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0.01.21 방학 14
  2. 2010.01.06 홍대 조폭 떡볶이 11
  3. 2010.01.04 눈타령 8
  4. 2009.12.18 영하 10도 4
  5. 2009.12.11 엠티의 역사 11
  6. 2009.09.28 휴대폰 음성메모 15
  7. 2009.08.26 칠석에 내리는 비 6
  8. 2009.08.10 국수 18
  9. 2009.08.07 오래 된 선풍기 13
  10. 2009.06.11 춘천의 추억 7

방학

추억주머니 2010. 1. 21. 22:12

방학(放學):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한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놓을 방, 배움 학이니, 방학은 배움을 놓고 놀라는 뜻이 틀림없다.

초중고대,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아도 방학땐 거의 놀기만 했던 것 같다. 요샌 방학이 되어도 누구 하나 정신없이 놀기만 하는 학생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마냥 놀아도 되었던 시절을 타고난 복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엔 자율학습을 하느라 매일 학교에 가야했지만, 등교는 했으되 공부대신 우린 여전히 수다가 본업이었고 고체 연료와 냄비, 양푼 따위를 집에서 날라와 친구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거나 도시락을 모두 모아 비빈 양푼 비빔밥에 달려들어 숟가락 다툼을 하며 히히덕거렸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달리 괜한 시국 탓하며 학기중에도 학업을 멀리했던 우리가 방학 동안 공부를 했을리 만무했다. 친구들 따라 토익, 토플 특강을 신청하긴 했어도 출석일수가 열흘을 넘긴 적은 없었다. 그나마도 3학년 때부터는 특강 등록증을 검사하는 학생회 친구가 거저 들여보내 줄 터이니, 다들 특강비로 술 사마시자고 꼬드겨 단체로 부모님을 속인 뒤 꽤 오래 술과 밥을 사먹으며 놀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학시절 4년이라고 아직도 아련하게 추억하는 이유도, 학기중이든 방학이든 따지지 않고 참 원없이도 놀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미래가 두렵긴 했지만 특별히 인생을 계획하고 앞길을 따져 본 적 없이, 그저 빈둥빈둥 놀았다. 뭐가 그리 재미 있었으냐고 꼬치꼬치 따지면 딱히 손꼽을 것도 없이, 멍하니 무심하게 놀 수 있었던 건 정말 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아 물론, 노는 게 본업이었던 유년시절은 빼고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원이나 과외는 생각도 못하고 요즘 학습지에 해당하는 <일일공부>가 유일한 사교육 경험이었던 나는 학기중이든 방학때든 만날 시험지가 밀려도 별 걱정하지 않고 놀았다. 까짓것 일주일치가 밀려도 하룻저녁 끙끙대며 앉아 다 풀면 되는 일이었다. <방학생활>과 일기가 문제이긴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한참 밀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해치우는 버릇은 여전했으므로 개학을 일주일 쯤 앞두고서 숙제검사를 실시한 부모님에게 손바닥을 몇대 맞은 뒤 시작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개학 후 글짓기든 독후감이든, 만들기든 뭔가 하나쯤은 상을 타왔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치밀한 구석이 있어서, 똑같은 굵기와 진하기의 연필로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다 쓰면 티가 날까봐 나는 연필도 굵은 것, 흐린 것, 뾰족한 것, 뭉툭한 것 번갈아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렇게 강요받은 일기 쓰기가 싫더니, 요샌 누가 쓰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블로그질을 하는 걸 보면 우습다. 한두 달치 밀린 일기를 며칠 만에 다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필력>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건가? 흐흐흐.

어쨌든 어린 시절 방학 중 내가 가장 크게 기대했던 이벤트는 친척집 순례였다. 친할머니댁에서 며칠,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고모네집에서 며칠, 원두막이 있는 시골집이 아니라 다들 서울 하늘 아래라 특별한 것도 없건만 나는 방학동안의 홀로 외박을 학수고대했다. 싸가지고 간 방학숙제와 일기는 언제나 손도 대지 않은 채 며칠 뒤 다시 집에 가져갔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부시시 눈을 떠보면, 안방 한가운데 덩그라니 내 이불만 놓여있고 같이 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불은 어느틈에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방 구석에 상보가 덮인 소반 하나가 놓여있기 일쑤였다. 두분 아침 드시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완고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할아버지가 늦잠 자는 손녀딸을 그냥 내버려두고 그 옆에서 아침상을 받아 진지를 드셨을 걸 생각하면 지금도 놀랍다. 할머니가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내버려두라고 말리셨을 게 분명하지만, 밥상 예절을 중시하셨던 할아버지 성격상 보아 넘기시기 힘드셨을 텐데. 딱히 할머니댁에서 뭘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고, 갓 성년이 된 고모들 수다 떠는 데 눈을 빛내며 끼어 앉아 있고, 낮잠자고 누룽지나 찐고구마 같은 간식 먹고 TV 드라마 보고... 나중에 작은아버지댁이랑 합치셨을 땐 사촌동생들이랑 놀아주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방학때 할머니댁에서 며칠 놀다 돌아오면 집에서 한 일주일쯤 보내다가 다시 외할머니댁엘 갔다. 거긴 사촌언니가 있는데다 만화책을 수십권씩 빌려다 쌓아놓고 보는 외삼촌들도 있었으니 더욱 즐거웠다. 물론 할머니댁보다는 늦잠자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새벽같이 안방에서 쫓겨나 잠이 모자라면 건넌방이나 사랑방으로 베개를 들고 옮겨 이어잘 수도 있었다. 온갖 과일과 한과, 견과류가 그득했던 외할머니댁 광이나 다락에서 끊임없이 가져다먹는 간식의 묘미는 또 어떻고!  두 할머니댁 말고도 고모네 집에서도 거의 방학마다 나를 불렀던 건 좀 의아하다. 살림이 여유로웠던 셋째 고모는 딸이 없어 그러려니 한다지만, 꽤나 먼 동네 단칸방에 살았던 넷째 고모네는 딸도 있는데 거길 가서 며칠 씩 지내다 온 건 무슨 이유였을까. 아무리 아이라지만 군 식구 하나 더 챙기는 게 꽤나 귀찮았을 텐데, 고모들이 나를 심히 예뻐했다는 것말고는 딱히 나를 오라고 했던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편하기만 했던 두 할머니댁과는 달리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며칠은 나도 대단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는데도, 다니러 오라는 고모들의 청이 싫지 않았다. 어린마음에도 오히려 내쪽에서 큰 아량을 베푸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끼니 때마다 고모들을 도와 수저를 놓거나 물잔을 옮기며 듣는 칭찬도 퍽이나 뿌듯했고.

물론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과거의 나처럼 마냥 놀지 못한다. 놀기는커녕 다음 학년 수업을 땡겨서 선행학습을 하느라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오래 학원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집안에선 아예 방학 내내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거나... 달리 노는 인생을 아예 알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나름 행복과 즐거움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여유롭고 신나야 할 때조차 공부에 치여 보낸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더욱 숨막히는 삶에 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몹시 안타깝다. 유년을 돌아보며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빈둥빈둥 놀기만 했어!"라고 즐거이 고백하는 나와 달리, 그 아이들은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학원을 다섯개나 뺑뺑이하느라 정신없었어!"라고 토로하며 그마저도 행복하다 여기는 건 아닌지.

아무려나 일 하기가 싫으니 만날 꿈꾸는 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년, 방학, 휴가, 이 따위 것들이다. 이 맘때쯤 아직은 밀린 방학숙제와 일기 걱정 없이 태평하게 빈둥빈둥 놀고 있었을 내 유년의 방학이 그리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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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참 먹은 김에 키드님의 홍대 설경 사진을 보고 나서 포스팅해야지 생각했던 조폭 떡볶이 이야기나 해야겠다. 
홍대앞에 자주 다니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홍대앞 주차장 거리의 명물 포장마차 조폭 떡볶이가 글쎄 점포를 냈다고 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도 포장마차는 그대로 운영을 하고 있지만 그 옆쪽으로 번듯하게 테이블을 갖춘 점포를 냈으며 상호도 <조폭 떡볶이>로 간판까지 내걸었다고 했다. 드럼통 몇 개 엎어놓은 손바닥 만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만날 줄을 서서 먹을 만큼 장사 잘 되던 가게가 번듯하게 점포를 넓히면 희안하게 맛도 달라지고 서비스도 달라져 결국엔 망하고 마는 이상한 경우를 익히 보아왔던 나는 더럭 걱정이 앞섰다. 일단 포장마차와 점포 두 곳으로 나뉘면 당장 떡볶이 맛부터 달라질 게 아니겠나 말이다!

내가 처음 조폭 떡볶이 포장마차의 존재를 알개 된 것은 무려 15년전이다. 홍대 클럽이 지금처럼 정신 사나워지기 훨씬 이전에 얼떨결에 단체로 춤바람이 들어 일주일에 두번씩은 꼬박 <황금투구> <명월관> <발전소> <조커 레드> <흐지부지> 따위의 클럽에 놀러 다녔던 시절, 신나게 춤을 추고 나온 뒤의 출출한 뱃속을 채우기엔 딱이었던 그곳을 소개한 후배는 당연히 그 유명한 전설을 내게 들려주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주문을 해도 듣는둥 마는둥 대답도  잘 안하고는 기막히게 손님들이 주문한 메뉴를 턱턱 내주는 주인 아저씨가 전직 조폭인데 마음 잡고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터라 가끔 깍두기 아저씨들도 찾아와 말없이 오뎅과 순대를 먹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잘 살피면 얼굴 어딘가에 사연 깊어 보이는 흉터도 있다는 전설이었다.
 
몇년 계속 들락거리며 들으니 그건 그야말로 전설일 뿐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하도 무뚝뚝해서 그런 헛소문이 돌았다는 카더라 통신도 함께 떠돌았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건 밤마다 일대 포장마차는 하나같이 파리를 날려도 그 포장마차는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조폭 떡볶이>가 그 무시무시한 전설과 함께 그토록 오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맛이었다. 그 집 떡볶이는 내 머릿속에 <이상>으로 자리잡은 떡볶이의 맛에 가장 부합하는 맛이다. 특별히 잡다한 양념 맛 없이 그저 고추장과 물엿으로 맛을 낸 듯한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랄까. 순대와 튀김, 김밥, 오뎅까지 다른 메뉴도 골고루 먹어봤지만 일단 언제나 손님이 많아서 회전율이 높으니 모든 메뉴가 다 신선할 수밖에 없고, 특히 떡볶이는 그 주변 포장마차 떡볶이를 거의 다 먹어봤어도 비슷한 맛조차 내지 못할 만큼 맛이 있었다. 문득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일만큼, 자주는 못가더라도 나 혼자 단골이라 여기던 포장마차였기에 점포확장을 빌미로 행여 맛이 변할까봐 염려스러웠던 거다.

다행히 친구 말로는 맛이 변한 것 같지는 않더라고 했는데,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는 법이어서 마침 죄다 떡볶이 애호가들이 모인 지난주에 칼바람과 빙판길을 무릅쓰고 새로 열었다는 주차장길의 조폭 떡볶이 점포를 찾았다.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풍선기둥엔 상호와 함께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피식 웃음부터 나왔는데, 과연 조폭 주인아저씨가 점포의 주방을 직접 맡을 것인가 과거처럼 포차에 올라 앉아 있을 것인가 염려했던 내 걱정은 점포 외부에 설치된 높은 주방 한 가운데 앉아 있는 아저씨를 본 순간 누그러졌다. 가게가 생기긴 했지만,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주방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되는 대로 자리를 잡고 먹는 셀프 시스템이었다. 가게 인테리어는 <조폭 떡볶이>라는 상호와 부조화를 이룰 만큼 뜻밖에도 대단히 여성스러운(?) 느낌에 아늑하고 깔끔하고 고급스러워보일 정도였다. 그뿐인가, 가게 안에 마련된 남녀 분리된 화장실까지 깨끗했다! 그리고 고맙게도 제일 중요한 떡볶이 맛은 옛날 맛 그대로였다. 초저녁에 떡볶이를 처음 만들고 있는데 혹시라도 그냥 빨리 먹고 싶어 재촉을 하면, 아저씨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끝까지 양념을 다 졸여 맛이 밴 다음에 퍼주던 바로 그맛. ^^;

신촌에도 포장마차가 꽤 많지만 거긴 떡볶이를 만드는 네모난 판이 하나밖에 없어서 떡볶이가 거의 떨어져 갈 때면 거기다 다시 물을 붓고 흰떡을 넣고 다시 양념을 해 한쪽에서 조리를 하기 때문에 영 재수가 없으면 고추장 물에 빠진 맛대가리 없는 떡볶이를 억지로 먹어야 할 때도 있지만, 최소한 조폭 떡볶이집에선 그런 되다만 떡볶이는 팔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최고 인기 품목인 떡볶이가 다 팔려나가기 전에 언제나 옆에서 새로운 떡볶이를 한 판 미리 준비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래서 그토록 오래 한 자리를 지키며 명성을 쌓았겠지만...

이번에 연 가게엔 조폭 떡볶이의 역사가 무려 20년이며, 조폭 소문에 대해서도 정말로 무뚝뚝한 말투 때문에 받은 오해였다는 해명 내용의 벽걸이가 걸려 있었다. 소화 안된다고 다들 툴툴거렸던 게 무색할 만큼 떡볶이와 순대 오뎅 튀김을 후딱 먹어치우며 생각해보니, 지난 여름에 그 옛날의 춤바람 파트너와 만난 김에 부러 포장마차엘 갔던 게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로는 홍대쪽에 갈 일이 있어도 배가 너무 불러 떡볶이엔 생각도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반년간이나 내가 거들떠보지 않았는데도 그간 꾸준히 바글바글 손님이 몰리고 돈을 많이 벌어 번듯한 가게까지 낸 조폭 떡볶이 아저씨들은 어쩐지 점포확장 했다고 맛과 서비스가 달라져 결국 망하고 마는 이상한 음식점의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 같다. 15년 전엔 주인 아저씨 혼자였던 것 같은데 몇년 지나며 일손을 돕는 아저씨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이젠 테이블을 닦아주는 아르바이트생 같은 예쁜 언니에다 설거지용 주방에서 빈 그릇을 닦는 아줌마들까지 갖추었지만, 떡볶이 값은 몇년째 15년 전보다 겨우 500원 오른 2500원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떡볶이 맛이 변함없으니 하는 말이다. 

춤바람은 사라진지 오래여도 홍대앞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동네지만, 15년전의 추억대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곳은 조폭떡볶이가 유일한 것 같다. 역시나 춤바람 일행들이 오래도록 열광했던 버섯칼국수집도 자리를 옮기고는 옛날의 영화를 잃고 말았다. 확실히 칼국수며 김치 맛도 그 옛날의 맛이 아니라 나부터 가고싶지 않아졌으니, 조폭떡볶이마저 맛이 변한다면 무척 허무할 거다. 조폭떡볶이 아저씨들이 계속 승승장구 번창해서 아예 그 자리에 건물을 세우는 날까지 한결같은 맛과 무뚝뚝함을 유지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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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타령

추억주머니 2010. 1. 4. 15:50

여기다 눈 얘기를 자꾸 쓴 탓은 아닐 텐데 오늘 서울에 내린 눈은 40년만에 처음이라는 대폭설이다. 2시쯤 본 뉴스에서 서울 적설량이 현재 25.8cm라고 했음. @.@
언덕 중턱에 사는 나로선 이런 날 외출이 무서워 그냥 집에 콕 박혀 있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인데, 집앞 골목길은 여러 이웃들이 힘을 합쳐 거의 다 쓸고 길을 냈지만, 골목에서 모퉁이를 돌아 이어지는 큰 언덕길 눈밭은 이미 죄다 밟히고 다져져 비나 넉가래로는 치울 형편이 아니라 염화칼슘만 여기저기 뿌린 뒤 모두들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위쪽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눈을 치우며 내려와 골목 어귀에서 만났는데, 비질을 하는 부모들 옆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나의 본적 주소지이자 (지금은 동네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주소에도 <산31번지>라고 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할머니댁은 언덕 위에 있었다. 조부모님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서 살다 다시 상경하셨으니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정착한 게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데, 서울 토박이인 외할머니댁도 똑같이 한강 건너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은 좀 신기하다.

아무튼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할머니댁이든 외할머니댁이든 언덕길에서 비닐포대 썰매를 타며 꽤나 즐거워했다. 물론 그 때도 겁이 많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경사가 제일 급한 곳부터 길게 타고 내려가진 못하고 완만한 부분만 즐겼는데, 우리가 그렇게 비닐포대로 반들반들하게 언덕길을 빙판으로 만드는 건 어른들에게 대단히 혼날 일이어서 조만간 동네 어른들 가운데 누군가 연탄재를 들고 나와 우리의 놀이터를 망가뜨리기 십상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우리의 썰매장을 망가뜨리고 나면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연탄재가 덜 뿌려진 곳을 골라 일부러 더욱 매끄럽게 발로 문질러 눈을 다진 뒤에는 마치 처음 눈이 내린 상태처럼 보이도록 눈을 보슬보슬 뿌려놓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재수없게 그곳을 밟은 사람은 영락없이 미끄러져 자빠지도록!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지만, 그땐 그렇게 만들어놓은 빙판 언덕길에 누군가 와장창 넘어지는 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ㅎㅎㅎ

오늘 내다본 집앞 언덕길도 그 오래 전 할머니댁 언덕처럼 꽤나 반들반들 발자국이 찍혀 있어, 비닐포대만 있다면 한번쯤 주욱 미끄럼을 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쪽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에 처박히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이 동네에 이상한 여자 산다고 소문 날까봐 차마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누군가 아이들 가운데 비닐포대를 구해 썰매를 타고 논다면 슬쩍 한번 빌려타자고 나설 자신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썰매를 눈썰매장에서나 타는 것으로 아는지 아쉽게도 저 아까운 언덕길에서 썰매 타고 노는 아이가 한명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언덕과 인연이 많은 운명인지,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 모두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소로는 무려 <종로구>인 서울 중심지에 그렇게 높은 학교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이야 염화칼슘이 흔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는 염화칼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시기였다. 해서 겨울방학 이전에 눈이 좀 많이 내린다 싶으면 우리 학교는 무조건 단축수업을 했다. 산꼭대기라 워낙 춥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겨울 교복으로 바지를 입어도 무방했는데, 특히 추위에 약한 나는 교복 바지를 2개나 맞춰 돌려 입으며 당연히 안에 내복까지 껴입고 다녔다. 마침 근처에 화교학교가 있기도 해서, 중학교 시절 나는 교복바지 때문에 화교학교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눈이 심상치 않게 많이 내리는 날엔 어김없이 단축수업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환호를 하며 하산준비를 했다. 경사가 3, 40도 이상인 언덕이라 그야말로 눈밭 하산길은 만만치가 않아, 기다란 동앗줄 같은 밧줄이 군데 군데 드리워졌고 체육 선생들이 중간에 서서 벌벌 기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때도 멋내는 데 열중한 아이들은 제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치마 교복에 메리제인슈즈 같은 학생 구두를 신고다녔지만, 나처럼 바지교복을 갖춰입은 아이들은 눈이 많이 내리면 책가방을 썰매삼아 타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2학년때였던가 그날은 정말 순식간에 폭설이 내려 책가방 썰매가 얼마나 스릴 넘치고 재미나던지, 몽둥이를 휘두르는 (길 미끄럽게 한다고;;) 체육선생을 피해 몇번이나 오르내리며 책가방 썰매를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재단에 건물만 달라진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눈오는 날 단축수업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새 염화칼슘이 도입되었던 것. 아마 중고등학교만 있었다면 굳이 염화칼슘을 그렇게 미친듯이 뿌려대지 않았을 텐데 그 산꼭대기에 대학건물까지 있었으니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한 교직원들의 자동차 운행 때문에라도 염화칼슘을 무더기로 살포했던 것 같다. 눈이 많이 내려도 단축수업을 하지 않는 서글픈 현실을 개탄하며, 나는 책가방 썰매 타고 가파른 학교 언덕길을 하산했던 무용담을 신이 나서 들려주었지만 다른 중학교 출신들은 좀체 믿으려하지 않았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서도 교복바지파가 드물어 증언도 부족한 터라, 책가방 썰매 하교길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로 남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스키장이든 눈썰매장이든 가본지가 까마득하다. 보드는 타본 적도 없고 두발로 타는 스키도 잘 타지 못하는 터라 리프트 탈 때마다 추위에 벌벌 떨어야 하는 스키장엔 지금도 가보고픈 생각이 전혀 없지만, 썰매 운전도 운전이랍시고 방향조절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므로 ^^ 에버랜드에서 타던 스키썰매는 약간 그립다. 다 미친듯이 내린 눈 때문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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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

추억주머니 2009. 12. 18. 03:17
요샌 겨울이 돼도 영하 10도씩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연일 강추위다. 이런 추위엔 본능적으로 동면모드에 접어들어 집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놈의 요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하려면 아주 귀찮아 죽겠다. 어떤 날은 온종일 눈꼽도 안떼고 있다가 오밤중에 세수 한 번 하고 마는 게으름뱅이가 이틀에 한번은 제대로 씻고 떨쳐입고 나서야 하다니 말이다. 그나마 핫요가라 학원에만 가면 따끈따끈하기에망정이지, 추운데서 옷갈아입고 벌벌 떨어야 하는 요가였다면 애저녁에 관뒀을 거다.
째뜬 영하10도의 날씨는 중무장을 했어도 건물 사이로 휘몰아치는 도시의 칼바람엔 귀떼기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무서운 추위임을 새삼 실감했다. 목도리와 장갑으론 부족해 털모자를 썼어야 했다고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장갑 낀 손으로 귀와 코를 간간이 보듬다가 오래 전 추억이 떠올랐다. 아침 등교길에 춥다고 징징거리다 아버지한테 귓방망이를 얻어맞았던 사건.

5학년 때였나. 내복과 외투를 다 껴입고도 마당에서 얼굴 춥다고 징징대는 딸에게 목도리를 두르고 마스크까지 씌워줬던 아버지는, 내가 "그래도 밖으로 나온 눈이 춥다"고 계속 징징대자 참지 못하고 손지검을 했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뒤통수 정도를 갈기려고 했다가 얼떨결에 뺨을 때린 것도 같았는데, 그 이전까지 매라고는 가끔 동생들과 단체로 손바닥 정도나 맞아보았던 나는 너무도 큰 충격에 징징대던 울음까지 뚝 멎어버렸다. 더 혼나지 말고 얼른 학교나 가라고 채근하는 엄마 말대로 멍하니 집을 나서 학교로 향하며, 나는 아픔보다도 난데없는 배신감에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을 계속 쏟았던 것 같다.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라 여겼던 고명딸의 자존심도 여지없이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그날 저녁까지도 충격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는 아빠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내 눈치를 보며 자꾸만 말을 거는 아빠에게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결국 흐지부지 아빠와 화해를 한 건 틀림 없지만 아빠가 내 뺨을 때렸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도, 아니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대사건>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울 엄마도 그렇고 자식들을 사랑의 매로 다스리는 분들이 아니어서, 집에 분명 회초리는 존재했지만 특별한 체벌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껏해야 방학숙제 밀렸다고 삼남매가 쪼르륵 서서 손바닥을 몇 대 맞았던 정도였는데, 내가 아빠에게 뺨을 맞다니.
물론 내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은 인생을 통틀어 그 추웠던 겨울 아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귓방망이 맞은 충격 때문에 며칠간이나 화를 풀지 않고 아빠의 눈길을 외면했던 나의 <시위>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삼남매 가운데서 아버지한테 뺨맞은 자식은 내가 유일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동생들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지구온난화 탓도 있지만 주거여건을 따져봐도 확실히 그때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마루엔 널빤지가 깔려 당연히 난방이 안돼 추운 겨울날 맨발로 방에서 나와 디디는 것이 고역이었던 그 옛날의 한옥은 당연히 세수도 마당 수돗가에서 엄마가 솥에 데워놓은 더운물을 떠다가 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릴 삶의 모습들이 불과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란 게 놀랍다. 자다 말고 내복 바람으로 옥외 화장실에 가야하던 그 때의 매서운 추위를 떠올리며 요즘 추위쯤 <요까짓것> 코웃음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본성이 간사한지라 그게 잘 안된다. 추운 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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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티의 역사

추억주머니 2009. 12. 11. 22:57

누가 그랬다. 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엠티를 다니냐?
그러고 보니, 멤버십 트레이닝의 약자라는 <MT>를 다닌 역사가 그 이전 역사보다 길다. 하하하.

첫 엠티. 열아홉살때. 대성리. 청량리역에 모여 기차타고 가서 허름한 민박집에 묵었다. 
오티, 엠티 같은 데 가면 운동권 학생들한테 <포섭> 당하거나, 위험한 <혼숙>이 자행되는 공간이라며 절대 못가게 하시던 구시대 아버지를 설득하느라 애를 좀 먹었었다. 나중에 학생들 엠티에 한번 쫓아가본 아버지는 문제의 <혼숙>이란 것이 운동장 만한 방에 수십 명이 떼로 모여 한쪽에선 술마시다 자고 한쪽에선 고스톱치고 한쪽에선 기타치며 노래부르는 요상한 놀이의 장임을 깨닫고는 두말 안하셨다.
여전히 청평, 강촌, 남이섬 등지를 벗어날 수 없었던 두번째, 세번째 엠티 때도 똑같았다. 청량리역이나 성북역에 모여 기차를 타고 가선 시설 조악한 민박집이나 방갈로 같은 데서 죽어라 술퍼마시며 놀다 돌아왔다.

방학을 맞아 동아리에서 떠난 엠티는 장소가 좀 더 멀어졌다. 첫 동아리 엠티는 역시나 너무 멀고 기간도 길다고  집안 반대에 부딪쳐 못가고 스무살 때 비로소 동아리 엠티를 따라갔다. 3박4일짜리 동해안. 망상 해수욕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속버스 타고 가서 무려 <텐트>에서 잤다. 동아리가 개강하자마자 공연을 해야하므로, 체력단련한답시고 밤늦도록 술먹이고는 새벽에 깨워 백사장을 달리게 했다. 3박4일간 찍은 사진을 보면 다들 팅팅 불어 가관이었다. 

첫 직장에 들어가자 고급스러워진 엠티 장소는 드디어 콘도 또는 호텔. 상사들이 모는 자동차에 나눠타고 움직였다. 숙소는 호화로워졌지만 고기 먹고 밤새 술마시다 퍼지는 건 똑같았다. 회사 규모가 커지니 슬쩍 이름도 <워크샵>이라고 바뀌고 아예 관광버스를 몇 대씩 대절해 아무도 운전 안하는 건 좋았지만, 회사에서 출발하자 마자 버스 안에서부터 술을 마셔대는 분위기였다. 거의 20시간 술자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다행히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선 다들 쓰러져 잠들어 더는 술권하는 이가 없었지만, 간간이 속이 아파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해야 하는 후유증이 꽤나 심했다.

회사생활을 관두고서도 엠티 기회는 이어졌다. 관계가 돈독해진 몇몇 출판사에선 번역자 관리 차원에서 직원들 엠티 때 끼워주었다. 스스로 가고 싶을 때도 있었고 가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일 끊길까 염려되어 웬만하면 따라갔다. 숙소는 펜션 아니면 콘도, 호텔. 장소가 무려 제주도일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가기도 해서 신났다. 허나 가서 하고 노는 건 역시나 고급 안주에 밤새 술마시기. 세상은 안변하더라.

늙다리 대학원생 시절에도 엠티가 있더라. 딱한번. 요샌 학부생들도 우아하게 콘도 같은데로 엠티 간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다. 양평이었던가 십수년 전 학생때와 다르지 않던 허름한 민박집. 그나마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가긴 했다. 밥먹고 술마시고 캠프파이어 하고 레퍼토리도, 다음날 숙취까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똑같았다.

그 뒤로 이래저래 만난 이들과 좀 각별히 친해지고 싶을 땐 어김없이 엠티를 떠났다. 장소도, 탈것도, 먹거리도 전보다 다양해졌다. <여행>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엠티>에 방점이 찍히는 짧은 나들이는 확실히 장소보다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매번 <구경>보다는 먹고 마시고 수다떨고 앉은 자리에서 최대한 즐기는 게 엠티의 골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딘가에 모여 밤새 수다떨며 술마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역시나 엠티는 그와는 다른 <설렘>을 동반한다. 소풍 전날 가방에 간식을 싸며 설레던 어린시절처럼, 오늘도 뭔가 간식을 싸야할 것 같은데 겨우 1박2일에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 그냥 설렘만 즐기고 있다. 이 감미로운 설렘을 위해서라도 힘 닿는 때까지 엠티를 따라다닐 테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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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 예쁜 휴대폰을 보면 탐이 나긴 하지만 나는 웬만한 디카보다 성능 좋은 카메라에, 전체 화면이 터치식이고 동영상 재생 화질도 엄청 뛰어나게 만들었다는 초고가의 최신 유행 휴대폰에 별로 마음이 가질 않는다. 일단 기능이 많아지면서 꽤나 무거워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내가 그 많은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 둘째 이유다.
내가 휴대폰에서 쓰는 기능은 전화 걸고 받기, 카메라, 문자 메시지, 알람, 전화번호부, 메모장, 단순한 게임 하나(스토니^^), 아주 가끔 계산기와 스톱워치, 깜깜할 때 랜턴 대신(그나마 플래시 기능은 얼마 전에야 알았지만 귀찮아서 그냥 액정 불빛만 비춘다), 역시나 아주 가끔 DMB 시청(주로 차에서 엄마 드라마 보여드리느라)이나 몇곡 안되는 mp3 듣기가 전부다.
앞으로 휴대폰 기술이 엄청 더 진화한다고 해도 난 이 이상의 기능을 쓸 것 같지 않다. 휴대폰 화면이 아무리 좋아져봤자지, 고 작은 화면으로 뭘 보겠다고 오래오래 들여다보며 집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하다. 난 멀미나던데...

암튼 휴대폰 기능 중에 음성메모도 있음을 알면서 그걸 써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영리한 친구들은 메모할 게 마땅하지 않을 때 통화내용을 아예 녹음해 나중에 확인한다는데 나는 운전중이 아니라면 굳이 메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적도 없는 듯하고, 나중에 메뉴 버튼 눌러 음성메모 찾아가서 그거 확인하는 게 귀찮아서라도 상대에게 문자로 한번 더 보내달라고 부탁하고 만다. 실제로 음성메모 기능을 파악해 유용하게 써먹는 사람이 과연 주변에 얼마나 될까?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음성메모 기능을 열심히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휴대폰 회사마다 기능 버튼이 다 다르겠지만 몇년 전에 나온 모 회사의 휴대폰은 통화중에 기기 옆면에 달린 여러 버튼을 누르면 통화음을 크게 하거나 줄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버튼을 아주 길게 누르면 통화 내용이 녹음된다. 요즘 대세라는 터치폰도 기기 옆쪽에 그런 기능 버튼이 달려있는지 어쩐지 안 써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통화중 음성메모 기능을 사용하려면 손쉽게 작동할 수 있어야 하므로 비슷한 원리가  적용됐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주로 휴대폰 사용에 서툰 어르신들이 자기도 모르게 통화내용을 음성메모함에 녹음해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완전히 기계치인 분들은 또 곤란하고, 휴대폰 통화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다.

지금 왕비마마가 쓰고 계신 휴대폰은 둘째 조카인 준우왕자 탄생 기념으로 아버지가 장만하신 거라 만 7년이 지난 구형 슬라이드폰이다. 액정이 좀 작아 문자메시지를 읽고 보내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원래부터 기계치인 영자씨는 전화를 걸고 받기만 하면 그뿐이고 문자가 와도 일일이 무수리가 읽어드려야 하니 사용엔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거기 달린 카메라를 전혀 못쓰는 걸 안타까워하실 정도. 깨끗하게 써서 아직도 새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휴대폰은 혹시 나중에 왕비마마가 다른 휴대폰으로 바꾸게 된다해도 영영 버릴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거기 녹음된 음성메모 때문이다. 왕비마마는 전화 받다가 잘 안들려도 휴대폰 통화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시므로, 거기 녹음된 내용은 모두 이전 사용자가 무의식중에 남기신 거다.
주로 등산 갔다 오시면서, 어디쯤 왔노라고, 엄마에게 저녁 반찬 거리로 무얼 사갈 것이 있느냐고 묻거나, 일일 드라마 잘 보고 있다가 나중에 내용 들려달라고 당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열 개나 휴대폰 음성메모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거의 1년이나 뒤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할머니 휴대폰으로 장난을 하던 정민공주의 발견으로. 더 오래된 엄마 휴대폰을 해지하고 아버지 유품을 엄마가 쓰시도록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그 존재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 놀랍다. 

아버지의 청년시절 일기장을 장농에 넣어놓고 잘 꺼내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목소리도 너무 슬퍼서 좀처럼 듣게 되질 않는데, 추석 전 성묘를 갔다가 어차피 울 거니깐 까짓것 하면서 다시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누가 개발해낸 것인지 몰라도 휴대폰에 음성메모 기능을 그렇게 쉽게 작동하도록 넣어둔 기술자에게 대단히 고맙다. 그리고 블로그 이웃들과 지인들에게도 그런 기능과 어르신들의 오작동 가능성에 대해서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휴대폰 음성메모함에 의외의 추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거나 연휴동안 집에서 부모님의 휴대폰에 접근하게 된다면 슬쩍 한번 찾아보시길 권한다. 우리 아버지 말고도 무심코 휴대폰 음성메모함에 통화내용을 녹음해둔 분이 또 계시면 정말 나도 기쁠 것 같다. 특히 무뚝뚝하게 툴툴대는 자식과 정겨운 부모님의 대화가 녹음된 소중한 보물을 건진 분이 계시다면 꼭 알려주시기를. 나 또한 통화중에 휴대폰 음량을 자주 조절하는 편이라 실수로 녹음해놓은 게 없나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내 휴대폰 음성메모함은 텅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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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날짜보다 음력이 더 편한 할머니 두분이랑 오래도록 가까이 산 데다 이젠 울 엄마도 할머니가 되어 매일 양력과 음력이 나란히 적혀 있는 달력을 들춰가며 날짜계산을 하는 터라 며칠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오늘이 칠석이라고. 절에선 칠석(음력 7월 7일이다)부터 백중(음력 7월 보름)까지 계속 특별기도가 있는 터라 왕비마마는 원래 절에 가셨어야 하는데 마침 안과 정기검진일이라 못 가게 된 게 엄청 아쉬운 모양이었다.
왕비마마의 아쉬움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오늘도 과연 비가 내릴 것인가 그것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방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칠월칠석은 견우랑 직녀가 일년에 딱 하루 오작교를 타고 만나는 날이고, 그래서 기쁨의 눈물이 비로 내린다는 전설을 나는 전래동화책을 보기 이전에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 한 여름 낮잠을 자려고 할머니방에 누우면 친할머니는 잠이 쉬이 오도록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겨 주시거나 부채질을 해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실 적에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었는데 계집애라 학교에 못가게 하는 바람에 오라버니들 책 읽는 걸 귀동냥으로 들으며 독학으로 대강 한글을 익혔다는 이야기며, 몸종 거느리고 꽃가마를 타고서 시집 오던 날 이야기, 한량 남편의 기생질 사건 같은  할머니의 실제 경험담도 있었지만, 견우 직녀 얘기랑 햇님달님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곧 진리이기도 했지만, 칠월칠석엔 정말로 해마다 비가 내려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비가 조금 내리면 기쁨의 눈물이라 살짝 울고 마는구나,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면 이번엔 그동안 서로 헤어져 지내는 게 힘들어서 서러움의 통곡을 하나보다, 하는 할머니의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지면 어찌나 더 실감이 나던지. 여름마다 옥수수를 사다가 쪄먹을 때 옥수수 끄트머리에 달린 수염을 뜯어내면서도, 햇님달님 호랑이가 마지막에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옥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옥수수 수염이 빨갛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호랑이 피가 묻어 색이 변했다는 옥수수 수염을 단 한오라기도 남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왈칵 울음을 쏟아내던 견우와 직녀가 진정했는지 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쳤다. 언젠가는 칠석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가 해가 쨍 났다가 저녁무렵 다시 비가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날 직녀랑 견우가 만나서 기뻐 울다가 행복해져서 해가 났었는데 저녁때 다시 헤어져야 하는 게 슬퍼 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하셨고, 종일 비가 안 내려 이상하다 싶었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 어느해 칠석엔 아마 까마귀랑 까치가 게으름을 부려서 오작교를 늦게 만들어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10여년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에겐 참 늘 위대한 분이었던 우리 할머니, 이제 돌이켜보아도 정말 참 대단하시다. 할머니가 소싯적에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든, 당신이 직접 꾸며내신 이야기였든 칠석날 하나에도 손녀딸에게 이토록 소중한 추억과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주셨다니.
오늘따라 눈물나게 할머니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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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삶꾸러미 2009. 8. 10. 16:21

어느 책에선가 국수가 혁명가들의 음식이란 얘기를 봤다. 후루룩 먹고 또 일을 해야하기도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 기다란 국수발을 끊지 않고 목으로 넘기며 죽음을 경험하는 거라나 뭐라나.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최소한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일 순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맛 없어도 면발 몇 줄기 삼키는 건 누구나 가능하고, 노동의 중간에 후다닥 끼니를 해치우기엔 국수만한 것이 없는데다 값도 싼편이니까. 물론 전통의 맛을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는 우래옥이나 을지면옥의 냉면은 사먹으려면 7, 8천원이나 하는 고가(?)의 음식이 되었지만 몇만원짜리 만찬에 비하면야 뭐. 

국수 애호가였던 이북 출신의 조부모님과 오래 살면서 나 역시 국수를 어려서부터 먹고 자랐고 지금도 퍽이나 좋아한다. 내가 파스타류를 특히 좋아하는 것도 국수와 워낙 친근하기 때문이 아닐까. 암튼 할머니댁에서 살 때나 나중에 분가후 주말에 다니러 다닐 때도 그 옛날 여름이면 점심끼니는 으레 국수였다. 평안도 출신 답게 물냉면 아니면 비빔국수. 멸치다시를 내서 뜨거운 육수에 말아먹는 잔치국수는 아무래도 서울이나 남도쪽 음식인듯 집에서 해먹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저 매일 냉면냉면... 맛있는 동치미 국물을 늘 마련해놓은 것도 아니어서 인스턴트로 파는 마른 냉면을 사다가 삶고 거기 딸려오는 봉지스프로 육수를 대강 만들어 먹는 건데도 삶은 달걀 하나만 얹어 있으면 어찌나 맛있게 여겨졌던지. 할머니가 신김치 송송 썰어 참기름과 설탕을 약간 넣고 맨손으로 고추장과 함께 조물조물 국수에 비벼 주시던 비빔국수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엔 동네마다 국수가게가 있어서 빨래를 널듯 긴 젖은 국수를 기다란 가로대에 걸쳐 높은 건조대에 척척 올려놓았다가 다 마르면 걷어서 잘라 팔았다. 그땐 쌀이 부족할 때라 혼분식을 장려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집마다 국수를 참 많이도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국수 심부름을 가는 것도 늘 내 차례였는데, 신문지에 크게 한움큼 싸준 국수를 사들고 오며 나는 한줄기씩 그 밀가루 국수를 뽑아 과자처럼 오독오독 끊어 씹어먹으며 즐거워했다. 엄마는 배탈난다고 질색을 했지만, 국수 삶는 걸 기다리는 동안 동생들과 나는 엄마 몰래 얼른 마른 국수 한두 줄기를 뽑아 씹으며 좋아했었다. 여름이면 우리 식구들은 냉면도 좋아했지만 콩국수를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유난히 콩국수를 더 많이 해먹었던 것 같다. 학교 급식제도가 막 시작되고 있던 시절이라 그 땐 일주일에 한번씩 우유 대신 유리병에 든 두유가 빵과 함께 나오곤 했는데, 나는 지금이나 그 때나 단맛을 가미한 콩국물을 절대로 못먹는 반면(편식은 안된다며 담임선생이 억지로 먹였다가 다 토해버린 기억이 있다) 소금을 쳐 고소한맛이 더욱 강조된 콩국물은 몹시 좋아했다. 콩을 덜 삶으면 콩비린내가 나고 너무 삶으면 메주냄새가 나기 때문에 콩국수를 맛있게 만드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엄마는 늘 푸념을 하면서도 매번 맛있는 콩국수를 만들어주셨던 것 같다. 몇해 전 나도 큰 마음 먹고 흰콩을 사다 삶아 손수 콩국수를 만들어보았지만, 콩이 옛날 콩이 아닌 때문인지 그 옛날처럼 고소하고 뿌듯한 맛은 결코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푹푹찌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도 점심끼니는 거의 언제나 국수다. 더욱이 마트에 나가보면 다양한 국수 종류는 물론이고 평양냉면 육수며 콩국물까지 1인분씩 봉지에 담아 팔고 있으니 금상첨화. 이런저런 브랜드 냉면을 죄다 사먹어 보니 굳이 완제품으로 비싸게 호화포장된 냉면을 세트로 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저렴하게 포장된 생냉면을 사고 제일 싼 봉지육수를 골라도 완성후의 맛은 거의 똑같다. 반면에 콩국물은 브랜드별로 가격과 맛의 차이가 심한 편인데, 딱히 내 입맛에 맛는 정말 고소한 콩국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무원이가 만든 콩국물이 *정원이네서 만든 것보다 낫더라. ^^

그저께 점심은 물냉면, 어제는 콩국수, 오늘은 크림스파게티. 그끄저께는 열무비빔국수를 해먹었을 텐데, 지난주에 사온 육수와 콩국물을 다 먹었으니 내일은 또 다시 비빔국수 차례. 연일 너무 더워서 입맛이 없으니 자꾸만 차가운 것만 찾아서 그러는지 계속 배탈기가 있어서 오늘은 일부러 스파게티를 해먹었는데도 속이 편하질 않다. 이어지는 밀가루 세례를 감히 내 뱃속이 거부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더위와 스트레스에 심신이 지쳐버린 것일까. 그래도 확실히 국수는 식욕이 없는 와중에도 일단 입안에 넣으면 술술 잘도 넘어가니 신기하다. 말년에 이가 부실해 단단한 음식은 거의 못드셨던 우리 할머니가 유독 소면을 좋아하셨던 눈물겨운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밥먹기 귀찮은 심정으론 저녁끼니도 국수로 대충 때우면 좋겠구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일 점심때 비빔국수는 특히 맵게 비벼먹고 나면 늘어진 정신줄이 좀 팽팽해지려나. 국수 한 그릇 먹자마자 얼른 또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요즘의 나를 보면 국수가 노동자의 음식인 건 맞는 듯도 한데, 왕비마마는 무슨 죄람. 고종황제도 냉면을 즐겨먹었다는 이야기로 위로를 해드려야 할까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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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속의 가장 오래된 선풍기는 지금처럼 온통 몸체가 플라스틱이 아니라 튼튼한 철제 구조에 드르르륵 로터리식 손잡이를 돌려 20단계쯤 풍량을 조절할 수 있고, 회전조절 장치는 둥그런 날개판 뒤쪽의 목덜미에 배꼽처럼 달려 있는 것으로 아마도 상표가 <도시바>였던 것 같다. 그 선풍기는 어찌나 튼튼한지 30년쯤을 쓰고도 멀쩡했고 풍량을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 제일 느린 바람으로 틀어놓으면 밤새도록 바람을 쐬어도 문제가 없어 해마다 5월부터는 무조건 선풍기를 끼고 사셔야 하는 열혈남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당연히 110볼트 제품이라 트랜스로 감압을 해야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긴 했으나 몇년 전까지도 멀쩡히 사용했는데, 그 선풍기가 어쩌다 우리집에서 사라졌는지 그 부분이 기억에 없다. 결국 망가지고 말았었나??
여름이면 방방마다 TV와 선풍기를 각자 돌려대는 건 우리집 식구들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에어컨을 설치하고 난 뒤에도 우리집엔 선풍기가 늘 석 대는 완비되어 있었다. 에어컨은 두세 배로 뛸 전기요금을 감당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 만큼 못견디게 덥거나 동생네 식구들까지 모두 와 좁은 집에서 득시글거릴 때나 트는 물건이니까.
사라진 <도시바> 선풍기만큼 오래되진 않았어도 아직 멀쩡한 우리집 선풍기 가운데는 이제 LG로 이름을 바꾼지 오래인 <골드스타> 선풍기가 있다. 금성, 골드스타에서 LG로 이름을 바꾼 게 최소한 10년은 넘은 듯하니, 그 녀석의 수명은 그 이상이란 얘기다. 작년 여름 끝무렵에 멀쩡히 돌아가던 날개가 깨져버리는 바람에 그만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모델 번호로 LG 전자제품 AS센터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고맙게도 모델명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작년엔 그냥 날개 없는 선풍기를 잘 닦아 넣어두었고 올 여름이 시작되면서 나는 굳이 AS센터엘 가서 날개를 사다 끼웠다. 원래 여름마다 아버지는 제일 신제품이고 디자인이며 색깔도 화사한 LG 선풍기를 내방에 놓아 주셨는데, 이제 그건 왕비마마가 쓰셔야 할 것 같아 곧 골동품 반열에 들게 될 골드스타 선풍기를 내가 차지한 거다. 
그런데 이 선풍기가 요즘 들어 어째 좀 시원치를 않다. 큰 이상은 없는데 회전할 땐 멀쩡하다 고정만 시켜두면 뭔가 틱틱 걸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마감모드랍시고 몹시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런 미묘한 소리는 이상스레 내 신경을 긁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는데,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에서 뿜는 열기를 하루 열몇시간씩 견디려면 선풍기는 필수고 그렇다고 종일 에어컨을 틀자니 아침저녁으론 꽤 선선한 날씨에 나만 뭐하자는 짓인가 싶다. 
마감 스트레스 때문에라도 갑자기 확 열이 오르면 대낮엔 간간이 에어컨을 틀기도 하지만 컴퓨터 열기를 날려보내는 방향으로 고정시켜두는 선풍기의 존재는 밤낮으로 나에겐 필수적. 틱틱거리는 소음이 싫어 휘휘 회전시킨 선풍기로는 성에 안찬다는 얘기다.
하는 수 없이 어젠 또 하나의 선풍기를 꺼냈다. 망가진 <도시바> 선풍기의 대체품으로 사들였거나 어디선가 포인트 사은품으로 받은 듯한 선풍기엔 <더위사냥>이라는 제품명과 **해상 1억 배상책임보험을 자랑하는 문구가 적혀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다. 산지 몇년 된 듯하지만 여전히 새것처럼 말끔해 보여 반색을 하며 선풍기를 작동시켰더니...
ㅋㅋㅋ 미풍 버튼을 누르면 날개가 용을 쓰듯 천천히 돌아가며 시동을 걸다가 한참이 지나야 제 속도를 내며 돌아간다. 거의 종일 틀어놓고 있으니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는 이 선풍기 갑자기 서버리면 어쩐다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예전엔 모든 전자제품을 수리해주는 <전파상>이 동네마다 있었지만 요샌 웬만한 전자제품 AS는 모두 자체 회사가 운영하는 곳에서 담당하니 <전파상>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 이렇게 이름 없는 회사에서 만든 전자제품은 어디에서 수리를 하라고? 싼맛에 사서 쓰다 고장나면 버리는 1회용이란 뜻인가?
틱틱 소리를 내는 <골드스타> 선풍기는 아마도 LG AS센터에 가면 수리를 받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대형 가전과 달리 선풍기는 들고 가서 수리를 받아야한다는 난점이 있어 과연 내가 그런 수고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집안내력상 아마도 쉬이 내다버리진 못할 거다. 최소한 회전으로 틀어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볼 수도 있고, 오래된 물건엔 어쩐지 이런저런 역사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선뜻 내다버리지 못하는 성향은 나의 우유부단함과 함께 혈통에 잠재된 DNA의 결과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식구가 30년 가까이 이 좁은 집에서 오래된 짐을 그대로 껴안은 채 살고 있지 않았겠지.
생각해보니 오래된 추억의 <도시바> 선풍기가 30년 넘게 여름을 지켰던 데는 솜씨 좋은 아버지와 전파상 아저씨의 거듭되는 손질이 주효했던 것 같다. 누렇게 변한 전선과 플러그 연결부분에 검은 테이프가 감겨 있던 게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다. 드르르륵 둥근 손잡이를 오래 돌려야하는 그 <도시바> 선풍기가 여름마다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걸 창피하게 여기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나마 제일 오래된 <골드스타>가 완전히 고장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다. 겉보기엔 아직 멀쩡한데... 아직 10년은 더 쓸 수 있겠는데... 그러면서. 
노인들이 오래된 물건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건 자신의 처지를 물건에 투사하기 때문이란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망가지고 생채기 나 쓸모 없어지게 되어 외면받는 물건에서 늙고 병들어 가는 자신들의 종말을 바라보기 때문에 어떻게든 고쳐 쓰고 싶어 하거나, 그냥 끌어안고 산다는 의미다. 
나는 옛날부터 오래된 물건을 못 버리는 사람이었고 아직도 낡은 물건의 처지에 스스로를 투사할 만큼 늙은 건 아닌데도 어쩐지 이렇게 나이들어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오래 된 선풍기 하나 때문에 이렇게 구질구질 시시콜콜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만 봐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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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추억

추억주머니 2009. 6. 11. 18:11

춘천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과 동경의 장소다. 김현철의 노래 <춘천가는 기차>가 나오기도 훨씬 전인 고3 여름방학때, 두 친구와 작당하여 아침부터 이어지는 따분한 자율학습을 과감히 제끼고 난생 처음 춘천행 기차에 올랐었다. 그 전에는 땡땡이라고 해봤자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떡볶이를 사먹는다든지 조금 일찍 달아나는 정도였을 뿐, 하루를 온전히 빼먹는 땡땡이는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전날부터 몹시 마음이 설렜다. 청량리역에서 만나 일단 성북역까지 가서는 거기서 춘천행 기차를 타야했는데, 두어시간 남짓한 그곳이 나에겐 마치 한반도 끝에 있는 부산만큼이나 심정적으로 먼 곳이라 생각되어 대단히 짜릿한 일탈로 여겨졌다. 이미 아는 오빠를 따라 춘천에 몇번 다녀본 전적이 있는 친구의 안내대로, 춘천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간 공지천 주변을 거닐다 호숫가에 서 있는 <이디오피아>라는 카페에서 볶음밥과 빙수를 먹은 뒤 돌아오는 기차를 탄 것이 여행의 전부였지만, 우리 셋은 너무도 행복했다.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남한강과 북한강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웠고, 완행열차에서 사먹은 삶은달걀도 감동의 맛이었다.
그날의 추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와 친구들은 남은 학기 내내 두고두고 춘천 기차여행 이야기를 되뇌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서 졸업 전에 다시 춘천으로 이별여행을 떠났다. 진학을 하든 재수를 하든 단짝 친구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서글퍼하면서. 두번째 춘천 여행에선 꽝꽝 얼어붙은 소양강댐에도 구경했고, 새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린 공지천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열여덟살이던 당시 춘천은 나에게 짜릿한 일탈의 공간이었고,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 내가 홀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고, 여러가지 매력 넘치는 기차여행을 누릴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춘천 기차여행을 큰 자랑거리로 떠벌였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경한 친구들에게 겨우 두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춘천은 일탈의 장소이긴커녕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다녀오거나 매일 통학할 수도 있는 지척의 도시였다. +_+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친구 하나가 동조해주는 바람에 눈이 펑펑내리던 어느날 충동적으로 다시 춘천행 기차를 탔던 날, 우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버스가 올라가지 못하는 소양댐을 굳이 걸어서 올라갔고 언 손을 호호 불며 맛없고 쓴 커피를 마시면서도 행복했다. 그날 처음 춘천 닭갈비라는 것을 먹어보았는데, 종일 눈에 젖어 덜덜 떨다가 들어가 먹어본 그 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년에 한번씩 춘천엘 간 적은 있지만 죄다 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춘천가는 기차>가 상징하는 춘천여행의 묘미와 추억을 더는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사라져버렸어도 언제고 한번 꼭 기차를 타고 춘천엘 가봐야지 막연하게 마음은 먹었지만, 강원도 여행길에 일부러 들르지 않는 한 춘천 자체를 찾아갈 일도 아예 없는 편이어서 춘천은 점점 내 추억의 창고에서도 깊숙한 구석쪽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낭보가 들려왔다. 판화가인 막내고모가 춘천에서 열리는 강원아트페어에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었다. 기차여행은 못하겠지만 간만에 춘천 땅도 밟아보고 고모 그림도 보고 닭갈비도 먹고 일석삼조, 일타삼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지난 7일, 왕비마마를 모시고 춘천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당연히 설레고 들떴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가는 길에 가평 찰옥수수도 사먹을 생각을 하면, 막히는 길쯤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왕비마마와 공주 일행이 납시었는줄 온 세상이 알았는지 전날엔 미치도록 막혀 되돌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는 춘천행 국도도 뻥 뚫려 오히려 병목현상이 나타나는 곳마다 서 있는 옥수수 장수들을 만나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뜨겁고 매운 닭갈비를 먹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이번 춘천 여행에선 정말로 눈과 입과 위 모두 흐뭇하게 대접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도 가끔 닭갈비를 사먹긴 하지만, 역시 닭갈비는 춘천에 가서 먹어야 제맛이란 진리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또 언제 춘천엘 가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일탈의 공간이었던 춘천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동반하고 간 이번 여행의 의미는 또 다른 추억의 겹으로 남아 돌이킬 때마다 흐뭇할 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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