는 거 아닌가?!

돌이켜보니 주변인들의 요즘 연애담을 들어봐도 다 비슷하다. 가물가물 기억도 잘 나지는 않지만 과거 추억을 들춰보면 분명 누군가 먼저 좋아하는 마음을 품거나 거의 동시에 마음이 통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망설이거나 적극 응수하는 단계를 거쳐 본격적으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새는 일단 서로 '조건'과 '스펙'을 맞춰보고 '느낌'이 괜찮은 것 같으면, 혹은 별로 마음에 안들더라도 싱글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단순한 목적만으로도 '일단 사귀고 보는' 식이다. 애틋한 마음을 고백하거나 어떻게든 감정을 전하는 노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촌스러운 감정 소모를 대신하여 고가의 선물이나 커플링이 오간다. 예로부터 중매 시장에서 남녀가 조건에 맞춰 서로를 재본 다음, 세번만에 옳다구나 결혼을 결심했던 전례가 어느새 연애 분야에도 물든 모양이다.

매사에 이기심이 늘어난 요즘 사람들은 혹시라도 감정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섣불리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는 않으면서 은근슬쩍 얍삽하게 '어장관리'만 한다는 이야기도 익히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 이제 나는 연애하기 정말 글렀구나, 하는 사실이다. 내가 너무 구식이라서 (물론 하도 오래 돼서 연애인자가 메말라버린 건 인정한다)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일단 사귀고 보자'는 시도 정도에는 도저히 넘어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귀자'는 말에 이미 '네가 마음에 든다. 좋아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올시다다. 오히려 그 말에는 '일단 사귀어 보긴 하겠는데 아님 말고' 하는 심보가 들어있을 뿐이다. 어린 친구들은 그 편이 더 속편하다고 말한다. 구질구질하지 않고 '쿨하게' 관계 정리가 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름지기 고백이라 함은 애틋한 감정 토로가 먼저여야 할 것 같다. 그 마음을 전하기까지 자기 감정을 곱씹고 돌이키며 망설이는 단계를 거치고 제대로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연애'이고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5, 6학년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진짜 '연애 사건'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뭐든 어른들 따라하는 게 당연해진 요즘 사랑조차 가볍고 소모적인 유희로 변질되면 어쩌나 걱정이다. 구닥다리 고모의 마음으로는, 1학년 때부터 줄곧 우리 공주를 좋아했던 녀석이 갑자기 훌쩍 키도 자라고 멋있게 변해서 (공주 말로는 걔가 아토피가 심해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지만 ㅠ.ㅠ) 순애보를 성공시키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 같다. 그 녀석이 아니더라도, 제발이지 무작정 '사귀자'고 달려드는 놈들 대신 우리 공주에게 '난 네가 좋다'고 제대로 고백하며 접근하는 첫사랑이 다가오면 좋겠다. 고모로서 대리만족이라도 느끼게... 엇, 열세살이면 너무 빠른가? 그럼 으음, 지금 당장은 말고 몇년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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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

놀잇감 2010. 8. 27. 17:20

날짜는 또 월말이고 일은 밀려있고 그러나 역시나 일은 하기 싫고 낮엔 여우비가 내리더니 이젠 아예 주룩주룩 쏟아져 맥주일잔이 땡기고 돌아보니 변변한 휴가를 즐겨본 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질 않고....
그래서 콩밭에 간 마음을 담아 사진폴더를 뒤졌더니
지난달에 번개치듯 선운사에 다녀온 추억이 콧바람을 부추긴다.
콩밭에 간 이놈의 마음 어찌 돌려야 하나.


아무때나 내려오라던 절간 친구는 그날따라 행방이 묘연해져 우릴 바람 맞히는 바람에 선운사 대웅전 마당은 유독 뜨겁게 느껴졌지만, 7월의 녹음 우거진 오솔길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바람 맞은 마음 달래러 들른 변산 해수욕장과 하늘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예뻤다. 키가 30센티미터만 더 컸더라면 손에 잡힐 것처럼 유독 낮게 깔렸던 그날의 어여쁜 구름을 보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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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스토리 3

놀잇감 2010. 8. 21. 03:24


역시 뜸들이고 공들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더 되는 게 없다.
영화 보면서 느낀 찡한 감동과 펑펑 흘린 눈물과 애틋한 마음 때문에 뭔가 그럴싸한 후기를 적어보리라 작심했지만 차일피일 밀린 방학숙제 앞둔 듯한 조바심만 들 뿐이다. 연말 집계용으로 그냥 대충 기록만 남겨야지.

다들 칭찬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애니메이션 영화에 특별히 애정이 많은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감동과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여운으로 모두 남기기가 어디 쉬운가! 1, 2편 모두 극장에서 보며 신나했고 오래도록 후속작을 기다려왔지만 <토이스토리 3>은 시리즈 중 최고다!

이별에도 예의가 있는 법이라는 말 흔히들 하지만, 애정하던 대상과 '잘' 헤어지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예의가 필요하고, 그렇게 하고도 상처는 남는 법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펑펑 울면서, 혼자 꾸역꾸역 십수년쯤 뒤에 예쁘게 자란 보니랑 앤디가 연결되서 장난감들이 반드시 앤디 2세들에게 전달되는 번외편을 상상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 같다. 나는 특히 애니메이션에선 왜 해피엔딩이 아닌 걸 견디질 못하는지 원.

1, 2편에서도 '싹수 있는' 소년이었던 앤디는 참 잘 자라주었고, 그래서 더 뿌듯했던 것 같다. 15년이나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장난감들 때깔만 봐도 앤디가 얼마나 장난감을 소중히 여기며 갖고 놀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스토리 전개상 그런 거라 해도, 어쨌거나 대학생 될 때까지 간직했던 앤디의 장난감들이 하나같이 말짱하고 성능까지 그대로라는 게 난 그렇게도 뿌듯하고 좋았다.

어린 시절 종이인형과 딱지 정도 이외엔 장난감을 별로 갖고 논 기억이 없다고 줄곧 생각했었는데, 요번 3편에 나온 무시무시한 눈 깜박이는 아기 인형을 보니 나도 그 비슷한 인형이 있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금발머리가 곱슬곱슬하게 붙어있고 원피스를 입은 채로 눕히면 눈을 감고 앉히면 눈을 뜨는 딱딱한 플라스틱 아기 인형을 내가 몹시 무서워했었다는 것도! ^^ 낮에는 그럭저럭 업고 돌아다니거나 갖고 놀았지만 밤만 되면 그 인형 눈이 어찌나 무섭게 보이던지 냅다 집어던지곤 했기 때문에 그 인형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었다. 영화 보는 내내 새삼 그 옛날 인형한테 어찌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암튼, 그래도 굳이 뭔가 꼬투리를 잡아보자면;;
원래 낀 안경과 그놈의 3D안경까지 두개를 들어올리고 눈물 훔치느라 꽤나 고생했지만, 사실 3D 효과는 별로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고, '데이케어 센터'를 굳이 '탁아소'로 번역한 게 계속 거슬렸다('서니사이드' 번역은 고심한 것 같던데 왜 하필 '탁아소'냐고!! 그냥 '어린이집'이나 '유아원' 정도로 옮겼더라면 거슬리지 않았을 텐데... 나도 안다, 직업병이다 ㅋㅋ). 사실 뭐 그렇더라도 만3천원이 아깝지 않았을 만큼 좋았다! DVD 나오면 꼭 소장할테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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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투덜일기 2010. 7. 29. 00:29

인간은 워낙에도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내가 얼마나 기억력이 부실한지 새삼 놀라는 때가 있다. 바로 며칠 전에 들었음이 분명한 멍의 원인이 기억나지 않는것도 그렇고, 부러 잘 챙겨둔 물건의 위치가 완전히 깜깜하게 떠오르지 않는 때도 부지기수다. 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과거의 끼적거림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생각의 틀이라든지 일상적인 고민거리는 10년전이나 20년 전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가끔은 어떻게 이렇게 유치찬란하고 얼굴 뜨거운 글을 적어놓았나 싶을 때도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적어놓은 글을 증거로 눈으로 보면서도, 그 안의 사건이라든지 정황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막막해지기도 한다. "넌 어쩜 그런 걸 다 기억하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부 기억에 대해선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것까지 묘사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시기는 뭉텅뭉텅 인생에서 잘라 내 버린 것처럼 기억이 전무하다. 다 기억의 선택이 부려댄 조화겠지만, 그걸 깨달을 때마다 신기하다.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워낙 인상적이라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대개는 알게 모르게 그 기억을 계속 환기해 신선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란다. 알게 모르게 환기되는 기억의 중요성이 대체 어떤 근거로 정해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오래 기억해두면 좋을 것들은 쉽사리 사라지고 잊고 싶은 것들만 꾸역꾸역 남기고 있진 않아야 할 텐데 말이다.

5년만에 슬슬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컴퓨터가 걱정스러워 그간 또 까먹고 안하던 하드 백업을 하느라 오래 전에 컴퓨터 바꾸면서 압축해둔 파일들을 새삼 뒤져보니 별별게 다 있다. 내 기억에선 거의 사라졌던 흔적들을 발견하는 기분이라 거의 보물찾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은 아 맞다, 그랬었지, 이런 짓도 했었구나, 싶은 것들이 많았으나, '으엥?' 하며 놀라게 되는 것들도 있다. 어떻게 이런 걸 잊을 수 있나 싶은 것 가운데 하나를 기막혀 하며 올려본다. 무려 2002년 5월 날짜 파일이다. 8년이면 꽤 긴 세월이긴 해도, 기억이 까맣게 지워졌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의 '소중한' 파일이었다. 스스로 너무도 한심해서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며 기억을 환기해보니 아스라이 그 그림을 얻게 된 상황은 대강 떠오르는 것도 같은데, 이후의 추이는 완전 깜깜하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었다고 농담삼아 푸념하는 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잔혹한 현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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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중

추억주머니 2010. 6. 26. 14:37

까마중이라는 식물의 존재를 정말로 '새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김점선의 책을 읽다 발견했다. 아 반가워라.
이제는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서울 한구석 나의 본적지는 어린시절만 해도 거의 허허벌판 이었고, 주변에 야산과 풀밭이 많아 아이들이 뛰어놀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포도나무까지 심어 기르셨으니 철철이 온갖 화초가 넘쳐났어도, 그래도 나는 야산울 쏘다니며 산딸기와 까마중, 오디 같은 열매를 신나게 찾아다녔다.
산딸기와 오디는 최근에도 상품으로 구경할 수 있을 정도라 잊을 이유가 없었지만, 까마중은 수십년째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물론 근교든 멀리든 산엘 가본 기억이 가물거리기 때문이겠지만서도.


동글동글 새카맣게 익은 까마중을 따서 입안에 넣으면 꽤 달콤해, 집에 계신 할머니랑 고모 가져다주겠다고 잔뜩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른 놀이에 팔려 쭈그려 앉는 바람에 다 터뜨려 바지에 물을 들였던 기억도 있다. 인간의 기억은 향과 맛으로 가장 깊이 각인된다더니만, 사진만 봐도 풋내 나는 까마중의 흐릿한 달콤함이 입안에 감도는 기분이다.

요샌 샐비어, 분꽃, 채송화 같은 소박한 옛날 꽃들도 다시 사랑을 받는 모양인지 심심찮게 눈에 보이던데, 까마중은 과연 어딜 가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까마중, 까마중, 까까머리 중학생이 떠오르는 귀여운 이름까지 다신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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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으로 하하하

놀잇감 2010. 6. 6. 20:37

몇달만에 반차를 낼 터이니 영화도 보고 같이 놀자는 후배의 말에 옳다구나 반색을 했다. 더구나 넷이나 모이면서 안본 영화가 겹쳐 고민할 필요가 없어 예매까지 미리 했다는 말에 웃음도 났다. 유유상종이라더니만...
내 경우는 그냥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하나는 연인이 있어도 취향상 같이 볼만한 영화가 아니어서, 하나는 <하하하>가 워낙 개봉관에서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나머지 하나는 그냥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느라 지금껏 못 보고 있던 영화를 모모하우스에 가서 봤다.

평일 오후의 소규모 영화관엔 관객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계속 킥킥거림과 웃음이 터져나와 시끌벅적할 정도였다. 배우들이 다들 낮술 마시면서 찍었다던데 어쩐지 관객도 낮술 마시며 한참 풀어져 봐야할 것 같은 분위기.
너무 찌질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도 유쾌하게 담아낼 수 있구나 싶어 줄곧 킬킬대다 나왔더니 어찌나 허기가 지던지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야 했다. 
김상경은 <살인의 추억> 말고는 그간 홍상수 영화에서만 본 터라 투실투실 살집 많아진 그의 모습을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른 역할로 보는 게 적응 안될 지경이다. 친구네 아파트에 산다는 그는 연예인 답게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독한 향수와 스킨 냄새 때문에 한참 뒤까지 어지러울 지경으로 빤질빤질하다는데, 내가 본 영화 속 모습으론 향수냄새는커녕 후줄근한 티셔츠에 매캐한 땀냄새만 배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홍상수식 연기를 잘한다는 의미겠지. 
칸에서도 유준상과 예지원 소식만 잔뜩 들리던데, 난 김상경, 문소리 커플 에피소드가 더 좋았다. 어쭙잖은 시인 김강우도 좋았고.

하나같이 무능력한 백수급 남자들의 변명과 다 알면서 모른척 홀딱 넘어가주는 여자들의 밀고 당기기를 보며, 그래, 저래야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는 거구나 싶어서 또 킥킥 웃음이 났다. 정말 제목 하나 잘 붙였다. 하하하 웃다보니 영화도 끝났고 통영의 추억도 끝이 나더라.

통영에 가본 건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라 언덕배기 즈음에 있었던 내가 묵은 모텔이 어느 동네인 줄도 모르겠고 강구안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한산섬 가는 유람선이랑 제승당은 눈에 퍼뜩 들어왔다. 컬러임에도 그리 선명하지는 않은 사진으로 남은 그 여행의 기억이 내 머리속에도 그렇게 방점으로 남아 있었나보다. 암튼 나도 통영에 가고 싶어졌다.

(드물게 보는 영화들은 블로그에 기록해야 연말에 베스트 뽑을 수 있을 텐데 올핸 읽은 책도 본 영화도 몹시 저조하다. 마지막으로 영화관엘 간 게 언제인지 그날 오후 내내 생각해보니 <전우치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6월초 현재 영화관엘 가 본 게 겨우 두번인듯. ㅠ.ㅠ  전우치전과 하하하. 집에서 본 영화도 꼬마 니꼴라와 인사동스캔들이 전부다. 책도 안읽고 영화도 안보고 그렇다고 일도 별로 안하고 나 뭐하고 산 거니.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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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배신

투덜일기 2010. 2. 18. 02:01

어설픈 나의 기억력 탓도 있긴 하겠지만 어려서 읽었던 동화의 줄거리가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더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괜한 배신감에 젖는다. 최근의 창작동화는 정확하게 어린이 독자를 겨냥해 쓰인 문학이지만, 옛날이야기로 내려오는 전통설화나 구전문학은 딱히 아동용이 아니었으므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땐 일부 내용이 각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50권짜리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 따위에 들어 있었으니 당연히 동화라고 내가 믿었던 작품들이 실제로는 상당히 진지한 문학작품이었음을 알게 되더라도 배신감은 여전하다.

하기야 내가 어렸을 때 출간된 번역문학은 죄다 일본 출판사들이 각색해서 낸 책의 중역본이었으므로 일차로 일본 아동 출판사에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각색 및 편집하고 또 이차로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다듬으며 내용이 원전과 꽤 많이 멀어진 게 당연할 것이다. 어쨌거나 신랄한 풍자문학이었던 <걸리버 여행기> 같은 작품을 어린시절 그냥 환상적이고 신나는 모험 동화로 읽었던 나는 나중에 한참 유행하던 완역판으로 다시 보며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종일관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던지. 

소설이야 그렇다 쳐도,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 동화집에 들어있던 동화마저도 내가 읽은 내용이 원전과는 조금씩 달랐단 걸 비교적 최근에 알았을 땐 불쑥 이게 뭐야, 하는 억울함마저 들 정도였다. 가령, 인어공주의 결말은 사랑을 잃은 슬픔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번역을 의뢰받고 새삼 작업을 하다가 인어공주의 끄트머리에서 낯선 결말을 만났을 때 나는 하도 의아해서 비교적 어린 친구들에게 설문을 해볼 정도였다. 나랑 띠동갑 이상 되는 사람들은 혹시 물거품 이후의 결말을 알고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헌데 너무 어린 친구들은 이미 명작동화 세대가 아니라 창작동화 세대였던지, 물거품 결말도 아니고 왕자의 무지를 일깨우고 악한 마녀를 무찔러 사랑을 이루는 디즈니 만화의 해피엔딩만 알고 있었으며, 그 외엔 하나같이 물거품이 되는 것으로 기억했다.

동화치고 슬픈 결말이라 어린시절 내 눈물을 쏙 뺐던 인어공주 이야기는 솔직히 물거품으로 스러지는 결말이 가장 극적이라고 느껴지기에, 과거 동화책을 만든 사람들이 거기까지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원래 그렇게 끝내질 않았다는데 어쩌겠나 말이다. 원래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된 뒤에 다시 공기의 정령이 되어 삼백 년이나 인간 세상을 떠돌 운명이다. 원래 불멸의 영혼이 없는 인어는 인간의 사랑을 얻어야 불멸의 영혼을 지닐 수가 있는데, 일단 사랑에 실패를 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삼백년간 인간 세상을 떠돌면서 착한 일을 해야 천국에 갈 수가 있다나. -_-;


어려서 나는 안데르센 동화 가운데 <인어공주>를 제일 좋아했고, <빨간 구두>를 제일 싫어했는데 알고보니 결론은 다 똑같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너무도 당연했던 그 시대에 뭘 더 바라겠냐만 그래도 제 분수를 모르고 허황된 꿈을 꿨던 소녀들은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른 뒤 깊이 회개하고 나서야 천국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판국이니 우리 세대가 필독도서로 읽던 <고전 명작 동화>가 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 같은 편견을 주입시킨다는 이유로 점점 퇴출되는 반면 요즘 아이들에겐 창작동화가 훨씬 더 많이 읽히는 게 당연하다. 부모가 자식을 갖다 버려 간접 살해를 시도하질 않나, 식인마녀가 등장하질 않나 결국엔 아이들이 마녀를 끓는 물에 빠뜨려 죽이는<헨젤과 그레텔>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잔혹한 이야기인가 말이다. 그림형제의 동화는 특히 민담을 수집해 엮은 게 많아서 은근히 잔혹동화가 많단다. 

내가 어린시절 동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어떤 역경에도 결국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결말 때문이었고,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 <성냥팔이 소녀>나 <인어공주> <거인의 정원> 같은 비극은 어린 마음에도 배신감과 낯설음에 막막했지만 나름의 감동으로 소녀의 감수성을 키웠던 듯하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결말도 아니더라는 상황은 더 큰 배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더는 몰랑몰랑해질 수 없는 메마른 어른의 심장에 그나마 간직된 아련한 추억을 새삼 빼앗기는 기분이랄까.

같은 작품도 나이에 따라 느낌과 감동이 달라지므로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 특히 고전작품은 다시 읽어보고 싶은 게 꽤 많지만 앞으로도 명작동화는 웬만하면 거들떠보지 않을 작정이다. 동화는 그 옛날 내 마음대로 재구성을 했든 말든 그냥 그 감동 그대로만 기억에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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