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사랑'에 해당되는 글 89건

  1. 2009.08.12 여름 긴머리 9
  2. 2009.06.11 자전거 바람이 불었다 21
  3. 2009.04.17 음식 단상 13
  4. 2009.02.27 그림책 구경 12
  5. 2009.02.26 사랑하는 영자씨 18
  6. 2009.02.21 졸업식 6
  7. 2009.01.16 편견 10
  8. 2009.01.15 할머니의 추억 14
  9. 2009.01.11 돌아감 9
  10. 2008.12.15 편애 22

여름 긴머리

투덜일기 2009. 8. 12. 15:47

아주 옛날 여권부터 시작해서 주요 신분증에 들어 있는 내 사진을 보면 다 머리가 짧다. 간간이 의도치 않게 머리칼을 방치해둔 적이 있기는 했지만 30대 이후로는 줄곧 짧은 커트 머리나 기껏해야 단발 정도를 유지했고 그게 나한테 제일 어울린다고 굳게 믿었다. 키 작은 사람에겐 긴 머리가 안 어울린다는 패션상식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긴머리가 싫다. 특히 물귀신을 연상시키는 치렁치렁 곧은 긴 머리는 정말 답답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기다란 머리카락이 내 방에 마구 떨어져 구렁이처럼 엉기는 걸 상상하면 더더욱 소름끼친다. 수년째 전지현이 이어오고 있는 샴푸 광고를 볼 때마다 나는 큼지막한 가위를 들고 탐스러운 그 머리칼을 싹둑 자르는 상상을 하며 속 시원해 할 정도다.

오랜 세월 나를 알고 지내는 이들도 나의 짧은 머리에 익숙하다. 몇달에 한번씩, 아니면 일년에 한두번쯤 만나게 되는 지인들이 목격한 나의 머리모양도 늘 짧았던 듯, 언젠가 꽤 길었던 머리를 경쾌하게 커트하고 만난 자리에서도 상대는 몇년째 어쩜 머리모양도 안바뀌었느냐며 나의 한결같음을 토로했다. 하기야 20대 후반에 접어들면 여자들은 대부분은 머리모양을 자주 바꾸지 않는 것 같다. 가끔 기분전환으로 꼬불거리게 파마를 하는 일이 있기는 해도 길이를 파격적으로 바꾸는 경우는 드문 편일 거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머리칼을 잘랐는데도 주변에선 무슨 일 있느냐고 묻는 요상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고.

어쨌거나 십년 이상 내 기억 속에 남은 전형적인 나의 모습은 커트머리였는데, 요즘 계속 머리칼을 기르고 있다. 게으름 부리다가 미용실 갈 시기를 놓쳐 어중간한 길이에 꼴사나워진 머리를 질끈 묶고 이리저리 삐져나온 머리칼들을 애써 실핀으로 고정시키고 집에서 버티던 중, 정민공주가 부탁을 했다. 자기도 중학교 가기 전까지 계속 기를 거니깐 고모도 같이 머리를 기르면 안되겠느냐고. 왜 굳이 고모랑 조카가 머리칼을 같이 길러야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쁜 머리띠랑 고무줄도 사줄 테니 같이 기르자고 꼬드기는 열두살 조카의 말에 나는 큰 앙탈 없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더 늙기 전에 마지막으로 긴 머리 한 번 더 해보지 뭐, 그러면서.

나이에 따라 머리모양마저도 제한을 둔다는 건 말도 안되지만 오랜 세뇌 때문이거나 사회적인 편견에 물든 탓인지 중년 이후에도 치렁치렁 생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는 여인네들을 나는 아름답다고 여길 수가 없다. 내가 워낙 긴 생머리를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늙은이의 발악 같기도 하고 유치한 치기의 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천편일률적으로 바글바글 아줌마 파마를 하라는 건 아니지만, 긴 생머리는 쫌!

정민공주의 부탁 이후 두어번 미용실에 갔을 때 나는 확 커트머리로 되돌아가고픈 충동을 억누르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이제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온 머리는 실핀의 도움 없이도 가뿐히 하나로 묶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외출을 할 때가 아니고선 늘 이마를 확 까고(!) 하나로 질끈 묶고 있는 나로선 머리가 길어지니 여간 편한게 아니다! 특히 지난주초처럼 푹푹찌는 폭염에는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 한올도 짜증스럽기 마련인데 그럴땐 커트머리보다 질끈 묶어 올리는 머리가 정말 더 시원하다. 이젠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에 실핀을 꽂을 필요도 없고, 답답하게 머리띠까지 하고 있을 필요도 없이 그냥 고무줄 하나면 되니 얼씨구나 좋을시고다.  

더욱이 머리칼을 묶어 자꾸 땡겨주어 그런지 머리 길이도 쑥쑥 자라는 모양으로 이젠 머리 묶는 위치를 거의 정수리까지 올려도 될 정도다. 숱이 워낙 적어도 남들처럼 탐스러운 <똥머리>를 연출하는 건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김초시 상투 정도로 볼품없긴 해도, 이 머리가 보통 편한 게 아니다. 뒤통수에 머리를 묶었을 땐 잘 때 반드시 풀고 자야하지만, 정수리로 치켜 올려 묶으면 잘때도 거치적거리지 않으니 더운 여름밤에도 목덜미를 휘감는 머리칼로부터 해방! 수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치렁치렁 긴머리를 고수하는 이유도 집에 가서 질끈 올려 묶고 지내는 게 커트나 단발보다 백배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새삼 생각중이다. ;-p

물론... 여름 긴머리가 편한 건 집에서 질끈 묶고 있을 때 뿐이고 가끔 외출을 하려면 여전히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이 짜증스럽다. 집밖에서도 과감하게 <똥머리>로 다닐 수 있는 용기와 미모가 부족함이 그저 아쉬울 뿐이니 여름 동안엔 계속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며 살아야 하려나... 볼품 없는 머리숱에 다 풀린 파마기 탓에 이 상태론 외출 할 때마다 거울 보며 인상을 찌푸리게 돌 게 뻔한데... 벌써부터 왕비마마는 <넌 짧은 머리가 어울려>라면서 머리 좀 잘라야겠다고 성화시고, 몇몇 지인들도 왜 <안어울리게> 머리를 기르냐고 퉁박을 주었다. 하지만 미용사도 여름엔 그저 질끈 묶을 수 있는 긴 머리가 최고라고 동의했단 말이지!
 
아무려나...
머리모양 하나도 조카와 상의해야 하는 못난 고모인 나는 시방도 얼른 똥머리를 하려고 젖은 머리를 애써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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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년에 느루를 장만하고 나서, 그때 직접 매장을 추천하고 조언을 해주었던 막내동생네도 곧 미니벨로를 장만했다. 애팔렌치아라고 하던가, 검정색으로 아주 늘씬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그러고선 올해부터 아직 네발자전거를 벗어나지 못했던 준우왕자의 강훈련에 돌입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지만 겉보기론 3학년이라 해도 믿을만큼 키가 훤칠한 녀석이라 머지 않아 제 엄마와 함께 미니벨로를 탈 수 있게 하기 위해, 네발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뗀 거다. 겁이 많아서 통 진도가 안난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는데 어느 틈엔가 녀석은 순식간에 두발 자전거를 마스터 하고야 말았단다. 이렇게...

그러고 나서 좀 있다 준우왕자의 동생인 지우의 생일이 돌아왔다. 겨우 만 세돌이 되는 녀석은 똑 소리나게도 우리에게 선물을 콕 찝어 요구했다. 자전거를 사달라고. +_+ 그것도 하얀색이랑 검정색으로.
"고모, 지우 자전거 사주세요. 하양색이랑 검정색 있는 거..."라는 지우의 말을 직접 전화로 들으며 나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애들 자전거가 죄다 파랑 아니면 분홍, 아니면 노랑, 초록 같은 원색이던데, 하얀색이랑 검정색이라니...
그런데 그건 나의 기우였다. 지우 기호에 딱 맞는 어린이용 자전거가 있더라!
어린 녀석 취향이 세련됐기도 하여라. @.@
문제의 자전거는 삼천리자전거에서 나오는 <하이킥>이란다. 지우도 또래들보다 키가 커서 12인치를 사줘야 하나 16인치를 사야하나 고민했는데 딱 맞춤처럼 14인치짜리가 매장에 있더라나. 당연히 지우왕자는 저 자전거에 올라타곤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ㅎㅎㅎ
제가 원하는 선물을 생일선물로 받은 지우는 연일 자전거 타기에 힘쓰는 모양이고, 겁이 많아 속도 내는 건 엄두도 못냈던 제 형과 달리 방향전환이며 속도내기에 거침이 없어 오히려 걱정이다. *_*

무릎 보호대를 하고 제 형의 뒤꽁무니를 거의 바짝 뒤쫓는 지우의 모습을 보면 난폭운전의 기질마저 느껴진다. ^^; 귀여운 녀석...

준우마저도 두발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모습을 본 데다 고모와 작은엄마의 미니벨로 맛을 본 정민공주는 자기도 기어 달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미 온 집안에 불어닥친 자전거 바람에 물든 큰동생네도 전격 미니벨로를 장만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내 자전거랑 똑같은 다혼 우베공 흰색으로...
다만 사이즈는 내것보다 큰 걸로. ㅠ.ㅠ

이 자전거를 타다가 공주는 오른쪽 무릎을 왕창 갈아 진물이 날 정도였는데도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 눈치다. 사진은 5월 31일에 소풍 갔던 월드컵 공원에서 타는 모습이고, 공주의 아빠가 찍은 사진이다. 자전거를 타고 느껴지는 바람이 보이는 것 같은 이런 사진.. 좋다. @.@



자존심이 심히 상하기는 하지만, 조카랑 고모랑 나란히 똑같은 미니벨로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아주 그럴듯하다. 왼쪽이 내 느루, 오른쪽이 공주의 우베공.
이땐 하필 내 자전거를 올케가 타느라 안장을 제일 낮게 했고, 정민이 자전거는 동생이 안장을 높여 탄 직후라 더더욱 형님과 동생 같이 보인다. ㅎㅎㅎ

이번엔 여기저기서 동생들 사진을 퍼왔지만, 담번엔 정말로 온가족이 떼로 모여 자전거를 탄 뒤 단체사진을 찍어와야겠다. 암튼 온 집안에 부는 자전거 바람, 참으로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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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단상

식탐보고서 2009. 4. 17. 21:43
얼마전 공주님 납시는 날 저녁메뉴를 무얼로 할까 고민하다 연어 스테이크를 구웠다. 거창하게 말해 연어 스테이크지, 소박하게 말하면 그냥 생선구이였다. 다만 멋을 좀 부리느라 연어 살덩이에 소금과 후추, 바질가루를 슬쩍 뿌려 1시간쯤 재놨다가 열량은 그냥 무시하고 버터와 다진마늘을 좀 넣어 구웠고, 어서 본 건 있어가지고 타르타르소스랍시고 다진 양파와 다진 마늘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뒤 피클 대신 병제품으로 나온 레몬갈릭소스를 조금 섞어 구운 연어에 얹어 먹었다. 당연히 구울 때부터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훈제 연어 샐러드인줄 알고 인상을 찌푸리던 공주님은 반색을 하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제대로 된(?) 연어를 처음 먹어본다면서.
왕족들은 역시 아무리 잘해줘도 끝이 없다. 이번주에 역시나 공주님 납시는 날 장도 보러가기 전에 일찌감치 전화가 왔길래, 오늘은 빨간고기를 해줄까 닭볶음탕을 해줄까 물었더니 공주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둘 다 싫고 내가 안 먹어본 걸로 맛있는 거 만들어주라. 지난번 연어 스테이크처럼." 
버럭 화가 나서 고모가 해주는 거 아무거나 먹으라고 대꾸하곤 또 착한 무수리답게 골똘히 고민해봤는데, 연어 스테이크는 어쩌다 운이 좋았던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12살난 조카가 먹어보지 않았으면서 내가 요리해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란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야흐로 없는 것이 없는, 풍요의 세상에 태어나 거의 모든 걸 누리며 살아온 공주가 아닌가 말이다.

일제 강점기 끄트머리에 태어나 전쟁을 거치고 어마어마한 변화의 역사를 거쳐온 우리 엄마 세대엔 댈 것도 아니겠지만, 먹거리에 관한 한은 나 역시 퍽이나 큰 변화의 흐름 속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외식이라고 하면 엄마 곗날 중국집에 쫓아가 짜장면을 먹거나 졸업식 같은 중요한 날 큰맘 먹고 한일관 같은 불고기집엘 가는 게 전부였던 나의 유년과 비교하면 요즘 호화찬란하고 국적까지 다양한 외식문화와 먹거리의 발달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아직도 지방에 따라 취향에 따라 사람들마다 먹어본 음식의 종류가 한정될 터이고, 음식도 유행이라 시대의 흐름을 타 새로 생겨나거나 새삼 유행을 하거나 인기를 잃어 사라지는 걸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밖엘 나가보면 한집 건너 한집씩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놀라우리만치 방대해진 외식산업은 확실히 옛날과 다른 방식과 빈도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나는 감자탕을 대학시절에나 비로소 구경해보았고 삭힌 홍어 전문점은 사회생활을 한참 하고 난 뒤에나 접할 수 있었으며 누룽지탕 같은 메뉴는 불과 몇년 전에 생겨난 것 같은데, 우리 조카들만 해도 이미 열살 이전에 저런 음식들을 다 거쳤기 때문이다. 다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맛있는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어른들 탓이고, 또 정 먹고 싶으면 삭힌 홍어 사다가 집에서도 삼합을 만들어 먹거나 오븐에 수제 피자를 구워내는 놀라운 솜씨를 지닌 우리 올케들 덕분이다. 
뷔페에라도 가면 울 엄마는 지금도 무얼 먹어야할지, 뭐가 뭔지 메뉴를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시는 터라 우리 아랫것들이 적당히 알아서 음식을 담아다드릴 때가 많다. 하지만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인 어린 조카들은 아무 문제 없이 척척 지들이 먹고 싶은 것들을 담아다가 먹는다. 어쩔 땐 어른들이 되레 그들에게 뭐가 맛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우리집의 진짜 미식가들은 어린 조카들이어서, 옛날부터 그들이 잘 먹고 맛있다고 하는 걸 먹으면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_+ 파스타가 맛이 없네, 깐소새우가 맛이 있네... 어른스러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끔은 실소가 나온다.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임을 내가 알게 된건 분명 어른이 되고 난 뒤였다. 아니, 어른이 된 후로도 한참동안 스파게티는 <경양식집>에서 가끔 파는 맛없는 이태리 국수라고 여겼고(그게 첫 만남이었으니까;;) 맛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첫 출장을 갔을 때 본사 직원들이 환영파티랍시고 뉴욕에서 꽤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엘 데려가선 파스타를 먹으라고 권하는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까지 가서 맛없는 스파게티를 환영파티 음식으로 먹을 순 없다고 여기며 낯선 메뉴에 끙끙거리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시켜 먹은 <토르텔리니>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태리식 작은 만두인 토르텔리니를 맛있게 하는 곳을 아직도 서울에서 찾아 헤매고 있을 정도. +_+
어쨌거나 나는 <파스타>라는 말을 안 게 얼마 안되는데, 겨우 열살 전후의 조카들이 제 엄마에게 파스타며, 바비큐립, 퀘사디아 같은 어려운 음식이름을 척척 대며 만들어달라고 청하는 걸 보면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 그리고 확실히 음식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내 주변엔 덩치만 커다란 어른이었지 감자탕이며 선지해장국, 간장게장을 못먹거나 맛을 모르는 지인들이 꽤 되는데 나의 조카들은 서너살 때 이미 입주변이 새빨갛게 변할 만큼 매워서 낑낑대면서도 감자탕의 맛을 알았고(할아버지의 술안주 기호식품이었으니까;;), 선지 해장국을 시키면 공주는 온 식구들의 선지를 죄다 빼앗아 먹곤 했다. 간장 게장 게딱지를 먼저 차지하고 앉아 거기에 야물딱지게 밥을 비벼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집에선 전혀 놀라운 게 아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답게 조카들도 고기를 심히 편애하고 채소를 마지못해 먹기는 하지만 지금 하는 식상활 대로라면 웬만한 나의 지인들보다 빨리 음식 사회화 과정을 마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런 마당에 나더러 안 먹어본 맛있는 요리를 해놓으라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요구였던 셈인데, 난 또 뭐가 없을까 며칠째 틈틈이 고민하며 무수리의 책무에 충실히 살고 있다.

음식은 언제부턴가 식탐 많은 나에게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짜증스러운 노동의 집약체가 되고 말았다. 맛있는 음식 먹는 걸 그 무엇보다 좋아하기에 식도락 흉내내며 이런저런 음식점을 순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확실히 예전보다 외식 요리에 대한 애정이 줄었고 좋지 못한 재료가 남기는 외식 후유증에 더욱 민감해졌다. 복잡한 건 귀찮으니까 당연히 재료의 원맛을 살리는 소박한 요리법을 실천하게 되기도 했고, 온갖 성인병의 징후를 다 갖고 있는 엄마 때문에라도 싱겁고 건강한 집밥을 <손수> 해먹고 살다보니 생겨난 결과다. 아직도 맛있는 걸 먹으면 몹시 행복한데 그걸 만드는 주체가 주로 나여야 한다는 상황은 여전히 뼈저리게 체화되질 않는다. 비길 데 없이 맛있었던 엄마표 탕수육과 엄마표 돈까스, 엄마표 김밥 따위를 이제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고만 싶은 중년의 딸에게, 부엌은 확실히 <맛있는 냄새가 나는 지옥>이다(오래 전 씨네 21 칼럼에서 본 표현인데 바쁘게 부엌에서 콩닥거리다가 땀찬 고무장갑을 서둘러 벗을 때 잘 벗겨지지 않는 짜증스러움 등 공감가는 얘기들이 참 많았으되, 누구의 칼럼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차라리 먹는 걸 뜨악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더라면 정말 대충 해먹으며 덜 불행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문제는 나의 식탐으로 귀결됨을 느끼며 더욱 한숨이 나온다. 요리하는 건 싫은데 반찬 없는 밥상은 더 싫으니 어쩌란 말이냐!

이왕 할 거면 투덜거리지를 말든지, 투덜거리려면 하지를 말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할 텐데, 식탐녀 무수리는 끼니때마다 노상 입이 튀어나온다. 어쨌든 오늘 저녁 다시멸치와 마른 새우를 넣고 감자 한개, 애호박 반개, 양파 한개, 새송이버섯 한개, 맛타리 버섯 한줌, 두부, 다시마가루 조금,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찌개는 <매우> 맛있었고, 소금을 거의 뿌리지 않고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먹은 삼치구이도, 파프리카, 오이, 샐러리, 삶은 달걀에 발사믹 식초와 흑임자소스를 섞어 뿌린 샐러드도 훌륭한 맛이었다. (솜씨 자랑하는 거 맞다;;)
짜증과 투덜거림 속에서 그나마 내가 붙들고 살아갈 기둥은 이것뿐이려니...
<식탐은 나의 힘. 밥심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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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구경

놀잇감 2009. 2. 27. 16:43

그간 보고싶은 전시가 무척 많았는데 바쁨과 게으름을 핑계로 통 움직이질 못했다.
그나마도 봄방학 끝나기 전에 조카와의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조바심이 게으른 몸을 재촉해 간신히 보러 갔던 게 성곡미술관에서 하는 CJ 그림책 축제.
같은 기간에 볼로냐 그림책 전시회도 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조선일보에 박힌 미운털에 더하여 이쪽엔 그림책과 원화 말고도 설치미술 작품도 있으니 어린 조카들이 보기에 더욱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엄마들의 열성은 참 대단하여, 그림책과 친해지기엔 너무 어린 아이들까지 죄다 데려온 바람에 동화작가의 낭독시간에 빽빽 울어대질 않나, 설치미술 작품을 마구 흔들어대질 않나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약간 인상이 찌푸려질 때도 있긴 했다. 하기야 그래도 엄마라면 누구나 자기 자식을 책과 친하게 만들어주고 싶겠지.
나의 조카들은 제 엄마한테 미리 하도 교육을 받고 온 탓인지 네살짜리 녀석도 조곤조곤 속삭이며 전시장을 돌아다녀 꽤나 뿌듯했다. 다만, 가끔 광화문에 볼 일 있을 때 부러 성곡미술관에 가서 조각공원 내다보며 마시는 차 한잔이 참 좋았었는데 치사하게도 입구 물확에 개구리밥풀을 심어놓았던 원래 찻집은 아예 문을 닫았고, 작은 건물에 있는 현재 찻집에선 이제 호두 들어간 수제 쿠키도 팔지 않더군. ㅠ.ㅠ 그나마 그 찻집을 이용하려면 전시 매표소에서 찻집 이용권까지 미리 사야했다. 그거야 원래 알고 가긴 했지만, 옛날엔 유자차 같은 전통차도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파는 것도 커피 아니면 병에 든 주스와 물 뿐이라 조금 빈정상했다.
전시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왕이면 예쁘고 맛있는 찻집도 그냥 계속 유지해주었으면!
 
그래도 좋았던 건, 전시장에서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마음대로 사진을 찍게 해주더라는 것. 사실 우리나라처럼 그림전시장에서 사진찍기를 금지하는 데는 없는 것 같다. 유럽이든 미국이든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제아무리 유명한 명화도 다 사진찍게 해주던데, 대체 왜 우리나라만 카메라에 인색한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국내외 그림책과 CJ에서 개최했다는 그림책상 원화들, 데이비드 위즈너의 특별초대전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 신났다. 내가 어렸을 때의 뻔한 그림책과 달리,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이야기가 돋보이는 요즘 그림책들은 정말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재미나고 신기하다. 어른인 나도 그러니 아이들은 얼마나 더 행복할까. 출판계가 아무리 불황이라도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육열 때문에 거의 끄덕없는 분야가 아동서적이라는 건 그나마 고무적이다. 그렇게 책을 열심히 사주고 읽히다가 아이들이 학교에만 들어가면 죄다 사교육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열에 하나, 스물에 하나쯤 커가면서 계속해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기는 하겠지.

일찍 보러 갔으면 조카나 아이들 데리고 한번 가보시라고 다른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전시였지만 3월 1일에 끝나는 전시에 거의 막차를 탄 셈이니 이런 글을 쓰는 건 순전히 기록과 자랑의 목적 외엔 쓸모가 없어졌다.
올해의 첫 전시회를 느즈막히 끊었으니 어서 퐁피두 전시회도, 클림트도 보러가야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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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비틀즈의 노래 Hey, Jude는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앙을 위해 폴 매카트니가 만든 노래다.
존 덴버의 노래 가운데서도 아내를 위한 노래 Annie's Song이란 게 있다.
음악가를 가족으로 둔 덕분에 자기 주제가를 갖게 된 사람은 대단한 행운아겠지만, 반드시 본인을 위해 작곡된 노래가 아니더라도 자기 이름이 들어간 곡이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퍽 흐뭇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대중가요엔 끊임없이 제목이든 가사에 사람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나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맥락으로 나온 가요 중엔 이 나라의 수많은 영자씨들을 위한 노래 <사랑하는 영자씨>가 있다.

40년대 출생이신 울 엄마 또래엔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끝소리가 <子>인 이름들이 수없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영자>란 이름을 가진 딸은 거의 집집마다 하나씩은 꼭 있지 않나 생각될 정도다. 요새도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는 울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모임에도 열두 명 가운데 무려 <영자>가 셋이란다. 김영자. 홍영자. 이영자.
그 아주머니들의 노래방 18번이 모두 <사랑하는 영자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영자씨 가운데 한 분인 울 엄마는 <만남>과 <애모> 이후 거의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영자씨>를 애창곡으로 삼아야 했다. 누가 부르든, 울 엄마를 대동하고 노래방엘 가게되면 반드시 신청해야 하는 지정곡쯤이 되고 말았으니까. 사실 이 노래는 본인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줘야 하는 것이라, 듀엣 곡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주로 울 아버지가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의 형식으로.
그리고 울 엄마가 요 전에 쓰시던 휴대폰 화면에는 <사랑하는 영자씨>라는 글씨가 기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 곰살맞으셨던 울 아버지의 소행이었을 거다. 휴대폰 기본설정 바꾸기의 달인인 정민공주가 그 글귀를 없앴을 때 울 엄마가 펄쩍 뛰면서 야단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아무려나 지난 화요일은 우리집 영자씨의 생신이었다. 주중이라 당연히 늘 하던 대로 주말에 미리 모여 저녁을 먹고 케이크 촛불을 껐다. 언제부턴가 가족들의 생일파티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조카들의 선물을 개봉할 때다. 어린 조카들이 할머니나 고모, 제 부모에게 하는 선물이란 당연히 손수 그린 그림이나 카드 뿐이지만, 며칠 전부터 은근히 압력을 넣어 받아내는 아이들의 선물은 그야말로 사랑스럽다. 내가 팔불출 고모임은 이미 만방에 알려졌으니 이참에 또 자랑하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다들 짐작하셨겠지...


주말에 미리 생일파티를 끝내더라도 정작 당일을 그냥 넘길 순 없는 일이라, 무수리는 전날 장을 봐다가 미역국 끓이고 불고기 재고 초고추장 만들고 두릅 데쳐서 조촐한 아침상을 차렸다. 전날 밤 적어놓은 카드엔 정민공주의 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만날 툴툴거리고 잔소리 해야 하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고는 무뚝뚝해서 좀처럼 하지 않는 말,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도 마지막에 적어 넣었다. 그러곤 또 민망해서 성의없는 현금 선물과 함께 모르는 쳑 소파에 갖다 놓고 드물게 모녀가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었다.

소파에서 발견한 카드를 읽은 엄마는 아침부터 사람을 울린다고 투덜거렸고
미역국 끓이느라 못 잔 잠을 자겠다고 심술내며 방에 들어온 무수리 딸도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영자씨가 옆에 안 계실 날이 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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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투덜일기 2009. 2. 21. 14:38

꽤 넓은 오지랖 때문에 몇년 전까지도 지인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일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졸업식에 가는 게 아니라 졸업식 날 졸업식장 주변에 가는 것이었다고 해야 옳다.
공식적인 식장에 진득하니 앉아 있었던 적은 좀체 없으니 하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본인의 졸업식 때도 몰려 다니며 사진 찍은 기억 밖엔 없으니, 국민의례부터 시작해 지루한 누군가의 말씀, 학위나 상장 수여, 송사, 답사, 졸업노래로 이어지는 졸업식순을 꼬박 지켜보는 건 드물게 조카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때뿐이다. 요식적인 행사의 뼈대는 참 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멍하니 있다가 간만에 그런 걸 겪게 되면 참 뻘쭘하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것은 국민의례.
난데없이 우루루 주섬주섬 일어나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려니 계속 킥킥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바뀌었더군. 친절한 유치원 원감 선생님의 말로는 2007년부터 바뀌었단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종소리 따라 무조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20여년 이상 쓸 일도 없었는데 아직도 내 입에서 술술 외어 나오는, 마치 공산당 당원 서약 같은 저 구절 대신에 바뀐 문구도 그다지 멋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나.
게다가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라니!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유치원 아이들에게 애국가 가사를 죄다 익히게 하려는, 또는 그간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는지 자랑하려는 유치원 원장의 욕심 때문임이 단박에 느껴지긴 했는데,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과 달리 우물쭈물 웅얼거리는 어른들의 모양새가 얼마나 우습던지. 놀라운 건 그간 애국가 부를 일이 <전혀> 없었던 나도 4절까지 가사를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더라는 것! 역시 주입식 세뇌교육의 힘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간 월요일마다 빠짐없이 거쳐야했던 월요조회의 잔재였을 테니 말이다.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유치원을 졸업하는 아이들에게 가운을 입히고 학사모를 씌우는 유행이다.
유치원은 상류층 아이들이나 가뭄에 콩 나듯 다녔던 나의 어린시절과 달리 언제부턴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필수적인 취학전 교육 코스가 된 것이나 원복을 입히는 건 이해하겠는데, 유치원 졸업식에 가운을 입히는 건 정말이지 우스꽝스럽다. 우리나라 학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이나 학벌주의에 생색 내기 좋아하는 성향이 더해져 비롯된 또 하나의 관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역시나 나의 조카답게 준우군은 졸업식 끝나고 나서 원하면 다시 입고 사진 찍으라고 비치해둔 가운과 학사모를 무시하고 그냥 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마 쑥스러워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한복에 학사가운이라니 어휴 그 원장의 취향 참 촌스럽기도 하다.
조카의 유치원에서 강요한 졸업식 한복차림은 졸업식이 2부까지 이어지는 장기전이었던 데다
2부에서는 아이들이 엄마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고 다례를 올리는 순서에 직접 쓴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취학 전에 자기소개문을 써 발표시키는 건 참 잘한 짓인데, 왜 그걸 굳이 졸업식에서 해야만 하는지?? 더욱이 부모에게 올리는 효도 다례를 왜 하필 졸업식에서??
워낙 컨디션이 바닥이기도 했지만, 장장 2시간 반에 걸쳐 진행된 <지루한> 졸업식을 지켜보느라 비조직적인 인간인 나는 거의 손바닥 만한 유치원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_-;;
올케한테 어디로든 투서를 보내서 다시는 유치원 졸업식에 그딴 이상한 짓 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여나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다.

암튼...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유치원 교사의 송사 때 한복 입은 우리 조카 담임이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요새 부쩍 늙었는지 남들 울 때 따라울기 잘하는 나는 그만 과거 내 졸업식에서조차 눈물을 흘린 적이 없건만 하마터면 같이 울 뻔했다. ;-P
이제 제도권 교육에 시달리느라 고생문이 훤한 조카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일 거라고 나중에 혼자 변명을 하긴 했지만 졸업식 참석은 어쨌거나 고된 일이더라. 에구구 삭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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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하나마나 푸념 2009. 1. 16. 22:04

며칠 전 왕비마마와 공주를 모시고 느닷없이 찜질방엘 갔을 때의 일이다.
날씨가 워낙 추웠던 탓인지 시설이 워낙 노후한 곳이기 때문인지 찜질방은 놀랍도록 한산했다.
원래 가려던 찜질방은 하필 정기휴일이라 다음을 기약하려 했으나 고집쟁이 조카 공주의 강짜에 어쩔 수 없이 갔던 것인데 약간 뜬금없는 일을 겪었다.

황토방이었던가 소금방이었던가, 잘 기억은 나질 않는데 워낙 사람이 없어서 딱 한사람이 누워있는 찜질방엘 공주와 함께 들어갔더니 드러누워 있던 아줌마가 반색을 하며 자꾸 말을 걸었다.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추워서 그런가봐요."
공주와 나는 노코멘트.
"그나저나 오늘 평일인데 너는 어떻게 학원에 안가고 엄마를 따라왔니?"
여전히 우리는 노코멘트. 엄마가 아니라 고모라는 말도 해주기 싫었다.
"아유 엄마가 젊어서 큰언니랑 동생 같아 보이네요. 넌 오늘 학원 안갔나보다? 추워서 안갔어? 불이 어두워서 이런데서 책 보면 눈 나빠지는데..."
당시 조카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가져간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의 침묵이 답답했는지 급기야 아줌마는 벌떡 일어나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얜 학원 안다녀요?"
하는 수 없이 내가 대꾸했다. "네, 안 다녀요."
드디어 집요하게 나의 반응을 이끌어낸 아줌마는 속사포처럼 수다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어머나, 왜 학원을 안 보내요! 요새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이런데까지 와서 책 읽는 거 보니까 얘는 시키면 잘하겠구만. 눈빛도 초롱초롱한 게 똘똘하게 생겼네. 요즘 공부는 엄마가 신경써서 시켜야 잘 되는 거예요."
"왜요,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 많지 않은가..."
졸지에 무식한 엄마 취급을 받으며 더욱 말대꾸 하기가 싫어진 내가 혼잣말을 하듯 대꾸했더니 아줌마의 댓거리는 더욱 가관이었다.
"요즘에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은 다 문제 있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혼자 데리고 있거나 가난한 할머니가 키워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애들이나 학원에 안가는 거지, 제대로 된 집안 아이들은 다 학원에 다닌다니깐요! 학원도 동네 속셈학원 같은 데는 아무 소용없고, 아주 잘 가르친다고 이름난 학원엘 보내야 돼."
공주와 나는 내심 발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이렇게 무례하고 무식한 편견에 사로잡힌 아줌마가 다 있나 싶었던 것.
정민공주는 일찌기 학원에 다니기를 거부하여 집에서 학습지 방문교사와 사촌오빠의 과외교습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공주가 그날 우리집에 온 것도 무수리 선생과 영어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조카는 아줌마 들으라는 식으로 나에게 말했다.
"내 친구들도 학원에 안다니는 애들 많은데... 현지도 안다니고 예림이도 안다니고 **도 안다니지만 걔네들 다 엄마아빠 다 있고 아무 문제도 없어."

나는 어떻게든 무식한 아줌마로부터 정민공주를 보호하며 변호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앞뒤없이 말했다.
"애들 공부를 학교에서 가르쳐야지 어려서부터 너도나도 학원에 보내는 이 사회가 잘못된 거죠.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순전히 나의 실수였다. 나의 논리를 받아들일 상대가 아니란 것쯤은 미리 파악했어야 하는데.... 아줌마는 한심하다는 듯 나에게 훈계를 했다.
"어떻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에요? 인생의 전부지! 공부를 잘해야 인생이 성공하는데! 공부 못하면 요새 사람취급도 못 받아요!"
"어떻게 모든 아이들이 공부를 다 잘할 수가 있겠어요. 잘하는 애들도 있고 못하는 애들도 있고, 공부 못하는 애들은 또 잘하는 특기를 살려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죠. 저는 꼭 큰돈 들여 공부시켜야 성공하는 이 사회가 틀려먹었다고 생각해요..."
벽창호 같은 아줌마를 단시간에 설득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고 더는 대꾸하기가 싫어져 그만 일어나 나가버릴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미 옷이 다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 아줌마는 별 희한하고 무식한 여자를 다 보겠다는 식으로 금방이라도 혀를 끌끌 찰 것 같은 표정이더니 "참 내..."라고 중얼거리며 찜질방을 나갔다.

뒤에 남은 나는 인상을 찡그리다 그 아줌마의 뒷모습에 대고 혀를 낼름거렸는데, 그 모습을 본 조카가 물었다.
"고모, 왜 메롱 했어?"
"저런 아줌마랑은 아무리 얘기해봤자 쇠귀에 경읽기거든. 어떻게 공부가 인생의 전부겠니.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한 거지."
"맞아. 저 아줌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긴다."
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책을 읽었지만, 나는 혹시나 조카가 아줌마의 폭언에 마음을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사실 그 아줌마의 생각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 사회의 대다수 엄마들과 부모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편견이 더욱 무섭고 씁쓸했다. 그런 아줌마들은 단지 학원엘 안다닌다는 이유로 문제 가정의 아이로 단정하고 자기네 아이들과 못놀게 격리시킬 것이 뻔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인간취급도 안할 테니까.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그들이 자라 대학엘 가고 어른이 될 때쯤엔 입시지옥, 취업지옥도 없는 근사한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는데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오히려 옛날이 좋았지.. 라고 회상하게 될 뿐 도무지 발전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다들 사회적 특권을 누리기 위한 편법에만 목표를 두면 안되는 거 아닌가.
늘 뾰족한 대안은 생각나질 않고 불만만 가득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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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맏이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데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이 다 장수하신 편이라 어른이 된 뒤에도 할머니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많다.
놀라운 건 두 할머니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글만 익히셨으며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쪽머리를 하셨을 정도로 외모로는 <구식> 할머니였고 외출할 때 말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은 언제나 <몸뻬> 바지였다는 점, 그럼에도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아들과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남아선호사상이야 뼛속 깊이 자리잡은 본능 같은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 딸들과 손녀딸들이 크게 홀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맏손녀딸이다 보니 오히려 특혜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7살에 국민학교에 얼떨결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할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다. 당시 전교에서 제일 작은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매일 손녀딸을 업어 등하교를 시키는 우리 할머니의 정성은 온 동네에 유명했다고 한다. 확실히 두 할머니들은 장손을 각별히 챙기시는 듯해도, 손위 누이인 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전폭적이었고 내 말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다 동의해주셨다.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이란 걸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큰 반대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심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 결심을 듣자마자 "쟤는 무슨 일을 하든 똑 떨어지게 잘 해낼 거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앞장서서 온 식구들의 우려를 잠재우셨다.
두분은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이런저런 사회문제를 의논해도 나와 말이 잘 통했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절대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친할머니 손에서 8살까지 자란 나는 당연히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은 사람이어서 아빠와 엄마보다 순위가 앞섰고, 외할머니와는 친할머니만큼 곰살맞은 관계는 아니어도 늘 나를 감싸주시는 커다란 산 같은 분이라고 여겼다. 두분 다 서울 하늘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사셨으니 그만큼 자주 만나며 지낸 덕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크고 공고했으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친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고 심장이 약해 말년엔 바깥출입이 거의 불편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에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걸레질과 정리정돈을 하시던 바지런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마지막 1, 2년을 암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그 전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랬기에 내 기억에 남은 두분 할머니는 늘 자애로운 미소에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십여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일일이 챙기시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속 상한건 할머니가 된지 오래인 우리 왕비마마 때문이다.
우리 조카들은 고모한테 열광하는 것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워낙 울 엄마가 손녀 손자들을 각별이 예뻐하고 안아주고 사족을 못쓰는 성품이 아니다 보니, 예민한 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셨던 울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을 던져 손녀손자들과 놀아주셨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렇게 손주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보기엔 당신에게 쏟아져야 할 남편의 사랑이 손녀손자들에게 나뉘어 가는 것조차 질투하시는 듯했다. 내가 조카들에게 몸바쳐 봉사할 때도 겉으로는 늙은 딸 피곤해 할까봐 염려하시지만, 사소한 일로 어린 손녀딸과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아마도 속마음은 무수리의 온전한 보필을 당신만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울 엄마는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쌀쌀맞은 속담의 신봉자다. 아이들이 그리워서 거의 매일 손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의 귀찮은 질문(숙제 다 했니? 밥 먹었니? 유치원에 잘 갔다 왔니?)을 던지고는 쌀쌀맞거나 시큰둥한 반응(그거 어제도 물어봤잖아? 할머니는 왜 만날 밥먹었느냐는 거만 물어요?)에 마음 상해 하고, 손주들이 놀러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한편, 떼로 몰려온 조카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정신없다고 타박을 하시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니 눈치 빤한 조카들은 심지어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 할머니 볼에는 뽀뽀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_-;;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일부러 나한테도 뽀뽀를 안해주고 까탈을 떠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라고 위로를 하긴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굵어져 할머니한테 툴툴거려도 내심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정민공주 이외엔 나머지 조카들이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따돌림하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늘 아프고 온종일 TV나 보고 자기네랑 놀아주지도 않고 귀찮고 빤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비마마 본인도 그게 섭섭해서 마음 아파하시지만 정작 조카들을 대할 땐 ~~ 하지 마라, 고모 괴롭히지 마라, 뛰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만 해대니 관계가 호전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린 조카들에게 할머니의 추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감동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나로선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조카들을 업어주기엔 울 엄마의 건강이 너무 나빠지셨고 할머니들과 윷놀이,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익숙하다. 조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게임용어와 컴퓨터 용어에 왕비마마는 더욱 절망하는 판국이니 원...
우리 왕비마마와 어린 조카들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위한 묘안은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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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감

삶꾸러미 2009. 1. 11. 21:02

어린 조카들이 차츰 말을 배워 적절하게 써먹고 뜻을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참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이제 겨우 원할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인 세살 짜리 꼬마가 발음도 어눌하게
"일단은 해보자." "어차피 내 거야." 따위의 말들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한텐 어떻게 들리는지 몰라도 난 너무 귀여워서 거의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이며 자꾸만 말을 시켜보게 된다.
어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새겨두었다가 나름대로 적지적소에 배운 말을 써먹는 아이들의 언어능력은 정말이지 깜찍하다.

운좋게도 어른이 된 다음에 할머니, 할아버지 상을 당했던 나와 달리, 너무 어린 나이에 노할머니와 할아버지 상을 당한 조카들은 <돌아가시다>란 말이 죽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임을 이미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말은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되는 불길한 말이라는 것도 어느새 깨달은 듯하다. 더불어 동방예의지국의 후예들 답게 '시'라는 접미어엔 높임의 뜻이 들어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해서 가끔은 너무도 어른스럽게 어른들을 놀래킨다.

재작년이었던가. 탈장수술을 받느라 입원을 해야했던 어린 준우가 병실에 누워 제 엄마에게 심각하게 물었단다.
"엄마, 나 돌아가는 거야?"
어린 꼬마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이 안쓰러워서 눈물바람을 하는 제 엄마 때문에 제딴엔 대단한 중병에 걸린 것으로 오해를 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녀석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이나 깔깔거리다가, 죽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조카들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며칠 전엔 또 정민공주 때문에 웃다가 서글퍼진 일이 있었다.
그동안 고모의 직업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도 아니건만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 때문에 서점에서 제 눈으로 고모의 명성(?)을 확인한 정민이는 새삼스레 고모가 번역한 책들을 욕심내기 시작했고, 처음엔 재미있는 책만 추천해달라고 하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든 번역서를 죄다 한권씩 자기에게 달라고 졸라대기에 이르렀다. 초기 번역서들은 나도 한권밖에 갖고 있지 않은 터라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공주는 내 번역서들이 꽃힌 책꽂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고모 돌아가면 이 책들은 전부 정민이한테 물려준다고 유언장에다 써주라. 아참, 무서운 책들은 빼고 다 준다, 그렇게 써놔. 알았지?"

말로는 걸핏하면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르니깐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하루하루를 핑계대고 있긴 하지만, 죽음 역시 삶의 연속선에 놓여 있음을 실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 조카들이 죽음을 너무도 가까이 실감하고 예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서글픈지 하하 웃으면서도 가슴엔 뻥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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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

삶꾸러미 2008. 12. 15. 20:47

편견, 편단(공정하지 못하고 편벽되게 결정함), 편벽(남에게 알랑거리며 그 비위를 잘 맞추는 일, 또는 그런 사람), 편법, 편식, 편심, 편애, 편파, 편취, 편협.

<편>자 들어간 글자 치고 잘한 일은 하나도 없다.
특히 편애는 나쁘다.
원래 공평무사한 인간이 극히 드물다는 점을 구실로 삼더라도 편파적이면서 잘했노라고 말할 순 없는 일이다.

어제 카니발 콘서트에서도 그랬다.
나는 표나게 김동률을 더 좋아했다. 이적 노래는 몇 곡 아는 것도 없었다.
같이 간 지인은 너무 편애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지러지는 비명은 당연히 김동률만을 향한 것이었다.
물론 이적에게도 환호하고 박수도 쳐주었지만 내가 느끼는 감동은 달랐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사람은 이적이 노래를 부를 때 훨씬 더 열광했고 내가 모르는 노래들도 척척 따라불렀다. 반면에 김동률이 노래할 때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정확히 나눌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을 공히 좋아하는 이들과, 따로따로 편애하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으니 아무도 마음 다치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다치는 이들이 생겨나는 편애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오래 전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확실히 나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냥 예쁜 아이들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잘하거나 모범생이어서 예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눈엔 심하게 잘나고 스스로의 잘남을 깨닫고 있는 우등생이나 상위권 학생들은 주는 것 없이 얄미울 때가 많았다. 성격이나 성적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눈빛과 태도로 전달되는 맑은 심성 때문에 정이 가거나, 어딘가 측은함이 느껴지는 아이에게로 애정이 쏠렸다. 그러나 교사는, 특히 담임은 누구를 편애하는지 드러내서는 안된다. 누구나 고유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가수와 달리, 아이들에겐 담임선생이 단 한명 뿐이니까.
편애를 받는 아이는 친구들에게 왕따가 되기 십상이고, 편애의 좁은 관계망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린 마음을 다칠지도 모른다.

매사에 잘난 척도 더럽게 많이 하면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건 나의 가장 큰 단점임을 새삼, 그것도 옆구리를 세게 찔리고 나서야 깨닫고 속이 상해 밤새 가슴을 쳤다. 
사탕발림처럼 얄팍한 사랑을  덧칠하며 꽂는 비수는 더욱 아픈 법이거늘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한 죄는 너무도 크다.
온종일 자학, 반성모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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