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2.04.06 건축학개론 12
  2. 2012.03.24 영화 혹은 극장의 기억 5
  3. 2012.03.06 윌리 로니스 - 그날들 13
  4. 2012.01.20 옛날 이야기 6
  5. 2011.12.09 밥짓기 9
  6. 2011.09.22 오래된 물건 12
  7. 2011.09.20 뮤지컬 <친정엄마> 14
  8. 2011.08.15 탱고의 추억 12
  9. 2011.06.22 오르세미술관 전 11
  10. 2011.05.20 파란 대야 13

건축학개론

놀잇감 2012. 4. 6. 13:07

*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에 대해서 들었을 때 나는 한가인/엄태웅 조합보다도 배수지/이 제훈 조합에 훨씬 더 관심이 갔다. 나 역시 <파수꾼>에서 기태 이제훈을 보며 앞으로 주목할 만한 괜찮은 배우 하나를 얻었군 하며 흐뭇했었고, 수많은 아이돌 걸그룹에 대해선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면서 유일하게 알고 예뻐하는 아이가 '수지'다. 엄청 공들여 만져놓은 듯한 인공미 소녀들의 물결 속에서 수지양은  자연스러운데도 맑갛게 빛나며 예쁜 느낌! 한가인의 미모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열아홉살 수지와 비교하니 확실히 광채가 다른 것 같았다. 물론 빛나는 청춘을 그려난 과거의 화면이 현실에 찌든 현실의 모습보다 당연히 환하고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멜로 영화는 여주인공이 예뻐야 보기 뿌듯한 이 불편한 진실.. -_-;

영화를 보기 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포스터의 저 카피 대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쌍년/놈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이웃 어느분의 의견에 빵 터져 킥킥댔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역시 그 말이 진리였다. 감정에 서툴고 사소한 것으로 오해하고 자격지심과 자존심 앞세우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찌질하게 먼저 상처 주는 쪽을 택했던 청춘 한때를 그 말만큼 잘 찝어낸 말이 또 있을라고!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나도 분명 '쌍년' 짓을 했다는 건 잘 안다. 영화처럼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재회는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 만났을 때 진짜로 왜 그랬냐고 나더러 따지더라. ㅋㅋㅋ  

수지와 이제훈에 대해선 이유없이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던 반면, 엄태웅과 한가인에겐 우려의 시선을 품고 있었는데 퍽 괜찮았다. CF속의 한가인이 그간 예뻐서 좋긴 해도 연기하는 걸 제대로 본적이 한번도 없다가 <해를 품은 달>에서 보며 얼마나 아쉬웠는지. "연우 역할을 문근영이 했으면 얼마나 좋아!"라는 탄식을 수도없이 내뱉을 만큼 김수현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연기도 참 못했다(상대적으로 김수현과 아역 김유정 양이 사극 연기를 너무 잘한 걸수도 ^^;). 역시나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는지, '제주도 학원출신' 음대생이지만 피아노는 지긋지긋하고 아나운서가 돼 돈을 잘 버는 게 꿈이었으나 결국엔 의사 부인이었다가 술마시고 쌍욕도 마구 하는 이혼녀가 된 서연의 옷은 한가인에게 퍽 잘 어울렸다. 세상풍파는 혼자 다 겪은 듯 외모도 성격도 확~ 변해버린 승민(이제훈이 나이든다고 어떻게 엄태웅이 되느냐고!)을 수긍하는 건 약간 더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는 뭐 그랬다 치고! 보는 것이 극의 묘미이니 꼬치꼬치 따질 수야 없다.

감독이 꽤나 오래 준비하고 다듬은 대본이라더니 가끔 가슴을 툭 떨어뜨리거나, 참 기발하다고 킥킥대게 만드는 대사가 꽤 많았다. 알탕, 대구탕과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매운탕'도 그렇고, '싱숭이생숭이', '우루사'도 그렇고... (그런데 일주일도 안 돼서 벌써 다 까먹었으니 원;;) 하여간 근래 보기 드문 최고의 조연 캐릭터 '납뜩이' 조정석이 한 말과 행동들은 죄다 인상적이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이제훈한테서 <파수꾼>의 기태 그림자를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특히 택시기사한테 대신 화풀이하는 장면 ㅠ.ㅠ) 그에게 납뜩이 같은 솔직하고 좋은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까지 여겼다. 물론 여기서 이제훈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는 건축학과 새내기 승민이었는데, 미련한 내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는 뜻이다. -_-;

서울이란 도시는 고향이라 여기기 좀 뭣한 공간이지만 그래도 나고 자란 곳이다보니 서울에서도 낯익은 지명이 영화 배경으로 등장하면 엄청 반갑고 정겹다. 전도연 하정우 나왔던 <멋진 하루>도 그래서 더 좋은 영화로 기억된 듯한데, 이 영화에서도 '정릉' 때문에 호감이 배가됐다. 살아본 적은 없어도 그 동네 사는 친구들이 엄청 많아 나 역시 개포동-정릉간 그 버스를 갈아 타고서 자주 놀러다녔고, 누구의 묘인지 아직도 헷갈리는 '정릉'엔 중1때 소풍을 갔었다. 소풍 장소가 발표되자 당시 정릉 친구들은 아우성을 쳐댔다. 국민학교 6년 내내 정릉으로 소풍 다녔는데 중학교에 와서도 또 거길 소풍으로 가야하느냐고! 그리고 건축학개론 첫 시간엔가 서연과 승민이가 지도에 빨간펜으로 그리던 길 위에 현재 내가 사는 집도 있다. 아니, 내부순환로가 개통된지 오래지만 북악터널을 지나 구불구불 신촌으로 이어지는 그 옛길은 요새도 내가 걸핏하면 지나다니는 길이다. 나와 별 상관도 없는 그 설정에 괜스레 흐뭇했던 이유는 역시나 강북인의 정서였을까?   

내가 건축을 해볼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건축과는 이과잖아! 난 수학 못해! 뭐 이런 원초적인 한계;;) 건축하는 사람에 대한 로망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막상 그들 일하는 얘기 들어보면 처음엔 엄청난 박봉에 노상 밤샘에, 건축주와의 신경전에 끔찍한 직업이 따로 없다 싶지만 그래도 '집'과 '건물'을 어느틈에 뚝딱(은 결코 아니겠으나;;) 만들어내는 일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멋진가! 게다가 영화에 그 과정이 나오는 건축의 배경은 심지어 제주도다. 한옥열망과 더불어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열망 또한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영화 보는 내내 막 부럽다가 막판엔 심술이 났다. 그러니깐, 제주도에 저 정도 집 짓고 살려면 예쁜 외모로 의사랑 결혼했다가 위자료 엄청 받고 이혼해야 되는 건가? 아니지, 그 전에 일단 제주도에 물려받을 땅과 집이 있어야 하는 거네! 흑... 비뚤어진 심보로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제주도 바닷가에 옛집과 추억을 최대한 살려 지은 집은 참 아름답고 마음에 들었다. 확 터를 갈아엎고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서 더 애틋했던 것 같다. 인생 역시 깡그리 갈아엎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불가능지만, 서연과 승민 역시 과거의 기억을 가지런히 잘 정돈했으니 그 집처럼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납뜩이 때문에 대체로 깔깔 웃다가 영화관을 나왔는데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 때문인지 덩달아 환기된 청춘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조용히 빗속을 걸으며 조금 슬펐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가 좋았지' 싶었던 부분도 확실히 더러 있긴 하다. 엄청 잘 만든 수작이 아님에도 이렇게 인기몰이를 하는 건 다들 영화의 틈을 각자의 추억으로 메우기 때문인 듯. 암튼 이 영화 때문에 새삼 봄을 앓는 주변의 중년들이 몇몇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들에겐 이 영화가 싱숭이생숭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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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주민들이 연달아 올린 글을 보며 나도 트랙백하고 싶다 생각은 하면서도 일단 대체로 기억이 가물가물 또렷하게 생각나는 게 드물었다.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멘붕'상태에 가까운 마감스트레스 때문에 뭔가 끼적일 마음의 여유도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쓸데없는 곳에 집착하는 나의 뒤끝성향 탓에 틈만 나면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자꾸만 더듬고 있질 않겠나... 난생 처음 혼자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대체 뭐더라.. 뭐더라.. 이러면서. +_+ 아직도 통 기억을 붙들어내지 못한 항목이 많지만 일단 포스팅 하고 나면 오히려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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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폴더를 슬쩍 훑어보니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만한 독서후기보다는 그저 감상에 치우친 책자랑이 많다. 책읽기에 대한 내공과 역량이 그것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이번에도 후기보다는 책자랑 또 한판.

사진집은 워낙 비싸서 잘 안사게 되는데 작년말쯤에 나온 윌리 로니스의 이 책은 괜스레 갖고 싶었다. 순전히 바게트 빵 들고 뛰어가는 저 아이 사진이 표지라서 그랬던 것 같다. 오래 전 전시회 다녀와서 흑백사진을 추억하며 막내동생 사진이랑 비교해 올렸던 바로 그 사진이다.
게다가 이 책은 그냥 사진집이 아니라 사진을 찍은 '그날'에 대한 뒷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했다. 원제는 <Ce jour-là>, 부제가 '내 작은 삶의 기적: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이다.

찾아보니 전시를 보러간건 2007년이었고 사진작가는 2009년에 작고했단다. 1910년에 태어나 무려 아흔아홉살.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해 태어났건만 14년을 더 살았다. 근대와 현대를 모두 경험한 이에 대한 선망일까, 수많은 <결정적 순간>을 선보인 앙리-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도 좋고, 같은 말이라 생각되는 <정확한 순간>을 담은 윌리 로니스의 사진도 좋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오래전 전시회때 본 사진들은 책에 별로 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내가 마음대로 로니스의 아들 뱅상이라 짐작했던, 저 <작은 파리지앵> 사진을 포함해 두어 장만 낯이 익었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바스티유의 연인> 사진도 없다. 그 대신 같은 날  찍은 <바스티유 기념탑의 그림자>가 들어있는 식이다. 60장쯤 되는 사진과 그 뒷이야기가 짤막하게 담겨 분량은 18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읽을 거리가 좀 더 많기를 바랐으나, 사실 사진은 구구절절 설명을 듣기보다 보는 사람의 인상과 느낌이 더 중요하므로 이야기가 짧아 사진이 더 돋보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사진이 더 많았다면 가격도 훨씬 더 비싸졌겠지!

가능하면 연출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순간을 포착하거나 기다렸다가 일상을 잡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작가도, 저 빵소년 사진은 연출한 거란다. 빵집 앞에 할머니와 줄 서 있는 저 아이를 보고 부탁해 '세번이나' 달리게 했다는 사연. 우연히 맞닥뜨려 포착한 사진들은 확실히 조금 흔들려 초점이 흐려지기도 했던데, 저 바게트 빵소년 사진은 정말 거의 완벽해보인다.

두고두고 찬찬히 보고 읽을 심산으로 산 책인데, 택배상자 열다가 그 자리에 앉아 다 읽고 말았다. 사진도 좋지만 간결한 단상과 사연을 적은 담백한 글도 좋다. 요즘 부쩍 '세상은 불공평해! 뭔가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해!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잘 다루고!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이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아!'라고 투덜대는 일이 잦아졌다. 이 책을 보고서도 하이고, 바흐를 몹시도 좋아했다는 이 아저씨 '사진도 잘 찍지만 글도 잘쓰네' 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_-;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어떤 사진이든 그냥 그 상황의 인상에 다른다. 내 순간성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위치만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시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p30)

"사실, 내 사진 인생을 통틀어 내가 가장 붙잡고 싶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은 내가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나에게 이야기해줄 줄 안다. 내 시선을, 내 감성을 표현해주는 것이다. 사진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p91-92)

으음... 혹시나 저작권법 위반 어쩌구 할까봐, 그리도 또 좀 퍼오기 귀찮아서 사진 없이 글만 인용하려니 느낌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군. 암튼, 새하얀 설경을 어스름에 찍어놓은 것 같은 소박한 흑백사진과 글들이 참 어울리는 책이다. 서늘한 느낌과 따뜻함이 공존한다고나 할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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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추억주머니 2012. 1. 20. 21:53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전해 해주시던 이야기들이 나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방되던 해와 그 이듬해 이북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만주 생활을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90년대까지 사신 두분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개인의 역사로 지니고 계셨다. 물론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다 그러했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기운이 장사라 단오날 씨름대회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는 이야기, 할머니가 꽃가마 타고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오던 이야기, 손기정 옹이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뜀박질을 정말 잘해서 노상 심부름을 시켜먹었다는 이야기, 만주에서 여각하며 돈을 막 궤짝으로 벌어들였는데 밤마다 돈 세기가 싫어 큰고모 둘이 서로 미뤘다는 이야기,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다른 사람들처럼 집 살 생각은 안하고 곧 고향 돌아갈 거라 여겨 그 많은 식구가 여관에서 지내며 갖고 온 돈을 다 탕진했다는 이야기, 결국 평생 한량으로 사신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광주리 이고 나가 생선장수를 하며 생계를 꾸렸던 고생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신 덕분에 서른살 무렵까지 두분의 옛날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으며 나는 우리 조부님 세대가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다. 두분 역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열살 무렵 전쟁통에 피난살이 했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라디오와 전축에 이어 흑백TV와 컬러TV, 자동차, 컴퓨터 따위의 등장을 지켜보셨다. 젊어선 지금은 사라진 전차를 타고 다니며 통학 및 데이트를 했다고 하고, 서울이라도 동네가 높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부모님은 결혼 이후에도 한참 물을 지게로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또 울 엄만 공병호 타자기라나 뭐라나 해서, 국내에서 최초의 국가공인 타이피스트 자격증을 딴 몇 명에 속한 덕분에 일터에서 콧대높은 '미쓰 리'로 불리며 그 옛날 출산휴가와 복직을 거듭하며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10년도 넘게 검찰청엘 근무했다고 들었다. 타이피스트들이 서류를 타이핑해주지 않으면 사건을 못넘긴다나 뭐라나. 그때 엄마의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위쪽에 '후까시'를 잔뜩 넣어 부풀리고 아랫머리를 밖이나 안으로 살짝 꼬부려 '고데'(일명 '소도마끼'라고 하던가?-_-;)를 한 모습이다. 그땐 일주일에 한번 머리를 감고 월요일 아침 일찍 미장원엘 가서 그 머리를 하고는 얌전히 자면서 일주일을 버텼다나! 

엄마는 옛날부터 TV를 보다가는 뉴스에 얼굴을 비치는 유명 정치인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그때는 '새파란 검사보'였다는 둥, '부장검사'였다는 둥 알은체를 했다. 막내 낳고 퇴직을 했으니 일을 관둔지가 4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그때 검찰청 동료 아줌마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만난다.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국가정책을 무시하고 셋이나 애를 낳았다며 주변의 눈치를 꽤나 받았다는데, 엄마는 막내를 낳아 아들이 둘 되니까 그제야 마음이 턱 놓이더라고 했다. 이왕 산아제한 정책 무시한 거 딸 하나 더 낳지 그랬느냐고,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계속 툴툴댔다. 아들들은 다 소용없고(!) 딸 하나는 너무 불리해!

실제로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형제들이 대부분 많아서 보통 네다섯은 되었다. 제 밥 그릇은 지가 알아서 쥐고 태어난다면서. 그런 친구들 집에 가보면 우리 할머니가 내 이름 부를 때 고모들 이름을 먼저 두어번 부르고 나서야 성공하듯, 친구네 엄마도 자식들 이름을 부를 때 몇번씩 헷갈려했다. 울 엄만 그러는 일 없던데. 어쨌든 얼마전 <무한도전>에서 추억의 골목놀이가 종류별로 나오며, 맨 마지막에 엄마들이 저녁밥 먹으라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들여가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짠했다. 요즘엔 그렇게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엄마들이 골목어귀에서 "OO야 밥먹어라!"고 소리치며 아이를 찾는 일도 더는 없으니 말이다. 대신에 학원 간 아이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뿐...

더불어 내 나이와 역사도 만만칠 않음을 느낀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은 거의 흑백사진이다가 열살 무렵에야 겨우 컬러사진이 등장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리. 그뿐인가, 나도 동네를 돌아다니던 물지게, 똥지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고 ㅠ.ㅠ 나무로 짜인 장식장에 들어 양쪽으로 문을 드르륵 열게 되어 있던 흑백TV가 집에 생겨나, 학기초 <가정생활환경 조사서>에 드디어 '텔레비죤' 항목에 표시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누런 육성회비 봉투의 추억이 없나, 교복자율화 세대라서 사복입고 고등학교엘 다닌 경험이 없나, 7,8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 ㅠ.ㅠ 대학시절 좀 깨어 있는 친구들은 교양과목으로 컴퓨터 기초를 수강했지만, 나는 거금주고 산 <클로버> 타자기만 믿고 신기술을 외면했다. 먹끈이 돌아가고 자판을 아주 세게 쳐야 글씨가 새겨지는 수동 타자기만 사용해보다가, 회사에 취직해 처음 전동타자기를 접하고는 너무 힘주어 치는 바람에 한번에 알파벳이 세개씩 다다다 쳐져서 당황했던 건 또 어떻고! 사무실에 컴퓨터가 등장한 건 두번째 회사로 옮긴 이후였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나는 주로 수십 종류의 서류양식 인쇄물에 기안서, 보고서, 영업계획서 따위를 손글씨로 쓰느라 끙끙대야 했다.
 
컴퓨터에 그나마 좀 익숙해진 건 90년대 중반이었던 직장생활 막바지. 개통하는데만 당시 돈 150만원쯤 들었던 무전기 만한 모터로라 휴대폰과 '임원진' 자동차에만 부착되어 있던 카폰을 신기해하던 나도 그 무렵 공중전화 옆에서만 통화가 되는 <시티폰>을 거쳐 PCS폰을 개통했다. 그때부터 썼던 번호를 3년전까지도 고수했으니 참 놀랍다. 그간 바꾼 핸드폰은 또 몇개나 될까. +_+ 아주 어릴 땐 집에 전화도 없어서 10원짜리 챙겨들고 공중전화 걸러 나가 까치발을 들고 다이얼을 돌렸는데, 이젠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다. 아버지 학교로 전화를 걸면 친절한 교환수 언니들이 자리 비운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어떻게든 연결해주었고, 교복 입고 놀러가면 아버지가 교환실에 넣어놓고 퇴근시간까지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면 교환수 언니들은 간식으로 중국집에서 군만두랑 잡채밥을 시켜주었는데, 그 때 먹은 잡채밥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잡채밥은 중국집 음식에 대한 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 극장 간판화가, 버스 차장과 더불어 교환수도 이젠 오래전에 사라진 직업이다.

이웃 블로그에서 공포 영화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 땐 골목 담벼락에 주르륵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포영화는 예고편도 못보는 겁쟁이라,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글씨체로 쓰인 <캐리>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는 골목은 잘 지나지도 못했다. 방학이면 꼭 종로에 데려가 <로보트 태권브이> <똘이장군> <칠칠단의 비밀>따위의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시던 삼촌 덕분에 나의 형제들은 꽤 어려서부터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 스카라, 국도, 대한 극장 같은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외화의 등장인물까지도 거의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극장 간판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시내 개봉관 극장간판은 참으로 사실적인데, 동네 3류극장 쯤 되면 배우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장간판 그림의 질이 달랐던 것도 기억난다. 오랜 독재 끝에 총맞아 죽은 대통령과 계엄령을 겪은 것이 중학생 때이니 참 나도 오래 살았구나 싶어 입만 열면 자꾸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꼰대스럽게도 아, 옛날엔 말이지... 그러면서. @.,@

굳이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민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냥 지난 이야기 회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아직 어린 조카들도 자신의 '옛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 너 어릴 때 이러저러했노라고 걔들은 기억도 못하는 아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또, 또, 또... 그러면서 자꾸 옛날 이야기를 들춘다. 생각해보니, 어떤 시대를 살든 어느 세대에 속하든 인간의 수명이 워낙 길어 평생 따져보면 누구나 드라마틱한 삶과 역사를 겪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내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월간지를 보던 시절 21세기엔 쉽사리 우주여행을 다니고 다른 행성의 우주인과 교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 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조카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그만큼 변해 나중엔 오늘의 현실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회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남은 생엔 또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남은 날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팔팔한 순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중년은 중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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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짓기

투덜일기 2011. 12. 9. 21:05

쿠쿠밥솥이 고장났다. 쌀이 안익는 건 아닌데, 수증기가 다 옆으로 새는 바람에 푸실푸실 끈기없는 낱알 같은 밥을 만들어냈다. 2년전에도 겪어본 일이라 AS 신청을 해 패킹을 갈아야겠군, 의연하게 중얼거리고는 실로 간만에 냄비 밥짓기에 도전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또 쿠쿠밥솥에 쌀을 앉혀 한번 더 끈기없는 밥을 먹으면 좋겠건만, 왕비마마가 별로 어렵지 않다며 냄비밥을 명했기 때문이다. (아 그러면 엄마가 직접 하시든지! +_+ 아마 엄마도 냄비밥을 지어본 건 20-30년을 넘기지 않았을까. 쳇)

백미, 현미, 흑미, 서리태, 보리, 기장쌀, 율무까지 죄다 쌀독에 섞어놓은 잡곡인지라, 제일 바닥이 두툼한 냄비에 쌀을 씻어 앉히고 (까마득한 옛날 놀러가서 코펠에 밥할 때 압력솥보다 밥물 넉넉히 두던 걸 떠올려가며) 밤새 두었다가 무려 다섯시반에 일어나 '새벽밥'을 지었다. 한시간 내 곁에 붙어서서 불조절을 한 덕분에 태우진 않았지만 결과는 젠장, 죽밥이었다. 삼층밥, 꼬두밥보다는 그래도 진밥이 낫지 홀로 위로하며 상전(?)에게 새벽밥을 해먹이고 나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취사예약 버튼 눌러놓고 잊어버리면 그만인 쿠쿠밥솥의 힘과 편리함이 실로 대단한 것이었구나. 보온밥통이 있거나 없거나 옛날 엄마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솥이나 냄비에 밥을 짓고 도시락까지 몇개씩 싸주었는데, 그 고된 노동을 최소 십수년씩 어떻게 견뎠을까. 내 경우 아버지가 보온밥통에 들었던 헌밥을 드시고 출근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도시락에 누렇게 변색된 헌밥을 싸간 적은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이야 해놓은 밥 금세 얼렸다가 전자렌지에 돌리면 새밥처럼 되살아날 뿐만 아니라, 종류별로 햇반도 나오는 시절이지만(그나마도 급식을 하니 특별한 날 아니고선 도시락 쌀 일도 없겠다만;;), 옛날엔 정말로 새벽마다 부엌에서 솔솔 풍겨오는 밥짓는 냄새를 맡으며 어렴풋한 아침 잠에서 깨어나곤 했던 것 같다. 

하기야 엄마가 새벽밥을 지어주면 뭐하나. 중학생 때까지는 꼬박꼬박 밥상에 둘러앉아 다같이 아침밥을 먹었지만, 등교시간이 훨 빨라진 고등학생 때부턴 밥보다 잠이 더 중요하다며 아침을 거르는 대신 5분, 10분 더 자는 쪽을 택했었다. 정 배고프면 학교 올라가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꼬마김밥이나 못난이 만두를 사먹거나, 2교시 끝나고 도시락 까먹기를 해도 된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엄마는 그래도 집밥이 최고라며 집에서 들기름 발라 재고 구운 김(사실 당시 김 재는 담당은 바로 나였다 뭐;;)에 싼 밥덩이 몇개를 접시에 담아 헐레벌떡 등교준비를 하는 내방에 가져다주며 눈을 흘겼었다. 그렇면 또 난 옷 갈아입고 책가방 싸면서 희희낙락 낼름낼름 주워먹었으니 참 얄밉기도 했겠다.

어쨌거나 밥솥은 AS를 신청해 해결했으므로 난데없는 냄비밥 짓기는 한번으로 끝인데, 냄비 하나 가득 만들어놓은 죽밥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 그나마 위안은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밥에 물 부어 끓여먹으면 퍽 맛있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계속 전기압력밥솥만 쓰면서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 수도 없어 그게 아쉬웠는데, 뜻밖의 고장으로 약간의 삽질과 고생은 있었지만 얻는 것도 있긴 하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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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

추억주머니 2011. 9. 22. 17:07

어제 만난 친구에게 이사를 가긴 가야겠는데 집을 팔고 사는 문제도 두렵지만 일단은 30년 가까이 된 두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또 다시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몰래몰래 버리란다. 노친네들이야 워낙 오래된 물건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못버리게 하는 게 당연하므로 엄마 안 계실 적에 스리살짝. 그래야 하는 것이었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신은 없다. 오래된 물건 못버리는 '지병'은 (이웃 주민 '쌘'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좀 심각한 걸 알기 때문이다. 

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산 책 <나의 고릿젓 몽블랑 만년필>은 막상 읽어보니 내가 워낙 클래식 음악에 무지한 탓에 3분의 1 이상은 뭔소린지도 몰라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고,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젠체하는 느낌이 드는 시인의 글이라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찍은 오래된 독일물건들 사진을 보는 건 참 좋았다. 런던에서 수학선생님을 하고 계시는 런던아줌마님은 물건 함부로 안 버리고 죄다 껴안고 사는 습관을 '영국병'이라고 칭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래된 물건 절대 안버리고 소중히 간직하는 태도는 유럽인들의 공통적인 특색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치르고도 변함없이 간직된 수많은 골동품들이 유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몇백년 전의 식료품 거래 영수증이나, 사적인 편지까지도. 유럽치고 벼룩시장 유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 말이다. 하다못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야드 세일'이나 '거라지 세일'을 하는 판국에...
 
오래된 물건을 못/안버리는 습관은 어쩌면 근대의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새로운 것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 확확 세상이 바뀌던 때라 과거에 대한 향수가 특히나 진했던 게 아닐까. 신문지도 함부로 안버리시던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맞는 것 같은데, 세대를 거쳐 우리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그런 성향이 이어진 이유는 역시 알쏭달쏭하다. 내 경우는 단지 좀 우유부단하고 청승맞아서 과거에 얽매이는 듯도 하고. 

하여튼 독일 벼룩시장에서 지은이가 득템한 골동품들 사진을 보며 희희낙락하다가 제일 정겨웠던 건 몽당 연필과 색연필이 든 파버카스텔 필
통이었다. 같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나도 최소 30년 된 스테들러 색연필 갖고 있다규!
전에도 어딘가 쓴 것 같은데 중학교 때 고모부가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을 나는 아끼느라 1, 2년간은 계속 구경만 했었고 드디어 사용한 계기는 손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고등학교 올라가선 친구들과 워낙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으므로 색연필로 편지지를 꾸미기도 했고, 예쁜 편지지에 좋은 글귀 적어서 코팅해 선물하는 유행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 색을 달리해 시를 베껴적는 정성을 들인 기억도 있다. 그렇게 드문드문 십수년간 사용했어도 좀체 닳을 일이 없었던 색연필을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건 역시나 조카의 탄생 이후의 일이었다. 벽지 낙서를 거쳐 드디어 스케치북과 이면지에 작품을 그려주기 시작한 정민공주의 그림활동에 흐뭇해, 색연필이 막 부러져 하루에도 몇번번씩 깎는 일이 생겨나도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그렇게 조카들 넷을 겪고도 아직 꽤 건재(라기엔 좀 민망하지만;;)한 스테들러 색연필의 현재 몰골은 이렇다. ㅋㅋㅋ


녹이 슨 철제 케이스 위엔 정민이가 서너살 때 붙인 방귀대장 뿡뿡이 스티커가 어지럽기 이를데 없고(잘 떼지지 않아 뗄 수도 없다;;), 내용물은 중간에 없어지고 사라져버린 색깔이 많아 다른 색연필로 대체하는 바람에 마구 뒤섞였지만 아직도 그림놀이 할 때는 없어선 안될 소품이다. 문방구 가면 파버카스텔이든 스테들러든 48색, 64색 색연필이 번드르르 종류별로 진열되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30년 넘은 이 색연필을 못 버리고 갖고 있는 내가 확실히 청승은 청승이라고 인정할밖에. (그나마 핑계는 요즘 같은 브랜드라도 나뭇결이 거칠고 칼을 대면 뚝뚝 쪼개지는 색연필과 달리 연필 나무가 정말 연하고 부드럽다는 것. 똑같이 집어던져도 대체된 잡종 색연필보다 잘 부러지지도 않는다. ㅠ.ㅠ) 애지중지 써온 30년 역사와 색연필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을 생각하면 어떻게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전엔 엄마가 난데없이 장농 서랍 정리를 하며, 시집올 때 함에 들었던 혼서지와 사주단자를 버리겠다고 내놓으셨다. 아예 쓰레기통에 넣어둔 걸 나는 다시 꺼내며 왜 이런 걸 함부로 버리느냐고 막 화를 냈다. 엄마는 우리 할아버지가 손수 쓰신 글씨체도 아니고 당시 혼서지랑 사주단자 써주는 대서소에 가서 써온 거라 별로 보관할 가치가 없는 거라 항변했지만, 왠지 나는 그냥 버릴 수 없는 물건이라고 느꼈다. -_-;

40여년이 지났어도 비단 색실이 하나도 안 바랬다. 벌써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엄마는 입때 갖고 있다가 왜 이제와서 새삼 버리시겠다고 하는지 원...

물론 나도 좀 지나면 아무 미련없이 버리자는데 동의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마음으론 한참 더 갖고 있어야할 것만 같다. 엄마방 장농 서랍 안쪽에 든 우리 부모님의 연애편지 묶음도 마찬가지고... -_-;

옛날에 대학생 때였나, 할아버지가 다락방 한 가득 갖고 계시던 오래된 물건들을 비웃으며 대체 왜 그렇게 끼고 도시느냐고 투덜거렸는데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으니 어쩌면 좋으냐. 오래된 물건 못 버려 전전긍긍하는 모습 때문에 머지않아 다 큰 조카들에게 고리타분한 노친네 취급받는 모습이 막 눈에 선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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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친정엄마>

놀잇감 2011. 9. 20. 17:42

소설이든 연극이든 <엄마를 부탁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절대로 보러 가지 않았을 뮤지컬 <친정엄마>를 엄마는 꼭 보고싶다고 하셨다. 별 수 있나. 효녀 코스프레를 하는 수밖에. 유니버설아트센터는 무대가 높아 맨 앞줄은 오히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보느라 목이 아프다는 친절한 객석설명에 힘입어 제일 좋은 자리라는 다섯째줄 정중앙 좌석을 꽤나 오래 전에 예약을 해두었다.

친정엄마 역할에 나문희/김수미의 더블캐스팅인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엄마가 나문희 버전을 보고싶다고 지정해준 것. 김수미 여사에겐 죄송하지만 나는 일용엄니 이외의 역할을 그리 좋게 본 적이 없다. 다들 국민엄마라는데 나는 영... 째뜬 친정엄마의 고향이 정읍으로 설정되어 있으므로 전라도 사투리 연기는 김수미 버전이 더 감칠맛나고 구성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하지만 뮤지컬인데 김수미/이유리 둘 다 탤런트라 두 주연배우의 가창력이 다 떨어지면 곤란하지 않았을까, 염려도 든다. 나문희/양꽃님 모녀의 경우엔 딸 역할의 양꽃님씨가 워낙 노래를 잘해서 뮤지컬다운 느낌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한두곡 밖에 안되는 나문희 여사의  독창 부분은 약간 안습... 박자도 막 틀려주시고. ㅋ 그래도 회한 어린 엄마 역할의 연기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음.

극의 내용은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만하고 살았던 엄마, 스스로 엄마가 되어 딸을 키우며 병마에 엄마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이기적인 딸의 이야기다. 엄청 빤한 이야기인데도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는 대다수 중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상대로 울지 않았다. 약간 울컥하는 부분이야 없지 않았지만 정말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하고 빤하게 예상대로 진행되다보니 오히려 지루한 느낌까지... -_-; 하지만 극이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주변에선 정말이지 곳곳에서 흑흑 흐느낌이 솟았고 울 엄마도 눈물을 훔쳤다. 나중에 물으니 울 외할머니, 그야말로 친정엄마께 학창시절 쌀쌀맞고 못되게 굴었던 것이 생각나셨단다. 할머니가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에 고생하신 것도 떠오르고.

맞다. 울 외할머니 역시 극중의 김봉란 여사처럼 중병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던 말년에도 손수 김치를 담가 자식들 집집마다 보내주셨던 분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떠올리면 나 역시 수시로 울컥 눈물이 솟지만, 뮤지컬을 보는 동안엔 역시 딸의 입장이었기에 크게 공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재수없게 들려도 할 수 없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꽤나 착하고 훌륭한(?) 딸 축에 들기 때문이다. ㅋㅋ 오히려 가족과 엄마한테 너무 얽매여 살아서 주변에서 짜증낼 정도로. -_-; 그러다보니 시댁식구를 위한 집안 행사에 친정엄마 불러다가 가사도우미처럼 써먹고 김치 떨어졌다고 시골에 독촉전화하고, 엄마 병든 것도 모르고 자기 투정만 하는 딸에게 공감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직도 그런 딸과 엄마가 많다고? +_+  

어쨌거나 내용은 신파스럽고 진부하더라도 잔잔한 재미와 웃음은 있었다고 인정한다. 창작곡이 아니라 죄다 유명한 대중가요를 개사했으므로, 아는 노래도 많고 완성도 떨어지는 창작곡 때문에 짜임새가 떨어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R석 7만7천원이면 가격대비 만족도도 괜찮다고 할 수 있겠고. 까칠한 나로선 다시 보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지만, 극장을 나서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칭찬과 감탄(김수미/이유리 버전도 또 보러 오고 싶다고 하는 모녀들 꽤 봤음)을 보더라도, 그리고 작년부터 계속 이어지는 앵콜공연을 보더라도(11월부터 연말까지 또 연장공연이 잡혀있는듯;;) 옛날에 꽤나 고생하신 엄마를 둔 자식으로선 볼만한 뮤지컬인 모양이다. 

집에 와 찾아보니 나문희 여사 울 엄마랑 동갑이시던데 아무리 연예인이라 관리를 잘하기로서니 어쩜 그리도 피부가 곱고 팽팽하신지... 맨 앞줄이 비록 고개는 아프겠지만 중간 휴식 시간 이후 2부 첫 순서를 배우들이 관객석으로 내려와 노래부르며 시작하는데다, 나문희 여사가 일일이 맨 앞줄 관객의 손을 잡아주는 혜택이 있다! 김수미 여사 공연때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그런 거 좋아하는 분이라면 맨앞줄이나 앞쪽 통로석도 고려해볼 만 하다. 재작년, 작년 어버이날 선물로 김영임 아줌마의 <효> 공연 보러갔을 때도 보니깐 노친네들도 아이돌에 광분하는 십대팬들과 다름없이 유명인과 악수하고 가까이 얼굴보는 거 엄청 좋아하시두만! 김영임 아줌마가 객석으로 내려와 일종의 굿놀음인 <대감놀이>를 하며 관객에게 깃발을 뽑게 시키면 여기저기서 막 수표와 지폐가 몰려들기도 했었다. 요번에도 맨 앞줄에 머리 새하얀 할머니를 모시고 온 3대 관객들을 비롯해 나문희 아줌마랑 손잡는 거 어찌나들 좋아하시던지. 울 엄마도 속으로 부러워했을까?

암튼 공연이 옛 추억을 불러일으킨 덕분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엄마의 옛날 추억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부산에서 피난살이 할 때 고생한 이야기, 공부 시키겠다며 데려간 고모한테 구박 당한 이야기, 교복 입고 까탈떨던 이야기... 나는 몰라도 울 엄마에겐 분명 재미있고 감동적인 공연이었던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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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추억

추억주머니 2011. 8. 15. 23:58

제목이 너무 거창한 감이 있어 좀 찔린다. 얼른 고백하자면 오래 전 울며 겨자먹기로 딱 한달 탱고를 배워봤다는 이야기다. 학교 때 연극을 했었는데, 하필 내가 맡은 배역이 잠깐 탱고 추는 장면이 있었다.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극단 동아리는 아니고 매년 가을 학과 행사처럼 무대에 올리는 원어 연극이라, 순전히 숫기 개발과 영어공부(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발을 들였다가 꼬박 3년이나 코를 꿴 터였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탱고라고는 코미디언들이 우스꽝스럽게 팔을 뻗고서 <라쿰파르시타>에 맞추어 격렬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앞뒤로 오가는 춤 정도가 고작이었다. 헌데 나더러 무대에서 그런 우스운 춤을 추라니, 난감했다. 연출을 맡은 선배는 나와 파트너에게 탱고 추는 장면이 들어간 외화 비디오 하나를 주더니 잘 보고 연구해 따라하라고 명했다. 으악. 비디오를 보고 나니 더욱 막막했다. 전혀 우스운 춤이 아니잖아! 철거 직전의 도시 폐허에서 노숙인처럼 사는 소녀가 꿈속에서 짝사랑하는 우유배달 소년과 탱고를 추는 장면이라 애틋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하는데 탱고 음악과 함께 우리가 엉거주춤 되도 않는 탱고 흉내를 내며 걸어다니면 으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름방학과 함께 본격 무대 연습이 시작되자 보다 못한 기획이 우리를 이끌고 학교 앞 무도학원을 찾아갔다. 노상 회식때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던 중국집 송X원 건물 바로 3층에 무도학원이 있었다. 수완 좋은 기획 선배는 이미 박카스 한 상자 사들고 가서 학원 원장과 강사를 잘 구워삶아 놓았으니 염려 말라고 했지만, 쭈뼛거리며 들어간 허름한 무도학원 분위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우릴 반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빠글빠글 파마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여 기른 퉁퉁한 원장 아줌마의 태도도 시큰둥했지만 앞으로 우리를 가르칠 거라는 강사 아저씨는 어휴... 맥가이버 머리인지 단발머리인지 암튼 뒷머리를 길게 기른데다 '올빽'으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통 넓은 검정바지를 잔뜩 허리춤 위로 끌어올려 입은 '배바지'를 보노라니 한숨이 나왔다. 내심 이 사람들이 진짜 탱고를 가르칠 수나 있는 걸까 의아했다.

첫날 우리 둘에게 기본 스텝을 가르치던 강사는 나와 파트너 모두 뻣뻣한 몸치임을 깨닫고 역시나 한숨을 쉬었을 거다. 둘쨋날 연출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나다시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무도학원엘 다시 가보니 마룻바닥에 분필로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시작하는 발만 제대로 짚으면 그림 따라 번갈아 발만 옮겨도 스텝이 완성될 거라면서. 그러나 문제는 스텝이 아니었다. 상체는 우아하게 뒤로 젖히고 하체는 서로 일직선이 되도록 붙여야 한다는데, 후배였던 우유배달 소년과 나 둘 다 발놀림에 신경을 쓰다보니 당연히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엉거주춤 엉덩이는 뒤로 빠지고... 한쪽 벽면의 거울로 보는 우리의 몰골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스텝 순서는 또 왜 그렇게 안 외워지는지! 무도학원까지 보내주었는데 도통 탱고가 늘지 않자 해병대 출신이었던 연출 선배는 잡아먹을 듯이 길길이 화를 냈고, 나는 3학년이랍시고 바락바락 대들며 정 못봐주겠으면 탱고 장면을 빼라고 항변했다.

몹시도 더웠던 그해 8월, 전체 연극 연습 말고도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허름한 무도학원에서 매일 한시간씩 땀을 삐질삐질 흘렸지만 탱고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알고보니 수업료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었고, 기획선배가 거의 담뱃값 정도를 쥐어주며 한 일주일 기본 스텝만 가르쳐주면 된다고 했다는데 몸치 둘이 꼬박 한달이나 춤 강사를 귀찮게 했으니... -_-; 단신인 나보다 키가 한뼘 정도밖에 크지 않은 느끼한 생김새의 강사 아저씨가 직접 나를 리드하며 가르칠 땐 열심히 배우려는 생각보다 그저 지독한 그의 머릿기름인지 스프레이 냄새와 등에 닿은 손길이 싫기만 했다. 후배였던 나의 파트너도 어쩜 그렇게 춤을 못추는지 원. 강의실에서 둘이 따로 연습을 하면서도 서로 발을 밟다가 웃어대기 일쑤였다. 나중엔 도저히 안되겠는지 학원장 아줌마와 제비 같은 강사가 마지막으로 직접 시범을 보여줄 터이니 분위기만 참고해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손을 떼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그때까지 연습했던 탱고 음악의 테이프를 복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두 사람이 추는 탱고를 지켜보며, 똑같은 스텝인데 어쩜 춤이 우리와 그렇게도 다를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장 아줌마의 푸짐한 몸매도 느끼하게 생긴 강사 아저씨의 제비 같은 손길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우면서 박력있는 두 사람의 스텝과 회전이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당시 난 대사 외우기도 벅차 죽겠는데 무대에서 난데없이 탱고를 추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저 괴롭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빠져 춤도 음악도 음미해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공연일은 다가왔고 얼렁뚱땅 흉내만 낸 탱고 장면도 무사히 넘어갔다. '괴롭고 어려운' 탱고와도 안녕이었다.

물론 지겹도록 들으며 연습했던 <라쿰파르시타>를 비롯해서 탱고 음악을 들으면 비싯 웃음과 함께 진땀이 나는 것 같은 조건반사가 한동안 이어지긴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몇년 뒤엔가 알 파치노가 나온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추는 장면이 나왔을 땐 워낙 영화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불쑥 내가 몸치가 아니어서 탱고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탱고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영화에서 탱고를 처음 춰본다는 여자가 알 파치노의 리드에 맞춰 완벽하게 춤을 춘다는 건 리얼리티가 영 떨어지지만!

요즘 알 파치노의 그 영화와 제목이 같은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역시나 탱고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탱고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 드라마 때문에 또 당분간 탱고 학원에 사람들이 드글드글 하겠군, 중얼거리며 옛날 생각도 함께 떠올라 웃음이 난다. 내게는 난감하고 고통스러웠던 탱고의 추억도 지나고 보니 다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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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 전

놀잇감 2011. 6. 22. 16:47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전시작품에 포함됐다는 소식에 가야겠구나 벼르고는 있었다. 오르세미술관 전시회는 잊을 만 하면 몇년에 한번씩 기획되는데다가 몇해 전엔 <고흐의 방>과 밀레의 <만종>이 왔다고는 해도 작품수가 하도 알량해 보이코트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수리 때문에 작품을 '대거' 빌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기 때문이다. 134점이면 소품이 포함됐다 해도 예술의 전당까지 흔쾌히 가줄 수 있는 작품량이었다. 6월 4일에 시작해 9월 25일까지 하는 전시라 '언제' 갈 것인가 그것만이 의문이었는데, 마침 어제 저녁약속이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벨리니에서 잡혔다. 여름밤 산책도 하자면서. 이런 걸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거야, 라며 설렘을 안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별이 빛나는 밤> 말고는 또 무슨 그림이 왔는지 일부러 알아보지 않고 갔는데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꽤 유명한 그림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듯했다. 오르세에서 빌려주는 작품만 가져오다보니 일관되는 주제나 사조로 전시실을 꾸미기에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고...
고흐, 세잔, 르누아르, 밀레, 드가, 모네, 고갱, 피사로, 보나르, 로트렉, 쇠라, 루소 등등 그림책에서 봤다 싶은 화가들의 작품이 한두 개씩은 전부 포함되긴 했으나 이른바 오르세가 자랑하는 대표작은 많이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난 뿌듯했고 만이천원이 아깝지 않았다. 실물 알현을 못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실컷 보고 왔기 때문이다. ^^; 데생과 스케치류의 소품도 꽤 많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초의 사진 작품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으므로, 134점 모두 대작일거라는 오해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 나는 최근 한국과 일본 근대문학을 좀 읽었더니 20세기초 사진과 작품들이 남다르게 다가왔고,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이나 공장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의 노동현장 포착 모습이 짠했다.  


게다가 뜻밖의 그림들도 몇점 만나는 바람에 마음에 드는 작품만 집중적으로 몇번씩 감상하며 눈호강을 할 수 있었다. 방마다 주제를 정해놓기는 했던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겠고, 암튼 인물화를 모아놓은 전시실에서 맞닥뜨린 르누아르의 <소년과 고양이>,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 로트렉의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 세 작품은 거의 나란히 걸려 시선을 끌었다.

르누아르, [소년과 고양이]

포스터에 담긴 오른쪽 그림이 바로 르누아르의 초기작이라는 <소년과 고양이> 일부인데 정말 예쁘지않은가! @.@ 
르누아르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을 화폭에 담아 눈을 푸근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렸지만, 척 보면 르누아르 그림이라고 알 수 있을 듯한 특징이 작품마다 두드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초기작이라도 이게 르누아르 그림이라니 의외였다. 평소 보던 르누아르 작품과는 색감도 뭔가 다르고 분위기도 한층 어두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말을 들으니 누드화 가운데서도 남자 누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단다. 고양이 표정까지 어쩜 저리도 사실적일고. 꽃소년에 열광하는 본성을 못속이고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가 돌아섰다. ㅎㅎㅎ

상당히 작품 크기가 큰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도 워낙 아름다워 한참을 감상했는데,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바로 옆에 걸린 로트렉의 작은 인물화였다. 어딘가 퇴폐미와 서글픔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 로트렉의 그림도 꽤나 좋아하는데 공단 드레스를 떨쳐 입은 단아한 귀족 여인의 전신상 옆에서 더욱 초라하게 대조되는 어릿광대의 뒷모습이라니...
로트렉의 그 그림 사진 찾아올리려고 나름 검색해보았으나 못 구했다. 하기야 구한다고 해도 전시실에서 그 순간 느꼈던 기분을 전달할 순 없을 테니 그냥 통과.

그 방에 같이 걸려 있던, 처음 들어보는 아르망 스갱이라는 화가의 인물화 <가브리엘 비앵>도 눈빛이 오래 잊히질 않을 만큼 좋았고,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폴 기구의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생각되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림이 작군, 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도 한 점 왔다. 나로선 처음 보는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이긴 하지만. 가장자리 인물을 가차없이 잘라 표현한 드가의 기법이 당시로선 대단히 선구적인 시도였으며, 그게 일본 판화의 영향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에 조금 놀랐다. 화투의 새 그림까지 예로 들어 설명하던데 그 부분에선 시끄럽고 듣기 싫어서 딴그림에 정신을 팔았다. 그림을 볼 때 설명을 들으면 더 많이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서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나 혼자만의 느낌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도 있어 변덕이 부글부글 끓는다. 일부러 도슨트 시간에 맞춘 것도 아닌데 그림 설명을 만나 약간 반가운 느낌과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나는 기분 사이에서 어제도 오락가락했다. 

풍경화 가운데선 뭐니뭐니해도 고흐 그림이 인기 폭발이었지만, 밀레의 <봄> 앞에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저 유명한 <만종>이나 <이삭줍기>보다(이번에 이런 작품이 왔다는 얘기가 아님;;) 나도 밀레의 <봄>이 훨씬 좋았다. 먹구름 잔뜩 낀 왼쪽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도 예쁘고 농촌의 오솔길과 꽃을 피운 과일나무, 멀찌감치 나무 아래 서 있는 아주 작은 농부의 모습까지 정겹지 않은 구석이 없을만큼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 아닐는지. 하트만이라는 고객을 위해 그린 4계절 연작이라는데 겨울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고, <봄>이 연작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란다. 계절 중엔 뭐니뭐니해도 봄이 최고지...

그밖

펠릭스 발로통, [공]

에 오호라 쾌재를 부르며 기쁘게 만난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공>. 작품 크기가 큰 것도 아니고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은데 마음을 훅 후비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한참을 감상했다.
그림자까지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가 또 좀 외로움이 풍기기도 하고... 저 멀리 서 있는 두 여인 가운데 이 아이의 엄마가 있을까 아닐까 혼자 한참 시나리오를 쓰다가 말았다.




해외 미술관에서 두서없이 주워담듯 빌려온 전시회는 통일감이 없어서 문제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눈에 띄어 불평이 쏙 들어갔다. 메인요리로 고흐의 별밤만 기대하고 갔는데 서비스로 주는 각종 디저트에 감동하고 온 기분이랄까. ㅋㅋ


벽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전시실에서 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해보려고 일부러 그런 사진을 구했다. 별빛을 심히 도드라지게 강조한 복제 그림들과 달린 원래 그림 느낌이 거의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 출처: http://moonsoyoung.com/90114994256


고흐가 이 밤풍경을 그리려고 밀짚모자에 촛불을 얹어놓고 작업을 하느라 뜨거운 촛농이 뚝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도슨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암튼 하늘의 북두칠성도, 해안도로를 따라 켜진 진노랑색 가스등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미소띤 표정도 다 정겹고 아름답다. 코앞까지 가까이 가서 확인했는데 두 사람 다 웃고 있었다. ^^;


어제 만난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은 참 공교롭다. 97년이었던가, 도서전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김에 파리와 런던 여행을 계획했다. 파리에서 2박 3일이었나 3박 4일쯤 보내는 동안 마침 파리에 와 있던 친구와 점심무렵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세 시간이면 그림 구경 실컷 하겠지 싶어 시간을 안배했으나, 오르세미술관의 작품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인상파 전시관을 절반도 다 못돈 채 눈물을 머금고 약속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 못봐서 제일 아쉬웠던 그림이 바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날 친구는 오후에도 미팅이 잡혀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차를 마셨던가 간단히 점심을 떼우고 헤어져야 했으므로, 같이 지하철을 타다가 나는 뻬르라세즈로 친구는 미팅 장소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파리일정을 하루 더 늘려 오르세 미술관을 마저 보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런던행 비행기표 변경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파리를 떠나며 몇년 안에 다시 오리라,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여행을 제대로 하리라 결심했다. 다시 가기는 개뿔. 그 결심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만난 친구가 바로 그 때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났다가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진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인생이 공교로운 거 아닌가? 물론 내가 예술의 전당 가는 김에 혼자 전시회를 볼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벨리니로 장소를 정한 건 그 친구였다. 오래 전 그 친구를 만나려고 오르세에서 미처 못본 고흐의 그림을 십수년이 지난 어제 결국 보고 나서 또 그 친구를 만나니 뭔가 하나 빠졌던 퍼즐 조각을 마침내 끼웠거나 어그러졌던 아귀를 딱 맞춘 느낌이 들었다. 그날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지며 내가 친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는데(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요번엔 친구가 내게 쿠키를 싸주었다. 부른 배를 꺼뜨리겠다고 예술의 전당 주변을 거닐다 올려다본 밤하늘 색깔은 유난히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 색깔이 '프러시안 블루'라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오후에 보고 나온 고흐 그림의 밤하늘 색깔을 떠올렸다. 확실히 인생은 오묘하다. 혹은 인간이 같다붙이기 선수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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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대야

추억주머니 2011. 5. 20. 23:21

온 집안 가득 대부분 옛날 살림살이로 들어찬 우리집.
창고나 다름없는 옷방 한 구석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재봉틀이 아직도 있다. 아주 오래 전 방바닥을 죄다 뜯고 새로 난방용 파이프를 깔던 대공사를 했을 때, 나는 쓰지도 않는 그 재봉틀을 버리자고 주장했다가 혼만 났다. 반들반들한 까만색에 자개로 양쪽 문에 무늬를 넣어 키 큰 문갑처럼 생긴 발재봉틀은 의자를 놓고 사용해야 하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어른 둘이 들기에도 만만칠 않은 애물단지다. 그 재봉틀로 엄마가 시집와서 옷감 끊어다가 어린 시누이들 옷도 만들어 입혔고, 온갖 낡은 옷 수선하고 20년 전쯤까지는 내 바지 길이도 잘라 박아주고 통짜 커튼이랑 식탁보도 만들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효용 면에서나 공간 면에서 이젠 그만 버려야한다는 것이 당시 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집안 개조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도져 거의 정신줄을 놓았던 엄마 등 뒤에서 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춰 나를 나무랐다. 엄마 혼수품 중에 딱 하나 남은 재봉틀이 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그러냐고, 우리가 함부로 버리고 말고 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엄마가 스스로 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둬야한다고. 10년쯤 전에 내가 또 슬쩍 재봉틀 쓰지도 않는데 버릴까, 하고 물어봤을 때도 엄마는 니 마음대로 해라, 고 하라면서도 눈빛으로는 몹시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직접 만든 누렇게 바란 천덮개를 쓰고서 골동품 발재봉틀이 아직도 옷방 구석에서 온갖 짐에 눌려 있는 이유다.
 
정수기 청소를 하러 오는 분들이 작년부턴가는 물을 받을 통까지 들고 오지만, 그 전까지는 우리에게 물을 받을 커다란 통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엄마가 간단히 김치 담글 때나 만두를 빚을 때 쓰던 대야 두개(하나는 둥근 동심원 무늬 요철이 있는 양은[?] 재질이고 하나는 파란색 플라스틱이다)는 싱크대 밑에서 먼지를 쓰다가 두달에 한번씩 요긴하게 쓰였다. 헌데 이제는 그 두달에 한번 쓸모가 없어진 거다. 어차피 김치는 담가먹지 않기로 했으니 정수기 청소용으로도 필요 없게된 그 대야는 없애도 되는 물건이란 생각에 난 또 슬쩍 버려도 되겠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요즘 잘 못버리는 지병 자가치료를 시도하는 중이다 ㅎ) 어차피 크기가 커서 재활용품 버리는 날 몰래 들고나가는 건 불가능한 물품이다. 엄마는 또 니 마음대로 해라, 고 말은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파란 대야의 사연을 들려줬다.

둘(울 엄마와 아버지)이 벌어 총 열 식구 먹여살리느라 워낙 살림이 빠듯하고 정신이 없던 가난한 집안에선 첫손녀딸 백일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엄마는 섭섭함을 감추고 주말에 몰래 나가 백일사진이나 찍어주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날 아침 일찍 출근도 하기 전에 외할머니가 뜨끈뜨끈한 수수팥떡을 이고 오셨단다. 나의 백일 떡을 문제의 그 파란 대야에 담아서. 심지어 새벽같이 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날라온 거였다나. (나의 우상이자 영원한 1순위 천사표 친할머니가 나의 백일도 몰랐다는 놀라운 반전에 잠시 멍했다가, 그런 일에 꽁하는 내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냥 내다버리기엔 너무 멀쩡하다고 인정;; 이러다 평생 끼고 산다

'나쇼날'이라서 물도 잘 안들고 플라스틱도 튼튼하고 좋다고, 요샌 그런 플라스틱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엄마 앞에서 파란 대야를 뒤집어보니 정말로 영어로 National이라고 적힌 마름모꼴 로고 위에 역시나 영어로 National Plastic Co., Limited라고 둥글게 찍혀 있었다. 나는 슬며시 다시 대야를 싱크대 밑으로 밀어넣고 일어섰다. 무려 사십여년 전 내 백일에 맛있는 수수팥떡을 담아 외할머니가 이고 오신 대야라는데... -_-;
이런저런 의미와 추억을 이유로 결국 나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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