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에 뜻밖에 전시장을 찾았다가 대박을 만난 느낌이기도 했고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 세계 가운데 천진난만하고 색감이 화려하고 예쁜 그림이 너무도 많아 그림 좋아하는 우리 조카 정민공주도 좋아할 전시라는 생각에 공주를 대동하고 두 번째로 전시장을 찾았다.
나 역시 사람 없이 조용한 미술관 관람을 그 누구보다 즐기기에 지난번 강추위 속에 평일 야간 관람을 할 때가 더 좋긴 했지만 어린이를 위한 그림 설명을 따라가는 재미도 나름 흘륭했고 그나마 방학 초기라 샤갈전 때처럼 와글와글 장터바닥 같진 않아 다행이었다.
마침 덕수궁앞에선 오후 수문장 교대식이 벌어지려는 찰나여서 공주는 몹시도 즐거워하였고...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선 '반드시' 궁궐도 꼼꼼히 돌아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결국 미술관 1, 2층 전체를 2번이나--한번은 우리끼리, 두번째는 어린이 작품설명하는 도슨트와 함께, 그리고 우를루프 전시관은 3, 4번은 봤을 거다--돌고 난 뒤에, 어스름녘 추운 날씨에 궁궐을 돌며 중화전, 함녕전 따위를 다 보고 다니느라 고모 무수리는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 ㅠ.ㅠ)
이 블로그엔 스킨의 특성상 웬만해선 사진을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샤갈전과 더불어 2번이나 전시를 관람한 흔치 않은 경우라 자랑하고파서 무리를 무릅썼다.
자.. 보시라~
17살에 다니던 파리의 미술학원을 6개월만에 때려치우고는 더 배울 게 없다고 했던 장 뒤뷔페는 의외로 가업을 잇느라 마흔 살까지 포도주 상인으로 살았단다. 그 이후 인생의 절반만을 화가로 산 셈인데.. 아.. 역시 천재는 다른 게 확실하다. 지난번에도 내가 좋아라 하는 그림이라고 올린 초창기 그림도 재미있고 아기자기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작품들은, 피카소처럼 예술적 영감이네 어쩌구네 하면서 여자를 수시로 갈아치우지 않고도 예술세계의 깊이와 폭이 몹시 다양하고 중층적이었다.
모자를 써 보는 여인 / 1943년 11월 / 캔버스에 유채 / 60 x 73 cm / 파리 파르티퀼리에르 컬렉션 소장
예술가야 워낙 상상력이 뛰어난 게 당연하겠지만 모자를 써보느라 분주한 손가락의 모양을 달랑 네 개만으로 저렇게 단풍잎처럼 처리한 뒤에 얼굴과 머리모양, 모자에 중점을 둔 뒤, 나머지 몸은 대강 쓱쓱 작게 그렸다. 정말 어린아이 그림 같지 않나?? ^^;;
아래 작품도 내가 좋아라~ 하며 미소를 머금었던 작품이다.
금반지 / 1958년 / 100 x 81cm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뒤뷔페가 흙, 돌, 지표 등의 재질학에 관심을 두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라는데 이 시기엔 예쁘고 화려한 것보다 다 이렇게 질감이 가장 두드러지고 표현이 단순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저 손가락에 낀 금반지가 실제로 보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
정민이는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우를루프' 세계를 제일 좋아했고, 작품을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걸 고르겠냐고 물었더니 이걸 골랐다.
클로슈포슈(?), 밀도가 좀 더 높은 스티로폼을 조각하고 채색한 입체 조형물인데 몹시 귀엽다!
딱히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뒤뷔페만의 신조어라는 '우를루프'의 세계에선 사람도, 물건도, 제각각의 공통적인 색채를 갖고 탄생한다. 우를루프 세계 속에서 물건 이름 맞추기도 그림 감상의 또 다른 재미였는데 멀리서 본 느낌과 실제 작품 제목이 전혀 틀린 것도 많지만, 제대로 짐작했을 때의 기쁨이란! 뉴욕과 파리에 거대한 우를루프의 세계 조형물들이 있다는데 몹시 가보고프다.
내가 이 사람의 그림을 왜 좋아하게 됐는지.. 두 번째로, 각기 다른 도슨트의 작품 설명을 들으며 돌아보니 장 뒤뷔페는 일상의 소박한 것, 초라한 것, 별것 아닌 것, 추할 수도 있는 것들에서 미를 느끼고 그대로, 또는 더 밉고 못생기게 표현하면서 아름다움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거창하고 심각하고 정치적인 색채가 진하거나 암울한 느낌의 그림은 내가 좀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의 그림은 인간적이면서도 밝고, 가끔 슬프면서도 희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더 많지만 공식 홈페이지(덕수궁 현대미술관)에 소개된 그림 가운데 퍼오느라 선택의 폭이 좁아졌는데,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은 나처럼 건망증 심하고, 특정 분야에 대해선 장단기 기억력 상실증 환자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꼭 찝어내서 그린 것도 같다. ^^;;
좌표 / 1978년 205 x 291cm / 종이에 아크릴(36개의 구성재료를 붙임)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기억의 극장' 연작 가운데 하나라는 이 작품에서.. 기억의 조각들 가운덴 그냥 소용돌이처럼 흔적만 남거나, 점점이 사라져가거나.. 또렷이 각인된 사람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툭툭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래도 배열이 참 예쁘기 그지없다!
점점 노쇠해지면서, 그림 뒤에 자석을 붙여 철판에 붙여놓고 이리저리 배열을 한 다음 오려붙였다는군. 실제로 이 그림을 보면서 나는 아련한 색감이 참 몽환적이라 느꼈다.
장 뒤뷔페는 "나의 전체 회화 작품에는 두 개의 바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개입 흔적을 극도로 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존재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여... 부재의 원천에서 물을 길어 마시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나는 전자의 바람이 나부끼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쪽이 더 즐겁고 행복했는데, 인간 존재를 없애 허무감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물론 감탄스러웠다.
앞으로 난 이 화가를 주목해보리라! 1985년에 작고한 이 화가 생김새도 멋지다 ㅎㅎ
공식 홈피에서 퍼온 월페이퍼인데.. 책상 전면에 놓인 그림들이 사랑스러워서..
대개 못마땅한 전시회는 외국의 소규모 미술관 한두 개에서 작품 몇개 덜렁 가져와 놓고선 그럴듯하게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전시는 프랑스의 장 뒤뷔페 재단 창고가 텅텅 빌 정도로 작품을 실어왔고, 다른 미술관 소재의 작품들도 많아서 일단 전시의 질이 알차고 비중 있었다.
게다가 sk가 웬일로 그런 선심을 쓰는지 포인트 삭감 없이 그냥 멤버십 카드만 보여주면 할인을 해주는데, 동반자까지 무조건 할인이라 정민공주는 단돈 3천원에 궁궐까지 다 봤으니 어찌 흐뭇하지 않을쏘냐. 1월 28일일까지밖에 하질 않아서 주변에 더 널리 알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
2006년 마지막 문화생활과 2007년 첫 문화생활이 같은 전시회라니.. 이 또한 뜻 깊지 않은가!
(그런데 사진들이 모두 저작권에 저촉을 받는 것들이라 문제가 생기면 후다닥 삭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ㅡ.ㅡa)
정민공주가 밤중에 헤어지며 "고모, 오늘 정말정말 재미있고 즐거웠어! 다음에 고모 전시회 갈 때 나도 꼭 데려가야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점심때 들른 음식점에 '윌리 호니스전' 팸플릿이 있었는데, 공주 모녀에게도 가보라고 권하다가 그만 촐싹맞게 내가 '벨로 언니랑' 보러 갈 거라고 발설하고 말았던 것... 아... 어찌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