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뭐기에

놀잇감 2006. 11. 19. 02:25

주말에 고모한테 영어 배우러 왔던 조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래 고모는 놀아주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콱 찍혀 있어서
영어공부할 땐 고모가 아니라 영어선생님이라고 아무리 세뇌를 시켜도 그게 잘 먹히질 않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영어공부를 해놓고 나서 놀라는 제 엄마와 고모의 당부에
겨우 9살짜리 조카가 자긴 꼭 <누나>라는 주말드라마를 봐야한다고 박박 우겨댔던 것이 화근이었다. ㅡ.ㅡ;;
조카는 지난주 일요일에도 드라마에 아주 '중요한' 장면이 있었는데 제 아빠 생일파티 때문에 온 가족이 모인 터라 못봤다며 돌연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영어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재방송을 보라 하니, 자긴 재방송 언제 하는지도 모르고, 제 부모가 그때 또 딴 걸 보면 자기는 계속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된단다....

결국, 드라마와 고모 중에서 더 중요한 걸 선택하라는 ^^;;
대단히 야비한 고모의 강요로 결국 조카는 '재미있게' 고모랑 영어공부를 하는 쪽으로 간신히 마음을 돌렸는데, 지나고 보니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나는 과연 몇살때부터 드라마에 심취했더라?? ㅡ.ㅡa
나 어렸을 때도 분명, 손창민과 강수연이 아역배우로 활약하던 어린이드라마에 푹 빠져
4차원의 세계며, 지구를 파멸시키러 날아온 우주 괴물 따위의 이야기에 몰입했던 것 같긴 하다. 특별히 교육이 엄한 집안도 아니었으므로 주말 저녁이면 달리 놀거리가 없어 TV 앞에 앉아 유명한 주말연속극 따위를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 함께 틀림없이 봤을 테고.

요새도 어린이용 드라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제는 우리 조카가 주로 12세 미만, 또는 15세 미만의 청소년은 시청지도를 바란다는 어른용 드라마를 보며 빠져든다는 점이다.
노래방엘 가도 조카가 부는 애창곡들은 대부분 제가 좋아했던 드라마의 주제가이고
하물며 제 미니홈피 배경음악도 그런 음악이다.

조카가 심취하는 문제의 그 드라마들은 처음에 제 엄마랑 같이 보면서 맛을 들인 모양이니
새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엔 명분이 서질 않는다.
옛날엔 다 봤는데 왜 이젠 안되느냐고 눈을 똑바로 뜨고 반박할 게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거의 주말마다 온 식구들 다 모여 저녁 먹으면서, 드라마광이신 울 엄마 때문에라도 빼놓지 않고 틀어놓는 TV도 문제다.
자녀교육 때문에  TV를 굳이 없애지 않는 한,
저녁 먹으면서 TV 연속극 보는 문화... 너무도 당연한 우리네 모습이 아닌가?

공중파에서 해주는 드라마 종류가 20편이 넘는다니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리저리 채널만 잘 돌리면 종류 다른 드라마를 하루 종일도 볼 수가 있다. 그게 바로 울 엄마의 낙이기도 하고.
지금처럼 달랑 세 식구 사는데도 TV가 셋이라 서로 시청권을 놓고 다툼을 벌일 일이 없을 땐 상관없지만, 예전엔 뉴스나 스포츠 중계를 보시려는 울 아부지와 드라마를 보시려는 울 엄마의 신경전이 더러 있었다. 물론 대부분 울 엄마의 승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럴 때마다 울 아부지는 만날 울고 짜는 뻔한 드라마가 뭐 그리 재미 있느냐고 타박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러는 당신은 요새 외화 시리즈를 전문으로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을 아예 사수하다시피 고정시켜놓고 <맥가이버>, <미녀삼총사>부터 <CSI>에 이르기까지 섭렵하고 계신다^^)

아무튼 프로그램 개편이 되서 정붙이고 오래 보던 일일연속극이나 주말연속극 같은 것이 끝나기라도 하면 울 엄마는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 괴로워하다, 다시금 정붙이고 볼 수 있는 드라마를 애써 찾는다.

나도 울 엄마 수준은 아니지만 드라마란 마약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얼마 전 <연애시대> 같은 드라마나, 인정옥,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처럼
가끔 가슴이 찌릿찌릿 저려오는 공감을 안겨주는 주옥같은 대사가 일품이라든지
인생이나 사랑에 대한 '너무 뻔하지 않은' 성찰이 돋보이는 드라마는 본방 때 보고
재방송 또 찾아보고, 가끔은 케이블서 재탕해준다고 할 때도 얼씨구나 좋아라 하며 찾아보기도 한다.  
물론 시간 많고 여유로울 땐 별 시답잖은 드라마도 다 틀어놓고 보며
잘 생긴 남자주인공 때문에 헬렐레 나사가 풀려 침을 흘리기도 하고
연기든 캐릭터든 성에 차지 않으면 또 그런 대로 온갖 욕을 해대면서라도 시청률 올리기에 일조한다. ㅡ.ㅡ;;


마침, 바쁜 일도 끝내고 새로운 큰 일 시작을 앞두고 있는 약간의 휴지기를 즐기고 있는 요즘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드라마를 공중파 세군데에서 마구 틀어주고 있기에
몹시 신나하면서 리모컨 놀이를 좀 했는데, 그 묘미가 참으로 만만칠 않다!

개인적으로 소품 예쁘고 볼 거리 많은 드라마는 '이야기' 수준이 좀 떨어져도
죽도록 싫어하는 배우가 나오지 않는 한 열심히 보는 편이라 ^^;;
<황진이>는 한 회 제대로 보고 나니 완전히 홀딱 빠져 기생들이 가체에 꽂고 나오는 떨잠 하나 비녀 하나에도 헤벌쭉 웃음을 흘리며 거의 중독 수준이 되어 버렸고,
같은 날 방송이기도 하고 워낙 내가 싫어하는 여배우들이 주인공이라 별로 잘 보게 될 것 같지 않은 타 방송사의 두 드라마도 이국적인 배경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서, 또한 영화 같은 인상적인 시퀀스에 이끌려서 눈여겨 보게 되었던 것.

얼마 전 무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여자와 드라마'의 상관관계를 다루며
전문가들이 전지구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여자들의 드라마 심취 이유를 설명했는데,
하루 평균 2만 단어를 사용하는 여성들의 언어 중심적인 두뇌 작용엔
대사를 매개로 서사가 이루어지는 드라마가 대단히 적합한 데다
(하루 평균 7천여 단어밖에 사용하지 않는 남자들에겐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드라마'가 대단히 피곤한 물건이기 때문에, 차리리 일방적인 정보 입력을 요하는 뉴스를 선호한다고)
남들의 인생을 관찰하는 경험이 여자들 사이에 커다란 동질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든 친근한 사람이든 '드라마'를 바탕으로 깊은 공감대 형성과 또 다른 대화의 장이 가능해진다다는 얘기였다.

유치찬란하다고 욕하면서도 굳이 또 그 드라마를 찾아보고 있는 나 자신을 그리 한심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친절히 설명해주는 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홀로 씩 웃었는데,
12세 미만, 또는 15세 미만 어린이나 청소년은 시청 지도가 필요하다는 경고를 제작측에서 내놓는  그런 유치찬란한 드라마를 겨우 9살짜리 조카가 보면서 과연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고 어떤 대화의 장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인지... 그건 참말 모르겠다.

겨우 9살짜리가, 학교 가서 애들이랑 얘기하려면 <주몽>은 꼭 챙겨봐야한다고 하는 얘길 들으면 정말로 이 나라가 드라마 공화국이 틀림없는 것 같긴 한데,
가끔 나 역시 드라마에 심히 휘둘려 뒤끝이 긴 후유증에 시달리곤 하면서 과연 어떻게 현명한 드라마 보기를 조카에게 전수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려서부터 각종 드라마에 노출되었어도 이리 평범하게 살고 있으니
조카도 분명 제 앞가림 잘 하며 자라줄 것이라 별 고민 없이 믿어도 좋을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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