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회

삶꾸러미 2007. 4. 25. 17:21

오늘 오후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발신번호는 정민공주네 집 전화.
"XXX씨 핸드폰인가요?"
공주는 그럴듯하게 목소리를 바꿔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금요일에 시간이 있으시냐고 다시 묻는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금요일에 학교에서 "산행대회"가 있는데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도 모두 같이 가도 된다고 했단다.
제 엄마가 도시락은 준비할 터이니, 고모도 같이 산행대회에 참석하라는 것이 전화의 요지.

아...
이 고모가 얼마나 산에 가는 걸 싫어하는지 공주는 잘 알고 있건만...
(반면에 공주는 등산광이신 할아버지와 제 아버지 따라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등산을 즐기기 때문에 10살임에도 앙증맞은 분홍색 등산화까지 갖추고 있다;;)
과거 회사다니던 시절에 산으로 "강제" 야유회를 가면, 나는 당연히 산 아랫자락에서 기다리며 막걸리나 홀짝거리다 하산할 때 합류하는 부류였고, 산을 꼴딱 넘어 하산로가 달라지는 경우엔 강압적인 윗대가리들한테 참석 여부만 확인 시킨 뒤 대번에 줄행랑을 쳤더랬다.
물론 뭐, 부모님의 부탁으로 꽃구경이나 단풍구경 따라간 산행에선 투덜대며 등산을 하기도 했지만, 자진해서 산에 가자고 말하는 건 내 평생 없을 거다.

7시 기상.
7시 30분까지 씻고 준비.
8시까지 정릉 자기네 집으로 올 것.
8시에 동생 지환이를 깨우고 나서 공주와 함께 아침을 먹을 것.
8시 20분. 동생 지환이를 고모가 어린이집 차에 태워준 뒤
8시 30분. 공주, 엄마와 함께 학교로 출발. (또는 산행 집결지인 북한산 매표소로 출발)

이상은..
휴대폰이 뜨끈뜨끈해질 정도로 오래오래 통화를 하며 공주가 고모 무수리에게 하달한
산행대회 아침 스케줄이다.
공주는 생각 좀 해보겠다는 고모에게 '알았다'는 답을 들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 나는 얼렁뚱땅 금요일에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ㅠ.ㅠ

아 못살아...
난 정말 가기 싫은데.
산을 미치도록 좋아하거나 백수가 아니고서야 평일에 조카 산행대회 쫓아가는 고모가 어디 있다고!
제 엄마가 장보러 간 사이에 공주 혼자 일을 꾸민 것인지, 올케는 좀 전에 전화해서
정말 올 수 있겠느냐고 미안한 듯 묻는다. 같이 가주면 공주야 더할 나위없이 기뻐하겠지만;;
아침에 잠드는 인간이 아침 생새벽부터 산을 오른다는 건 턱도 없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
막가파 공주는 무조건 자기 말대로 금요일에 1시간만 자고 (내가 6시에 잠든댔더니만;;)
일어나 일찍 오라고 윽박을 지르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어쩌다가 나는 공주 조카에게 아무것도 거부하지 못하는 고모가 되고만 것일까..
으휴...

어떤 핑계를 대야 화를 모면하고 금요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지
이웃분들의 의견을 공모합니다. 어흑...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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