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사랑'에 해당되는 글 89건

  1. 2007.09.17 예상대로 4
  2. 2007.08.23 6박7일 12
  3. 2007.05.05 부모 노릇 7
  4. 2007.04.25 산행대회 9
  5. 2007.01.29 찜질방을 경험하다 8
  6. 2007.01.19 장 뒤뷔페전 그 두번째 6
  7. 2007.01.02 고모의 딜레마 5
  8. 2006.11.19 드라마가 뭐기에 2
  9. 2006.10.19 요즘 아이들 3

예상대로

투덜일기 2007. 9. 17. 23:29
조카들은 고모의 헤어스타일 변신을 마구 비웃어댔다. ㅜ.ㅜ
하필 작은올케도 미용실에 가서 추석맞이 파마를 했다는데
작은엄마는 예쁘지만 고모는 이상하다고 정민공주 등이 깔깔대며 놀렸다.
심지어 짖궂은 정민공주는 "이상한 꼬불꼬불 머리를 한 아줌마 같은 고모!"라고
부르기까지...
늘어지는 귀고리와 목걸이, 은색 반짝이 의상으로 최대한 머리를 커버하려고 했던 나의
노력에 대해서도 "머리가 이상하니까 큰 귀고리랑 목걸이를 했구나! 근데 다 보여, 고모!"라고 일갈했다. 흑..

사실 동생들은 일주일전까지 내 몰골이 하도 추레했기 때문에 훨 나아졌다고 위로했으나
그 역시 나에겐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5살된 조카 지환이는 나를 이런 모습으로 묘사했었다.

아이들 눈에 비친 내 머리가 과연 얼마나 이상한지 파악해보고자
세 조카들에게 제발 고모 좀 그려달라고 부탁했더니
정민공주는 아예 보이코트, 6살된 녀석은 차마 그림이랄 수도 없는 낙서를 해놓고는 이상해진 고모라고 킬킬댔는데, 5살난 지환이가 그나마 고모 머리가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위로해주면서 그림도 꽤나 귀엽게 그려주었다.


결국 나는 다음날까지 샴푸하지 말라는 미용사의 말을 무시하고
미용실에서 돌아온 날부터 마구 감아주고 있는데, "탄력있는 컬"을 위해 단백질 파마를 권한 때문인지 별로 잘 안펴졌다. 쳇...

한동안은 계속해서 화려한 의상과 악세사리로 가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을듯;;
그놈의 빌어먹을 미용사 추석 연휴동안 배탈이나 나라!
Posted by 입때
,

6박7일

삶꾸러미 2007. 8. 23. 02:07

고된 6박7일을 보내고 나니 쌓인 피로와 더불어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렸는지
저녁 먹자마자 식곤증으로 쓰러져 밤중까지 낮잠 아닌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6박7일은 원래 3박4일을 목표로 우리집에 다니러왔던 정민공주의 방학행차 날수다.
돌이켜 보건대, 온 몸을 다바쳐 공주를 보필해야 하는 무수리에게 7일은 정말 힘겨웠다.
3박4일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_-;;
물론 나도 어린시절 방학때면 당연히 일주일씩 방학숙제 싸들고 할머니댁에서 지내는 걸 중요한 전통처럼 되풀이했고, "우리 집에도 제발 와달라"(!!!)고 특별히 부탁하는 고모들 집에도 이틀쯤 가서 머물곤 했다. ㅎㅎ
이상스레 딸이 귀한 집안이라 고모들이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사내녀석들과 달리
얌전하고(벗은 옷과 잠옷 같은 건 늘 머리맡에 얌전히 개어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끼니 땐 일손을 돕는 시늉이라도 하는(가령, 수저 놓기 같은;;) 나를 무척 예뻐했던 기억이 난다.

하. 지. 만.
정민공주는 무수리과에 속하는 나와는 전혀 다르다. ㅠ.ㅠ
샤워하기 전에 벗은 옷은 거실에 하나 방바닥에 하나씩 마구 떨어져 있기 일쑤고
(집에선 당연히 제 손으로 집어 빨래통에 갖다 넣는다는데, 우리집에만 오면 손가락 까딱 안한다. 어흑...) 수저 놓기를 도와주기는커녕, 밥이라도 잘 먹어주면 내가 고마워해야 한다.
그것도 공주가 '주문'한 특별메뉴(첫날은 짜장덮밥, 둘쨋날엔 카레라이스, 셋쨋날엔 매운고기[제육볶음을 의미한다]... 등등)를 해다가 바치면서 말이다.
머리도 매일 다른 스타일로 땋거나 묶어주어야 했고, 연일 즐겁게 놀아주거나 방학숙제를 도와야 했고, 어찌나 말을 안듣고 고집을 부리는지 거의 온종일 잔소리를 하며 싸워야 했는데 대부분은 내가 졌다. 으으으

사정이 이러니 조카들 버릇은 고모가 다 버려놨다는 핀잔을 10년째 듣고 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정민공주에 관한 한 할아버지와 고모에겐 '안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정말로 불가능한 게 아닌 한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었던 게 사실이니까.
예를 들어, 집에 사다 놓은 삼겹살이 없는데도 아침 댓바람부터 매운고기가 먹고 싶다며 공주가 앙탈을 부리면 공주의 할아버지는 얼른 나가서 삼겹살과 깻잎을 사오시고, 무수리 고모는 득달같이 고추장양념을 해서 만들어 먹이는 식이었다. (내가 미쳤지...)

처음 3박4일 예정이었다가 공주의 체류기간이 길어진 건
중간에 우리 아버지 49재도 있었고, 바이올린 교습이랑 그림공부하러 가야하는 날이 포함되는 바람에 공주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고모랑 하루종일 놀 수 있는 날이 단 하루 밖에 없어서 억울하다"고 제 엄마에게 항변했기 때문이었다.
제딴엔 할일 다 하고 숙제할 것 다하면서 지내는 게 억울했던 모양인데, 하필 개학을 코앞에 둔 시점에 다니러 와서 고모가 숙제까지 챙기느라 더욱 뼈빠지게 힘들었던 건 안중에도 없다. 쳇.

물론,
일주일 동안, 49재날을 제외하곤 정민공주 때문에 두 모녀가 눈물바람을 비칠 새도 없이 분주하고 시끌벅적했고, 울 엄만 난데없이 손녀딸과 함께 일요일 아침 조조영화를 보러가기도 했다. 엄마의 마지막 영화관람이 <태극기 휘날리며>였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귀차니스트 할머니에겐 실로 몇년 만의 쾌거이기도 하다. ^^;
그리고 사실 나 역시 귀찮고 힘들고 피곤하면서도, 도도한 공주를 보필하는 일은 순간순간 재미있고 뿌듯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말씀이 "손자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고 한다는데
고모 무수리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왕비마마 보필도 지치는데 공주까지 모시느라 고되고 힘들었으므로, 왕비마마까지 대동하여 친히 공주를 자택까지 모셔다놓고 돌아오는데 어찌나
마음이 홀가분하던지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ㅋㅋ

그런데 못말리는 건, 벌써부터 공주가 보고싶다는 것. +_+
방학 전부터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만났고, 이번엔 아예 6박7일을 시달리고도 공주의 전화목소리를 들으니 왈칵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흐이구...
확실히 나는 못말리는 무수리 기질이 철철 흐르는 고모임에 틀림없다. :)

Posted by 입때
,

부모 노릇

삶꾸러미 2007. 5. 5. 00:56

워낙 옛날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아기들을 보면 절대 가만 두지 못하고 아이와 눈을 맞춘  뒤 재미난 표정을 짓거나 구슬러서 아가들을 웃기거나 관심을 끌곤 했다.
최대한 옆사람들이나 애 엄마한텐 안들키게 하느라 노력하지만, 아이가 까르륵 웃어버린다든지 하면 좀 곤란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20대쯤엔
결혼은 생각 없어도 어떻게든 애만 하나 낳아서 키우는 건 어떨까..도 꽤 진지하게 (?)
고민했더랬다. ㅋㅋ
남의 애들도 예쁜데 내 애는 오죽 예쁠까..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것.
물론 막연하게 홀부모의 힘겨움이라든지 아이가 받아들여야할 충격 같은 문제 때문에 그냥 아련하게 품은 '바람'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는데
드디어 내게도 '조카'라는 존재가 생기고부터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첫조카는 탄생 이전부터 우리 가족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우린 올케의 출산 이전부터 아가를 위해 돌아가면서 비디오를 찍고 (예비 삼촌인 막내동생은 기타 치고 노래도 불렀고, 나는 태명이 '짱이'였던 아가가 태어나면 고모가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장담했다. *_*)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출산준비물을 보러 다니고 장만하고...
그랬다.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생활을 했던 올케 대신 주중엔 작은 이모가 첫조카를 돌보고
주말엔 큰동생네가 아예 우리집에서 기거하며 조카를 돌봤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아기의 24시간을 옆에서 목격하고 육아에도 참여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거의 3, 4시간마다 우유를 먹이고, 수시로 기저귀를 갈고,
안고 흔들어서 재우고, 매일 목욕을 시키고,
갑자기 고열이라도 나면 한밤중에 응급실로 뛰어가고
정해진 예방주사를 맞추러 다니고...

큰동생이 특수한 직업을 가진 터라 철야작업이나 외박도 수시로 했기 때문에
조카 병원행은 올케와 함께 주로 내가 보필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나나 울 아버지가 안아주면 아기가 더 빨리 잠들기 때문에 서로 솜씨자랑 하느라 나서기도 했지만,
특히 그땐 내가 집에서 번역을 할 때라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동생들보다는,
밤중에 일하고 있던 내가 우유를 타거나 보채는 조카를 달래는 게 너무도 당연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드디어 나도 깨닫게 된 거다.
아.. 육아는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하고.
겨우 주말에 이틀 조카와 함께 지내면서 깨달은 육아의 어려움은 조카가 점점 자라
유아원을 다니고, 유치원엘 들어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더니
언제부턴가는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특히 엄마들이 너무도 존경스러웠다.

얼마 전 친구 하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를 낳은 뒤 심한 우울증으로
아기를 몇달간 아예 떼어놓고 본인의 몸과 마음부터 추슬러야 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는데
그 마음이 나도 백번 이해가 되었다.
어느것 하나 혼자 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조그마한 새생명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엄마노릇을 오로지 본능과 의무감으로 해내야 한다는 건
초인적인 희생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디 갓난아기 뿐인가.
초, 중, 고, 대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식이 번듯하게 홀로서는 순간은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직장인이 되어 제 밥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해도, 결혼이란 큰 행사를 앞두곤 여전히 부모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제도적 현실은 변하질 않고 있고(간혹 혼자 힘으로 버젓이 혼례를 치르는 장한 지인들도 봤지만, 남동생들 보니 전셋값이라도 장만할 때까지 여자친구 기다리게 했다간 끝이 없겠더라), 나만 해도 부모님이 결혼이외 독립은 죽어도 안된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지만 사실 독립하라고 등 떠밀어도 선뜻 나가지는 못할 형편 아닌가! *_*
심정적으로는 내가 이제 노부모님 모시고 사는 거라고 떵떵거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명 내가 부모님께 얹혀 살고 있는 게 맞다.

설령 결혼이나 독립으로 부모님 그늘을 벗어났다고 해도
별안간 겁이 나거나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 입에서 "엄마야!"라는 외마디가 나오는 한
엄마와 부모님에 기대는 우리의 마음은 여전한 거라고 여겨진다.
2년전 83세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워서 올해로 67살이나 먹은 딸(=울 엄마 말이다)은
아직도 몸이 심하게 아프고 힘들면 '엄마...'를 찾으며 울먹인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 대신 엄마를 토닥여주면서도, 은근히 구박한다.
"아니...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서도 엄마 김치까지 담가다 주면서 딸 챙기셨는데,  엄마도 나한테 씩씩하고 든든한 엄마가 돼 주진 못할망정 만날 왜 이리 엄살이야.." 라면서.
그치만 속으론 만날 병들어 비실비실한 엄마라도 내 곁에 있어주셔서 다행이라 여긴다.(아 물론 긴 병엔 효자 없다고 -_-;; 나도 힘들땐 별별 생각 많이 하지만...)
 


암튼 오늘 또...
자의식이 몹시 강한 조카 정민공주 때문에 저녁때 한바탕 집안에 난리가 벌어져
올케와 조카, 두 모녀를 어렵사리 화해시킨 후 집으로 돌려보내며
또 한번 부모 노릇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논리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기들의 부모 노릇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말귀가 통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부모 노릇은 정신적으로 힘들다더니만
정말로 훌륭한 부모가 되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특히 나처럼 덜떨어진 정신연령을 갖춘 이로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인듯...

이젠 절대로 내 입에서 "결혼은 말고 애나 하나 낳아서 키워볼까" 하는 만용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부모 노릇, 엄마 노릇 씩씩하게 해내고 있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늙은 딸 보필에 오늘도 여념 없으신 나의 부모님께
그저 갈채를 보낼 뿐이다.

Posted by 입때
,

산행대회

삶꾸러미 2007. 4. 25. 17:21

오늘 오후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발신번호는 정민공주네 집 전화.
"XXX씨 핸드폰인가요?"
공주는 그럴듯하게 목소리를 바꿔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금요일에 시간이 있으시냐고 다시 묻는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금요일에 학교에서 "산행대회"가 있는데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도 모두 같이 가도 된다고 했단다.
제 엄마가 도시락은 준비할 터이니, 고모도 같이 산행대회에 참석하라는 것이 전화의 요지.

아...
이 고모가 얼마나 산에 가는 걸 싫어하는지 공주는 잘 알고 있건만...
(반면에 공주는 등산광이신 할아버지와 제 아버지 따라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등산을 즐기기 때문에 10살임에도 앙증맞은 분홍색 등산화까지 갖추고 있다;;)
과거 회사다니던 시절에 산으로 "강제" 야유회를 가면, 나는 당연히 산 아랫자락에서 기다리며 막걸리나 홀짝거리다 하산할 때 합류하는 부류였고, 산을 꼴딱 넘어 하산로가 달라지는 경우엔 강압적인 윗대가리들한테 참석 여부만 확인 시킨 뒤 대번에 줄행랑을 쳤더랬다.
물론 뭐, 부모님의 부탁으로 꽃구경이나 단풍구경 따라간 산행에선 투덜대며 등산을 하기도 했지만, 자진해서 산에 가자고 말하는 건 내 평생 없을 거다.

7시 기상.
7시 30분까지 씻고 준비.
8시까지 정릉 자기네 집으로 올 것.
8시에 동생 지환이를 깨우고 나서 공주와 함께 아침을 먹을 것.
8시 20분. 동생 지환이를 고모가 어린이집 차에 태워준 뒤
8시 30분. 공주, 엄마와 함께 학교로 출발. (또는 산행 집결지인 북한산 매표소로 출발)

이상은..
휴대폰이 뜨끈뜨끈해질 정도로 오래오래 통화를 하며 공주가 고모 무수리에게 하달한
산행대회 아침 스케줄이다.
공주는 생각 좀 해보겠다는 고모에게 '알았다'는 답을 들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 나는 얼렁뚱땅 금요일에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ㅠ.ㅠ

아 못살아...
난 정말 가기 싫은데.
산을 미치도록 좋아하거나 백수가 아니고서야 평일에 조카 산행대회 쫓아가는 고모가 어디 있다고!
제 엄마가 장보러 간 사이에 공주 혼자 일을 꾸민 것인지, 올케는 좀 전에 전화해서
정말 올 수 있겠느냐고 미안한 듯 묻는다. 같이 가주면 공주야 더할 나위없이 기뻐하겠지만;;
아침에 잠드는 인간이 아침 생새벽부터 산을 오른다는 건 턱도 없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
막가파 공주는 무조건 자기 말대로 금요일에 1시간만 자고 (내가 6시에 잠든댔더니만;;)
일어나 일찍 오라고 윽박을 지르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어쩌다가 나는 공주 조카에게 아무것도 거부하지 못하는 고모가 되고만 것일까..
으휴...

어떤 핑계를 대야 화를 모면하고 금요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지
이웃분들의 의견을 공모합니다. 어흑...



Posted by 입때
,

혹자들이 찜질방을 '복합가족놀이공간'이라고까지 극찬하는 말을 들었지만
난 워낙 뜨거운 곳을 잘 견디지 못할 뿐더러
남들이 입었던 옷을 빌려입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찝찝한 데다(언젠가는 세탁 부실한 찜질방 옷에서 '이'가 옮았다는 엄청난 소동도 들은 바 있었으니!)
찜질방이든 사우나든 일단 '대중목욕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단체 누드'의 민망한 순간을 언제든 겪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껏 단 한번도 찜질방엘 가본 적이 없었다.
사우나야 가끔씩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다지만 아무래도 찜질방은 떼로 몰려가 즐겨야 하는 곳일 터인데, 그간엔 고맙게도 찜질방행을 강요하는 가족도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찜질방의 장점에 대해선 익히 듣고는 있었다.
온가족이 총출동해서 온종일 놀다가 그 안에서 한끼 정도 해결하고 올 수도 있으니
주부들이 특히 좋아하며
심지어는 엄마 따라 '맛을 들인' 5, 6학년 정도 여자애들이 시험 끝난 날 따위에
보드게임이나 퍼즐 같은 걸 싸들고 지들끼리도 찜질방엘 간다더군.
하지만 24시간 영업을 하는 탓에, 집 나온 청소년 또는 어른들의 값싼 쉼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수많은 종류의 찜질방 가운데  이불이나 거적을 덮어야 하는 일부 서늘한 방이나 수면실에선 차마 눈 뜨고 못 볼 짓거리들을 해대는 젊은/혹은 늙은 연인들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공연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글우글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광경을 TV로 볼 때도 내게는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것 같고, 뻔들뻔들 땀을 흘리면서 '건강 데이트'를 한다는 연인들의 이야기도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런 내가 전격적으로 찜질방엘 가보게 된 것은 순전히 조카들 덕분이었다.
토요일에 와서 하루 자고 가기로 한 조카들은, 아파트에서 침대 생활을 하는 자기네 집과 달리 주택이라 방바닥이 뜨끈뜨끈한 우리집 방에 이불을 깔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선
대뜸 '찜질방 놀이'를 하자고 졸라댔다. ㅡ.ㅡ;;

아이 따뜻해..라고 중얼거리며 요 밑으로 파고들어 나란히 누워있던 조카들은
나를 꼼짝도 못하게 눕혀놓고 각종 소꼽놀이 도구를 챙겨와선 '검은 계란'이라며
까먹으라고 했고, 연이어 식혜와 주스, 각종 과일도  날라다주었다(물론 다 장난감^^).
찜질방 경험이 전혀 없던 나와 달리, 조카들은 제 엄마아빠와, 이모들과 여러번 다녀본 품새였다. ㅋㅋㅋ

잠들기 전에도 '찜질방 놀이'를 더 해야한다고 난리를 치던 조카들에게
다음날 진짜로 찜질방엘 가자고 약속한 뒤 겨우 재운 터라, 걱정반 기대반으로 엄마 모시고
우리도 3대가 찜질방엘 진출했던 것인데...
일단 여자들은 무조건 분홍색 옷(그나마 울 엄마처럼 뚱뚱한 사람들은 흰색 티셔츠를 남자들과 공유하더군), 남자들은 무조건 청회색으로 구분시키는 성차별부터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나마 아이들은 모두 노랑색 옷을 나눠주기에 못마땅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일요일이라 빈 사물함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찜질방은 완전 만원이었고
구운 달걀과 음료수 하나를 사먹으려 해도 매점에 줄을 서야 했지만
그래도 할머니, 고모와 둘러 앉아 식혜에 '검은 계란'을 까먹으며 행복해 하는 조카들을 보니 나도 그럭저럭 즐거워졌다.

둥글게 이글루스 모양으로 입구를 만들어 놓은 여러 찜질방 입구엔 황금참숯방, 천연보석불가마, 황토소금방, 알프스아이스방 따위의 재미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온도가 심히 높고 거의 엉금엉금 기어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들어 놓은 불가마엔 들어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60도를 전후로한 찜질방은 뜨거운 걸 못견뎌하는 나도 제법 참을만한 수준이었다.

놀라운 건 그렇게 뜨거운 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을 자는 사람들!
그리고 드넓은 홀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딱딱한 목침을 베고 코까지 골며 자는 아저씨들.. 가끔은 어려 보이는 여자애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남들 발이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셈인데 어떻게들 그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는지 원...
맨날 혼자 자다가 조카들과 올케와 동침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나와는 참 다른 세상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방마다 다정스럽게 누워있는 연인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래도 대낮부터 심각하게 눈꼴사나운 광경을 연출하는 이들은 없어 다행이었다.

암튼 TV에서 본 것처럼 우리도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하나씩 쓰고 ^^;;
뜨거운 방에서 땀을 흘리고 나와선 아이스티와 녹차 따위를 마시며 탱자탱자 놀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후딱후딱 지나갔고, 사용료가 10분에 천원인 마사지 의자에 앉아 잠깐 마사지도 받고 나니 직업병인 어깨 결림이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마지막 목욕탕에선 장난감까지 싸들고 가서 마냥 놀 작정을 한 조카들을 말리느라
전투적으로 샤워를 마치고 후다닥 나와야했지만 ^^;;
난생 처음 겪은 찜질방의 경험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물론 누구든 같이 가자고 청하면 얼씨구나 좋아라 따라갈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몸이 찌뿌드드할 때, 번잡한 시간을 피해 가족들과 나들이 삼아 가보는 건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ㅋㅋ 그럼 결국은 나도 찜질방이 '복합가족놀이공간'이라는 데 동의한다는 건가?

그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찜질 가운이 촌스러운 분홍색이 아닌 곳이면 좋겠고 ㅡ.ㅡ;;
남녀차별없이 같은 색 옷을 대단히 깔끔하게 세탁해서 주는 곳이면 더욱 좋겠고
얼음 동동 띄운 수정과도 파는 곳이면 좋겠다! (어제 가본 그곳은 치사하게 식혜만 팔아서 맘상했다. 난 수정과가 더 좋은데;;)

아무려나 별것도 아닌 찜질방 탐방기 끝!

Posted by 입때
,

작년 연말에 뜻밖에 전시장을 찾았다가 대박을 만난 느낌이기도 했고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 세계 가운데 천진난만하고 색감이 화려하고 예쁜 그림이 너무도
많아 그림 좋아하는 우리 조카 정민공주도 좋아할 전시라는 생각에
공주를 대동하고 두 번째로 전시장을 찾았다.

나 역시 사람 없이 조용한 미술관 관람을 그 누구보다 즐기기에
지난번 강추위 속에 평일 야간 관람을 할 때가 더 좋긴 했지만
어린이를 위한 그림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도 나름 흘륭했고
그나마 방학 초기라 샤갈전 때처럼 와글와글 장터바닥 같진 않아 다행이었다.

마침 덕수궁앞에선 오후 수문장 교대식이 벌어지려는 찰나여서
공주는 몹시도 즐거워하였고...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선 '반드시' 궁궐도 꼼꼼히 돌아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결국 미술관 1, 2층 전체를 2번이나--한번은 우리끼리, 두번째는 어린이 작품설명하는 도슨트와 함께, 그리고 우를루프 전시관은 3, 4번은 봤을 거다--돌고 난 뒤에, 어스름녘 추운 날씨에 궁궐을 돌며 중화전, 함녕전 따위를 다 보고 다니느라 고모 무수리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ㅠ.ㅠ)

이 블로그엔 스킨의 특성상 웬만해선 사진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샤갈전과 더불어 2번이나 전시를 관람한 흔치 않은 경우라 자랑하고파서
무리를 무릅썼다.

자.. 보시라~


Posted by 입때
,

고모의 딜레마

삶꾸러미 2007. 1. 2. 22:29

원래 아기와 아이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내가 조카들을 이렇게 지독하게 사랑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부모자식간은 온종일 씨름하다 보면 미울 때도 있고 고울 때도 있지만
고모와 조카 사이는 잠깐씩 그리움을 달래며 예쁠 때만 보고 있으니 조카 사랑이 어떻게 보면
더 유난스럽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이야. ^^
아무튼...
올해로 무려 10살(!)이나 된 정민공주가 태어난 뒤로 난 참 못말리는 고모였고
7개월 된 지우한테까지도 고모는 도무지 안 되는 게 없는 인간이라 조카들 버릇을 완전히 망치는 공공의 적이라고 식구들한테 손가락질을 받는다.

식구들의 비난 속에서도 내심 나는 조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걸 다들 시기하는 것뿐이라며 흐뭇해 하는데,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어느덧 넷이나 되는 조카들한테 골고루 사랑받는 고모로 살기엔 이제 체력이 몹시 딸린다는 것이다.
아직 기어다니는 아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녀석들의 고모 독차지 경쟁도 만만치는 않다.
밥먹을 때도 저마다 고모 옆에서 먹겠다고 싸움을 벌이는 지경이니까..

동생들은 내가 매를 벌었다며 한편으로 고소해한다. ㅡ.ㅜ;;
너무 하자는 대로 다 하니깐 애들이 고모 알기를 우습게 알고 친구처럼 막 대한다나.

하지만 조카들 버릇을 망치고, 스스로 매를 번다는 비난을 듣더라도 나는 조카들이랑 최대한 신나게 놀아주고 싶고, 바라는 걸 들어주고 싶다.
집안에서 한 명쯤은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어른이 있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공룡 놀이, 자동차 놀이, 학교 놀이, 엄마 놀이, 크리스마스 놀이, 레슬링, 파워레인저 변신 놀이, 이야기 놀이, 그림그리기 놀이 따위를 열심히, 온 몸을 불살라가며 같이 한다.
그리곤 조카들이 돌아간 날 밤부터 거의 반몸살을 앓는다.

어제도 떡국 먹으러 다니러 온 동생들 식구가 온종일 먹고 놀다 돌아간 데다
방학 맞은 정민공주는 하룻밤 더 자고 가겠다고 나서서 1박2일간
훌륭한 고모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나니,
물집만 잡혔던 입술에 더하여 입천장이 헐고 입가가 빨갛게 찢어진 데다
삭신이 마구 쑤신다.
어제 엉긍엉금 기어다녀야 하는 동물놀이를 너무 오래 한 탓이다.

언제부턴가 나도 사랑스러운 울 조카들의 '고모, 놀자!' 소리가 제일 무섭다. ㅠ.ㅠ
하지만 요 녀석들은 벌써 그걸 알아차리곤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모네 집에 올라오자마자 소리친다.
"고모, 놀자~!"

동생들은 내 나이를 생각하라며 이제 그만 놀아주라는 데...
몸살을 앓을 땐 그래야겠다고 작심하면서도 막상 사랑스러운 녀석들의 얼굴을 보면
놀아달라는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어리석은 고모의 이 딜레마는 언제쯤이나 해결될 수 있을 것인지. 쯧쯧.

Posted by 입때
,

드라마가 뭐기에

놀잇감 2006. 11. 19. 02:25

주말에 고모한테 영어 배우러 왔던 조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 고모는 놀아주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콱 찍혀 있어서
영어공부할 땐 고모가 아니라 영어선생님이라고 아무리 세뇌를 시켜도 그게 잘 먹히질 않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영어공부를 해놓고 나서 놀라는 제 엄마와 고모의 당부에
겨우 9살짜리 조카가 자긴 꼭 <누나>라는 주말드라마를 봐야한다고 박박 우겨댔던 것이 화근이었다. ㅡ.ㅡ;;
조카는 지난주 일요일에도 드라마에 아주 '중요한' 장면이 있었는데 제 아빠 생일파티 때문에 온 가족이 모인 터라 못봤다며 돌연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영어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재방송을 보라 하니, 자긴 재방송 언제 하는지도 모르고, 제 부모가 그때 또 딴 걸 보면 자기는 계속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된단다....

결국, 드라마와 고모 중에서 더 중요한 걸 선택하라는 ^^;;
대단히 야비한 고모의 강요로 결국 조카는 '재미있게' 고모랑 영어공부를 하는 쪽으로 간신히 마음을 돌렸는데, 지나고 보니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나는 과연 몇살때부터 드라마에 심취했더라?? ㅡ.ㅡa
나 어렸을 때도 분명, 손창민과 강수연이 아역배우로 활약하던 어린이드라마에 푹 빠져
4차원의 세계며, 지구를 파멸시키러 날아온 우주 괴물 따위의 이야기에 몰입했던 것 같긴 하다. 특별히 교육이 엄한 집안도 아니었으므로 주말 저녁이면 달리 놀거리가 없어 TV 앞에 앉아 유명한 주말연속극 따위를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 함께 틀림없이 봤을 테고.

요새도 어린이용 드라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제는 우리 조카가 주로 12세 미만, 또는 15세 미만의 청소년은 시청지도를 바란다는 어른용 드라마를 보며 빠져든다는 점이다.
노래방엘 가도 조카가 부는 애창곡들은 대부분 제가 좋아했던 드라마의 주제가이고
하물며 제 미니홈피 배경음악도 그런 음악이다.

조카가 심취하는 문제의 그 드라마들은 처음에 제 엄마랑 같이 보면서 맛을 들인 모양이니
새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엔 명분이 서질 않는다.
옛날엔 다 봤는데 왜 이젠 안되느냐고 눈을 똑바로 뜨고 반박할 게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거의 주말마다 온 식구들 다 모여 저녁 먹으면서, 드라마광이신 울 엄마 때문에라도 빼놓지 않고 틀어놓는 TV도 문제다.
자녀교육 때문에  TV를 굳이 없애지 않는 한,
저녁 먹으면서 TV 연속극 보는 문화... 너무도 당연한 우리네 모습이 아닌가?

공중파에서 해주는 드라마 종류가 20편이 넘는다니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리저리 채널만 잘 돌리면 종류 다른 드라마를 하루 종일도 볼 수가 있다. 그게 바로 울 엄마의 낙이기도 하고.
지금처럼 달랑 세 식구 사는데도 TV가 셋이라 서로 시청권을 놓고 다툼을 벌일 일이 없을 땐 상관없지만, 예전엔 뉴스나 스포츠 중계를 보시려는 울 아부지와 드라마를 보시려는 울 엄마의 신경전이 더러 있었다. 물론 대부분 울 엄마의 승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럴 때마다 울 아부지는 만날 울고 짜는 뻔한 드라마가 뭐 그리 재미 있느냐고 타박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는 당신은 요새 외화 시리즈를 전문으로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을 아예 사수하다시피 고정시켜놓고 <맥가이버>, <미녀삼총사>부터 <CSI>에 이르기까지 섭렵하고 계신다^^)

아무튼 프로그램 개편이 되서 정붙이고 오래 보던 일일연속극이나 주말연속극 같은 것이 끝나기라도 하면 울 엄마는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 괴로워하다, 다시금 정붙이고 볼 수 있는 드라마를 애써 찾는다.

나도 울 엄마 수준은 아니지만 드라마란 마약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얼마 전 <연애시대> 같은 드라마나, 인정옥,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처럼
가끔 가슴이 찌릿찌릿 저려오는 공감을 안겨주는 주옥같은 대사가 일품이라든지
인생이나 사랑에 대한 '너무 뻔하지 않은' 성찰이 돋보이는 드라마는 본방 때 보고
재방송 또 찾아보고, 가끔은 케이블서 재탕해준다고 할 때도 얼씨구나 좋아라 하며 찾아보기도 한다.  
물론 시간 많고 여유로울 땐 별 시답잖은 드라마도 다 틀어놓고 보며
잘 생긴 남자주인공 때문에 헬렐레 나사가 풀려 침을 흘리기도 하고
연기든 캐릭터든 성에 차지 않으면 또 그런 대로 온갖 욕을 해대면서라도 시청률 올리기에 일조한다. ㅡ.ㅡ;;


마침, 바쁜 일도 끝내고 새로운 큰 일 시작을 앞두고 있는 약간의 휴지기를 즐기고 있는 요즘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드라마를 공중파 세군데에서 마구 틀어주고 있기에
몹시 신나하면서 리모컨 놀이를 좀 했는데, 그 묘미가 참으로 만만칠 않다!

개인적으로 소품 예쁘고 볼 거리 많은 드라마는 '이야기' 수준이 좀 떨어져도
죽도록 싫어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는 한 열심히 보는 편이라 ^^;;
<황진이>는 한 회 제대로 보고 나니 완전히 홀딱 빠져 기생들이 가체에 꽂고 나오는 떨잠 하나 비녀 하나에도 헤벌쭉 웃음을 흘리며 거의 중독 수준이 되어 버렸고,
같은 날 방송이기도 하고 워낙 내가 싫어하는 여배우들이 주인공이라 별로 잘 보게 될 것 같지 않은 타 방송사의 두 드라마도 이국적인 배경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서, 또한 영화 같은 인상적인 시퀀스에 이끌려서 눈여겨 보게 되었던 것.

얼마 전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여자와 드라마'의 상관관계를 다루며
전문가들이 전지구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여자들의 드라마 심취 이유를 설명했는데,
하루 평균 2만 단어를 사용하는 여성들의 언어 중심적인 두뇌 작용엔
대사를 매개로 서사가 이루어지는 드라마가 대단히 적합한 데다
(하루 평균 7천여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는 남자들에겐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드라마'가 대단히 피곤한 물건이기 때문에, 차리리 일방적인 정보 입력을 요하는 뉴스를 선호한다고)
남들의 인생을 관찰하는 경험이 여자들 사이에 커다란 동질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든 친근한 사람이든 '드라마'를 바탕으로 깊은 공감대 형성과 또 다른 대화의 장이 가능해진다다는 얘기였다.

유치찬란하다고 욕하면서도 굳이 또 그 드라마를 찾아보고 있는 나 자신을 그리 한심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홀로 씩 웃었는데,
12세 미만, 또는 15세 미만 어린이나 청소년은 시청 지도가 필요하다는 경고를 제작측에서 내놓는  그런 유치찬란한 드라마를 겨우 9살짜리 조카가 보면서 과연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고 어떤 대화의 장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인지... 그건 참말 모르겠다.

겨우 9살짜리가, 학교 가서 애들이랑 얘기하려면 <주몽>은 꼭 챙겨봐야한다고 하는 얘길 들으면 정말로 이 나라가 드라마 공화국이 틀림없는 것 같긴 한데,
가끔 나 역시 드라마에 심히 휘둘려 뒤끝이 긴 후유증에 시달리곤 하면서 과연 어떻게 현명한 드라마 보기를 조카에게 전수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려서부터 각종 드라마에 노출되었어도 이리 평범하게 살고 있으니
조카도 분명 제 앞가림 잘 하며 자라줄 것이라 별 고민 없이 믿어도 좋을까?

Posted by 입때
,

요즘 아이들

삶꾸러미 2006. 10. 19. 21:10
물리적으로는  옛날보다 훨씬 더 많은 풍요를 누리고 사는 요즘 아이들이
나는 좀 가엾다.
교육전문가들이 제 아무리 지나친 조기교육의 폐해를 강조해대도
요즘 엄마들은 '대부분' 백일 갓 지난 아이에게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고
백만원쯤 한다는 학비를 들여 영어유치원엘 보내질 않나
초등학생쯤 되면 온갖 학원으로 실어나른다.

어린아이들을 무조건 공부의 홍수 속에 떠밀어 놓고야 마음을 놓는 이상한 분위기가
몹시 못마땅해서, 나는 내 딸도 아닌 조카의 교육에 자꾸만 밤 놔라 대추 놔라 참견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 일주일 전부터 매일 시험준비를 하고 문제집을 풀고 그러는 건 말도 안되는 거 아닌가!? ㅡ.ㅡ;;
물론 세월이 엄청 흘렀으니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와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저학년땐 그래도 마냥 노는 게 삶의 중심이어야 행복한 아이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올케 말로는 우리 조카가 다른 집 애들처럼 선행학습을 시켜주는 보습학원에도 전혀 안 다니고 수학 학습지 하나만 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하단다. 헐...
(게다가 우리 정민공주는 ^^;;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다. ㅋㅋㅋ)

그래도 정민공주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니깐
태평하게 그냥 지켜보기나 하자는 내 말에 일견 수긍하면서도
(엇.. 이렇게 또 쓰고 보내 이런 내 참견도 올케한테는 시누이 시집살이가 되겠구나.. ㅜ.ㅡ;;)
주변 엄마들의 악착같은 자식농사에 자꾸만 자극받은 우리 올케는 남들 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완전히 방치하여 조카가 자기네 반에서 밑바닥을 맴도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는 않다며
틈틈이 조카 군기를 잡는다.
하긴 그 말도 맞다.
대부분 공부는 뒷전이고 놀러 다니던 그 옛날에도
시험 전날 공부 하나 안하고 시험봐서 거의 상위권에 속하는 아이들이 있고
늘 꼴지 언저리를 맴도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요즘처럼 '다들' 공부에 미친듯이 매진한다면, 특별히 공부에 관심이 없고 그냥 즐겁게 놀기만 하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제도권 교육에서 열등한 학생으로 치부될 테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 시험을 앞두고 주말에도 공부를 해야했고
어제는 수학 문제집을 두 개째나 푸느라 기운이 쪽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던 정민공주가
오늘 오후에는 하늘 꼭대기를 찌를 듯 신이 오른 목소리로
전화를 해서는 시험 끝났으니 엄마랑 영화보러 간다고 자랑을 했다.
영화 끝나고 고모랑 만나 저녁을 먹자나?

어엇.. 이거 몹시 익숙한 시추에이션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월말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따위가 끝나고 나면
룰루랄라 단체로 영화보러 갔다가 떡볶이랑 튀김 사먹고 집에 왔었는데...
그걸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정민이는 벌써 한다는 뜻이다.
어휴...
하긴 요즘 초등학생 수학문제는 내가 중학교때나 풀었던 것보다 더 어렵고 요리조리 비틀려 있더라. 그러니 그 시절보다 5, 6년쯤 정민이가 앞서가는 게 당연하겠지.

어리숙했던 나의 어린시절보다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더 똘똘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사리분별도 뛰어난 것 같아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공부하기는 참 싫을 게 틀림없다.
얼마전 만난 후배 딸에게 추석날 보름달 보며 무슨 소원 빌었느냐고 물으니...
놀랍게도 '공부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대답해서 몹시 안쓰러웠다.
겨우 7살짜리가 공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니;; ㅠ.ㅠ
정민이와 달리 그앤 5살에 이미 한글을 떼고, 심지어 한자 초급 자격증까지 있으며, 초등학교 입학에 대비해 국어와 수학 선행학습을 탄탄하게 해낸 우수한 학생으로 주변에서 마구 칭찬을 받는 아이인데도 말이다.

나로선 정말 어떤 게 아이들을 잘 교육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내가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즐겁게 놀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아이를 키우는 지인들은 철없다고 나를 나무라며 본인이 엄마가 아니니 남의 말 한다고 타박을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공부에서 뒤떨어진 아이는 절대로 앞으로도 상위권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나 뭐라나;;;
그렇게 다들 공부를 잘해서 과연 뭐가 될 건데??

물론 공부를 잘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이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잘' 살 확률이 높은 것은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 어른이 되었을 때나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지만,
단지 학벌과 교육수준으로 삶의 질이 평가되는 절대적인 잣대는 분명 예전보다 훨씬 힘을 잃었다고 생각된다.
좀 황당한 예를 들자면,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 1위가 바로 '연예인'이라는 것부터 확실히 뭔가 다르지 않은가?? ^^*
그러니까 우리 정민공주를 비롯해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어른이 될 무렵엔
지금과는 많이 다른 가치에 따라 삶의 질과 행복이 좌우되는, 좀 더 괜찮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다.

여전히 교육정책은 휘청거리고, 정치판엔 무지한 정치꾼들의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당장이라도 한반도에 핵폭탄이 터져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온 세계가 떠들어대지만...
부디 다가올 미래는 지금보다 여러가지로 나아진 세상이길 바란다.
워낙 근시안이라 이대로 흥청거리며 살다간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고,  마실 물마저 없어진다는 아주 먼 미래는 나도 잘 모르겠고 ㅡ.ㅡ;;;
적어도 우리 조카들이 살아갈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까지는 말이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