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해당되는 글 76건

  1. 2008.04.15 피해야 할 번역투 표현 15
  2. 2008.03.31 아아악~~ 11
  3. 2008.02.16 주종목 19
  4. 2008.01.09 원숭이 줄타기 9
  5. 2007.12.28 원작과 영화 18
  6. 2007.10.09 책 장사 10
  7. 2007.10.04 개정판? 11
  8. 2007.08.26 땜빵 4
  9. 2007.08.16 가방끈 6
  10. 2007.05.14 편집자와 번역가의 딜레마 15
(내 블로그 첫 화면에 떡하니 사진들이 떠 있으니 마치 속옷 삐져나온 채로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 영 불편했다. -_-;; 남들은 사진으로만 블로그를 잘도 채우던데 역시 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 전직 교수의 번역을 못마땅해 하시는 키드님의 글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급조의 느낌이 나더라도 퍼뜩 생각난 자료를 <퍼다가> 정리하기로 했다. 블로그 시작할 때 <펌질> 역시 지양하기로 한 터라 이것도 불편해서 얼른 딴 글로 내릴지 모르겠다. 그저 소심한 인간의 발악이라고 여겨주시길)


쓰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번역을 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기계처럼 돌변해 상투적인 번역투의 표현들을 남발할 때가 있는데, 특히 번역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원문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어색한 문장과 표현을 떨쳐버리기가 더욱 쉽지 않다.
경력이 꽤나 오래 됐다고 하는 번역자들 역시 타성에 젖거나 시간에 쫓겨 문장을 제대로 다듬지 못하고 원고를 넘겼을 때는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이 많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일부 출판사에서는 자체적으로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법, 피해야할 번역투 표현의 예> 따위를 파일로 만들어 일찌감치 번역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편집자들이 교정할 때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번역된 책이나 영화 이외에도 워낙 번역투 표현이 남발되어 어느새 실생활에서도 적지않게 쓰이는 말이라 나처럼 번역하는 사람들 외에도 글을 끼적이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여기에 적어두기로 했다. 뻔히 잘 알면서도 나 역시 번역 원고를 매만지다 보면 심심치 않게 부딪치는 표현들이며, 평소 글쓰기에도 침투해 있다. 역시나 잘못 굳어진 습관은 참 고치기 어렵다.  


Posted by 입때
,

아아악~~

투덜일기 2008. 3. 31. 22:13
월말월초마다 마감에 시달리는 게 너무 싫어서 일부러 날짜를 중순으로 옮겨 계약하기도
하지만 마냥 게으름을 부리다 '연장'을 받게 되면 결국 사정은 똑같아진다.
오늘 하루종일 출판사에서 전화올까봐 전전긍긍 떨었는데
아직도 원고에서 손을 못 털었다.
하물며 대충 푸념을 끼적인 블로그 글도 읽으면 읽을수록 고치고 싶은 부분이 나오거늘
번역원고야 오죽하랴.
번역기계가 되어 무뇌아처럼 타이핑하고 지나간 부분은 어김없이 목구멍 가시처럼 턱턱 걸려
몇번을 고쳐도 예쁘게 아무려지질 않는다.
아아아악~~~

심지어 오늘은 무려 4년 전에 번역한 뒤 까맣게 잊고 있던 단편소설의 짤막한 <해설> 원고까지 <두 개>나 넘겨야 한다. *_*
시시껄렁한 옮긴이의 말을 쓸 때도,
숙제로 낼 겨우 한 페이지짜리 페이퍼를 쓸 때도 늘 백지를 앞에 두고 전전긍긍 날밤을 세웠던 내가 아닌가.
간만에 약간은 품격 있는 학술적인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니 가뜩이나 무뇌아가 되어버린 듯한
머리속에선 휘휘 공허한 바람만 부는 것 같다.

이럴 땐 골빠지는 일이 분명한  내 직업에 대한 회의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가장 좋아하는 일임에도 싫어지면 곤란하니까 그건 취미로 두고 두세 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말이 맞는 걸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엎질러진 물인데도, 회의적인 투덜이는 쓸데없는 고민을 또 끌어낸다.
아아아악~~~~

이렇게 시답잖은 낙서라도 하고나면 좀 위안이 되려나 했는데
이럴 시간에 일이나 하라고 스스로 뒤통수를 치고 싶어졌다.
젠장.
퍽!

Posted by 입때
,

주종목

책보따리 2008. 2. 16. 01:56
어느 분야든 전문성을 갖춘 이들만이 각광을 받는 세상이다 보니
'번역가'라는 이름에도 언제부터인가 '전문'이라는 말이 붙었다.
'전문번역가'라는 말은 그러니까 가끔 전천후 아르바이트나 부업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역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아 참, 번역을 전문으로 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들 중엔 번역가 말고 '번역사'도 있다. ^^
번역사는 출판계 번역이 아니라 주로 계약서와 매뉴얼 등 서류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칭한다는 것이
그쪽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의 설명인데, 내가 보기엔 의사, 검사, 판사, 세무사 따위와 같은 계급으로
상승하기 위해 (또는 동등한 권위를 지닌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라는 접미어를 붙인 직업명이거나
혹시라도 번역가와 번역사 집단 어느 한 쪽에서 서로 동등하게 취급받기를 꺼려 차별화한 이름인 것 같아서
좀 우습다. (친구야 미안^^)  

아무튼 누가 제일 먼저 '전문번역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직업을 지칭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문'을 떼어버리고 그냥 '번역가'만으로도 얼마든지 '외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생업으로 삼은 이'라는
뜻이 충분이 전달되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번역가'라는 말보다는 '옮긴이'가 훨씬 더 정겨운데, 옮긴이라는 말은 책에 맨 뒤에 인쇄되는 책만든 사람들의 목록과 책소개 글에나 사용될 뿐 직업명으로 불리기엔 분명 어감상 모자람이 있다.
그렇다고 빈대나 벼룩, 이를 연상시키는 '옮기는 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물론 훌륭한 번역가들 가운데는 확실히 자신만의 확고한 전문영역을 갖추고 그 분야에만 매진하는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께는 '전문 번역가'라는 말이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환경 관련 서적만 번역한다든지, 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옮기기 때문에 출판인들도 독자들도
그 사람의 번역이라면 선뜻 믿게 되는 객관적인 신뢰를 쌓은 분들이다.
'환경 전문 번역가'라든지 '과학 전문 번역가', '추리소설 전문 번역가'로 번듯하게 소개될 수 있는
(책 한 권 달랑 번역한 사람에게도 아무렇게나 뭉뚱그려 너그럽게 붙여주는 '전문번역가'--사이에 띄어쓰기 없음--와는 다르다) 그야말로 '주종목'이 확실한 번역가들이라고 하겠다.

가끔 내게도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이 있다.
'어떤 분야를 전문적으로 번역하느냐, 또는 어떤 분야의 일을 가장 흥미로워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다행히도 이미 출간된 책들의 성향을 알고 있거나 이미 여러 번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저는 주종목이랄 게 없답니다"라는 민망한 대답을 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초창기엔 주종목이고 자시고 따질 것 없이 의뢰받는 일은 무조건 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처음부터 소신있게 전문 분야를 개척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계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는 자기변명이다), 번역으로 꽤 자리를 잡은 사람이라 해도 일이 뜸할 땐 원숭이 줄타기 법칙의 본능에 따라 가끔은 하기 싫은 일(내 경우, 책마다 그 나물에 그 밥 타령인 자기계발서 류와 경제, 경영, 처세서!)도 질끈 눈감고 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책을 고를 수 있게 된 입장이 된 뒤에도
나는 '주종목'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한 분야(또는 몇몇 분야)를 구축하고 그에 관련된 책만을 주야장천 번역하며 흥미로워할 자신도, 인내심도 없는 '얄팍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위에 언급한, 내가 싫어하는 분야의 책이 아닌 한 모든 책은 읽고 옮기기에 흥미로웠던 반면, 비슷한 책을 연이어 옮기다 보면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지루해져 소신과 영혼이 있는 번역가의 작업이 아니라 번역기계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치고 있거나, 막무가내로 일하기가 죽도록 싫어지는 단계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을 번역할 때 문장을 매만지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원서 5백, 6백 페이지가 넘어 우리말로는 1, 2권으로 출간되어야 할 장편소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나서
곧이어 또 그 같은 소설을 작업하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럴 땐 좀 더 건조하고 진이 덜 빠지는 교양과학서라든지 인문서 같은 비소설로 눈길을 돌려
그간 한쪽으로만 지친 뇌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개인적인 무지 탓에 기본 자료조사와 두어줄 건너 한 번씩 정보 검색에 진땀을 흘려야하는
인문서나 과학서도 많지만 일도 하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그 묘미는 확실히 문학작품의 문체와 씨름할 때와 다르다. ^^
그렇기 때문에 내 경우 일을 계약할 땐 일부러 소설과 비소설, 무거운 책과 '말랑'한 책을 적절하게 시기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어느 책이든 번역은 모두 '골빠지는 작업'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소모되는 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독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옮긴이로서 섭렵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번역가가 갖는 특권인 것 같다.

형편이 이러니 혹자들이 바라는 대로 주종목을 키워 명실상부한 '전문' 번역가가 되는 것은
내게 매우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에게 나는 얼굴에 한자락 철판을 처억~ 깔고 이렇게 변명한다.
"제가 워낙 싫증을 잘 내서 한 분야만 줄곧 작업하는 건 괴로워하거든요.
게다가 요즘 출판사도 모두 '종합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저도 '종합 번역인'으로 살려구요." -_-;;

사실 회사원 시절 계약서와 매뉴얼, 온갖 서류 번역이 멀미 나게 싫어 '진짜' 번역을 해보겠다고
야무지게 나섰던 초창기엔 번역가로서의 내 주종목이 어린시절 일어판 중역으로 읽었던 수많은 고전작품과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이른바 '정전'이 될 것이라 거침없이 믿었음을 이참에 고백하고 넘어가야겠다. ㅋㅋ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대학원에서 영문학계의 판세를 들여다보니
대형 출판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번역으로 야심차게 기획 출간하는 고전들의 번역을
대개 진짜 전문가인 '교수들'에게 맡기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물론 해당 교수들이 정말로 손수 번역을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섣불리 고전작품이나 영문학 교과서들을 번역했다가 고매하신 박사님들이 구구절절 오역이니 아니니 따지고 나서면 어쩌란 말인가!! *_*
하물며 영문학 교수가 번역한 문학작품도 오역 연구 논문이 발표되는 마당인데?

욕심을 부려 내 평생 영문학 정전 가운데 몇 권쯤을 번역하고 오역의 지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지금 같아선 당장 내게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같은 작품 번역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것 같다.
아니, 실제로도 꽤 야심찬 기획으로 영문학 전공 번역가를 대거 찾는다는 모 출판사의  의견타진을 받고
심히 고민중이다. 밀려 있는 일도 일이려니와, 일년 내내 그렇게 피말리는 일만 하고 사는 건 나 같은 얄팍한 인간에게 보나마나 무리임을 왜 모르랴.
역시 난 별다른 주종목 없이 그저 잡다하고 어수선한 번역서 약력 가운데
보석처럼 소중하고 뜻깊은 몇 권의 책이라도 간간히 박혀 있으면 흡족할 작은 그릇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나올 책에도 출신학교와 옮긴 책 목록 밖에 없는 알량한 약력엔
부디 민망한 '전문번역가'라는 말 대신 '이러이러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구절이 들어가면 참 좋겠으나, 출판사의 성격상 내 바람은 무시될 확률이 대략 8할 이상이다.
차라리 '전문' 대신 '종합'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으음..
주종목도 없는 주제에 쉰소리는 관두고 나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Posted by 입때
,
번역을 오래 하다보면 "주로" 그간 같이 일해왔던 출판사의 일을 계속 맡거나
알고 지냈던 편집자들이 거처를 옮기고도 연락을 해와 일을 진행하게 되는데
가끔은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 경우도 있다.
말이 "뚫는다"는 것이지 주변머리도, 숫기도 없는 내가 일면식도 없는 출판사에
일감 달라고 뜬금없이 찾아가거나 연락을 하는 경우는 없다.
맨 처음 번역일을 해보겠다고 작심한 뒤 이력서를 써서 출판사 몇 군데에 보냈던 때를 제외하면. ^^

늘 새로운 출판사 쪽에서 주변에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거나 아는 출판인의 소개로 내게 처음 일감을 의뢰하면서 "첫 거래"가 시작되기 마련인데, 어쩔 때는 서로 대면하지도 않고 이메일과 전화통화 만으로 의견을 조율하여 책과 원고를 주고받아 출간에 이르는 때도 있다.
비즈니스에 관한 한 꽤나 철면피가 되기는 했어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밥 한끼 먹고 나서 차츰 친해지고 얼굴을 맞댄 채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반갑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초면 대인기피증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듯, 얼굴 대면 없이 전화와 이메일만으로 추진하던 일 하나가 최근 틀어졌다. ㅋㅋ

서로 바쁘니까 계약도, 책 검토도 온라인으로만 진행했는데
원서 출간이 늦어지네, 번역할 책이 바뀌네 마네 하더니만
계약 원고마감일이 지나도록 원서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기에 볼 일 보고 밑 안닦고 나온 것마냥 -_-;
기분 찜찜하게 차일피일 지연되기만 하던 일감 하나를 완전히 잘라낸 것이다.
그쪽에선 새삼 지금 당장 일을 서둘러달라지만, 나도 그간 밀린 원고며 앞으로 할 일 스케줄이 있는데
무작정 그러마고 할 순 없고 아직 서로에 대한 신뢰나 의리 같은 것도 쌓이지 않았으니
받은 계약금 돌려주고 깨끗이 마무리하는 쪽으로 정리를 했다.  

번역으로 먹고 살려면, 아니 프리랜서로 생활을 꾸리려면 "원숭이 줄타기 법칙"을 절대로 지켜야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지만, 줄 하나를 놓기 전에 다른 줄을 잡아야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원숭이의 입장은
꽤나 비장하다.
아마도 문제의 이 계약을 성사시킬 때도 "원숭이 줄타기 법칙"에 의거해서 다달이 빠짐없이
작업 스케줄을 잡느라 꽤 무리해서 일을 끼워넣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체적으로 암담 그 자체.
요령을 피워 재주를 부리려던 원숭이는 여러갈래 늘어뜨려놓았던 줄이 마구 꼬여 갈피를 못잡고
결국 땅바닥에 자진해서 내려와 꼬인 줄을 푸느라 진땀을 흘리는 중이다.
1년전에 받았던 계약금을 다시 토해내려니 괜스레 생돈 날리는 것 같아 속이 쓰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책 구경도 안하고 받았던 남의돈 잠시 맡아두었다가 내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아까울 건 없다.
다만 이제부턴 쓸데없는 욕심에 줄이 꼬이는 것도 모르고 아등바등거리진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까먹지 말아야할 터인데, 늘어진 줄 몇개를 지나고 나서도 또 새로운 줄이 드리워질지 어쩔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원숭이의 조바심을 키운다.
Posted by 입때
,

원작과 영화

책보따리 2007. 12. 28. 15:59
이제는 무너져버린 원칙이 되고 말았지만
과거에 나는 원작을 먼저 읽은 영화는 보지 않는다는 고집이 있었다.
거의 무한한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된 시간과 화면 속에 틀어넣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니
기껏해야 본전이고 대부분은 실망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화를 보고나서 느낌이 괜찮으면 원작을 찾아보는 짓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영화보다 못한 책이 어디 있으랴.. 하는 일종의 편견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편견은 지금도 여전하여, 원작보다 영화가 나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웬만해선 떠오르지 않는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작품은 공포영화를 안본다는 나의 금기를 드물게 깨고 본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였는데, 영화에 굳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원작은 제국주의자의 시각에서 본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에 지나지 않은데 비해 영화는 게리 올드먼과 위노나 라이더, 키아누 리브스의 열연으로 훌륭한 러브 스토리로 재탄생했었다^^)
물론 아메바스러운 나의 기억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읽다가 무섭고 소름끼쳐서 몇번이나 책을 떨어뜨릴 정도로 심취해서 보았던 <쥐라기 공원>도 그랬고
<반지의 제왕>, <브리짓 존스의 일기>, <향수> 같은 영화는 당연히 원작이 훨씬 좋았다.
취향에 따라 영화가 더 좋았다는 이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내 경우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영화가 좋아서 원작을 굳이 찾아보았던 작품도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 딱히 떠오르는 건 <냉정과 열정사이> 정도.

책이 인기가 높거나 베스트셀러가 되면 곧장 영화로 판권이 팔리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또 베스트셀러라고 널리 읽히게 되면 공연히 배알이 뒤틀려 안 읽으려는 고약한 심보를 갖추고 있다.
(<다빈치 코드>도 그래서 안 읽고 나중에 영화만 봤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핑계 저 구실로 책을 잘 안 읽는다는 게 맞다. ㅋㅋ)

그런데 우리나라 도서 시장을 보면 영화나 드라마 원작에 대한 시장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하다.
영화가 좋으면 원작도 찾아 읽으려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인데, 원작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은 해도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건 영판 드문 나로서는 그런 경향이 꽤나 신기하다.
(에단 호크가 원작/각본/감독을 모두 맡았던 영화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보고 나와 로비 매점에서 파는 책을 잠시 들여다보며 호기심을 느끼기는 했지만 역시 덥석 사서 읽고 싶지는 않았더랬다^^)
특히 소설의 경우, 할리우드에 영화 판권이 팔렸다는 사실은 한국 출판사와의 계약 여부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단 출간해서 팔다가 영화가 소개되어 인기가 높으면 다시 책도 덩달아 대박(!)을 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출판이 늘 도박이듯 ^^ 원작을 바탕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에 수입되어 인기를 얻을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 또한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 결국엔 모든 걸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몇년 전에 내 이름을 옮긴이로 달고 번역 출간했다가 우리나라 출판사에선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던 소설이 하나 있었다.
영미권에선 대단한 베스트셀러였고 할리우드에 영화 판권도 팔렸다고 해서 약간 기대를 했지만
내가 보기엔 출판사에서 별로 영업을 잘하지 못했던 탓도 있고 ^^
꽤나 눈물겹고 감동적인 부분도 있기는 하되 국내 소설 독자층에 어필하기엔 좀 생뚱맞은 이야기(그런데 놀랍게도 작가가 우리나라 모 영화를 보고 쓴 게 아닌가 싶게 비슷한 내용의 영화는 있었다!)였던 것도 같았기에, 책의 판매실적과 나의 수입은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마냥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그 뒤로 줄곧 잊고 있었는데 지난 주 영화관에서 그 소설 원작의 영화 예고편을 볼 수 있었다. +_+
역시나 내 상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들이 역할을 맡아서 킥킥 웃고 말았는데
소설처럼 영화도 죽을 쑬지 어쩔지 그 결과는 은근히 궁금하다. ㅎㅎ

1, 2권으로 나눠 출간하면서도 분량이 너무 많아 쳐진다면서
한글 출간본에는 후반부의 퍽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완전히 들어내기도 했었는데
영화에선 그 부분을 살렸을지 어떨지 그것도 궁금하고
혹시나 영화를 보고 흥미가 동해 원작을 찾아볼 가상의 독자가 왜 영화와 책 내용이 다른지
따지면 어쩌나(물론 대부분의 영화는 원작과 많이 동떨어지지만) 쓸데없는 걱정도 든다.
그리고 가장 염려되는 건 영화 번역을 누가 했을 것인지 하는 점.
내가 싫어하는 이미*만 아니면 좋으련만 그것까지 간섭할 수야 없는 일이고
째뜬 귀추를 주목해봐야겠다.
한국에서 인기 높은 배우들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원...
영화도 일주일 만에 개봉관에서 내려오는 거나 아닌가 몰라... ^^;;
Posted by 입때
,

책 장사

책보따리 2007. 10. 9. 15:50
대학에 다니던 시절 꼭 자기가 쓴 책을 주교재나 부교재로 쓰는 교수들이 있었다.
하다못해 숙제로라도 읽어서 내라는 경우도 있었는데 책을 찾아보면 출간된지 10년도 더 된
구태의연한 느낌의 양장본이었고 가격도 꽤 비쌌다.
1, 2학년땐 투덜거리면서도 멋모르고 책을 다 사곤 했지만 나중엔 요령이 생겨 도서관에서 빌려 제본을 하거나
친구들끼리 한 권을 사서 돌려보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양과목의 경우 수강하는 학생들 인원이 꽤 되니까 그들이 책을 다 새로 산다고 가정했을 경우엔 출판사에서 새로이 천부 이상 찍어내는 결과를 낳았을 것 같다.
그래봤자 손에 쥐는 인세가 푼돈이기는 했겠지만^^;; 한번 쓴 책으로 교수 평가 때 생색도 내고
또 그걸로 해마다 푼돈도 벌고 나쁘진 않았겠지 싶다.

하지만 나 같으면...
도저히 학생들에게 책장사를 하려 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짙다.
정말 훌륭한 책이라 저절로 팔려나가는 거라면 몰라도 어떻게 제자들한테 자기 책을 팔아달라고
강권하거나 은근히라도  압력을 넣는단 말인가!

여기에도 몇번 언급한 적이 있는 공동번역 논문집의 경우,
대학 출판부에서 기획한 책이기도 했지만 페미니즘을 주제로한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이라 당연히 대중적이 아니어서 출판사에서도 우리들도 잘 팔릴  것이라고는 애당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책이 나온 뒤 증정본을 받으러 셋이 함께 간 자리에서, 출판부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혹시 그 책을 교재로 쓸만한 강의는 안하시느냐고. ^^
그 책은 선생님들(그쪽에서 우리들을 지칭한 거다)이 나서서 팔아주셔야 하는 거라고.
헉.
교수님은 몰라도 나와 또 한 명은 강의 따위에 관심도 없는 터라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손사래를 쳤고
교수님 역시 강의하면서 자기 책 팔아먹으려고 애쓰는 것만큼 민망한 일은 없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더욱이 자기 학교 아이들은 '페미니즘 비평'이라고 하면 고개부터 설레설레 젓는다면서...

증정본을 받아들고 출판부 사무실을 나서며 우리 세 옮긴이들은 아마 그 책이 초판 1000부를 소화하기도 힘들지 모른다면서, 그냥 오랜 작업을 마침내 끝내고 책도 선을 보인 기념으로 우리끼리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한답시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더랬다. ^^
그래서 몇년 만인 얼마 전 2쇄 1000부에 대한 번역 인세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약소한 인세는 젖혀두고라도 꽤나 놀랐던 것 같다. 아니, 그 두껍고 어려운 책이 1000부나 (물론 언론사 증정본이 또 몇백 부 소요된다 ㅋㅋ) 팔렸다니!
그 대학 출판부야 뭐 대학 소속이니 판매 부진하다고 망할 염려는 없을 테고, 학교 주축의 문화사업 일환으로 계속 꽤나 쓸만한 책을 많이 내고 있는 듯하니 나로선 더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나에게도 그 책은 '공역' 자체만으로도 뿌듯한 경험이고 성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에 인세 계약으로 작업했던 책이 드디어 얼마 전 출간되어 따끈따끈한 증정본과 함께
초판 3000부에 대한 인세를 받고 보니, 역시나 은근히 책 홍보에 나도 거들어주었으면 하는 눈치다. -_-;;
꽤나 좋은(그러나 잘 팔리진 않는 '인문학 양서들') 국내기획물들을 많이 출간해왔던 그 출판사로선 나름대로 좀 팔아보겠다는 요량으로 기획한 번역물이다보니, 분야는 내가 죄다 그밥에 그나물이라면서 마뜩찮아하는 '자기계발서'다.
그런 책을 나더러 좋은 책이라 주변에 선전을 하라고?
에잇,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P
(그러면서 왜 번역은 맡았느냐고? ㅎㅎ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그곳 편집장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번역을 의뢰받을 즈음엔 작업 스케줄에 여유도 좀 있었고...)

어쨌거나 난 이번에도 그저 모르는 척 눈감고 지켜보기만 할 테다.
당연히 책 장사는 출판사에서 하는 거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게다가 내 가족이며 지인들은 정말 책 보기를 돌같이 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책 많이 읽으시는 이웃 블로거분들께 추천할 책은 또 절대로 아니다! ㅋㅋ

흠...
주절주절 늘어놓다 보니 결국 내 얼굴에 침뱉는 격이 되었고나야.
나도 늘 좋은 책을 스스로 기획해서 번역 출간으로 이어보겠다는 '꿈'은 지니고 살지만
주어지는 일만 소화하기에도 벅찬 상황이니, 권수로는 나름 부지런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질 면으로 따져보면 여전히 부끄러운 인생이다.
10년쯤 뒤엔 정말 좋은 책이라고 주변에 널리 추천할 번역서들이 내 약력에 콕콕 박혀있게 되기를
빌어본다.
Posted by 입때
,

개정판?

책보따리 2007. 10. 4. 22:45

"번역을 해서 밥은 먹고 살 수 있냐?"는 질문을 아직도 종종 받을 만큼
아직도 번역은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의 전천후 아르바이트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이 업계(?)에서 꽤나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나도 지난 몇년 간 연봉을 따져보면 그리 신통치는 않다.

물론 내가 게으름을 부려 제때 원고를 넘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간혹 번역료 지불을 마냥 지연시키고만 있는 몹쓸 출판사도 있고^^; 책이 출간된 후 1개월 이내 번역료를 지불하겠다는 계약서 조항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는데(대부분은 원고 넘기고 1개월 내 지불 조건이 많지만, 거의 원고를 넘기면 몇달 안에 책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다) 출간이 계속 미뤄져 출판사쪽에선 아주 당당하게 원고료를 안주고 버티는 경우도 간혹 만나게 된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작가들과 달리 번역가는 원고료를 인세로 받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고
거의 대부분 번역원고의 양에 따라 단번에 결제를 받는 '매절 계약'을 하기 때문에
책이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단번에 떼부자가 되기는 어렵다.
백만부 넘게 팔린 그 유명한 '좀머씨 이야기' 같은 책을 번역하고서도 정작 번역가가 받은 돈은  대략 '80만원'(그 책이 얇고 텍스트가 짧았던 건 읽어본 분들이 다 아실 터;;)이 전부일 정도니까. ^^;;
게다가 번역이라는 것이 매일 꾸준히 작업을 한다고 해도 한달에 '몇 권씩' 빠른 시일 안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고, 어떤 책은 자료 공부며 용어 확인 때문에 번역 기간이 6개월을 훌쩍 넘길 수도 있는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일인데 열악한 출판계 사정상 언어권별로 정해진 번역료는 십년 가까이 '불변'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하는 번역가라고 해도 별도로 다른 직업을(말하자면 번역 아카데미 강사라든지 대학 같은 데 출강을 나가는;;) 갖고 있지 않는 한 연봉은 뻔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번역가는 아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프리랜서는 결코 될 수 없다. ^^

얼마 전 드물게 인세로 번역계약을 한 뒤 그 감회를 어딘가 적어놓은 기억이 나는데
그 출판사처럼 정직한 경영을 모토로 삼는 경우 번역 인세를 5% 주기도 하고
모 대학 출판부에선 6%로 계약을 하기도 했지만, 여건이 더 열악한 영세 출판사에서 책의 상업적 성공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인세로 번역계약을 하는 경우는 2-3% 인세가 대부분이라는 전언이다. (책의 정가가 만원이라고 할때 권당 인세는 2-300원이니 초판을 5천부를 찍는다 해도 옮긴이 손에 들어오는 돈은 150만원이하라는 얘기다. 물론 여기서 또 3.3% 원천징수세를 떼야 한다)
6%로 계약한 모 대학 출판부 책의 경우 세 사람이 공동번역을 한 터라 실질적으로 한 사람에게 떨어지는 인세는 2%^^였는데, 꽤나 정가가 비쌌던 그 논문집의 초판 1000부에 해당하는 인세를 처음 받았을 때 내 통장에 입금된 돈이 불과 삽십여만원이었더랬다. ㅋㅋ
그 책이 나온지 3년만인 올해, 또 2쇄 1000부를 찍었다며 지난달에 그에 해당하는 인세가 입금되었는데 어휴... 교수님과 세미나를 해가며 1년 가까이 공들여 번역한 그 책에 들어간 품과 에너지와 정성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금액이다. ^^;; (상업적인 책들은 그나마 다행히 초판을 3천부 정도는 찍는다 ㅎㅎ)

어쨌거나 그럼에도 이 열악하고 부가가치 낮은 직업인 번역을 천직으로 삼았으니
남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 단점들을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소박하게 살면 되지 않겠나.

그런데 최근 공연히 열받고 섭섭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는 일들이 있었다.
과거에 출간되었던 책들이 새로운 꾸밈새로 신간인듯 세상에 선을 보인, 이른바 '개정판'을
뜻밖에 만나게 된 것.
법적으로 번역원고에 대한 모든 권한을 출판사에 넘긴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일을 했으니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낸다고 나에게 미리 통보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나로선 사실 아무 권한도 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기분이 구리고 찜찜하고 '아까운'지 모르겠다.

요즘 출판사들은 대형화를 추구하면서 회사 이름도 분야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누어 마치 다른 회사인 것처럼 책을 출간하는 것이 유행인데
9월에 나란히 개정판을 선보인 나의 자식(?)들도 얼핏 보기엔 처음과 다른 출판사에서 표지를 바꿔 낸 듯한 느낌이었다.
하물며 한 권은 대형할인마트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핸디북' 시리즈의 일환이어서 작은 판형에 종이도 재생지를 사용해 가격을 낮췄다는데, 대체 어느 인간이 기획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판형을 작게 하다보니 표지 디자인도 단순하게 만드느라 모든 시리즈에서 '감히' 옮긴이의 이름을 표지에서 빼버렸다. -_-;; (표지에서 내 이름이 사라진 그 책을 접하고 발끈 화가 나는 것을 느끼고서야 내가 이렇게 공명심에 집착하는 인간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ㅎㅎ)

그 개정판의 출간에 관하여 내가 옮긴이로서 출판사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그리고 공식적인) 예우는 새로 나온 책의 증정본을 받는 것뿐이다.
물론 9월에 나온 그 두 책의 증정본은 아직 받지 못했고, 저들이 잊지 않고 나까지 챙겨 보내줄지 그것도 미지수다. (둘 다 원고료 때문에 무던히도 나에게 애를 먹인 곳이라 내쪽에서 다시 연락하기도 싫은데, 그렇다고 내 돈 주고 책을 사기도 아깝다! ㅋㅋ)

문득 내가 옮긴이가 아니라 지은이였다면;;;
인세를 따로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개정 증보판에 붙여"라는 발문이라도 청탁받느라 미리 상황을 알았겠지 싶어지면서 잠시 우울했다.
허나 어쩌랴.
'작가'가 될 역량이 모자라 남의 글에 기대 사는 옮긴이의 삶을 선택한 것이 내 운명인 걸.
공연한 욕심에 속쓰려하지 말고 밀린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의 의미로
길게도 끼적였다. (그래도 느껴지는 이 억울함은 뭔지;;;)



Posted by 입때
,

땜빵

삶꾸러미 2007. 8. 26. 15:28

간만에 땜빵질로 바쁜 이틀을 보냈다.
이 나이에 소개팅 땜빵을 나갔을 리는 없고 ^^;; 급한 일 마무리에 동원됐단 의미다.
언제부턴가 거절을 못해 맡은 일 때문에 다른 일까지 크게 피해를 입는 사건을 연이어 겪은 이후로는, 일 면에선 워낙 잘난 체를 하는 터라 이젠 감히 내게 땜빵을 요구하는 이들이 드문데 가끔 동생놈이 무대포로 들이미는 일이 있다.

EBS 영화쪽 일이 워낙 번역료가 낮아서
일이 좋아 선심 쓰는 셈치고 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사실 꾸준히 하기가 좀 억울하다. ^^
한 8년 가까이 한동안은 일부러 짬을 내서라도 한달에 한 두 편은 EBS 영화 번역을 했지만
출판계 쪽 계약건만으로도 일에 치여 짬을 내기 힘들어진 다음부턴 아예 동생에게 말도 못꺼내게 했었다.

그렇지만 동생 놈 회사 일에 간혹 펑크가 난다거나, 번역 감수에서 걸린다거나
단기간에 번역이 쏟아지는 다큐멘터리 축제 기간 같은 때는 어쩔 수 없이 도와야한다.
아쉬울 때 동원되어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역시 핏줄이라나 뭐라나.. 쳇..

하여간 이번에 땜빵을 하게 된 건 포도주 산업에 관한 다큐멘터리 물.
총 130분 이상의 길이였는데, 번역하는 사람이 둘로 나뉜 테이프의 뒷부분은 아예 있는줄도
모르고 일을 넘겨 뒷부분 40분 정도 분량을 새로이 작업해야 하는 상황.
기막히게도 방영일자가 오는 화요일이란다. ㅋㅋ
원래 번역한 사람은 일요일에나 추가 번역 대본을 보내줄 수 있다고 했다는데
자막 편집 작업을 해서 납품하고 검수까지 받으려면 늦어도 토요일 오후까진 번역대본을 넘겨야한다는 것이 동생놈의 요구사항.

책이든 영화든 원래 그간 내가
번갯불에 콩구워내듯 빨리 "해치우는" 번역에 동원된 경험이 많긴 하지만
이번엔 좀 겁이 났었다.
컴퓨터 앞에 1시간 이상 오래 버티고 일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지 어언 석달이 다 되가는
시점이기 때문.
양쪽 발등에 불이 떨어져 활활 타고 있어도 뜨거운 줄 모르고 있는 내가 아닌가 말이다. -_-;;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영어가 마구 혼용된 다큐멘터리를
영어대본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눈치껏 테이프 보며 시간 맞춰 자막 길이 조절해서 한글 대본을 정리하는 과정은 예상대로 역시나 난항이었고
(번역 자체에 걸리는 시간보다, 때로는 TCR이라고 해서 작업용 테이프에 편의상 넣어놓은 시간을 보며 자막 길이 조절해 다듬는 시간이 더 걸리는데, 이번 작업은 뭔소린지 모를 외국어들의 총본산인데다 앞사람이 번역한 부분과 용어까지 통일하려면 앞부분도 죄다 다듬어야 했으므로 "겨우 40분 분량"이라는 말에 덜컥 일을 맡은 걸 죽도록 후회했다. ㅠ.ㅠ)
하필 메일로 받은 일부 원어 대본이 누락되는 바람에 오밤중에 생쇼를 거쳐 최종 마무리까지...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땜빵일은 무사히 토요일 오후에 끝이 났다.
어느덧 거대자본주의와 상업주의에 휘둘리게 된 유럽과 미국, 남미 포도주 산업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내용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가 다시 "빡세게" 몰아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음을 확인한 것이 큰 성과인 듯하다.

물론 알량하게나마 그것도 마감이라고, 어제 오후 이후 '번역일'은 단 한자도 하기 싫은
후유증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슬슬 워밍업을 거쳐 본격적인 "마감성 번역기계 작업모드"로 돌입할 수 있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도 같다.

동생놈한테는 바가지로 욕을 퍼부어주기는 했지만(아마 이번 원고료도 대충 떼어먹겠지;; 큭)
이래저래 나름 보람있는 땜빵질이었던 듯하다. ^^;; (흠.. 근거없는 나의 낙천주의도 서서히 부활하고 있는 모양이닷!)

Posted by 입때
,

가방끈

하나마나 푸념 2007. 8. 16. 01:17
신정아, 김옥랑, 이창하, 심형래, 정덕희, 윤석화...
요즘 학력위조 문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언론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다들 느끼는 기분이겠지만
나는 정교하게 학력을 위조하고 보란듯이 그 지위를 이용한 저들에게 분노하는 마음 보다
여전히 가방끈에 목매다는 이 사회 풍조가 어처구니 없고 슬프다.
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얼마나 학력이 중요하면 검증 잣대로 폭로될 수 있다는 불안한 가능성을 담보로 저런 짓을 해댈까.
현재 검찰에서 조사중인 유명 학원들의 강사진들도 다들 벌벌 떨고 있다는데
그간 알게 모르게 학력을 속인 사람들이 얼마나 더 폭로되어 나타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더는 알고 싶지 않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다.


Posted by 입때
,
계약 마감일에 즈음하여 번역원고를 넘기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출간전에 교정원고를 한번 더 검토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출판사에 따라서 이 과정을 생략하는 곳도 있지만
내가 거래하는 출판사들의 경우 2/3 정도는 편집자의 교정을 거친 원고가 원문의 느낌이나 분위기와 많이 멀어지지는 않았는지, 또는 분량 때문에 원고를 많이 쳐낸 경우 내용의 연결에 문제는 없는지 확인을 부탁한다.

초보 번역가 시절엔 물론 언감생심 이런 과정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
번역 초보의 특징은 원문의 틀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해 번역체의 느낌을 철철 흘리는 것이
보통이므로, 원고를 넘기고 나서 출간된 책을 보며 그제야 본인의 번역 문장과 다듬어진 문장의 차이를 깨닫고 차츰 배워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내가 번역한 원고를 주로 교정하고 편집했던 담당자들 덕분에 정말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고, 비교적 빨리 출판사가 원하는(말하자면 독자들이 편하게 여기는) 문장 호흡과 분위기를 익힐 수 있었더랬다.

돌이켜보면 요즘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와 편집자들은 길고 복잡한 문장을 적절히 잘라서 호흡이 짧고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은 글과 감각적인 느낌의 번역을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옮긴이 본인이 원서를 발굴해서 기획단계부터 참여한 책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대부분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을 '하청' 받듯이 일방적으로 의뢰받은 경우엔 (물론 의뢰 단계에서 책이 영 마음에 안들면 고사하는 때도 있지만, 내가 몹시 싫어하는 '경제경영서'나 '처세서'가 아닌 한 작업 일정이 맞으면 대개는 수용하게 된다. 일 없어서 노는 번역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_-;;) 애당초 번역 단계부터 원서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도록 하되, 출판사에서 기존에 출간한 책들과 얼추 비슷한 수준의 문장과 분위기로 맞춰주는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나중에 편집자의 취향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번역가에게 교정원고가 날아오는 것은 대개 초교(첫번째 교정교열을 의미한다)를 끝내고
2교와 3교를 앞둔 시점인 때가 많다.
편집자의 경향과 출판사의 요구 방향에 따라선 교정원고가 처음 넘긴 번역원고에서 그저 오자만 잡아낸 정도로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순서와 구조까지 크게 변형된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럴 땐 아예 담당자가 미리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런저런 기획의도 때문에 원문의 구조와 순서를 바꾸었으니 원문 자체의 뉘앙스만 봐달라는 식으로.
이럴 땐 애써 한문장 한문장 다듬으며 번역을 한 사람으로서 몹시 입맛이 쓰지 않을 수 없지만, 우선 책을 잘 팔고 보자는 것이 출판사의 목표이므로 어쩔 수 없이 협조는 필수다.
또한 그간 편집자들과도 친분을 많이 쌓고 보니, 그들의 애로사항 또한 모르는 바 아니어서 나는 교정원고를 검토할 때 옮긴이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최대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이다. 혹시 편집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오탈자를 잡아주고, 혹시 매만져진 문장에서 원문의 뉘앙스와 완전히 달라진 경우만 되돌리는 식으로. (유명 번역가 선생들 가운데선--아니, 유명하진 않더라도 지조 있는 번역가들은--쉼표 하나,  토씨 하나도 바꾸지 못하게 하는 이들도 있다지만, 나는 좋게 말해 융통성이 있는 편이고 나쁘게 말하면 편집자들의 선호도에 영합하는 지조 없는 번역가라고 하겠다.. 껄껄)

하지만 고집스러운 옮긴이의 경우엔 편집자가 나름대로의 출간 경향에 맞춰 교정해 놓은 문장들을 원래대로 다시 되돌려,원고뭉치를 완전히 새빨갛게(인쇄된 원고를 교정할 땐 빨간색 펜으로 수정 내용을 표시하는 게 아마 원칙일 거다. 그치만 나는 가끔이라도 원고 페이지를 시뻘겋게 수정하는 게 꺼려져 초록색이나 보라색 펜을 쓴다 ㅋㅋ) 수정하여 너널너덜한 상태로 만들어 보내기도 한단다. ^^;;

편집자와 번역가의 딜레마가 상충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편집자들도 교정교열을 하면서 원서를 참조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번역원고만 들여다보면서 비문이나 어색한 문장이 발견되면 '나름대로' 문장을 다듬는 것이 대부분이다.
편집자가 외국어 원문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대개는 국문과 출신인 편집자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하는 건 무리일 게다. 그러니까 편집자는 어디까지나 독자 입장에서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다듬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하겠다.
하지만 번역하는 입장에선 최대한 지은이가 전달하려는 느낌과 문체를 고스란히 우리말로 자연스레 옮기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이 짧고 읽기 쉬운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말이다.

오래 전, 문장의 호흡이 몹시 길고 복잡한 만연체의 소설을 번역한 적이 있었다.
가끔 10줄에 육박하는 길고 긴 문장들을 '최대한 유려하게' 번역하려 애쓰면서 나는 정말 미치고 폴짝 뛸 것처럼 괴로웠지만, 그 작가의 경우 답답하리만치 길고 복잡한 문장은 작품의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담아내는 중요한 장치였기 때문에 쉽게 번역하자고 아무렇게나 문장을 끊어댈 순 없는 일이었다. 당시 편집자 역시 기나긴 문장의 호흡이 지니는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흔히들 저지르듯) 독자의 이해를 위한답시고 무작정 문장을 짤막하게 절단내는 횡포는 피했으므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우겨대도 옮긴이의 입장이 관철되지 않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다.
아무래도 소설이 문체에 가장 민감한 장르라고 여겨지는데, 우리나라 독자에게 낯설다고 여겨지는 경우엔 출판사와 편집자의 의견에 따라 독자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는 과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출간된 소설의 경우엔, 섬세한 묘사에 치중한 문체도 문체려니와 '시제'가 대단히 중요한 소설의 장치였더랬다. 모든 사건이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감을 주기 위하여 거의 모든 문장이 현제시제였고, 간혹 과거를 회상할 때만 과거 시제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
하지만 편집자 출신의 출판사 사장(가끔 직접 번역도 한다고 했다. -_-;;)은 현제 시제로 일관된 문장이 한국 독자들에게 너무 낯설다면서(나는 지금도 한국 독자들의 수준을  폄하한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편집과정에서 '자기네들이 알아서' 일부 문장을 '익숙한 과거시제'로 바꾸겠다고 나에게 통보했다.
교정원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일부 과거형으로 손을 댄 문장들' 때문에 원문의 분위기가 여실히 달라졌으니 원래 내가 번역했던 대로 시제를 되돌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여전히 내세웠지만, 결국 내 의견은 묵살되고 말았다. 그런데 편집진 내부에서도 의견이 오락가락했었는지, 출간된 책을 보니 현재 시제로 되돌아간 문장도 더러 있긴 하되 짤막한 문장들을 공연히 연결하거나 다듬는 과정에서 '새로이' 수많은 오탈자가 생겨났음이 드러났다. 어휴...
교정쇄를 거치면서 오탈자는 거의 수정했다고 들었지만, 그 책을 쳐다보면 나는 아직도 시제를 중시했던 지은이의 문체를 고스란히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에 사로잡힌다.


아무튼
지금 또 얼마 후 출간될 교정원고와 함께 초록색 펜을 들고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번 책은 원래부터 여러 명의 필자들이 지었거나 들려준 이야기를 엮은 책이어서 챕터별로 분위기도, 문체도 다양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편집자는 '나름의' 욕심을 부렸는지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와 말투로 통일하느라 일부 글의 느낌이 달라지고 말았다.
최대한 편집자의 편의를 봐주려는 원칙은 세워놓았지만... 나도 이럴땐 갈팔질팡하게 된다.
게다가 요즘 '가끔 만나게 되는 일부' 편집자들은 놀랍게도 취향이 비슷하다. 그들이 앞세우는 핑계는 '독자들이 짧은 호흡의 읽기 편한 문장'을 선호한다는 것인데, 나는 제아무리 실용서라도 길고 짧은 문장의 리듬이 있고 장황하지만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맛깔스러운 문장을 '원문대로' 살리고 싶은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_-;;;

어느 쪽이 양보해야 더 좋은 책이 만들어질 것인지 장담할 순 없으므로
오늘부터 며칠 또 고민 깨나 해야 할 성 싶으니...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에효...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