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사랑'에 해당되는 글 89건

  1. 2008.12.11 콩깍지 12
  2. 2008.12.05 왕비와 공주 30
  3. 2008.11.22 추운 건 싫다 20
  4. 2008.11.20 연필이 좋다 19
  5. 2008.10.30 버스 모험 14
  6. 2008.09.25 맘마미아 13
  7. 2008.09.02 웃음이 필요해서 18
  8. 2008.07.22 비는 사랑을 타고 17
  9. 2008.06.01 너 때문에 잠을 못 자 11
  10. 2008.05.18 기우 14

콩깍지

삶꾸러미 2008. 12. 11. 15:49

며칠 전 지인의 집에 놀러갈 일이 있었는데, CF 어린이 모델 뺨치는 미모와 재롱을 선보인 지인의 딸 때문에 특히 즐거움이 더했다. 겨우 3살인데도 수정구슬처럼 예쁜 목소리로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그야말로 온갖 재능을 다 갖춘 예쁜 아기를 보며 좋아라 하노라니 정민공주도 좋지만 여자 조카가 또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이 절로 들었다. 그러면 어느새 많이 벗어진 콩깍지가 또 온통 내 눈을 가려줄 텐데! ^^

매번 지지부진하긴 했어도 연애 경험이 전무한 것도 아니건만 살면서 나는 불행히도 남자한테 콩깍지가 씌어본 적이 없다. -_-;;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처음에 눈에 거슬리던 단점이 안보이고 좀 참아주는 수준이 된 적은 있지만, 사랑의 콩깍지 때문에 오래도록 객관적인 판단을 못내릴 정도로 남자한테 허우적거린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집안 내력이려니 생각할 수 있으면 아쉽지도 않으련만, 원래 우리 집안 핏줄엔 낭만적 연애인자가 꽤나 풍부하다는 심증이 깊어 나홀로 별종으로 살려니 퍽이나 입맛이 쓰다.

예를 들어, 아 글쎄 울 엄마는 첫사랑인 울 아버지를 만나 8년이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는데 자기 남편 키가 그리 작은 줄을 한참 살다가 깨달았다고 했다. 울 아버지는 당시 대한민국 남성 평균키라고 큰소리를 쳤다지만, 불과 165cm의 단신. 반면에 울 엄마는 처녀시절 160cm에 45kg로 별명이 '와리바시'(나무젓가락을 뜻하는 일본말이다)였단다. 두 분 다 젊은시절 워낙 호리호리한 몸매였으니 당연히 여자인 엄마가 더 커보였을 텐데, 울 엄마는 어쩌자고 10년이나 지난 뒤에야 콩깍지가 벗어진 것일까? 나로선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대시절에 쓴 아버지의 일기장을 봐도, 다음 해에 바로 결혼을 하셨으니 8년 연애의 막바지라 시큰둥할 때도 됐건만  <온 세상이 너를 버려도 나는 결코 너를 놓지 않으리라>라는 비장한 말과 열렬한 사랑의 고백이 수시로 적혀 있다. +_+

어쨌거나 내 눈이 완전히 콩깍지에 덮여 이성적,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던 경험은 딱 한번, 정민공주의 탄생으로 비롯됐다. 하기야 그땐 첫조카에 대한 내 생각과 판단이 다분히 객관적이며 이성적, 보편적이라고 당연히 여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구 강요하는 수준이었다. ^^
그 무렵의 나는 걸핏하면 조카 사진을 꺼내들고,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아기를 보았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고 대답이 시큰둥하면 벌컥 분노가 치밀었다. 
<프렌즈>였던가, 예쁘지도 않은 아기 보여주며 예쁘지?, 예쁘지? 라고 묻거나 말도 못하는 아기한테 수화기 대주면서 바보 같은 유아어로 통화하라고 강요하는 거 정말 싫다는 에피소드를 보며 나도 킬킬 웃기는 했지만, 속으로 우리 정민공주는 정말 예쁘니까! 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공주의 부모도, 거의 광분해서 예쁘다고 부르짖는 나에게 <에이~, 예쁘긴 하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는 아니지>라고 일깨워주었는데 그러면 나는 막 화가 날 정도로 팔불출 고모였다.

물론 정민공주는 실제로도 예쁘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라고 눈을 반짝거리며 공주의 사진 3종세트를 들이밀 때 사람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했을지 돌이켜보면 웃음이 난다. 대부분 <네, 참 예쁘네요>라고 응수는 했지만 절반은 속으로 비웃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


돌아보니 공주에 관한 한 콩깍지가 완벽하게 덮여있던 건 5살까지였던 듯하다. 공주가 다섯살 되던 해 또 다른 조카가 태어났으니 말이다.  다른 조카들에겐 미안하지만 유일하게 공주님이기도 하고 첫조카이기도 한 정민이만큼 다른 녀석들에겐 심하게 콩깍지가 씌어지질 않는 게 사실이다. 물론 다들 예쁘긴 한데, 처음처럼 미쳐 광분할 정도는 아니라고나 할까... ㅎㅎ

뒤늦게 대학원에 다닐 무렵에도 아직 콩깍지가 조금도 벗어지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다들 공부에 힘쓰는 합동연구실에 공주를 데려가 자랑하는 작태를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 연구실 책상에 내가 늘 공주의 사진을 세워두고 자랑을 일삼기는 했었지만, 그리고 주말엔 주로 우리집에 와 있던 공주가 학교 간다고 매일 집을 나서는 고모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쓴 적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몇번이나 학교에 공주를 데려갔는지 참 민망하기 그지없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벨로나 착한 후배들이 반겨주긴 했으나, 딸도 아니고 조카를 데려와 자랑하는 팔불출 고모를 손가락질한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게다. 그랬던 그들이라도 자기 조카나 자식이 생겨서 눈에 콩깍지가 덮이게 되면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해주려나...

며칠 있으면, 태명 '짱이'로 세상에 나와 태어난지 열흘만에 또 한살을 먹어야 했던 정민공주의 10번째 탄신일이다. 공주 못지않게 생일파티를 기다리며 고모도 마음이 설렌다. 
이제와서 새삼 남자한테 콩깍지가 씌는 일은 없을 듯하니, 내 인생의 콩깍지는 이제 조카들을 향한 것일 뿐이리라. 세월이 흐르면서 꽤나 헐거워지긴 했어도 이 팔불출 고모의 콩깍지는 평생 안벗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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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공주

투덜일기 2008. 12. 5. 16:28

왕비와 무수리가 사는 누추한 집엔 일주일에 한번씩 공주가 왕림한다.
각별한 보필과 우러름을 받는 것이 본능인 왕비와 공주.
그러나 서대문궁(?)엔 두분을 보필할 무수리가 하나 뿐이니, 다른 공간에서와 달리 그곳에선 각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선점하려는 할마마마와 공주마마의 세력다툼이 매번 불꽃을 튀긴다.
왕비와 무수리의 촌수는 1촌. 왕비와 공주 사이는 2촌, 공주와 고모 무수리의 촌수는 무려 3촌이다.
왕비는 그 점을 극구 강조하며 (가령, "할머니한테는 너보다 딸인 고모가 더 중요해! 그러니까 고모 고생시키지 마라!"라고 공격하심) 매번 공주 보필에 온몸을 다 바치는 고모 무수리의 행태를 못마땅해 하신다.
할마마마의 판에 박힌 잔소리를 들으면 어린 공주 또한 큰 눈을 더욱 크게 부라리며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참견하지 마!"라고 반박한다.
무수리는 즉각 버릇없는 공주의 태도를 나무라며, 누가 뭐래도 할머니는 '우리 엄마'이니 까불지 말라고 쏘아주지만 어려서부터 할마마마와 라이벌 관계였던 공주는 무수리의 핀잔 쯤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왕비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사실 고모무수리에게 공주는 11년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기에 주변에서 아무리 손가락질을 해도 넘치는 애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자기 자식보다 첫 조카가 더 예쁘다는 속설이 있겠나.
아무튼 공주가 왕림하는 날이면 무수리는 일찌감치 장을 봐다가 공주가 원하는 반찬을 정성스레 만들곤 하는데 공주는 생긴 것과 달리 입맛은 소박하여 요구하는 반찬이라는 것이 빨간고기(깻잎을 넣은 제육볶음을 의미), 명란젓, 날치알 넣은 달걀말이 정도다. '안심 스테이크'라든지 '생 바질을 넣은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샐러드' 같은 건 정릉궁에 상주하는 왕실 요리사에게나 청해야함을 익히 알기 때문일 것이다. ^^

우스운 건 왕비에게 늘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면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시면서 공주가 왕림하는 날 부산을 떨며 뭔가 특별요리를 만들면, 콩알 만한 조카딸 하나 먹이려고 뭘 그리 애쓰냐고 타박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딸 무수리의 고생이 안타까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 만날 밥순이 노릇 하느라 손에 물 마를 날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왜 하필 공주 오는 날만 신경을 쓰시는지!
어젠 빨간고기 이외에도 공주가 좋아하는 고사리 나물을 볶으려고 왕비마마에게 손질을 부탁하였더니, 제사 때 나물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사리는 뭣하러 사왔느냐고 구시렁거리셨다. 나물 중에서도 공주는 고사리나물을 제일 좋아하는데!
혹시라도 공주 위주의 상차림에 왕비마마가 삐치실까봐 일부러 생태찌개도 끓여바쳤건만
어제 밥상에서도 왕비와 공주는 배추쌈을 놓고 또 한판 힘겨루기를 했다.
"할머니는 애기 배추 먹지마! 작은 건 다 내 거야!"
"다 같이 먹는 거지,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
"아니야, 애기 배추는 원래 나만 먹는 거야! 할머니는 큰 배추만 먹어!"
"너도 반씩 잘라 먹으면 되잖아!"

어차피 손바닥만한 크기의 쌈배추라 크고 작은 걸 다툴 일도 없었는데... 나 원 참. -_-;;
공주 안 보는 사이 얼른 앙증맞은 노란 배추를 집어드는 왕비의 손길을 보며 무수리는 속으로 킥킥킥 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무수리에겐 첫번째 관심의 대상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왕비와 공주의 사소한 알력다툼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왕비마마는 자꾸만 아이처럼 어려지지만, 공주는 나날이 생각이 깊어지고 어른스러워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공주도 무수리와 함께 할마마마를 깍듯이 보필할 날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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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건 싫다

투덜일기 2008. 11. 22. 11:15

갑작스레 영하로 뚝 떨어져버린 며칠 동안 차렵이불을 두 개 덮고 잤다.
원래 한겨울 용 이불은 퍽이나 두텁고 폭신한 무명 솜이불인데 12월도 되기 전에 그 이불을 꺼낸다는 건 죽도록 싫은 겨울이 벌써 완연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일부러 참았다.
원래 바닥생활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추위에 워낙 민감하고 싫어해서 도저히 침대생활은 자신이 없다.
옥매트나 전기담요를 깐다는 둥, 거금을 들여 돌침대를 샀다는 둥 침대 애호가 지인들의 겨울나기 방법을 들어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따땃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는 안락함을 포기할 수가 없고
굳이 겨울이 아니더라도 침대에 누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으론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내가 아파트를 싫어하는 이유엔 따뜻하지 않은 방바닥도 포함된다. 분명 실내 공기는 따뜻한데 바닥엔 별 온기가 없는 아파트의 방들... 참말로 정이 안간다. 
지은지 30년 가까이 됐어도 연탄 보일러, 기름 보일러를 거쳐 가스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낡은 우리집은 방바닥이 얼마나 따끈따끈한지 모른다. 물론 아파트보다야 외풍이 있어서 화장실과 마루는 춥지만, 조카들이 겨울이면 수시로 찜질방 놀이를 생각해낼 만큼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엎드려 귤을 까먹으며 책을 읽거나 TV를 보며 등을 지지는 재미를 선사하는 방구둘의 온기는 그나마 견디기 힘든 계절의 버팀목이다. 

하기야 방바닥이 아무리 따뜻해도 추운 걸 못참는 내가 또 다시 낡은 이 집에서 올 겨울을 나려면 두꺼운 이불은 필수이니 다음번에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군말없이 한겨울용 솜이불을 꺼내 덮을 작정이지만
당분간은 차렵이불을 겹쳐덮는 걸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추위만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내가 이불 두장을 겹쳐덮고 잔다고 하면 지인들은 퍽 의아해한다. 자다가 보면 이불이 서로 따로 놀기 마련일 거라나. 하지만 잠버릇이 얌전한 편인 나는 자고 일어나서도 이불이 늘 그대로다. 어쩔 땐 잠자는 공주 자세로 두손을 가슴에 모으고 잠들었다 그대로 깨어날 때도 있다. -_-; 자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도 그리 건강한 수면법은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나는 자면서 크게 뒤척이거나 돌아다니지 않는다.

얼마전 잠버릇 험한 조카들이 하도 이불을 차버려서 감기에 걸렸다는 올케의 얘기를 듣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어렸을 때도 이불을 차버리지 않았는지.
엄마의 얘기를 들으니 나도 어려선 이불을 차버리고 잤단다. 그래서 엄마가 중간에 늘 다시 덮어줘야 했다고. 그 말을 들으니 이불을 차버리고 추워서 바들바들 떨다 이불을 덮어주시는 부모님의 손길에 잠결에도 행복해 했던 느낌이 아련히 떠오르는 듯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한방에서 나란히 잠을 잤기 때문이다.
가끔 정민공주가 와서 자고 갈 때면 나는 거의 잠을 설친다. 험악하게 돌아다니며 자는 녀석을 다시 제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무수리의 밤을 보내야하기 때문인데, 어려서부터 대부분 따로 재우는 요즘 아이들은 자다가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질 무렵 엄마가 다시 이불을 꼭꼭 여며주는 손길의 기쁨을 모르고 살겠구나 싶은 것이 좀 안타깝다. 물론 침대에서 이불을 차버려 차가워진 몸으로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면서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잠꾸러기 공주는 나랑 잘 때도 고모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건 말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매일 자다말고 새벽에 아이들 방에 건너가 이불을 덮어주려고 일부러 깨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불 차버리고 자도 될 만큼 난방온도를 심하게 올리는 것 역시 안될 일이니, 잠버릇 심한 조카들의 겨울나기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풍요로워져서 좋은 것도 참 많지만, 온 식구들이 한방에서 겹쳐자던 불편한 어린시절이 요즘 조카들의 편한 삶보다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오로지 따뜻한 이불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추운 걸 싫어하는 마음은 똑같지만 그때의 추위가 지금보다 훨씬 혹독했던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과거와 추억만 바라보며 사는 건 늙어감의 징후라고 했거늘, 요즘 왜 이리 옛날 생각만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추운 건 싫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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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이 좋다

놀잇감 2008. 11. 20. 18:08

문방구를 사모으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취미다.
오래 전엔 눈가가 달착지근 아련해지는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모으던 때도 있었고,
수첩류와 무지공책, 예쁜 볼펜, 스티커, 메모지 따위를 주섬주섬 사모으던 시기를 거쳐
요샌 뭐든 주제를 정해 온갖 문방구류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주제를 자전거로 정하긴 했지만 아직 '모았다'고 할 만큼의 아이템을 마련하진 못한 상태.
자전거를 장만해놓고도 게으름 탓에 제대로 타지 못하는 죄책감을 은근히 다른 소비 욕망으로 떠넘기려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자전거 그림이 들어간 문방구를 유심히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눈에 띈 물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출처: 텐바이텐 all rights reserved by gongjang

자전거 그림이 들어갔대서 무조건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자전거의 환경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아 재생신문지로 흑연을 말아 연필을 만들었대고, 연필이 담긴 종이 케이스도 접착제 대신 실로 박았다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성스러웠다.
사실 자전거 그림은 약간 성의가 없게 느껴져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풍은 아니지만 슬슬 휘갈겨도 잘 써지는 연필심의 부드러움과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돌돌말린 연필밥이 내 마음에 꼭 들어서 요샌 뭐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연필을 사용한다.

모름지기 연필은 연필깎이로 둘둘 돌려 갈아놓는 것보다는 일일이 칼로 약간 기름하게 깎아 세로 결을 살려놓아야 내 마음에 꼭 드는데, 이 연필은 나무가 아니라 칼날이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앙증맞은 연필깎이도 하나 장만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연필깎이는 어디까지나 이 연필 전용이고, 나머지 연필들은 죄다 칼로 깎아쓰고 있는데 전동이든 수동이든 연필깎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연필을 칼로 깎아 쓴 게 언제인지는 돌이켜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미제인지 독일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주물(혹은 무쇠?)로 된 투박한 수동연필깎이가 있었다. 원래 책상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여서 아빠는 둥근 쇳덩어리 같이 생긴 그 연필깎이를 두툼한 나무토막에 못으로 고정시켜주셨는데, 우리 삼남매는 연필을 깎을 때면 양발로 그 나무토막의 양 귀퉁이를 누른 뒤 구멍에 연필을 꽂고 한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 다음엔 플라스틱으로 된 집 모양의 연필깎이도 생겨났던 것 같다. 연필을 꽂는 구멍에 집게 같은 것이 달려 그걸 젖히고 연필을 꽂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이제 양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고 한손으로 연필깎이 꼭대기를 지그시 누르며 손잡이를 돌리면 됐다.
물론 몇십원짜리 휴대용 연필깎이를 늘 필통에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도 아이라이너 전용으로 사용되는 손가락마디 만한 소형 연필깎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형이든 대형이든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연필이 깎였을 때 빼지 않으면 연필 한 자루를 금방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기계식 칼날이 싫기도 했지만, 나는 잘 드는 칼로 사각사각 연필을 돌려가며 나무를 벗겨내고 마지막에 심을 너무 가늘지 않게, 적당한 길이와 두께로 깎아놓아야 성에 찼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은 연필 다섯자루를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키 순서대로 넣어놓으며 몹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연필의 질이 형편없었다. 심이 골아서(자꾸 떨어뜨린 탓이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도 툭툭 부러져 나가는 연필이 흔했고, 재질과 색깔이 다른 나무를 붙여놓은 연필을 깎다보면 결이 이상해 깎이는 게 아니라 나뭇결을 따라 쪼개져 흑연심이 뭉텅 드러나는 연필도 있었다. 겉으로는 HB라고 적혀 있어도 심이 너무 단단해 색도 흐리고 걸핏하면 공책을 찢어먹는 연필도 종종 만났다. 그러다 겉모습도 매끈한 독일제나 잠자리가 그려진 일제, 하얀 지우개가 끝에 달린 노란 미제 연필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도 좋았지만 칼날 끝에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듯 깎이는 삼나무 재질(국산연필보다 심히 부드러운 나뭇결이 신기해 나중에 알아보니 삼나무라고 했던 듯)의 연필밥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문지를 떡하니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묘미는 나만이 즐겼던 것일까?
고모부가 출장에서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 세트엔 작은 연필깎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예쁜 색심까지 날카롭게 깎이는 게 아깝고 싫어서 언제나 칼로 색연필을 깎았는데, 특히 색연필을 깎고 나서 모인 연필밥은 너무 예뻐서 단숨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통에 모아두기도 했었다. +_+

하지만 연필 깎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된 건 분명 국민학교 고학년 때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전엔 연필깎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필깎는 칼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한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이었기 때문이다. 휘청휘청 얇고 너무도 예리해서 나에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으로 잘라(쓰다가 반쪽으로 잘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연필을 솜씨 좋게 깎아주던 최초의 손은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모든 재주에 능하셨던 한량 출신의 할아버지는 서예도 일품이고 한시도 읊으시고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셨으니, 그까짓 연필 정도 깎는 것이야 우스우셨을 게다. 그리고 짐작컨대 연필깎이에서 나오는 방정맞고 짤뚱한 연필 모양에 비해 약간 길쭉하고 늘씬한 느낌의 연필을 깎아내는 나의 취향은 할아버지한테서 비롯된 듯하다. 나와는 겨우 아홉살 차이가 나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우리 막내고모가 깎아놓은 연필 모양도 내 솜씨와 비슷한 걸 어른이 된 후에 깨달었는데, 그땐 그게 고모를 우러러보던 어린 조카의 무의식적인 모방이라 여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 막내고모와 내가 둘 다 연필깎기를 제대로 배운 인물이 할아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너무 작아서 할아버지가 놓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은 언제나 요술을 부리듯 일정한 길이로 깎인 늘씬한 연필을 탄생시켰다. 도루코 면도날 다음으로 쓰인 칼은 역시 도루코에서 나온 문방구용 칼이었는데 칼날이 좀 더 단단하고 윗부분엔 알루미늄으로 덧씌워 손으로 잡고 쓰기에 편하게 생겨먹은 그 칼도 역시나 작아서,  할아버지댁에서 분가해 나온 부모님과 살던 저학년 때엔 엄마나 아빠가 내 대신 연필을 깎아주었던 것 같다. 삼남매의 연필을 깎아주기가 번거로워져서 부모님이 연필깎이를 장만했을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일본에서 대거 수입된 앙증맞고 예쁜 샤프펜슬에 혹해 연필을 멀리했고 수학이 아닌 한 공책에 쓰는 필기도구도 볼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추억이 덜하긴 하지만, 특활로 미술반 활동을 했으므로 누가 뭐래도 데생 연필은 질 좋은 나무와 흑연이 들어있는 걸 골라 정성스레 칼로 깎아 갖고 다녔고 심이 물러 잘 부러지는 4B, 2B 연필 하나를 제대로 사겠다고 큰 문방구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때는 연필과의 완전 절교 시기였고, 나의 연필 사랑이 다시 불붙은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의류회사의 서울 구매사무소라는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처음 사무실은 대단히 허름했는데
놀랍게도 메모지와 연필, 볼펜, 노트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뉴욕 본사에서 보내준 것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허영심이라 실소가 나오지만, 어쨌든 일년에 두세 번 한국에 들르는 사장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사무용품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인간이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특히 사장이 하얀 지우개가 달린 노란 미제 연필로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품함엔 절대로 연필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인간이 일년에 쓰게 될 연필이 한자루나 될까말까 한데, 본사에선 분기별로 연필을 비롯한 사무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으니 참 웃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사무용품 사물함에 들어 있는 갖가지 문방구류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회사 로고까지 인쇄해 넣은 전화 메모용 포스트잇도 좋았고, 대학때 즐겨쓰던 빅볼펜과 노란연필을 마음껏 쓰는 것도 좋았다. 
특히 팩스 비용 최소화를 위해 발신 팩스는 한꺼번에 타이피스트에게 타이핑을 시켰는데
그 전에 이면지에 초고를 쓸 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듯 다들 연필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짧은 영어로 통신문을 작성하려니 모두들 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답안을 작성하듯 정성을 들였던 게 아닐까. ^^
암튼 볼펜과 연필, 갖가지 크기의 노란색 메모패드, 각종 포스트잇은 집에도 가져다놓고 썼는데
그 회사를 관두고도 몇년동안은 그때 집어온 메모패드와 노란 연필을 아주 요긴하게 집에서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

직장생활을 관두고 나서 만날 컴퓨터와 씨름을 하던 내가 다시 연필깎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역시 조카들이 생기고부터다. 우리 조카들은 넷 가운데 돌잡이에서 세 녀석이나 연필을 잡았을 정도로 아기때부터 연필을 좋아했고 나는 조카들이 해놓은 의미없는 낙서라도 그저 대가의 작품인 양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연필을 깎아 그들에게 바쳤다.

마분지에 연필. 정민공주 5세때 작품


그런 정성을 들이면 이런 그림도 간간이 하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언젠가 내가 기분전환 삼아 파마를 한 다음에 그려달라고 졸라서 얻은 건데, 나중에 정민공주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전시하려고 고이 간직해두고 있다. ㅋㅋ

암튼 나는 요즘 마냥 연필이 좋다.
조카들이 쓰다가 두고 간 동아니, 모나미니 하는 알록달록한 연필들이 벌써 죄다 몽당연필로 변해버렸지만 좀체 버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세살 된 조카의 손엔 몽당연필이 또 제격이기도 하고, 모나미 볼펜 몸통을 끼워 하나쯤은 꼭 들고 다니던 몽당연필의 추억 때문에라도 최대한 끝까지 써볼 작정이다.
물론 자전거 그림 뿐만 아니라 돌고래 무늬와 아무 무늬없는 나무색 연필, 단순한 느낌의 검정 연필도 기어이 사들였다.
검정 나무로 된 연필은 아마 또 칼로 연필을 깎아놓은 연필밥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 같아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글씨체가 부끄러워 요샌 뭐든 손으로 쓰는 걸 두려워하게 되는데 사각사각 소리도 경쾌한 연필로는 연애편지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지 보낼 연인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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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모험

추억주머니 2008. 10. 30. 20:48

내가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최초의 장래희망은 선생님이지만, 가족들의 증언과 놀림으로 각인된 어린시절의 장래희망은 버스차장이었단다(참고로 한살 어린 나의 큰동생의 꿈은 버스 운전수였고, 나와 둘이 세트로 버스놀이를 많이 하고 놀았다고 했다).
나와 세대차가 많이 나는 이들은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하겠지만, 버스 중간에 달린 문앞에 섰다가 정류장마다 오르내리며 차비도 받고 만원버스에 사람들을 밀어올리기도 했던 자주색 유니폼에 빵떡모자를 실핀으로 꽂은(주로 양쪽으로 땋은 갈래머리거나 단발머리였다) 버스 차장이 되겠다고 했다니 얼마나 웃긴지. 버스 외부에 달린 볼록거울도 없고 하차벨도 없던 시절, 버스 차장은 차체를 탕탕 두번 두들기며 "오라이!"라고 외쳐 운전수에게 출발을 알렸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둘 이상 데리고 탄 승객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 한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버스 계단을 내려주기도 했다.
버스 차장이 되고 싶다고 얘기했던 건 정말로 생각나지 않지만, 버스차장이 아직 어려 행동이 굼뜬 나나 큰동생 중에서 가까이에 있는 아이를 덥썩 안아 허공을 날듯 버스에서 내려주었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무서움 많은 나는 대부분 거친 손길로 내 허리를 안아 붕 날리듯 버스 밖으로 내려주는 걸 싫어했는데, 왜 차장이 되겠다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다. 어린 나의 눈에 그저 버스가 멋있고 근사해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국민학교 시절 "커서 뭐 될래?"라고 묻는 어른들의 질문에 암팡지게 "선생님이요!"라고 대답하곤 했던 나에게 삼촌과 고모들은 버스 차장 된다더니 웬 선생님이냐며 버스 운전수가 되겠다던 큰동생과 나를 한꺼번에 놀려댔다.

동생의 버스 운전수 희망이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내 버스차장이란 직업의 지난함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차비를 <삥땅>치는지 감시하느라 근무가 끝나면 알몸수색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는 버스차장들의 항의시위 사건도 뉴스에 종종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에 또래 친구들에게 차비를 받고 여린 몸으로 만원버스 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온몸으로 사람들을 받치고 있는 모습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버스 차장이 되겠다던 나의 소망은 재빨리 꼬리를 내렸고 다만 버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애정만 오래도록 남았던 모양이다.
많이 흔들리거나 기름냄새가 심한 버스에서 멀미를 해 샛노란 얼굴로 중간에서 내려야 하거나 엄마가 준비하고 다니던 비닐봉지에 구토를 한 기억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어려서도 지금 만큼이나 버스 타는 걸 좋아했다. 제일 처음 혼자 버스를 탄 게 몇살 때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암튼 혼자 타는 버스를 나는 대단한 모험처럼 즐겼고 멀지는 않지만 노선이 기묘해 꼭 한번은 버스를 갈아타야하는 할머니댁에 주말마다 숙제를 챙겨들고 가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다른 교통수단보다 버스가 훨씬 좋다는 이야기를 언젠가도 적어놓았지만, 고등학생 땐 심심할 때마다 친구들과 회수권 한장으로 떠나는 버스 종점여행이 엄청 재미있고 신나는 일탈이었다. 그땐 버스노선도 워낙 길어서 왕복하려면 3시간즘 걸리는 버스도 있었는데, 그 오랜 시간 조잘조잘 떠들며 창밖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늘 신났다.

그러나 버스 종점여행에 맛을 들이기 이전에, 한번은 버스를 잘못 타 크게 식겁한 적이 있었다.
중학생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마지막날엔 꼭 단체로 영화나 연극관람을 했었는데 그날은 마침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난 뒤였다. 친구들과 나는 당시 유행했던 <잘생긴> DJ가 나오는 떡볶이집엘 가느라 대학로에서 성신여대앞 돈암동까지 걸어갔다. 차비까지 돈을 톡톡 털어 모은 돈으로 떡볶이와 튀김 따위를 사먹은 우리들은 내가 여유 있게 갖고 있던 회수권을 한장씩 나눠가진 뒤 각자 집으로 향했다. 돈암동에서 집이 멀지 않은 친구들은 걸어가기로 했고 그 외의 친구들과 나는 회수권을 한장씩 손에 들었다. 가끔 친구들을 따라 돈암동에 떡볶이를 먹으러 간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낯선 그 동네에서 불안해 하는 내게 친구들은 타야할 버스 두 가지를 가르쳐주고는 총총이 제 버스가 오는 순서대로 가버렸다. 그런데 친구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타야할 버스는 둘 다 중간에 노선이 갈라져 버스 앞에 별도로 붙여놓은 표지판을 확인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는 사실이었다. 수중에 회수권도 딱 한장밖에 없는 주제에, 그때도 잘난척 하는 아이였던 나는 버스 운전기사에게 방향을 묻지도 않고 늘 학교앞에서 보던 버스 번호를 보자마자 냉큼 올라탔다. 

그러나 내가 탄 버스는 예상하던 동네로 가지 않았다. 버스 노선이 바뀌었나보다고 애써 위로하며 좀 지나면 낯익은 길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질 않았다. 급기야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어느 아주머니께 이 버스가 **동 가는 거 아니냐고 물었고, "하이고, 버스 잘못탔네!"라는 청천벽력같은 대답을 들었다. 이미 나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땐 당연히 버스 안내방송도, 버스노선도 같은 것도 없었다. 이미 버스 차장 제도도 없어진 뒤였다)
때는 깜깜한 밤이었고 내 수중엔 회수권도 땡전 한 푼도 없었다. 대학생 때도 종종 해지는 시간이 통금시간이었던 내가 겨우 중학생 때 밤중귀가라니. 난생 처음 간 동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어정거리며 느꼈던 낭패감과 공포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엉엉 울며 일단 건널목을 찾았다. 건널목 앞 구멍가게엔 빨간 공중전화가 매달려 있었다. 일단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 내 상황을 알려야한다고 생각했고, 훌쩍훌쩍 울며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돈이 없는데 집에 전화를 걸어야하니 20원(10원이었던가?)만 빌려달라(언제 갚겠다고?)고 했다. 가게 주인은 나를 째려보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대꾸도 하지 않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가 유리 미닫이 문을 탁 닫았다.
서러움이 복받쳐 엉엉 울며 건널목을 건넌 나는 어서 차비와 전화비를 구걸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 것인지 절망감 사이에서 한동안 울기만 했다. 행인도 거의 없던 캄캄한 밤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울고 있는 교복 입은 여중생이라니. 누가 봐도 가엾긴 했던지, 멀리서 다가오던 아줌마가 나를 빤히 관찰했다. 나는 속으로 이 아줌마에게 어떻게든 사정을 설명하고 돈을 구걸해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그쪽을 흘끔거리며 계속 울고만 있었다. 다행히도 그 아줌마가 왜 우냐고 말을 걸었고, 나는 웅얼웅얼 버스를 잘못 탔는데 차비가 없다고 고백한 뒤 또 한참 끄억끄억 울어댔다.(내가 울음끝이 좀 질기다^^;)
착한 그 아줌마는 당장 지갑을 열어 백원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며 집에서 엄마가 걱정하겠다고 혀를 찼다. 나는 전화부터 해야하는데 전화할 돈도 없었다고 흑흑 흐느꼈고, 아줌마는 길 건너편 공중전화를 가리키며 전화부터 하라고 타일렀다.
당시 학생 차비는 50원쯤 되었던 모양으로 백원이면 차비와 전화를 걸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때 백원이 지금 천원보다도 가치가 높았다는 얘기다. 암튼 나는 그 쌀쌀맞은 가게 주인에게 다시 가서 백원을 내밀며 전화걸게 잔돈을 바꿔달라고 말하며, 속으로 가게 주인이 나를 의심해 그 돈을 훔쳤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그래서 돈을 빼앗으면 어쩌나 마구 떨었다. 다행히 매몰찬 가게주인은 말없이 잔돈을 바꿔주었고, 내가 공중전화에 매달려 또 엉엉울면서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눈치였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던 딸이 대뜸 전화를 걸어 엉엉 울며 버스를 잘못 타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에 내렸다고 하자, 엄마는 버스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갈테니 얼른 버스를 바꿔타고 오라고 당부했다. 차비도 없어서 길 가는 아줌마한테 얻었다는 말에 엄마는 푹 한숨을 쉬었을 뿐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드디어 버스를 다시 타고 몇번이나 운전기사와 주변 승객에게 **동 가는 거 맞느냐고 묻던 나는 익숙한 길과 동네가 나타나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엄마가 눈에 들어온 순간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춘추복을 입기엔 아침저녁으로 약간 쌀쌀한 날이었던지 엄마는 스웨터를 팔에 걸친 채 기다리다, 버스에서 내려 꺼이꺼이 우는 나에게 얼른 옷을 입혀주었다. 엄마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오며, 친구들과 돈을 모두 털어 떡볶이를 사먹느라 여유 있던 회수권을 나눠가졌다는 사실을 실토했음에도 나는 전혀 야단을 맞지 않았고 다만 앞으로는 비상금으로 천원짜리 하나랑 회수권 10장을 꼭 갖고 다니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내 모험담을 들은 친구들은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나는 정말로 간담이 서늘해졌던 경험이었다.

지금 계산해보니, 내가 처음 홀로 버스를 탔던 건 5학년때부터인 것 같다. 셋방을 전전하느라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같은 동네에서 집을 옮겨다녀야 했던 그 시절, 5학년 무렵엔 학교에서 걸어다닐 수 없어 버스를 타고 대여섯 정거장 정도 가야하는 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7살에 입학한 나는 당시 11살이었다.
그런데 올해 11살이 된 정민공주도 얼마 전 버스 모험을 시작했다.

만날 제 엄마 차를 타고 편히 오던 우리집엘 혼자서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은 올들어 시작된 정민이의 소망이었다. 제 엄마와 버스를 타고 오는 걸 일부러 몇번 연습도 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달 처음으로 정민이는 영어공부를 할 책이 담긴 보조가방을 들고 첫 홀로 버스 여행을 시도했고 결과는 대체로 성공이었다. 중간에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얼마전 버스 노선번호 뒤에 A/B 식별제가 시행된 후라 주변 아줌마에게 물어 확인한 뒤에 버스를 탔다고 했다. 
비록 한 정거장 전에 내리는 바람에 한 정거장은 걸어오다 마중나간 나와 상봉하긴 했지만 정민이도 나도 몹시 뿌듯했었다. 
문제는 두번째로 오던 날이었다.
갈아타는 버스정류장에서 정민이는 하필 나에게 110번 A를 타는 것인지 B를 타는 것인지 전화로 물었고, 나는 너무도 확신에 차서 A라고 가르쳐주었다. -_-;;
그러나 20분쯤 뒤 정민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고모, 이 버스 이상한데로만 가는데? 이번 정류장이 경동시장이고 다음이 동대문 구청이래."
헉... 내가 잘못 가르쳐줬던 거다!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한바퀴 돌면 **동엘 오는지 물어보고 아니면 건너가서 갈아타라고 일러준 뒤 나는 초조하게 마음을 졸였다.
중학생이면서도 낯선 동네에서 더럭 겁을 집어먹었던 나의 경험이 떠올랐다.
다행히 정민이에겐 돈도 넉넉하고 휴대폰도 있으며 시간도 대낮이었으니 나보다 나은 상황이었지만, 역시나 어린 정민이는 겁이 난다며 전화를 끊지 말고 계속 통화를 하자고 했다.  
어리버리한 고모 탓에 결국 정민이는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처음 출발했던 기점으로 되돌아가느라 한시간이나 허비한 뒤 무사히 110번B 버스를 탔고, 정류장도 제대로 내려 버스정류장에서 멍청한 고모와 상봉했다. 과거의 나와는 상황이 꽤 다르긴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던 정민이는 약긴 긴장된 표정이었다가 나를 보며 이내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까지 1시간 반동안 부주의한 정신머리를 자책하며 정민이만큼이나 전전긍긍 조바심을 쳤던 내가 더 감격스러웠지만 물론 울진 않았다. ㅋ
그러고 나서 지난 월요일. 세번째로 버스모험을 시도한 정민이는 출발할 때도 도착해서도 전화 한번 안하더니 대뜸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왜 마중을 안 나왔느냐고 따졌다. ^^

정민이가 5살 때였나, 버스는 가난한 사람들만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일부러 단둘이 버스를 타고 시내 책방에 갔던 적이 있다. -_-;;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 재미와 파란 줄이 그어진 버스전용차선의 의미, 주차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비싼 택시비를 낼 필요도 없이 빠르게 목적지에 갈 수 있는 버스의 묘미를 제대로 설명해주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정민이는 혼자서 버스를 갈아타고 고모네 집에 오는 걸 대단한 재미로 느끼는 눈치인데, 그게 장하고뿌듯하긴 해도 여전히 나와 울엄마는 공주의 홀로서기가 불안하다. 그나마 밤중에도 홀로 버스타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땐 10살쯤부터 스스로 다 컸다고 잘난체 했었지만, 조카를 보면 아직도 마냥 애기 같고 불안하다. 동생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우겨서 정민이에게 휴대폰을 사준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이 좀 험악하고 불안한가! 아이가 셋이라 다섯식구가 가끔 택시를 탈 때도 눈치를 봐야했고, 웬만해선 우르르 버스를 타고 다녔던 나의 어린시절과 달리 조카들은 태어나자마자 제 아빠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지극히 드물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의 홀로서기는 더더욱 느리고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카들이 자라는 걸 지켜보며 세상은 달라졌어도 많은 것들이 되풀이됨을 느끼며 참 신기하다.
짜증스러워 귓등으로 흘렸던 어른들의 잔소리를 지금은 내가 하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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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미아

놀잇감 2008. 9. 25. 21:32


영화본지 일주일이 지나 그 감동이 이미 가물가물해지려고 하고 있으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어서 끼적여야겠다.
뮤지컬 <맘마미아>는 본 적이 없다. 아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 뮤지컬이 몹시 보고싶으면서 동시에 어쩐지 꺼려지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섣불리 뮤지컬을 보러갈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집에 전축은 없고, 카세트플레이어와 라디오로만 음악을 듣던 내가 중학교 때 처음 아버지가 장만하신 워크맨으로 이른바 <스테레오> 음악을 처음 영접한 충격적인 경험을 한 순간 내 귀에 울려퍼졌던 노래가 바로 아바의 주옥같은 명곡들이었다.
왼쪽 귀에서 시작해서 오른쪽 귀로 뇌를 통해 연결되는 듯한 오묘하고 강렬한 스테레오 사운드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삼남매는 앞다투어 서로 음악을 듣겠다고 줄을 서다시피했다. 아버지가 즐겨 들으시던 폴모리아 악단의 다른 영화음악들은 비교적 따분하게 생각되던 반면, 아바의 음악들은 열세살 짜리 계집애가 들어도 마냥 좋고 신이 났다.

그런데 그 소중한 아바의 명곡들로 만든 뮤지컬이라니... 뮤지컬 배우들이 과연 그 아름다운 <오리지널> 음악들을 제대로 소화나 할 것인가, 겁이 날 정도였고 성량 떨어지는 배우들이 노래들을 망치면 막 화가 날 것 같았다. 더욱이 스무살 된 딸을 결혼시키는 중년의 주인공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안들었고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기도 했다.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팀의 공연이 왔을 때도 나는 줄곧 외면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지들이 어떻게 아바의 노래를 제대로 표현하겠어, 라며. ^^;
물론 내심으론 뮤지컬 맘마미아에 대한 혼자만의 상상과 기대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다. 배우들은 입만 벙긋거려 립싱크를 하고, 아바의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식으로.

그러다 영화 맘마미아의 소식이 들려왔다. 주인공이 메릴 스트립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드디어 맘마미아를 볼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캐스팅엔 심히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영원한 나의 미스터 다아시 콜린 퍼스까지 나온다는데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했던 대로 피어스 브로스넌의 노래솜씨는 아슬아슬했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자연스레 어우러진 소중한 아바의 노래들은 전혀 훼손된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그간 뮤지컬 맘마미아를 멀리 했던 내 편견이 전혀 근거없는 아집이었을 것이다.
스무살 소피는 매우 사랑스럽고 예쁜데다 가창력도 뛰어났으며, 메릴 스트립은 연기로든 노래로든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했다. (아.. 나도 메릴 스트립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늙어야 할 텐데!)
아참, 콜린 퍼스의 노래 솜씨는 세 미중년 가운데 단연 돋보일 정도였고, 뱃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리드하는 장면은 남들에겐 몰라도 나에겐 그저 흐뭇한 백미였다. 
게다가 그리스와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은 또 어떻고!! +_+
영화관을 나서던 나는 입으로는 Thank you for the music을 흥얼거리며, 머릿속으로는 어서 지중해를 가봐야해, 그리스를 가봐야해... 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아바의 추억 때문에 더욱 점수를 많이 땄을 수도 있지만, 내겐 정말 좋았던 영화.
DVD가 나오면 당장 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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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필요해서

놀잇감 2008. 9. 2. 15:17
어제부터 약간 신경이 곤두서있다.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도 곱게 안나간다. 이건 또 무슨 증후군이람.
이럴 땐 억지로라도 웃음이 필요하고 행복을 부르는 주문이 요구된다.
내게 그런 마술을 언제든 부릴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사랑하는 나의 조카들.
녀석들의 행복이 여기에도 전염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얼른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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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사랑을 타고

놀잇감 2008. 7. 22. 20:58
젊은이들은 옛날 영화 <비는 사랑을 타고(Singing in the Rain)>는 모르는 대신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더 잘 알겠지만, 노래도 그렇고 빗속을 걸어가며 발로 물장구를 치다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는 영화 속 장면은 요새도 오마주인지 패러디인지 표절인지 알 수 없는 명목으로 비슷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어린 시절에 본 그 영화와 장면들이 깊이 각인된 때문인지
장마철만 되면 나도 그렇게 빗속을 신나게 쏘다니고 싶은 충동이 되살아난다.
더불어 예쁜 장화와 우산에 대한 로망도. -_-;

내가 어린 시절엔 겨울 부츠와 함께 장화도 부잣집 아이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거나, 엄마들이 꽤나 별러야 사줄 수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던 것 같다.
물론 본인들은 신발주머니에 잘 들어가지 않는 장화를 신고 학교에 오는 게 매우 싫다고 투덜거렸지만
나는 예쁜 비옷(비닐 거적대기를 둘러쓴 것 같은 내 비옷과는 차원이 다른;;)과 장화와 예쁜 우산을 세트로 들고 온 친구를 내심 몹시 부러워했었다.
나중에 나도 사촌언니가 물려준 장화를 신어볼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발이 젖지 않는다는 기능에만 충실할 뿐 조금도 예쁘지 않은 그 장화는 오히려 신고 다니기가 창피스러웠다.

어른이 된 뒤에 별 필요도 없는 문방구 쇼핑에 탐닉하는 나의 버릇이 가난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때문이라고 인정하듯, 예쁜 장화와 우산에 대한 나의 로망 역시 어린시절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뒤늦은 욕심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여전히 내가 선뜻 <저지르지> 못하고 탐하고만 있다는 것이다. ㅠ.ㅠ
물론 지름신에 홀라당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수긍을 하지만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멍은 수시로 나를 들쑤신다.
작년부터 장화를 살까말까살까말까살까말까 수십번도 더 고민했던 이유는 이를테면 이렇다.
1. 장화는 굽이 제일 높아봤자 5.5센티미터다. (간혹 6cm굽이라고 선전하는 데가 있긴 하지만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5cm에 더 가깝다!) 최소 7센티미터는 돼야 내 신발될 자격이 있는데;;
2. 겨울부츠는 종아리 굵기를 교묘하게 가려줄 디자인과 길이가 다양하지만, 레인부츠는 길어도 굵은 종아리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든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막상 사놓고도 차마 못 신고 나갈 확률이 높음.
3. 장마라고 해도 비가 잘 오지 않는 요상한 요즘 날씨 +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고 방구들 귀신에 가깝게 살고 있는 내 처지 = 과연 장화를 사서 여름에, 아니 일년에 몇번이나 신을 수 있을까? +_+
4. 3번의 이유 때문에 형편없이 활용도가 낮은 물건치고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전부터 내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 부츠는 가격이
무려 6만8천원. 봄부터 노리고 있는데 세일도 절대 안한다.
ㅋㅋ ^^;;
내가 물건을 살 때의 기준으론 <가격대비 만족도 및 활용도>가 가장 중요한 항목인데, 일년에 두어번 신으려고 이걸 사들인 뒤 좁아터진 신발장에 보관만 하려니 아직은 사고픈 욕망보다 사지 말아야한다는 이성이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우산은 또 다르다.
이미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붙여 사들인 우산이 몇개나 되는데도 사고 싶은 우산은 자꾸 내 레이더망에 걸려들고, 장화에 비하면 가격마저 착한 편이고 활용도도 높다. ^^
그렇다고 무턱대고 물건을 질러대는 인간은 또 아닌지라, 기다란 장우산이면서 우산모양이 깊어 비바람이 쳐도 머리가 쉬 젖지 않을 듯한 우산을 사고 싶다는 바람을 꽤 오래 간직만 하고 있었다. 까다로운 내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는 장우산을 만나기가 이상스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우산의 특징상 내가 들기엔 너무 길고 크거나, 내가 바라는 만큼 폭 덮이는 깊이가 아니거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레이스 따위의 장식이 요란하거나... 암튼 그랬다.

그러다가 올 장마철이 시작되었고, 비가 오든 말든 장화와 우산에 대한 나의 로망은 연일 꿈틀꿈틀 특히 밤마다 되살아나 나는 어느틈엔가 인터넷 사이트들을 배회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 조건에 딱 맞을 정도로 마음에 100퍼센트 파고드는 우산은 없었던 반면, 괜히 눈길을 끄는 녀석은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로 요것. ^^
장우산이기는 하지만, 돔 형태가 내가 바라는 만큼 깊지지도 않고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비닐우산이고 수동이며 당연히 oem 중국산이다.
위시리스트에 담아두고 들여다보며 나는 계속 지름의 욕망과 티격태격했다.
"사용후기를 보니 비닐이 그리 튼튼하지도, 완전 투명하지도 않대."
"그림제목이 <girl's goods>라니! 그림이 너무 여성적이고 편협하잖아."
"사진은 그럴듯해 보여도 실물로 보면 훨씬 허섭할거야.."
"아무리 신지 가토 제품이라지만 비닐우산치고는 가격도 비싼 편 아닌가?"
.......


하지만 결국 열흘쯤 전에 난 이 우산을 사고야 말았고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 쓰고 나가려고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 아직 본격적으로는 한번도 못써봤다. -_-;;
복날 삼계탕 재료 사러나가면서 잠깐 차에 타고 내릴 때 시운전(?)을 해본 것이 전부. ㅜ.ㅜ
마른장마가 끝나고 드디어 비가 내린 지난 주말엔 변덕스럽게 비가 오락가락해서 길다란 장우산을 들고 외출하기가 번거로웠고, 거기다 태풍이 몰고온 비라 바람에 혹시 비닐이 벌어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흠...

바짓가랑이 젖을 염려 없는 반바지에, 역시 젖어도 상관없는 고무재질의 발가락 슬리퍼를 신고 후두두둑 비닐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I'm singing in the rain~♪> 노래 흥얼거리며 물웅덩이에서 좀 철퍽거려줘야 하는데!

사실 <비는 사랑을 타고>라는 제목으로 뭔가 글을 끼적여야겠다고 생각한 동기는 따로 있었다. ^^;
지지난주 주말엔가, 억수로 비 내리던 날 그야말로 영화같은 장면들을 연출한 이가 있었으니...


다음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엔 나도 기필코 저 우산을 쓰고 나가 첨벙거려주리라 결심하며 주간 날씨를 열심히 살피고 있다. 다행히 이번주에 또 비온단다, 야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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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때문에 잠을 못 자!"
어제 촛불집회에서 정민공주가 가장 재미있다고 손꼽은 구호다.
회를 거듭할수록 촛불집회 참석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는 도대체가 저들과 말이 안통하는 걸 실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크고 많은 목소리를 모아 한입으로 질러대서 막힌 귓구멍을 뚫고라도 국민이 바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 아니겠나.

정치적으로 변질이 됐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어제 모였다가 밤을 지새우며 청와대로 몰려가려 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이 잘못되었고, 위정자들이 매번 국민과의 소통을 외면하고 진심을 왜곡, 우롱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제 저녁 8시 반이었을 게다. 촛불문화제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유발언도 몇명 못 했고 준비한 공연도 두어개 밖에 안 끝났을 때, 청와대 코앞인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100여명의 대학생들 가운데 80여명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사회자가 전하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남은 행사를 지켜보기보다 그냥 모두 일어나 연행된 그들을 구하러 가자고 외쳤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회자는 남은 공연과 발언을 준비한 이들에겐 죄송하지만, 모두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늘 하던대로 9시 반쯤 촛불문화제가 끝나면 가두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안전하게 공주를 데리고 퇴장하려던 나의 계획은 졸지에 무산되고, 우린 수만명의 대열 속에서 전경차로 막아놓은 세종로 방향의 반대인 서소문로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만난 지인들과 나란히 걸으며, 정말이지 옛날 생각 난다는 말을 하며 감격스러웠다.
시뻘건 집단주의의 광기가 싫고 겁나서 월드컵 때마다 단체관람은커녕 TV 생중계도 잘 보지 않은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서 수만명이 시청광장을 메우고 또 서소문로를 완전히 뒤덮은 채 행진을 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또 참여한 건 그야말로 오래 전 80년대의 경험이 전부였다. 그 옛날의 행진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좀 더 비장하고 두렵고 불안한 느낌이었다면, 여기저기 유모차가 보이고 온 가족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거나 연인인듯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촛불을 들고 가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이명박은 물러나라! 너 때문에 잠을 못자!>라고 외치는 분위기는 확실히 축제 같았다.

중앙일보 건물 앞에서 길이 막혀 다시 광화문으로 되돌아왔을 때, 몇몇 시민들이 사방을 꽉 막고 선 전경차를 흔들며  <차빼라!>를 외쳤지만, 이내 누군가 비폭력 시위를 하려면 전경차를 흔들면 안된다고 나서서 말렸다. 어디로든 돌아서 골목골목 스며들어 집에 가듯 청와대에 가서 만나자며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10시가 넘도록 집에 가려하지 않는 정민공주를 가까스로 설득해 온통 인도로 변한 종로 1가 중앙선을 따라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계속 남아있고 싶어하던 공주만큼이나 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명바기가 촛불은 누구 돈으로 사고, 배후엔 누가 있는지 보고하라고 했단다. 귓구멍 콧구멍이 확실히 막힌 놈이다. 미선이 효순이 때도, 노무현 탄핵반대 때도, 촛불을 준비한 자금은 십시일반 모금함을 돌려 걷은 시민들의 돈이었다. 나는 그나마도 주최측의 초와 종이컵을 축내는 게 아까워, 지난번에도 어제도 집에서 제사 지내고 남은 양초를 준비해 갔었다. 물론 집회가 길어져 가져갔던 초가 다 녹아 새 초와 종이컵을 써야 했지만...
모임 장소에 가면 <배후는 너야!> <배후는 이명박 정부>라고 적힌 종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왜 아직도 놈들이 배후, 음모 타령을 하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광우병 쇠고기, 한반도 대운하, 수돗물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치솟는 물가, 기업중심의 경제정책, 국민을 보호할 생각은 안하고 살인적인 무한자유경쟁에 모든 산업과 시장을 맡기겠다는 미친 정부.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가 쏟아내는 기막힌 정책 때문에 국민들이 못살겠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걸 너는 아직도 모르겠냐, 이눔아!

사람들이 왜 청와대로 달려가려 하느냐고?
니 귓구멍에 직접 대고 소리치면 혹시나 알아들을까 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러는 거다!
명바기는 앞으로 밤잠 좀 설칠게다. 물대포 쏘고 소화기로 뿌려대면 촛불이 꺼질 줄 아나본데, 니들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걸 차츰 알게 되겠지.  

새벽까지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던 시민들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실신하기도 하고 많이 연행되었지만 소수는 여전히 시청에 남아 오늘 집회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폭행시비가 벌어져 법적으로 잘잘못을 따지게 됐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먼저> 때렸느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질 때 교묘하게 상대를 자극해 먼저 주먹을 휘두르게 한 다음 한대 맞고 나서 같이 주먹질을 하면 정당방위가 되기 때문에, 주먹 세계(?)에선 절대 먼저 치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경찰측에선 분명 시위대가 먼저 사다리를 놓고 전경차를 넘어 방어선을 뚫었으니 먼저 주먹을 휘두른 셈이라고 주장할 테지만, 내가 보기엔 물대포를 쏘아 먼저 폭력을 휘두른 쪽은 경찰이다. 하기야 인간이 준 사료 먹고 광우병 걸린 소가 아무 잘못 없듯, 방패 들고 일선에 나선 경찰들도 무슨 죄가 있겠냐만은 폭력은 계속해서 감정적인 대응과 폭력을 부르는 법. 성난 사자들과 피로에 지친 경찰들의 격렬한 싸움은 벌어지지 않아야 할텐데 걱정이다.

어젯밤 촛불을 들고 걸으며 처음엔 경찰한데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벌벌 떨던 정민이가 숫적으로 너무도 우세한 시위대를 보며 안심을 했는지 나중에 한 마디 했다.
"고모, 경찰들도 명바기가 싫을 텐데 불쌍하다. 그냥 우리 청와대 가게 길 비켜주고 같은 편 하면 안 되나?"
"그래도 경찰은 대통령을 보호하는 게 일이라서 길 비켜주면 짤려."
"어차피 명바기가 쫓겨나면 상관없잖아!"
"....."
 
11살짜리 정민이처럼 명쾌한 답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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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

하나마나 푸념 2008. 5. 18. 21:52
어린이날 선물로 11살짜리 공주는 원래 고모에게 mp3를 사달라고 했었다. 작년엔 무려 십수만원 짜리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주어야 했던 고모는 아이팟 셔플 정도 사주면 되겠거니 하며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지만 공주가 원하는 mp3는 왕족의 취향답게 몹시 고급스러웠고 가격 또한 엄청났다. -_-;; 해서 깨갱 기가 꺾인 고모는 일단 공주가 5학년이 되어야만 사주기로 되어 있던 휴대폰을 대신 사주는 것이 어떨지 공주의 부모와 협상에 돌입했다. 공주의 휴대폰은 원래 할아버지가 5학년이 되면 사주시기로 약속했던 품목이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후 공주는 눈물을 쫄쫄 흘리며 자기네 엄마 아빠는 중학생 되기 전까지는 휴대폰을 절대로 안 사줄 텐데 자기는 그럼 이제 어쩌느냐고 더욱 슬퍼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차에 겨우 초딩 4학년짜리에게 수십만원짜리 mp3를 사줄 순 없으니, 차라리 mp3  기능이 있는 휴대폰을 사주는 게 좋겠다고 공주 본인 및 부모를 어렵사리 설득한 나는 어린이날을 며칠 지나고 나서야 정민공주와 휴대폰 쇼핑에 나섰다. 물론 휴대폰을 고르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하필 공주는 <하얀색>과 <폴더형>을 원했는데 검정색이 대세인 휴대폰 디자인 가운데 <하얀색>이면서 <폴더형>인 휴대폰은 어린이가 쓰기엔 턱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ㅜ.ㅜ 단말기 보조금은 없어졌다지만 통화량이 어지간한 어른들이야 이런저런 할인 혜택으로 저렴하게 휴대폰을 구입할 수 있지만, 값싼 어린이 정액제 요금으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휴대폰은 그리 많지 않았고, 협박과 회유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공주는 비교적 저렴하되 어린이용 기능이 많은 <하얀색 슬라이드형> 휴대폰을 마지못해 선택했다.

휴대폰을 산 날이 하필 휴일이라 다음날에야 비로소 제대로 개통이 가능했지만, 공주는 매뉴얼도 보지 않고서 이것저것 단말기를 눌러보며 웬간한 기능을 순식간에 모두 익히더니 며칠 지난 뒤 만났을 때는 건방지게 휴대폰을 비밀번호로 잠가두고 자기만 쓸 수 있게 해놓았다. 이유를 물으니 <남들이> 자기 휴대폰 마음대로 만지고 문자 메시지 읽는 게 싫다나. -_-;;

하지만 나는 곧 무시무시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고모랑 엄마아빠가 5학년도 되기 전에 너한테 휴대폰을 사주기로 한 이유는 어린이날 선물의 뜻도 있지만 우선 세상이 위험해서 별별 사고가 다 나기 때문에 너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혹시라도 지난번 뉴스에 나온 이상한 아저씨처럼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너를 납치하려고 하면 주머니 속에서라도 재빨리 휴대폰을 눌러서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비밀번호로 잠가두면 어떻게 빨랑 아무거나 단축번호를 눌러 도움을 청하겠니? 또 혹시라도 나쁜 언니오빠들이 너를 막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면 급한데 언제 비밀번호를 해제시키고 엄마한테 전화를 할 수 있겠어? 또 혹시라도 교통사고 같은 게 나서 기절해 쓰러져 있으면 사람들이 119를 불러주긴 하겠지만 보호자한테도 연락을 해야하는데, 그때 휴대폰에 저장된 1번이나 2번 단축번호를 누르면 제일 중요한 가족한테 빨랑 연락할 수 있지만 휴대폰이 잠겨 있으면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겠니?>

아...
고모라는 인간이 겨우 열한 살짜리 조카에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당연하다는 듯 떠들고 있으려니 스스로도 어찌나 민망하고 속상하던지,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험악하게 변한 것인지 허탈하고 화가 났다. 물론 나의 저런 협박이 하나같이 <기우>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나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내쳐 공주를 다그쳤다.

어제 보니 공주도 내 말에 확실히 겁을 먹었는지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풀어두고 있었는데, 슬쩍 그걸 확인하고서도 나는 씁쓸하고 참담한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제 머리가 꽤 굵어진 공주는 자기가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않은 이야기는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데, 제가 생각해도 고모의 잔소리가 영 터무니없는 공갈협박이나 기우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다.  세상이 어쩌려고 이 모양인지 원. 점점 끔찍하게 변해가는 세상을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것 같아 참으로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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