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배신

투덜일기 2010. 2. 18. 02:01

어설픈 나의 기억력 탓도 있긴 하겠지만 어려서 읽었던 동화의 줄거리가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더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괜한 배신감에 젖는다. 최근의 창작동화는 정확하게 어린이 독자를 겨냥해 쓰인 문학이지만, 옛날이야기로 내려오는 전통설화나 구전문학은 딱히 아동용이 아니었으므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땐 일부 내용이 각색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50권짜리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 따위에 들어 있었으니 당연히 동화라고 내가 믿었던 작품들이 실제로는 상당히 진지한 문학작품이었음을 알게 되더라도 배신감은 여전하다.

하기야 내가 어렸을 때 출간된 번역문학은 죄다 일본 출판사들이 각색해서 낸 책의 중역본이었으므로 일차로 일본 아동 출판사에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각색 및 편집하고 또 이차로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다듬으며 내용이 원전과 꽤 많이 멀어진 게 당연할 것이다. 어쨌거나 신랄한 풍자문학이었던 <걸리버 여행기> 같은 작품을 어린시절 그냥 환상적이고 신나는 모험 동화로 읽었던 나는 나중에 한참 유행하던 완역판으로 다시 보며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종일관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던지. 

소설이야 그렇다 쳐도, 안데르센 동화집, 그림 동화집에 들어있던 동화마저도 내가 읽은 내용이 원전과는 조금씩 달랐단 걸 비교적 최근에 알았을 땐 불쑥 이게 뭐야, 하는 억울함마저 들 정도였다. 가령, 인어공주의 결말은 사랑을 잃은 슬픔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번역을 의뢰받고 새삼 작업을 하다가 인어공주의 끄트머리에서 낯선 결말을 만났을 때 나는 하도 의아해서 비교적 어린 친구들에게 설문을 해볼 정도였다. 나랑 띠동갑 이상 되는 사람들은 혹시 물거품 이후의 결말을 알고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헌데 너무 어린 친구들은 이미 명작동화 세대가 아니라 창작동화 세대였던지, 물거품 결말도 아니고 왕자의 무지를 일깨우고 악한 마녀를 무찔러 사랑을 이루는 디즈니 만화의 해피엔딩만 알고 있었으며, 그 외엔 하나같이 물거품이 되는 것으로 기억했다.

동화치고 슬픈 결말이라 어린시절 내 눈물을 쏙 뺐던 인어공주 이야기는 솔직히 물거품으로 스러지는 결말이 가장 극적이라고 느껴지기에, 과거 동화책을 만든 사람들이 거기까지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원래 그렇게 끝내질 않았다는데 어쩌겠나 말이다. 원래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된 뒤에 다시 공기의 정령이 되어 삼백 년이나 인간 세상을 떠돌 운명이다. 원래 불멸의 영혼이 없는 인어는 인간의 사랑을 얻어야 불멸의 영혼을 지닐 수가 있는데, 일단 사랑에 실패를 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삼백년간 인간 세상을 떠돌면서 착한 일을 해야 천국에 갈 수가 있다나. -_-;


어려서 나는 안데르센 동화 가운데 <인어공주>를 제일 좋아했고, <빨간 구두>를 제일 싫어했는데 알고보니 결론은 다 똑같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너무도 당연했던 그 시대에 뭘 더 바라겠냐만 그래도 제 분수를 모르고 허황된 꿈을 꿨던 소녀들은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른 뒤 깊이 회개하고 나서야 천국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판국이니 우리 세대가 필독도서로 읽던 <고전 명작 동화>가 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 같은 편견을 주입시킨다는 이유로 점점 퇴출되는 반면 요즘 아이들에겐 창작동화가 훨씬 더 많이 읽히는 게 당연하다. 부모가 자식을 갖다 버려 간접 살해를 시도하질 않나, 식인마녀가 등장하질 않나 결국엔 아이들이 마녀를 끓는 물에 빠뜨려 죽이는<헨젤과 그레텔>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잔혹한 이야기인가 말이다. 그림형제의 동화는 특히 민담을 수집해 엮은 게 많아서 은근히 잔혹동화가 많단다. 

내가 어린시절 동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어떤 역경에도 결국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결말 때문이었고, 그런 기대를 저버리는 <성냥팔이 소녀>나 <인어공주> <거인의 정원> 같은 비극은 어린 마음에도 배신감과 낯설음에 막막했지만 나름의 감동으로 소녀의 감수성을 키웠던 듯하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결말도 아니더라는 상황은 더 큰 배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더는 몰랑몰랑해질 수 없는 메마른 어른의 심장에 그나마 간직된 아련한 추억을 새삼 빼앗기는 기분이랄까.

같은 작품도 나이에 따라 느낌과 감동이 달라지므로 중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 특히 고전작품은 다시 읽어보고 싶은 게 꽤 많지만 앞으로도 명작동화는 웬만하면 거들떠보지 않을 작정이다. 동화는 그 옛날 내 마음대로 재구성을 했든 말든 그냥 그 감동 그대로만 기억에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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