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오래 하다보면 "주로" 그간 같이 일해왔던 출판사의 일을 계속 맡거나
알고 지냈던 편집자들이 거처를 옮기고도 연락을 해와 일을 진행하게 되는데
가끔은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 경우도 있다.
말이 "뚫는다"는 것이지 주변머리도, 숫기도 없는 내가 일면식도 없는 출판사에
일감 달라고 뜬금없이 찾아가거나 연락을 하는 경우는 없다.
맨 처음 번역일을 해보겠다고 작심한 뒤 이력서를 써서 출판사 몇 군데에 보냈던 때를 제외하면. ^^

늘 새로운 출판사 쪽에서 주변에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거나 아는 출판인의 소개로 내게 처음 일감을 의뢰하면서 "첫 거래"가 시작되기 마련인데, 어쩔 때는 서로 대면하지도 않고 이메일과 전화통화 만으로 의견을 조율하여 책과 원고를 주고받아 출간에 이르는 때도 있다.
비즈니스에 관한 한 꽤나 철면피가 되기는 했어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밥 한끼 먹고 나서 차츰 친해지고 얼굴을 맞댄 채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반갑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초면 대인기피증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듯, 얼굴 대면 없이 전화와 이메일만으로 추진하던 일 하나가 최근 틀어졌다. ㅋㅋ

서로 바쁘니까 계약도, 책 검토도 온라인으로만 진행했는데
원서 출간이 늦어지네, 번역할 책이 바뀌네 마네 하더니만
계약 원고마감일이 지나도록 원서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기에 볼 일 보고 밑 안닦고 나온 것마냥 -_-;
기분 찜찜하게 차일피일 지연되기만 하던 일감 하나를 완전히 잘라낸 것이다.
그쪽에선 새삼 지금 당장 일을 서둘러달라지만, 나도 그간 밀린 원고며 앞으로 할 일 스케줄이 있는데
무작정 그러마고 할 순 없고 아직 서로에 대한 신뢰나 의리 같은 것도 쌓이지 않았으니
받은 계약금 돌려주고 깨끗이 마무리하는 쪽으로 정리를 했다.  

번역으로 먹고 살려면, 아니 프리랜서로 생활을 꾸리려면 "원숭이 줄타기 법칙"을 절대로 지켜야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지만, 줄 하나를 놓기 전에 다른 줄을 잡아야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원숭이의 입장은
꽤나 비장하다.
아마도 문제의 이 계약을 성사시킬 때도 "원숭이 줄타기 법칙"에 의거해서 다달이 빠짐없이
작업 스케줄을 잡느라 꽤 무리해서 일을 끼워넣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체적으로 암담 그 자체.
요령을 피워 재주를 부리려던 원숭이는 여러갈래 늘어뜨려놓았던 줄이 마구 꼬여 갈피를 못잡고
결국 땅바닥에 자진해서 내려와 꼬인 줄을 푸느라 진땀을 흘리는 중이다.
1년전에 받았던 계약금을 다시 토해내려니 괜스레 생돈 날리는 것 같아 속이 쓰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책 구경도 안하고 받았던 남의돈 잠시 맡아두었다가 내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아까울 건 없다.
다만 이제부턴 쓸데없는 욕심에 줄이 꼬이는 것도 모르고 아등바등거리진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까먹지 말아야할 터인데, 늘어진 줄 몇개를 지나고 나서도 또 새로운 줄이 드리워질지 어쩔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원숭이의 조바심을 키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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