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09.04.04 관계의 강요 23
  2. 2009.01.15 할머니의 추억 14
  3. 2008.12.09 남산 케이블카 27
  4. 2008.11.22 추운 건 싫다 20
  5. 2008.11.20 연필이 좋다 19
  6. 2008.09.25 맘마미아 13

관계의 강요

추억주머니 2009. 4. 4. 22:01

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그 시기에 특히 또래 집단들과의 긴밀한 우정이 형성되는 모양인지, 반엔 유독 끼리끼리 어울리는 무더기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 꽤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우정을 과시하듯 서너명씩 몰려다니는 그 아이들이 꼴같지 않기도 했고, 당시 유행하던 고무줄 놀이에 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실력(밑바닥이란 의미다) 때문에 어차피 같이 놀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독 나를 자기네 무리에 끌어들이려고 공을 들이는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H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닌데도 괜히 빙 돌아서 시장 언저리까지 나와 동행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막 우겨서 나를 고무줄 놀이 깍두기로 껴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고맙다기 보다는, 1, 2단을 넘기지 못해 놀림감이 되기 쉬운 내 고무줄 실력을 아이들 앞에 보여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H의 바람대로 학기초에 써내는 가정환경조사서에 그애의 이름을 적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만, 부모의 학력과 직업은 물론이고 집에 TV 따위의 가전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말도 안되는 항목까지 써내야 했던 그 종잇장에는 친하게 지내는 학우관계에 관한 항목도 있었고, 그 종이를 내기 전날 H는 나에게 다가와 "나는 친한 친구 이름에 니 이름 쓸 거니깐, 너도 내 이름 써야한다. 알았지?"라고 말했었다. 
H가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그냥 귀찮아서 그애와 친구로 지내는 걸 <눈감아주기로> 했던 것 같다. 도시락을 먹을 때나 점심시간 이후 운동장에서 놀 때, 방과후 집에 갈 때도 난 오히려 요란하게 휩쓸려 놀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편했음에도 거의 모두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반 분위기 때문에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4월 중순쯤 우리반에 전학생이 등장했다. 뿔테 안경을 써 모범생 분위기가 나고 꽤 얌전해 보이던 그 아이는 전학생이 흔히 겪어야 하는 따돌림의 운명을 고스란히 겪기 시작했다. 학기초이긴 해도 이미 <파벌>이 형성된 이후에 전학을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점심 시간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애를 확 밀어 넘어뜨리는 장난을 한 순간 그애가 "아부지!"라고 외치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부분 아이들은 깜짝 놀라거나 위험에 처한 순간 본능적으로 "엄마!" 또는 "엄마야!"라고 하는데, S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비쳤던 거다.
육성회 임원인 엄마를 둔 H는 당장 자기네 엄마를 통해 S의 뒷조사에 돌입했고, 전학시키던 날 학교에도 온 적 있던 S의 예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라는 사실, 그날 등에 업혀 있던 유난히 어린 아기동생은 배다른 남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온 반아이들에게 떠들어댔다. 이혼율이 높아진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혼이든 사별이든 재혼 가정이나 홀부모 가정은 무조건 <결손가정>이라며 잠재적인 문제아를 양산하는 가정으로 손가락질 했던 것 같다.
나도 2학년때 그 학교로 전학을 와 한동안 빙빙 겉돌던 기억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새엄마와 함께 사는 S를 안쓰러워하진 못할망정(사실 나의 무작정 동정심도 문제였지만;;) 괜히 따돌리는 반아이들에게 분노했고, 마침 집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S를 우연히 등교길에 만난 날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때도 친구를 본격적으로 사귀는 건 꽤나 뜸을 들이는 성격이라, 내가 S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의협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그냥 편견없이 전학생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와 S가 몇번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즉각 수군대기 시작했고, H는 나를 운동장으로 불러내 <절교선언>을 했다. "S랑 같이 다니면 너랑 절교할 거야. 어쩔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H에게 나는 기가 막혀서 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는, 보란듯이 S와 친한 척을 했다. 당연히 나까지 따돌림을 당하는 추세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들의 패거리 횡포가 부당하다고 느끼며 분노했다. 다행히 한동안 지켜본 결과 S는 나와 책읽는 수준도 비슷했고, 나처럼 운동도 싫어하는데다 나처럼 아기들을 예뻐해서 자기네 아기동생을 만날 업어준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집보다 훨씬 책도 많은 S의 집에 놀러가 보니, 동화속의 악독한 새엄마들과 달리 S의 새엄마는 특별히 다정스럽진 않아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다.
내 인생의 책 첫권으로 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바로 이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었다. 여자애들의 전반적인 따돌림 속에서 나는 얼떨결에 S와 단짝이 되고 말았지만, 나에게 정말로 각별한 친구의 존재는 S가 처음일 정도로 반발심이랄지 분노에서 시작된 우정은 퍽이나 성공적이었다. 한편, 나에 대한 H의 응징은 단순히 절교로 끝난 게 아니었다. ^^; 자신의 우정을 <감히> 거부한 배신자(실제로 H는 고무줄 놀이에 나를 끼워주었던 무리들에게 나를 <배신자>라고 칭했다)를 가만둘 수 없었는지, 따돌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H는 화장실 낙서사건을 공모했다. 당시엔 재래식 화장실인 <학교 변소>에 남녀 학생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하트 속에 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남자애가 우리반에서 제일 말썽쟁이에다 잘 안씻어서 더럽고 공부도 못하는 또 다른 왕따였다는 사실이 H가 꾸민 복수극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화장실 벽에 분홍색과 노란색 분필로 그린 하트 속에 이름이 적히는 사상최대의 스캔들을 직면하고 엄청난 놀림을 받기 시작한(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떼지어 "얼레리 꼴레리, 라니하고 OOO하고 얼레리 꼴레리~"라고 놀려댔다) 나는 처음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머리와 삐딱한 반항심은 그때도 여전했는지, 스스로도 잘난 척하며 나와는 터무니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던 코찔찔 말썽쟁이 OOO에게 일부러 보란듯이 연필도 빌려주고 전에없이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왕따들의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때부턴 유독 잘난 아이들이 못되게 따돌리던 힘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독 뚱뚱해서, 말을 더듬어서, 잘 안씻고 꾀죄죄해서, 숙제를 잘 안해와서, 그밖에 사소한 이유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은 각자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드러내놓고 엄청 친한척을 하진 않았지만 심정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사이였던 셈이다.
마침 그해 담임은 2학기부터 이상하게 좌석배치를 자율에 맡기겠다며 조장 몇명을 임명하곤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대신 남녀 비율은 반반씩 섞어 조를 꾸리게 했다.  폐품수집이든, 환경미화든, 용의검사든, 학예회 준비든 모든 경쟁평가는 조별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장으로 뽑힌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이미 패거리는 정해졌고 나는 굳이 조원을 선별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데도 뽑히지 않은 왕따 아이들은 전부 우리 분단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
그래서 우리 왕따 조가 모든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분야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든가 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꼴찌 조는 우리가 아니었다. 육성회 임원 자식들이 대거 모여있던 H의 조가 단연 극성스러운 1등을 차지한 건 말하나 마나일 것이다. 하지만 왕따들도 모이면 힘이 세지는 걸 우린 느꼈고, 근거없이 화장실 벽에 이름을 적혀 스캔들을 내는 복수극 같은 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에서 제일 키 큰 코찔찔 OOO이 주먹을 휘두르며 누군지 들키면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스캔들 당사자인 내가 바락바락 아니라고 하며 울고불고 해야 재미가 있을 텐데 오히려 의연하게 구니까 소문은 더 빨리 잦아들었던 것 같다.

쓰다보니 나 혼자 옛생각에 재미가 들어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왜 내가 새삼 이런 사연을 적고 있는고 하니, 제목에도 적은, 최근 경험한 어떤 관계의 강요 때문이다. 나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많아서 누가 느닷없이 강요하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수긍하기 보다는 반발심이 먼저 생기는 편이고,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더라도 제3자의 판단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겪고 판단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꼭 나를 염려한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대신 정립해주려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다가와서 간섭한 이들과 오히려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친하게 지내라거나, 새삼스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지인에게 듣더라도,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때문인지 덜컥 그 말을 수긍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십수년을 겪어도 뜻밖이라 생각되는 면을 발견할 만큼 한 인간을 파악한다는 게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느닷없는 관계의 강요에 제일 먼저 불쾌감을 느꼈다. S와 놀면 자기와는 절교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협박을 한 H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어쨌든 나는 내 판단력과 관계망을 간섭하려는 그의 시도에 11살 때의 추억이 떠올랐고 부디 그때처럼 순전히 반발심으로 원래 관계가 흐트러지진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기야, H와는 5학년에 올라가서 그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S와 함께 셋이 다시 친구가 되긴 했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그 둘다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지금 그들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하다. 흠.
Posted by 입때
,


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맏이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데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이 다 장수하신 편이라 어른이 된 뒤에도 할머니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많다.
놀라운 건 두 할머니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글만 익히셨으며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쪽머리를 하셨을 정도로 외모로는 <구식> 할머니였고 외출할 때 말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은 언제나 <몸뻬> 바지였다는 점, 그럼에도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아들과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남아선호사상이야 뼛속 깊이 자리잡은 본능 같은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 딸들과 손녀딸들이 크게 홀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맏손녀딸이다 보니 오히려 특혜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7살에 국민학교에 얼떨결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할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다. 당시 전교에서 제일 작은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매일 손녀딸을 업어 등하교를 시키는 우리 할머니의 정성은 온 동네에 유명했다고 한다. 확실히 두 할머니들은 장손을 각별히 챙기시는 듯해도, 손위 누이인 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전폭적이었고 내 말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다 동의해주셨다.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이란 걸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큰 반대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심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 결심을 듣자마자 "쟤는 무슨 일을 하든 똑 떨어지게 잘 해낼 거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앞장서서 온 식구들의 우려를 잠재우셨다.
두분은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이런저런 사회문제를 의논해도 나와 말이 잘 통했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절대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친할머니 손에서 8살까지 자란 나는 당연히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은 사람이어서 아빠와 엄마보다 순위가 앞섰고, 외할머니와는 친할머니만큼 곰살맞은 관계는 아니어도 늘 나를 감싸주시는 커다란 산 같은 분이라고 여겼다. 두분 다 서울 하늘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사셨으니 그만큼 자주 만나며 지낸 덕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크고 공고했으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친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고 심장이 약해 말년엔 바깥출입이 거의 불편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에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걸레질과 정리정돈을 하시던 바지런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마지막 1, 2년을 암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그 전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랬기에 내 기억에 남은 두분 할머니는 늘 자애로운 미소에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십여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일일이 챙기시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속 상한건 할머니가 된지 오래인 우리 왕비마마 때문이다.
우리 조카들은 고모한테 열광하는 것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워낙 울 엄마가 손녀 손자들을 각별이 예뻐하고 안아주고 사족을 못쓰는 성품이 아니다 보니, 예민한 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셨던 울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을 던져 손녀손자들과 놀아주셨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렇게 손주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보기엔 당신에게 쏟아져야 할 남편의 사랑이 손녀손자들에게 나뉘어 가는 것조차 질투하시는 듯했다. 내가 조카들에게 몸바쳐 봉사할 때도 겉으로는 늙은 딸 피곤해 할까봐 염려하시지만, 사소한 일로 어린 손녀딸과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아마도 속마음은 무수리의 온전한 보필을 당신만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울 엄마는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쌀쌀맞은 속담의 신봉자다. 아이들이 그리워서 거의 매일 손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의 귀찮은 질문(숙제 다 했니? 밥 먹었니? 유치원에 잘 갔다 왔니?)을 던지고는 쌀쌀맞거나 시큰둥한 반응(그거 어제도 물어봤잖아? 할머니는 왜 만날 밥먹었느냐는 거만 물어요?)에 마음 상해 하고, 손주들이 놀러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한편, 떼로 몰려온 조카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정신없다고 타박을 하시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니 눈치 빤한 조카들은 심지어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 할머니 볼에는 뽀뽀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_-;;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일부러 나한테도 뽀뽀를 안해주고 까탈을 떠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라고 위로를 하긴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굵어져 할머니한테 툴툴거려도 내심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정민공주 이외엔 나머지 조카들이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따돌림하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늘 아프고 온종일 TV나 보고 자기네랑 놀아주지도 않고 귀찮고 빤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비마마 본인도 그게 섭섭해서 마음 아파하시지만 정작 조카들을 대할 땐 ~~ 하지 마라, 고모 괴롭히지 마라, 뛰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만 해대니 관계가 호전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린 조카들에게 할머니의 추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감동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나로선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조카들을 업어주기엔 울 엄마의 건강이 너무 나빠지셨고 할머니들과 윷놀이,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익숙하다. 조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게임용어와 컴퓨터 용어에 왕비마마는 더욱 절망하는 판국이니 원...
우리 왕비마마와 어린 조카들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위한 묘안은 어디 없을까?

Posted by 입때
,

1970년대였다.
볕이 좋은 일요일, 가난한 부부는 계획했던 대로 올망졸망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남산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결혼식을 마치고 속리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택시를 대절해 친구들과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이 벌써 6, 7년 전의 일이었다. 그땐 평생 단 한번의 호사라 택시를 타고 남산을 올랐지만, 이번엔 두 아이를 걸리고 막내를 아내 등에 업힌 채 당연히 버스를 타고 회현동으로 향했다. 
탈 것들을 담은 그림책에서만 보던 케이블카를 태워주겠다고 아이들과 오래 전부터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보는 것은 젊은 부부도 처음이었기에 폴짝폴짝 뛰며 흥분해 좋아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마음이 설렜다. 편도 표를 끊어 무쇠로 만든 작은 버스 같은 케이블카에 오르자 정말로 거짓말처럼 케이블카는 줄에 매달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케이블카 창에 매달리듯 유리에 얼굴을 대고 내다보는 남산의 초록빛 녹음은 더욱 아름다운 듯했고,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는 곳의 동네이름을 어림짐작으로 가르쳐주며 새삼 서울이 참 넓구나 싶었다.
아쉽게도 케이블카는 몇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특히 둘째 아이의 목표는 남산구경이 아니라 오로지 케이블카 타기였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녀석은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또 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셈을 했다. 예정했던 대로 남산 팔각정 주변을 둘러본 뒤 아이들과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나면 집에 돌아갈 차비 정도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말 잘 들으면 또 태워주겠다고 달래자 아들녀석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얌전히 아빠의 손을 잡았다.
굵게 불어터진 우동 면을 멸치 국물에 말고 유부 몇조각을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남산을 쏘다니다 먹은 늦은 점심은 행복의 맛이었고, 다섯 식구의 일요일 나들이는 평화롭게 끝나가고 있었다.
둘째녀석이 내려갈 때도 케이블카를 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까지는.

남편은 남은 돈을 계산해보았으나 집에 돌아갈 버스비를 제외하면 솜사탕 하나를 사먹거나, 어린이용 반표를 끊을 수 있는 돈이 남을 뿐이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매를 맞고도 좀처럼 꺾이지 않는 둘째의 막무가내 성격을 잘 아는 그는 길바닥에서 큰소리로 아이를 혼내는 남부끄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분 좋은 가족 나들이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아내와 의논 끝에 아들녀석만 케이블카에 태워 내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들 녀석에겐 꼼짝도 하지 말고 케이블카 내리는 곳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케이블카 차장에게도 아이를 잘 간수해달라고 부탁을 한 뒤 부부는 그저 좋아라 손을 흔드는 아들을 배웅했다. 뒤이어 남은 두 아이를 하나씩 업고 안은 부부는 부지런히 뛰다시피 남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나 케이블카를 탔을 땐 눈깜짝할 새에 정상에 당도했으므로 동네 언덕쯤으로 어림짐작했던 남산 길은 막상 걸어보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둘째를 잃어버릴까봐 더럭 겁이난 젊은 부부는 부디 아들녀석이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꼼짝않고 기다려주기를,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 데려가는 일은 없기를 기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여 길잃을 염려가 없게 되자 남편은 큰아이 손을 아내에게 쥐어주고는 홀로 먼저 승강장 건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들녀석은 잔뜩 겁먹은 얼굴에 눈물자국이 두 줄기 말라붙은 채로 얌전히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멀고 먼 남산 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부모의 수고를 알 리 없는 녀석은 심통이 나서 제 아빠를 반기기는커녕 입술을 잔뜩 빼물고 눈을 흘겼다.
엄마는 금방일 줄 알았는데 걸어내려오려니 너무 멀어서 오래 걸렸다는 설명 끝에, 다음에도 또 케이블카 혼자 탈래? 라고 물으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을 겪기는 했지만, 다섯식구는 손에 손을 맞잡고 나란히 남산 입구 길을 내려오며 또 다음 나들이를 꿈꾸었다. 


---
남산 케이블카가 수십년만에 새것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니 또 문득 떠올라,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남산 옆을 지나간다거나 이야기 도중 남산이 언급될 때 늘 되풀이되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적어보았다.
사실 나는 저 날을 기억하지 못하며, 전부 엄마 아빠한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다. 나름 꽤나 놀랐을 법한 동생녀석도 그날의 기억을 갖고 있진 않는 듯하다.  
저 날 이후 나는 거의 30년쯤 뒤에야 비로소 다시 남산 케이블카를 타보았는데, 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아이들 데리고 남산에 놀러갔단 이야기는 들어보았는데 케이블카 얘긴 없었던 걸 보면 안탔단 얘긴가? 자동차를 가져갔을 터이니 그랬음직도 하다.
어느해였나 송년모임에서 굳이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야경을 보자던 후배의 주장에 촌스럽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안 그랬으면 새것으로 바뀌기 이전의 케이블카를 타볼 기회를 영영 놓쳤겠구나 싶어 새삼 고맙다.
Posted by 입때
,

추운 건 싫다

투덜일기 2008. 11. 22. 11:15

갑작스레 영하로 뚝 떨어져버린 며칠 동안 차렵이불을 두 개 덮고 잤다.
원래 한겨울 용 이불은 퍽이나 두텁고 폭신한 무명 솜이불인데 12월도 되기 전에 그 이불을 꺼낸다는 건 죽도록 싫은 겨울이 벌써 완연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일부러 참았다.
원래 바닥생활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추위에 워낙 민감하고 싫어해서 도저히 침대생활은 자신이 없다.
옥매트나 전기담요를 깐다는 둥, 거금을 들여 돌침대를 샀다는 둥 침대 애호가 지인들의 겨울나기 방법을 들어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따땃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는 안락함을 포기할 수가 없고
굳이 겨울이 아니더라도 침대에 누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론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내가 아파트를 싫어하는 이유엔 따뜻하지 않은 방바닥도 포함된다. 분명 실내 공기는 따뜻한데 바닥엔 별 온기가 없는 아파트의 방들... 참말로 정이 안간다. 
지은지 30년 가까이 됐어도 연탄 보일러, 기름 보일러를 거쳐 가스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낡은 우리집은 방바닥이 얼마나 따끈따끈한지 모른다. 물론 아파트보다야 외풍이 있어서 화장실과 마루는 춥지만, 조카들이 겨울이면 수시로 찜질방 놀이를 생각해낼 만큼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엎드려 귤을 까먹으며 책을 읽거나 TV를 보며 등을 지지는 재미를 선사하는 방구둘의 온기는 그나마 견디기 힘든 계절의 버팀목이다. 

하기야 방바닥이 아무리 따뜻해도 추운 걸 못참는 내가 또 다시 낡은 이 집에서 올 겨울을 나려면 두꺼운 이불은 필수이니 다음번에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군말없이 한겨울용 솜이불을 꺼내 덮을 작정이지만
당분간은 차렵이불을 겹쳐덮는 걸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추위만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내가 이불 두장을 겹쳐덮고 잔다고 하면 지인들은 퍽 의아해한다. 자다가 보면 이불이 서로 따로 놀기 마련일 거라나. 하지만 잠버릇이 얌전한 편인 나는 자고 일어나서도 이불이 늘 그대로다. 어쩔 땐 잠자는 공주 자세로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잠들었다 그대로 깨어날 때도 있다. -_-; 자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도 그리 건강한 수면법은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나는 자면서 크게 뒤척이거나 돌아다니지 않는다.

얼마전 잠버릇 험한 조카들이 하도 이불을 차버려서 감기에 걸렸다는 올케의 얘기를 듣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어렸을 때도 이불을 차버리지 않았는지.
엄마의 얘기를 들으니 나도 어려선 이불을 차버리고 잤단다. 그래서 엄마가 중간에 늘 다시 덮어줘야 했다고. 그 말을 들으니 이불을 차버리고 추워서 바들바들 떨다 이불을 덮어주시는 부모님의 손길에 잠결에도 행복해 했던 느낌이 아련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한방에서 나란히 잠을 잤기 때문이다.
가끔 정민공주가 와서 자고 갈 때면 나는 거의 잠을 설친다. 험악하게 돌아다니며 자는 녀석을 다시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무수리의 밤을 보내야하기 때문인데, 어려서부터 대부분 따로 재우는 요즘 아이들은 자다가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질 무렵 엄마가 다시 이불을 꼭꼭 여며주는 손길의 기쁨을 모르고 살겠구나 싶은 것이 좀 안타깝다. 물론 침대에서 이불을 차버려 차가워진 몸으로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면서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잠꾸러기 공주는 나랑 잘 때도 고모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건 말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매일 자다말고 새벽에 아이들 방에 건너가 이불을 덮어주려고 일부러 깨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불 차버리고 자도 될 만큼 난방온도를 심하게 올리는 것 역시 안될 일이니, 잠버릇 심한 조카들의 겨울나기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풍요로워져서 좋은 것도 참 많지만, 온 식구들이 한방에서 겹쳐자던 불편한 어린시절이 요즘 조카들의 편한 삶보다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오로지 따뜻한 이불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운 걸 싫어하는 마음은 똑같지만 그때의 추위가 지금보다 훨씬 혹독했던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과거와 추억만 바라보며 사는 건 늙어감의 징후라고 했거늘, 요즘 왜 이리 옛날 생각만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추운 건 싫다는 얘기.
Posted by 입때
,

연필이 좋다

놀잇감 2008. 11. 20. 18:08

문방구를 사모으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취미다.
오래 전엔 눈가가 달착지근 아련해지는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모으던 때도 있었고,
수첩류와 무지공책, 예쁜 볼펜, 스티커, 메모지 따위를 주섬주섬 사모으던 시기를 거쳐
요샌 뭐든 주제를 정해 온갖 문방구류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주제를 자전거로 정하긴 했지만 아직 '모았다'고 할 만큼의 아이템을 마련하진 못한 상태.
자전거를 장만해놓고도 게으름 탓에 제대로 타지 못하는 죄책감을 은근히 다른 소비 욕망으로 떠넘기려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자전거 그림이 들어간 문방구를 유심히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눈에 띈 물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출처: 텐바이텐 all rights reserved by gongjang

자전거 그림이 들어갔대서 무조건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자전거의 환경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아 재생신문지로 흑연을 말아 연필을 만들었대고, 연필이 담긴 종이 케이스도 접착제 대신 실로 박았다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성스러웠다.
사실 자전거 그림은 약간 성의가 없게 느껴져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풍은 아니지만 슬슬 휘갈겨도 잘 써지는 연필심의 부드러움과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돌돌말린 연필밥이 내 마음에 꼭 들어서 요샌 뭐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연필을 사용한다.

모름지기 연필은 연필깎이로 둘둘 돌려 갈아놓는 것보다는 일일이 칼로 약간 기름하게 깎아 세로 결을 살려놓아야 내 마음에 꼭 드는데, 이 연필은 나무가 아니라 칼날이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앙증맞은 연필깎이도 하나 장만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연필깎이는 어디까지나 이 연필 전용이고, 나머지 연필들은 죄다 칼로 깎아쓰고 있는데 전동이든 수동이든 연필깎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연필을 칼로 깎아 쓴 게 언제인지는 돌이켜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미제인지 독일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주물(혹은 무쇠?)로 된 투박한 수동연필깎이가 있었다. 원래 책상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여서 아빠는 둥근 쇳덩어리 같이 생긴 그 연필깎이를 두툼한 나무토막에 못으로 고정시켜주셨는데, 우리 삼남매는 연필을 깎을 때면 양발로 그 나무토막의 양 귀퉁이를 누른 뒤 구멍에 연필을 꽂고 한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 다음엔 플라스틱으로 된 집 모양의 연필깎이도 생겨났던 것 같다. 연필을 꽂는 구멍에 집게 같은 것이 달려 그걸 젖히고 연필을 꽂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이제 양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고 한손으로 연필깎이 꼭대기를 지그시 누르며 손잡이를 돌리면 됐다.
물론 몇십원짜리 휴대용 연필깎이를 늘 필통에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도 아이라이너 전용으로 사용되는 손가락마디 만한 소형 연필깎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형이든 대형이든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연필이 깎였을 때 빼지 않으면 연필 한 자루를 금방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기계식 칼날이 싫기도 했지만, 나는 잘 드는 칼로 사각사각 연필을 돌려가며 나무를 벗겨내고 마지막에 심을 너무 가늘지 않게, 적당한 길이와 두께로 깎아놓아야 성에 찼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은 연필 다섯자루를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키 순서대로 넣어놓으며 몹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연필의 질이 형편없었다. 심이 골아서(자꾸 떨어뜨린 탓이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도 툭툭 부러져 나가는 연필이 흔했고, 재질과 색깔이 다른 나무를 붙여놓은 연필을 깎다보면 결이 이상해 깎이는 게 아니라 나뭇결을 따라 쪼개져 흑연심이 뭉텅 드러나는 연필도 있었다. 겉으로는 HB라고 적혀 있어도 심이 너무 단단해 색도 흐리고 걸핏하면 공책을 찢어먹는 연필도 종종 만났다. 그러다 겉모습도 매끈한 독일제나 잠자리가 그려진 일제, 하얀 지우개가 끝에 달린 노란 미제 연필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도 좋았지만 칼날 끝에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듯 깎이는 삼나무 재질(국산연필보다 심히 부드러운 나뭇결이 신기해 나중에 알아보니 삼나무라고 했던 듯)의 연필밥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문지를 떡하니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묘미는 나만이 즐겼던 것일까?
고모부가 출장에서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 세트엔 작은 연필깎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예쁜 색심까지 날카롭게 깎이는 게 아깝고 싫어서 언제나 칼로 색연필을 깎았는데, 특히 색연필을 깎고 나서 모인 연필밥은 너무 예뻐서 단숨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통에 모아두기도 했었다. +_+

하지만 연필 깎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된 건 분명 국민학교 고학년 때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전엔 연필깎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필깎는 칼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한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이었기 때문이다. 휘청휘청 얇고 너무도 예리해서 나에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으로 잘라(쓰다가 반쪽으로 잘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연필을 솜씨 좋게 깎아주던 최초의 손은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모든 재주에 능하셨던 한량 출신의 할아버지는 서예도 일품이고 한시도 읊으시고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셨으니, 그까짓 연필 정도 깎는 것이야 우스우셨을 게다. 그리고 짐작컨대 연필깎이에서 나오는 방정맞고 짤뚱한 연필 모양에 비해 약간 길쭉하고 늘씬한 느낌의 연필을 깎아내는 나의 취향은 할아버지한테서 비롯된 듯하다. 나와는 겨우 아홉살 차이가 나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우리 막내고모가 깎아놓은 연필 모양도 내 솜씨와 비슷한 걸 어른이 된 후에 깨달었는데, 그땐 그게 고모를 우러러보던 어린 조카의 무의식적인 모방이라 여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 막내고모와 내가 둘 다 연필깎기를 제대로 배운 인물이 할아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너무 작아서 할아버지가 놓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은 언제나 요술을 부리듯 일정한 길이로 깎인 늘씬한 연필을 탄생시켰다. 도루코 면도날 다음으로 쓰인 칼은 역시 도루코에서 나온 문방구용 칼이었는데 칼날이 좀 더 단단하고 윗부분엔 알루미늄으로 덧씌워 손으로 잡고 쓰기에 편하게 생겨먹은 그 칼도 역시나 작아서,  할아버지댁에서 분가해 나온 부모님과 살던 저학년 때엔 엄마나 아빠가 내 대신 연필을 깎아주었던 것 같다. 삼남매의 연필을 깎아주기가 번거로워져서 부모님이 연필깎이를 장만했을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일본에서 대거 수입된 앙증맞고 예쁜 샤프펜슬에 혹해 연필을 멀리했고 수학이 아닌 한 공책에 쓰는 필기도구도 볼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추억이 덜하긴 하지만, 특활로 미술반 활동을 했으므로 누가 뭐래도 데생 연필은 질 좋은 나무와 흑연이 들어있는 걸 골라 정성스레 칼로 깎아 갖고 다녔고 심이 물러 잘 부러지는 4B, 2B 연필 하나를 제대로 사겠다고 큰 문방구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때는 연필과의 완전 절교 시기였고, 나의 연필 사랑이 다시 불붙은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의류회사의 서울 구매사무소라는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처음 사무실은 대단히 허름했는데
놀랍게도 메모지와 연필, 볼펜, 노트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뉴욕 본사에서 보내준 것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허영심이라 실소가 나오지만, 어쨌든 일년에 두세 번 한국에 들르는 사장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사무용품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인간이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특히 사장이 하얀 지우개가 달린 노란 미제 연필로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품함엔 절대로 연필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인간이 일년에 쓰게 될 연필이 한자루나 될까말까 한데, 본사에선 분기별로 연필을 비롯한 사무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으니 참 웃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사무용품 사물함에 들어 있는 갖가지 문방구류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회사 로고까지 인쇄해 넣은 전화 메모용 포스트잇도 좋았고, 대학때 즐겨쓰던 빅볼펜과 노란연필을 마음껏 쓰는 것도 좋았다. 
특히 팩스 비용 최소화를 위해 발신 팩스는 한꺼번에 타이피스트에게 타이핑을 시켰는데
그 전에 이면지에 초고를 쓸 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듯 다들 연필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짧은 영어로 통신문을 작성하려니 모두들 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답안을 작성하듯 정성을 들였던 게 아닐까. ^^
암튼 볼펜과 연필, 갖가지 크기의 노란색 메모패드, 각종 포스트잇은 집에도 가져다놓고 썼는데
그 회사를 관두고도 몇년동안은 그때 집어온 메모패드와 노란 연필을 아주 요긴하게 집에서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

직장생활을 관두고 나서 만날 컴퓨터와 씨름을 하던 내가 다시 연필깎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역시 조카들이 생기고부터다. 우리 조카들은 넷 가운데 돌잡이에서 세 녀석이나 연필을 잡았을 정도로 아기때부터 연필을 좋아했고 나는 조카들이 해놓은 의미없는 낙서라도 그저 대가의 작품인 양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연필을 깎아 그들에게 바쳤다.

마분지에 연필. 정민공주 5세때 작품


그런 정성을 들이면 이런 그림도 간간이 하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언젠가 내가 기분전환 삼아 파마를 한 다음에 그려달라고 졸라서 얻은 건데, 나중에 정민공주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전시하려고 고이 간직해두고 있다. ㅋㅋ

암튼 나는 요즘 마냥 연필이 좋다.
조카들이 쓰다가 두고 간 동아니, 모나미니 하는 알록달록한 연필들이 벌써 죄다 몽당연필로 변해버렸지만 좀체 버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세살 된 조카의 손엔 몽당연필이 또 제격이기도 하고, 모나미 볼펜 몸통을 끼워 하나쯤은 꼭 들고 다니던 몽당연필의 추억 때문에라도 최대한 끝까지 써볼 작정이다.
물론 자전거 그림 뿐만 아니라 돌고래 무늬와 아무 무늬없는 나무색 연필, 단순한 느낌의 검정 연필도 기어이 사들였다.
검정 나무로 된 연필은 아마 또 칼로 연필을 깎아놓은 연필밥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 같아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글씨체가 부끄러워 요샌 뭐든 손으로 쓰는 걸 두려워하게 되는데 사각사각 소리도 경쾌한 연필로는 연애편지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지 보낼 연인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다.

Posted by 입때
,

맘마미아

놀잇감 2008. 9. 25. 21:32


영화본지 일주일이 지나 그 감동이 이미 가물가물해지려고 하고 있으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어서 끼적여야겠다.
뮤지컬 <맘마미아>는 본 적이 없다. 아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 뮤지컬이 몹시 보고싶으면서 동시에 어쩐지 꺼려지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섣불리 뮤지컬을 보러갈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집에 전축은 없고, 카세트플레이어와 라디오로만 음악을 듣던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아버지가 장만하신 워크맨으로 이른바 <스테레오> 음악을 처음 영접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순간 내 귀에 울려퍼졌던 노래가 바로 아바의 주옥같은 명곡들이었다.
왼쪽 귀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귀로 뇌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오묘하고 강렬한 스테레오 사운드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삼남매는 앞다투어 서로 음악을 듣겠다고 줄을 서다시피했다.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폴모리아 악단의 다른 영화음악들은 비교적 따분하게 생각되던 반면, 아바의 음악들은 열세살 짜리 계집애가 들어도 마냥 좋고 신이 났다.

그런데 그 소중한 아바의 명곡들로 만든 뮤지컬이라니... 뮤지컬 배우들이 과연 그 아름다운 <오리지널> 음악들을 제대로 소화나 할 것인가, 겁이 날 정도였고 성량 떨어지는 배우들이 노래들을 망치면 막 화가 날 것 같았다. 더욱이 스무살 된 딸을 결혼시키는 중년의 주인공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었고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기도 했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의 공연이 왔을 때도 나는 줄곧 외면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지들이 어떻게 아바의 노래를 제대로 표현하겠어, 라며. ^^;
물론 내심으론 뮤지컬 맘마미아에 대한 혼자만의 상상과 기대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배우들은 입만 벙긋거려 립싱크를 하고, 아바의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식으로.

그러다 영화 맘마미아의 소식이 들려왔다. 주인공이 메릴 스트립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드디어 맘마미아를 볼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캐스팅엔 심히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영원한 나의 미스터 다아시 콜린 퍼스까지 나온다는데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했던 대로 피어스 브로스넌의 노래솜씨는 아슬아슬했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자연스레 어우러진 소중한 아바의 노래들은 전혀 훼손된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그간 뮤지컬 맘마미아를 멀리 했던 내 편견이 전혀 근거없는 아집이었을 것이다.
스무살 소피는 매우 사랑스럽고 예쁜데다 가창력도 뛰어났으며, 메릴 스트립은 연기로든 노래로든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아.. 나도 메릴 스트립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늙어야 할 텐데!)
아참, 콜린 퍼스의 노래 솜씨는 세 미중년 가운데 단연 돋보일 정도였고, 뱃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리드하는 장면은 남들에겐 몰라도 나에겐 그저 흐뭇한 백미였다. 
게다가 그리스와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은 또 어떻고!! +_+
영화관을 나서던 나는 입으로는 Thank you for the music을 흥얼거리며, 머릿속으로는 어서 지중해를 가봐야해, 그리스를 가봐야해... 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아바의 추억 때문에 더욱 점수를 많이 땄을 수도 있지만, 내겐 정말 좋았던 영화.
DVD가 나오면 당장 살 작정이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