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해당되는 글 76건

  1. 2010.11.26 몸값 18
  2. 2010.11.19 비겁한 밥벌이 3
  3. 2010.10.13 양치기 중년 9
  4. 2010.10.09 과거, 망각, 현재 2
  5. 2010.09.08 컴퓨터 20
  6. 2010.08.04 심기일전 16
  7. 2010.04.03 병원 공포 11
  8. 2010.03.16 소인배의 승리 20
  9. 2010.02.01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15
  10. 2010.01.15 어처구니 없는 요구 18

몸값

투덜일기 2010. 11. 26. 14:40

처음도 아니고 두번째 계약인데 굳이 출판사로 나오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2시에서 3시 사이에 아무때나 오라더니만 아침부터 일찌감치 다시 전화를 해서 나의 단잠을 깨워 2시까지 오라고 콕 찍어줄 때부터 조짐이 안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없으니 시리즈물의 계속 출간을 재고해보라고 내가 충심어린 부탁을 했던 청소년 소설의 두번째 책을 얼떨결에 계약하고 돌아와선 스스로가 한심해 엊저녁부터 계속 제머리를 쥐어박는 중이다.

어차피 책이 잘 팔릴지 안 팔릴지 예측하는 혜안 따위는 갖추지 못한 인간이니 출판사에서 계속 시리즈를 내겠다면 번역은 내가 맡아야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떤 문제가 있든 시리즈물의 번역자가 바뀌는 건 독자를 위해서도 좋지 못한 일이다. 다행히 편집 담당자는 책이 재미있다고 했으니, 내가 청소년물을 즐기기에 너무 '늙어'버렸나보다고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음책을 논의하러 갔었던 것이고.

하지만 시장에서 콩나물값 깎는 것도 아니고, 사람 불러다가 계약서까지 뽑아놓고 눈앞에서 원고료를 깎는 건 너무했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그런 의향을 물어왔다면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고 해도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다른 데는 내년 계약 건부터 어렵더라도 조금씩 몸값을 올려주는 형국인데 새삼 번역료를 깎아달라니. 시리즈물의 번역료를 권당 달리할 수도 있다는 건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번역가별로 몸값이 거의 정해져 있긴 해도 책에 따라 번역료가 약간씩 조절되는 경우는 물론 있다. 분량이 너무 엄청난 책의 경우 출판사에서 미리 양해를 구하는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번역하기 쉬운 책과 어려운 책은 출판사에서도 이미 알고 있지 않겠나. 지난번 계약도 가벼운 '청소년물'임을 빌미로 나로선 최대한 양보한 선에서 번역료를 책정했던 터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책정한 제작비에 맞춰서 두들겨 패듯 가장 만만한 '인건비'인 번역료를 막무가내로 깎으려 드는 곳을 간혹 만나게 되면 정말이지 맥이 쭉 빠진다. 시리즈물이라서 뒷권은 번역하기 더 수월할 거라는 짐작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지.

일단 사무실로 불러들이면 내가 소심해서 면전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따위의 극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저쪽에서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작전은 유효했다. 나름 굳은 얼굴로 입장을 밝히기는 했어도 결국 달변의 설득에 넘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저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갑'이라서 '을'인 내가 져야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겨우 몇십만원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는 상황이 서글퍼져 어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루한 밥벌이 아닌 직업이 어디 있을까마는 드물게 겪는 이런 장면은 그저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시리즈물 끝나면 다시는 상대하지 않을 출판사로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는 수밖에.

내키지 않아도 가끔씩 가게 되는 파주 출판도시는 이상스레 정이 가지 않는다. 삐까번쩍한 건물들이 즐비해도 인기척은 전혀 없이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그곳에 가면 괜히 숨이 막힌다. 씁쓸한 심정으로 서둘러 집에 오니 파주에 있는 또 다른 출판사에서 보낸 증정본 택배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 출간되는 마지막 책일 것이다. 책표지를 쓰다듬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의 몸값이 여기 담겨 있으니 그만 잊어버리자고 마음먹었다. 헌데 새삼 구석에 던져둔 계약서를 보니 자꾸 울컥해서... 여기다 일러바쳤으니 이제 정말 툭툭 털고 웃어버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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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밥벌이

투덜일기 2010. 11. 19. 02:38

기획력 있는 번역자들과 달리, 나처럼 줏대없이 주어지는 일로 번역을 하다보면 못마땅한 책과 씨름해야 할 때가 더러 있다. 누가 간절히 부탁하거나 일감이 똑 끊기면 어쩌나 밥벌이 걱정을 해야하는 상황에 몰리면, 스스로도 민망한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쳐 일을 맡게 되는 식이다. 당신 정도 경력이면 이제 마음에 드는 책만 골라서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간간이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먹고 살려면 말이다. -_-; 더욱이 인세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매절 계약일 마다하고 인세 계약일만 찾아하는 바람에 일년 내 수입이라고는 얼마 안되는 계약금 몇 건으로 버텨야 했던 해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죽도록 싫거나 너무 어려운 책, 또는 몹쓸 출판사의 일만 아니면 대개는 약간의 망설임과 고민 끝에 못 이기는 척 계약에 응한다.

문제는 그렇게 별 애정 없이 맡은 책의 경우, 프로답지 못하게 아무래도 홀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책에 흥미를 느껴야 진도도 빨라지고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가능하면 어떤 책이든 애정을 품어보려고 자기최면을 걸곤 한다. 그리고 쉽든 어렵든 '골빠지는' 과정을 거쳐 번역원고가 마무리되면, 좀 모자란 자식이라도 똑같이 정을 쏟는 부모(에 비하면 너무 비약이 심한가? 맞다, 심하다)처럼 돌변해 칭찬일색으로 치장하여 민망하기 그지없는 역자후기까지 양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도대체 이런 책을 종이 아깝게 왜 만드나 싶은 생각이 들거나 도저히 최면이 안 걸리는 '문제작'이 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원고를 넘긴 청소년 소설이 그렇다. 번역의뢰를 받고 상담을 하며 대강 훑어본 느낌으론 소재나 줄거리가 흥미로울 수 있겠다 싶었다(소녀의 탐정놀이 비슷;;). 분량도 얇은 데다 청소년 소설이니 내용도 문체도 수월하여 아주 가뿐하게, 잘하면 한달 안에 '해치울' 수 있는 '만만한' 작업이 될 듯했고, 더욱이 책 나오면 '조카가 좋아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 덜컥 계약에 응했다. 헌데 아뿔싸. 눈높이를 낮추어 아무리 조카 같은 청소년 독자의 눈으로 봐도 통 스토리도 재미도 없고 유치하고 구성도 단순하여 영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ㅠㅠ 그러니 점점 일을 하기가 싫어질밖에... 한달만에 해치우겠다고 생각했던 작업은 계속 늘어졌고, 그런 책을 쓴 작가도, 번역서를 출판하겠다고 나선 출판사도 밉기만 했다. 물론 제일 등신 같다고 느껴진 건 쉬운 맛에 덜컥 번역하겠다고 나선 나였고. 

어쨌든 지난달에 번역 원고를 넘기며 양심 고백을 했다. 야심차게 4권짜리 시리즈물로 기획했다는 건 알지만, 일단 원고를 읽어보고 나서 계속 다음 시리즈도 출간할지 진지하게 재고해 보라고. 요즘 청소년들도 눈이 높아서 웬만해선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이건 좀 아니다 싶다고. (처음 책을 추천했거나 검토한 사람 물 먹이는 짓이라 조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책에 대한 자신이 있는 건지 일단 대뜸 다음 책을 계약하러 오라고 청했고 '다음주쯤' 출판사에 오면서 '역자후기'를 '재미있게' 써오라고까지 부탁했다. -_-; 날짜를 콕 찝어 정해주어도 외출이 어려운 나에게 '다음주쯤'이라고 했으니 내가 어찌했을 것 같은가. 게다가 재미 없어 멀미날 것 같은 책을 위해서 '재미있는 역자후기'라니!

한번쯤 독촉전화를 받으면 발등이 앗뜨거라 싶어 뭔가 써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통 그런 자극도 없으니(전화 공포증 때문에 내쪽에서 먼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전화걸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후기를 못 썼으니 제발저려서 어떻게 전화를 건담!) 한달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도 나는 옮긴이의 말을 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대개는 번역을 하면서 후기에 써먹을 아이디가 떠오르거나 인상적인 구절이 있을 때 미리 메모를 해두곤 하는데 이 책은 전혀 그런 빌미가 없던 터라 정말 완전히 막막강산이다. 다른 일도 해야하는데 이도저도 제대로 못하고 갈팡질팡 제 머리만 쥐어박고 있으려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그래도 이렇게 자아비판을 공개적으로 하고 나면 낯이 뜨거워 뭔가 어떻게든 진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끼적이긴 했는데, 만날 이렇게 제 얼굴에 침뱉는 얘기만 쓰는 번역가라는 걸 출판사에서 알아채면 정말로 밥줄이 끊기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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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중년

투덜일기 2010. 10. 13. 16:08

몇달 전 가요계의 폐단을 지적하며 이하늘이 쓴 말인데, 유독 귀에 콕 박힌다. 물론 이하늘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넣은 방송국과 PD를 비난하는 맥락으로 사용한 반면, 내 경우는 스스로 민망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가시방석에 앉은 상황이다. 마감일을 질질 끄는 것이 이 업계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는 하지만, 계약 마감일에서 무려 두세 달이 지난 뒤에도 일주일씩 계속 약속을 어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로 막판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아서 늑대에게 잡혀먹힌 양치기 소년이 떠오른다. 

편집 담당자들이 번역하는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가장 흔히 듣는 거짓말이 "마무리중"이라는 변명이란다. 맞다. 최근들어 나도 몇번이나 써먹었다. 정말로 대강 초벌 번역은 끝났는데 골치아픈 퇴고를 앞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거짓말이 아니지만, 번역분량이 아직 엄청 남았어도 미안해서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마무리 중이긴 한데... 어쩌고 저쩌고. 편집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의 말을 들으면, 저런 구차한 변명을 그들도 다 알아차린단다. 이 인간 또 거짓말 하고 있구나, 하고. 하기야 거짓말이 아니라면 일주일, 이주일 차일피일 원고를 지연시킬 이유가 없겠지.

번역의 질은 둘째치고라도 마감일에 관한 한 '비교적 신용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조만간 고질적인 마감 어기기 대장이라는 악명을 뒤집어 쓰고 매장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두려움이 없지도 않으면서 왜 도대체 매번 마감일을 못 지키고 악순환의 구렁텅이에서 허덕거리는지!?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렇다고 만날 팽팽 놀러다니기만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근거없이 느긋해져 배째라고 여기는 태도, 이것도 일종의 병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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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과 바쁜 일은 원래 떼로 몰려다닌다는 게 맞다. 숨도 못 고르게 바쁠 땐 정말 또 다른 일이 겹친다. 마감에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주엔 설상가상 며칠 간격으로 교정지를 두권이나 넘겨야 했다. 몹시 힘겨워하는 후기도 써야 했고. 덕분에 평균 수면시간이 형편없이 줄었고, 가뜩이나 가을 타는 얼굴 꼬라지는 아주 가관이 되었다.
어쨌거나 새삼스레 교정지와 씨름하며, 며칠 간격으로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린 게 있어서 적어둔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반복할 운명에 놓인다." 조지 산타야나의 말이란다. 기계적으로 번역을 하고, 퇴고를 할 땐 자구에 얽매여 웬만해선 작품을 감상할 여유 따윈 생기지 않는다. 각별히 애정이 가는 책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석달이나 마감일을 어기고 넘긴 책이라 쫓기듯 번역한 소설에서 조지 산타야나의 인용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땐 신기하다 정도만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산타야나의 책을 헉헉대며 번역하다 엎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과거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면 똑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게 될 거라는데 끄덕끄덕 동의하며 그 주제로 역자후기를 써보냈다. 그런데 워낙 귀가 얇은 인간인지라, 며칠 뒤엔 다른 책의 또 다른 글귀에 시선이 꽂혔다. "망각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어차피 과거의 경험이라는 게 각자의 편견을 거쳐 남은 '반쪽짜리 학습'이므로 연연할 필요 없으니 잊어도 좋다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망각을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을 위로하는 맥락인데, 이 또한 진리가 아닌가. -_-;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뒤 carpe diem이 내 삶의 모토라고 주장해왔던 걸 생각하면 후자가 역시 내 취향이긴 하다. 과거에 자꾸만 얽매이는 건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어쨌거나 서로 모순인 것 같기도 하고, 잘하면 둘 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두 가지 생각 때문에 갈팡질팡했다. 가뜩이나 온갖 선택 앞에서 우유부단한 인간이 이런 심오한 문제를 어찌 결론 지으랴. 이럴 땐 황희정승 놀이가 최고일 듯. 깜박깜박 까먹는 걸 비롯해 수많은 걸 망각해도 공포에 사로잡힐 필요 없다고 마음을 놓으며 살다가, 또 마음 켕기는 순간엔 추억을 쓰다듬을란다. 결국 내 마음대로 펄럭거리며 살겠다는 얘기로군.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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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투덜일기 2010. 9. 8. 02:11

5년을 넘긴 컴퓨터가 얼마 전부터 슬슬 걱정스러운 양상을 보이더니 오늘은 급기야 그 무서운 '시퍼런' 화면을 수없이 띄웠다. 완전 컴맹이라 안절부절 못하며 몇번이나 전원을 껐다 켰지만 부팅이 되다말고 무시무시한 경고(이런 화면을 처음 보는 거라면 어쩌구 저쩌구.. 그게 아니라면 시스템 인스트럭터에게 연락하라던가 뭐라던가... )가 뜨더니, 안전모드도 실행이 안되는 상황. 더럭 겁이 났다. 지난주부터는 원고 백업도 안해놨는데!!!

컴퓨터가 슬슬 이상을 보이기 시작한 건 꽤 됐다. 되다말다 했던 CD롬이 완전히 고장나 읽히지 않는 건 1년이 다 돼가고(그렇기 때문에 확 밀어버리고 윈도를 새로 깔 수도 없다. 혼자선 할 자신도 없지만 -_-;; CD롬이라도 괜찮으면 동생이든 누구든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겠나..), 본체에서 갑자기 윙윙 바람부는 소리가 나면서 느려지질 않나, 화면 보호기 작동되다 말고 프로그램 오류 메시지가 뜨질 않나, 과거 경험상으로도 컴퓨터는 수명 5년이 지나면 시한폭탄처럼 저절로 망가지도록 프로그램이 심어져 있는지 꼭 말썽을 부리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악성 코드랑 바이러스 무서워서 유료 V3도 꼬박꼬박 자동실행하고 있거늘 나 원 참! 하지만 버벅거리긴 해도 또 완전히 고장난 것은 아닌 컴퓨터를 확 바꾸긴 좀 뭣하고,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버티는 것도 괴로운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지던 와중에 드디어 오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퍼런 화면'이 등장한 것.
 
컴맹답게 이럴 땐 컴퓨터가 열을 받아서 그럴 지 모른다며 모든 전원을 끄고 플러그 까지 빼서 몇시간 식히는 것이 나의 유일한 처방이다. 근데 이번에도 그게 먹히더라. ㅋ 드디어 안전모드가 실행됐으므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시스템 복원' 설정으로 컴퓨터를 다시 부팅하는 데 성공했고, 무서워서 얼른 작업해 놓은 원고들을 이메일로 보내놓았다. 외장하드에 백업하다가도 혹시 오류날까 싶어서 ㅠ.ㅠ

늘 마감인생의 덧없음을 하소연하는 나에겐 꿈에도 등장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두 편 있다.
하나는 거의 완성된 번역원고가 컴퓨터 고장으로 홀라당 날아가는 것이다. 마감일은 이미 어겨놓은 상황인데 백업도 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수천매 원고가 그야말로 홀라당 날아가는 바람에 펄펄 뛰다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거다. 요샌 정전으로 컴퓨터가 꺼져도 워드 프로그램에서 자동저장을 해주지만, 십수년 전엔 새벽녘에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밤새 작업한 원고를 홀라당 날린 적이 있었다. 하기야 지금도 재수가 없으면 컴퓨터가 미쳤는지 덜컥 오류가 났다가 수십매쯤 날아간 문서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낭패감과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다. 두번째로 번역을 하면 속도야 훨씬 붙지만, 어쩐지 전에 번역한 문장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기분도 영 찜찜하다. 허니 내가 이런 꿈을 꾸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또 하나는 (재수 없는 상상이긴 하지만) 잔뜩 맡아놓은 작업을 마무리도 하지 못하고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 사람이 죽었으니 출판사에서도 더는 독촉할 형편이 못되겠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그간 작업한 원고라도 넘겨달라고 하면 어쩌나, 다듬지 않은 초고가 세상에 선보이는 건 정말 싫은데, 계약금만 받아놓고 아직 시작도 못한 추후 작업들은 어찌되는 걸까, 앞으로 받기로 한 원고료는 또 어떻고! 뭐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상상을 하며 괜스레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물론 참 한심하다. 하지만 얼마 전 갑작스레 이윤기 선생이 심장마비로 운명하신 소식을 듣고 보니, 내 상상이 완전히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단 말썽 부리는 컴퓨터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새 컴퓨터를 장만하면 그만인데, 컴맹주제에 워드며 필요한 프로그램 설치하고 다운받는 과정을 생각하면 또 끔찍하다. 2005년도에 이 컴퓨터 샀을 때는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걸!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는 말이 정말로 나 같은 인간에겐 딱이다. 당면한 문제 해결보다는 그 이후의 소소한 귀찮음이 더 두렵게 느껴지니 말이다. AS를 부르는 방법도 있다는 건 알지만, 그간의 경험상, 그리고 시청자 불만 프로그램의 고발 내용을 보아도 컴퓨터 AS기사는 십중팔구 사기꾼이던데 어찌 믿는단 말인가. 당장 CD롬부터 새것으로 갈으라고 할 텐데 몇만원 들이느니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니 또 어떤 컴퓨터를 어디에서 살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고민부터 다시 꼬리를 문다. 우웩~~~ 책상을 넓고 한가롭게 쓰기 위해선 노트북 컴퓨터를 새로 사는 것도 생각해본 적이 있으니(근데 여름엔 노트북 자판 뜨거워져서 싫단 말이닷) 이런 고민은 최소한 몇달간 지속될 것 같다. 시퍼런 화면이 연일 나를 괴롭히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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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

투덜일기 2010. 8. 4. 20:15

덥고 습하고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르고 몸은 쳐지면서 일은 몹시 바쁜 궁극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느라 너무 짜증만 부렸다는 생각에 심기일전 용으로 그간 좋은 일을 꼽아본다.

7월 중순 즈음 번역 인생 50권째 책이 나왔다. 출간된 번역서가 100권 되는 날부터 옮긴이 약력에 '10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는 문구를 넣으려고 작심하고 있었으나, 이 추세로는 어쩌면 100권 이전에 이 일을 작파하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번역서 50권 기념'을 홀로 자축했다. 15년전 첫해엔 딱 한권이 나왔고 중간에 2, 3년은 늦은 공부한답시고 일을 거의 못했으니 15년간 50권이면 게으름뱅이라고 심히 자책할만 한 수준은 아니라는 자평을 내렸다. 엎어진 책들과 앞으로 나오게 될 책까지 감안하면 심지어 칭찬해줄 만 하다.

상반기를 마무리하며 전에 없이 맥이 빠졌던 이유는 '유사이래 최대불황'이라는 출판계 넋두리가 새삼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원숭이 줄타기 원칙이 무색하게도 예년과 달리 번역 의뢰 전화와 계약건수가 엄청나게 줄어 밀린 일 말고는 7월 초까지도 하반기에 새로 잡힌 일이 하나도 없어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가뜩이나 일도 하기 싫던 차에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며 다른 일을 모색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감에 허덕이는 사이 새로운 일감이 밀려들었고 어느새 하반기 작업 스케줄이 모두 채워졌다. 믿을 수 있을지는 지내봐야 알겠지만 구두상으로는 내년 초까지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위기감에 허덕이다 고비를 넘기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해 게으름을 쫓아내고 있다.

0.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다고 확신하지만, 얼결에 모 번역문학상 심사를 신청했다는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사실 아무나 다 신청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그럴만한 책이 전혀 아님에도 일단은 그런 논의에 끼어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놀랍고 흡족하다. 번역기계가 된 느낌으로 안일하게 작업하던 와중에 그 소식을 들으니 한동안은 시시한 문장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못하고 끙끙대며 고민했다. '상' 여부와 상관없이(오히려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싫다)  남은 번역인생에서도 좀 더 치열한 자기검열의 동기가 되겠다 싶다. 

음.. 억지로 꼽으려니 좋은 일이 또 뭐가 있는지 잘 떠오르질 않는다. 다음달로 약정이 끝나는 휴대폰이 드디어 맛이 가고 있다는 건(확인과 취소 버튼이 잘 안눌러지고, 아무때나 수시로 꺼진다 -_-;;) 좋은 일인가 나쁜일인가. 나 또한 스마트폰의 대열로 접어들 것인지 말것인지, 그렇다면 기종은 뭘로 할 것인지, 스마트폰은 관두고 그냥 예쁘기만 하고 기능이 단순한 휴대폰으로 바꿀 것인지 행복한 고민중이다. 휴대폰 추천 환영. ^^; 

쓰고 보니 다 재수없는 자기 자랑인 듯 하여 민망함이 밀려들긴 하지만, 어차피 심기일전을 위해선 나에게도 필요한 부분이다. 앞으로는 더 좋은 일 신나는 일만 생겨나서 계속 이 목록을 늘려나갈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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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얘기긴 하지만 요번에 번역한 책에 이런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미국 의학협회가 2000년에 발표한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고속도로 교통사고, 유방암, 에이즈를 포함한 여러가지 주요 사망원인보다 병원에서 의료 과실로 죽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 그 수가 연간 9만 8천명이 이르렀다고. *_* 우리나라랑 미국이랑 인구 비율이 워낙 다르긴 하지만,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닌가!

사실 우리 아버지도 119를 불러 타고 가기는 했지만 두발로 멀쩡히 응급실에 걸어들어가셨는데, 쓸데없이 말라리아니 뭐니 엉뚱한 추측으로 밤새도록 온갖 검사 다 받고도 발열과 오한의 원인을 못찾다가 아침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위중한 순간이 된 다음에야 의사들은 심증이 가는 병명을 <짐작>해냈었다. 물론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의료 과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두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심증뿐 의구심을 밝혀낼 도리도 없었고 워낙 황망해 아무런 경황이 없어, 우리로선 그래도 그 못미더운 의사들에게 매달리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닥터 하우스 팀도 병명을 알아내기까지 며칠씩 걸리기도 하지 않더냐고 속으로 애써 위로를 하면서.

책의 저자는 그런 의료 과실의 가장 큰 원인이 의료진의 무능이 아니라 안일하고 무심한 태도 때문이라며, 흔히 건강에 관한 한 주도권을 의료진에게 모두 맡기는 게 보통이지만 환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의료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게 귀찮을 만큼 묻고 의견을 제시하고 대안을 촉구하라고 권한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는 인간인데, 또 바로 그 전문가라는 위치 때문에 실수가 있어도 제도적으로 다들 쉬쉬하며 덮기에 급급해 수많은 과거 실수에서도 통 배우는 게 없단다. 게다가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수의 통계 자료를 지식으로 갖고 있는 의료진이 아니라 바로 본인므로, 최대한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환자 본인이 주도권을 갖는 수밖에 없단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건강을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순간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겠지만, 그 전엔 최대한 대체의학이나 믿음직한 민간전승요법에 더 기대어 건강을 챙기겠다는 사람이다.

온갖 지병을 다 갖고 계신 왕비마마 덕분에 한달에 평균 두세 번은 종합병원엘 가야하는 형편인데, 이 나라에선 의료 과실을 입증하는 게 미국보다 훨씬 더 어려운 탓에 돈 많은 사람들 아니고선 감히 거대권력인 의료계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걸 감안할 때 정말이지 환자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약 처방의 날짜계산이 잘못되었다거나, 약을 하나 빠뜨렸다거나, 다음 진료예약이 상담시 정한 날짜와 달라진다거나 하는 행정적인 착오는 실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걸핏하면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미국에서야 연간 의료 과실로 판명된 사망자 통계가 9만 8천명이라지만, 우리나라는 아마 의료 과실로 환자가 사망했음을 인정한 건수가 역사상 통틀어도 98건도 되지 않을 것 같다. CT 조영제 주사 하나를 맞아도 온갖 부작용으로 인한 결과는 본인 책임이라는 사유서에 서명을 받는 형편이니 뭐. -_-;;

월말에 또 왕비마마의 병원 거사가 잡혀 있어 어제는 그 건과 관련하여 무려 여섯 개 과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협진 상담을 하고 수술동의를 받아야했는데, 마지막 코스였던 심장전문의와 마취전문의는 수십 가지가 넘는 약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조차 난감해 했다. 외부 병원 약도 아니고 다 지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이라 컴퓨터 모니터에 진료과목 별로 종류 별로 다 뜨는 게 내 눈에도 확인되던데도! 미리 수술관련 안내문을 숙지하고 있던 내가, 그리고 작년 수술에서 이미 어떤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익히 겪어본 내가 이런이런 약은 지혈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미리 끊어야하는 게 아니냐고 넌지시 알려줘야 했다. +_+ 

아침부터 다저녁때까지 온종일 층층마다 병원을 뺑뺑 돌며 여러 과에서 의사들이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이유는 울 엄니가 워낙 고위험군 환자이기 때문일 텐데, 의례적인 절차라고는 해도 어쩜 다들 그렇게 건성건성인지 원 도무지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왕비마마가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대여섯개 진료과에서 그나마 정성스럽게 오랜 시간 문진으로 시작해 이런저런 점검을 하고 검사 결과를 알려주고 다정히 환자를 안심시키는 주치의는 딱 두명 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잘 지내셨어요? 별다른 일은 없으셨죠? 그럼 드시던 약 또 처방해드릴게요."라며 1분만에 진료를 끝내는 식이다. 환자인 울 엄마도 보호자인 나도 특별히 물어볼 게 없으면 더 시간을 빼앗는 게 민망할 지경.

간병 무수리 생활을 하도 오래한 전적 덕분에 이젠 병원 돌아가는 판세가 빤히 눈에 보이는 것 같고, 그놈의 행정절차와 의료계의 자존심 때문에 환자 측에서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소용없는 일이 무언지 대강은 파악이 된다. 요번에 번역한 책 때문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나는 의료진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고 수긍하는 <착한> 보호자였지만, 허망하게 아버지를 잃고 나선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게 커져 사사건건 의구심이 생겨 자꾸 꼬치꼬치 묻고 따지게 된다. 그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쓸데없이 키우지 않는 건 물론이다. 게다가 어리바리하게 주치의 지시를 잘못 알아듣는 인턴이나 간호사들의 실수를 미연에 막으려면 정말로 환자와 보호자가 똘똘하고 영악해질 수밖에 없다. (몇년 전엔 퇴원을 위해 항생제를 이틀전부터 끊기로 했는데, 멍청한 초짜 간호사 하나가 항생제를 새로 매다는 바람에 퇴원이 지연될 뻔하기도 했었다. 엉뚱한 약을 잘못 놓지나 않은 걸 고마워야 하는 건지도...)

병명도 다양하게 골고루 끼고 계신 왕비마마를 보필하려면 병원과 의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매번 다니면서도 참 멀리하고픈 곳이 또 병원이다. 박수근 그림이 걸려있고 한켠에 갤러리와 카페가 생겨난 대학병원 로비는 마치 백화점에 쇼핑 다니듯 병원도 소일거리 삼아 다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애쓰는 듯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구태의연하게도 의술이 인술이라는 사실이다. 병을 다루는 게 곧 사람을 다루는 일임을 젊고 늙은 의사들이 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 좋겠건만, 단지 하나의 그럴싸한 직업으로 선택되어 가는 양상이 짙은 의사라는 직업이 점점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눈에 불을 켜고 왕비마마를 지켜야하는 병원생활이 또 3주 뒤로 다가왔다. 왕비마마는 수술이 무서워서 심장이 벌렁거릴 뿐, 온통 관심이 집중되는 입원생활 자체는 막상 퍽 즐기는 양상을 보이시는데 간병무수리는 숨막히는 병원공기와 차고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버티는 쪽잠 생활이 싫고 겁나서 역시나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나저나 참, 저 책은 과연 잘 팔릴까?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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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배의 승리

2010. 3. 1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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ㅌㄹ마을 필독도서가 되어버린 책을 이제야 읽었다. 내일까지 검토서 만들어 보내야할 원서가 있었는데도, 워낙 하기 싫은 일인 데다 책 네 권이 자꾸 나에게 손짓을 해대는 것 같아서 그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엄마한테 구박 들어가며(원래 자는 시간인 아침이 밝은 뒤에도 안/못 자고 계속 읽었다) 거의 쉴 새 없이 내달리듯 탐독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웃분들이 거론하던 가상 캐스팅 배우들의 얼굴이 연이어 떠올라 킬킬 웃음짓기도 하고 나만의 아이디어를 짜내보려고 애쓰다가는 그냥 포기하고 이야기속에 빠져들었다.

로맨스 소설은 읽기 전엔 괜스레 뻔한 상투성을 비웃다가도 읽기 시작하면 매번 정신 못차리고 끝을 봐야 속이 시원하다. 중학생 시절 하이틴로맨스로 시작돼 할리퀸 로맨스 시리즈를 거쳐 주드 데브루가 어떻니, 조안나 린지가 어떻니 작가 따져가며 골라 읽던 시절에도 그러했고, 한동안 끊었다가(?) 로맨스 소설로 번역인생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로맨스 번역에서 차츰 손을 떼게 된 건 번역 분야를 넓혀 몸값을 올리고(?) 싶은 내 욕심도 있었지만, 그 무렵 외국(특히 미국) 로맨스 작가들의 작품이 사양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속속 등장한 국내물의 선전이 주효했다. 지나치게 진부하고 통속적인 구도와 인물에 신물나기 시작한 외국물보다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아기자기하고 인물도 정감있는 국내물이 훨씬 재미있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어서, 중소대형 출판사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로맨스 작가들을 스카우트 하려는 열풍이 불었다.

성균관, 규장각 시리즈를 쓴 정은궐 씨 얘기도 그때 지인에게 들었다. 초기 작품의 교정과 편집을 맡은 친구가 작품 의논 때문에 연락을 해보니 직장인이더라나. 다른 국내 로맨스 작가 발굴에 참여하기도 했던 눈썰미 좋은 그 친구가 글솜씨 칭찬하는 말을 들으며, 다들 막 짜증을 냈던 것 같다. 뭐냐, 직장생활도 하면서 취미생활로 돈도 벌고! 부러워서 질투난다, 뭐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인기로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예약 판매분만 수만 부가 넘었다는 얘기도 들은 듯하다. 얼마 전까지도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있었으니, 지금쯤 지은이는 돈방석에 올라 직장생활을 관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을까?

나로선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 <성균관>이 2007년 초에 나왔는데 <규장각>이 2009년 여름에 나왔으니 거의 2년 반이나 걸린 셈이다.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그러기도 했겠지만, 직장생활과 병행하느라 더 오래 걸린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짐작이다. 물론 중론이 그러하듯 나 또한 <성균관> 1, 2권이 <규장각> 1, 2권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주요 인물들의 정체가 다 공개되고 말았으니 다음 시리즈는 긴장감이 더욱 느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잘금 4인방 김윤희, 이선준, 문재신, 구용하를 비롯해 덕구아범과 순돌이, 반다운, 황서영 낭자까지 참으로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해낸 솜씨라면 뭔가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엮어내고 있지 않을까나? 지은이가 정조 시대 역사와 궁궐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던데, 여기서 끝내기는 아깝다규~!

반할 수밖에 없는 훈남들의 활약상을 즐기며 상상세계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인지, 찌질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꼬부랑 글씨 원서가 좀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재미없는 소설 읽고 검토서 만드는 건 정말 못할 짓이다! 어쨌거나 얼른 마무리해서 아침까지는 메일로 쏘아주어야 하는데 어흑... 어제처럼 이선준을 꿈꾸며 잠이나 자고싶다.(나도 이선준은 너무 완벽한 인물이라 문재신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는데 꿈엔 문재신 대신 이선준이 나왔다. 내 옆에 앉아 조보 대신에 신문을 꼼꼼히 읽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잔소리를 해댔다. ㅋㅋ)

그나저나 제 다음 순서는 통통님이신데, 워낙 바빠 언제 읽으실 수 있으려나요? 어떻게 전달을 해드려야 하옵는지... 책이 돌고도는 책방마을 ㅌㄹ마을, 나도 좀 기여를 해야할 터인데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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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까지는 싸이질에 대단히 심취했지만 사람들이 죄다 그곳을 떠나고 블로그질을 더 많이 하면서 나 역시 싸이월드를 거의 떠나 살았다. 2002년부터니까 꽤 오랜 세월 거기 담겨 있는 삶의 흔적들이 아깝기도 하고 몇몇 친구와 가족은 아직 그곳에서 소통하고 있으니 누구처럼 확 폐쇄하거나 닫아둘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그냥 막연한 방치상태랄까.
그러다 조카들 사진을 구경하러 간만에 로그인을 해보니 쪽지가 도착했다는 표시가 보였다. 그간 싸이 쪽지는 기분 나쁜 홍보글 아니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거나 결혼소식을 알리는 지인의 단체 쪽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이번엔 또 뭘까 지레 이맛살을 찡그리며 쪽지를 열어보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 내가 번역한 문제의 시리즈물 소설을 <꼭> 읽고 싶은데 곧 유학을 가게 되었다면서 시리즈별로 다 책이 너무 두꺼워 가져갈 수가 없으니 나더러 번역원고를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pmp에 다운받아서라도 읽고 싶다나. 기가 막혀서... 책이 저가형 보급판으로는 출간되지 않아 사 보기 부담스럽다면서 간곡히 부탁을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너무 어처구니 없는 요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유학을 안 가봐서 모르지만 짐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겨우 책 몇권 넣을 공간이 없다는 것인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가고, 유학을 간다는 것부터가 핑계 같다. 책 사기는 아까운데 그렇게 읽고 싶으면 서점에 가서 서서라도 읽든지! 아무래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 읽어보겠다는 꼼수일 것 같다. 순진하게 원고를 보내줬다간 온라인 공간에 원고 파일이 영원히 떠돌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오도독 소름이 끼쳤다. 내 이름이야 워낙 드물어서 동명이인을 찾기 힘들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사적인 사진들은 모두 일촌공개로 돌려놓은지 오래라고 해도 미디어 서평이나 책 사진 같은 건 그냥 공개해놓은 터라 그런 인간들의 검색에 속수무책으로 걸려들고 말았겠구나 싶었던 거다. 이런 공간에 조금씩 노출된 사생활만으로도 얼마든지 개인정보를 뽑아낼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섬뜩했었는데, 실명까지 드러나는 싸이월드 같은 데선 더더욱 발가벗겨진 채로 내던져지는 꼴이란 걸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 불찰이다. 얼른 모든 메뉴를 일촌공개로 바꾸어 놓고도 영 기분이 찜찜하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요구는 단칼에 거절했다. 버럭 화가 치밀어서 답장 쪽지를 보내긴 했는데, 그냥 무시할 걸 그랬나 후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번역 원고의 저작권은 이미 출판사에서 갖고 있으니 원고 파일을 유출하는 건 내가 민형사상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를 엄청난 일이란 걸 그 멍청한 인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불법 다운로드가 판을 치는 나라와 국민이다 보니 별 일을 참 다 겪는다. 몇달동안 낑낑대며 골빠지게 작업한 번역원고를 거저 달라는 인간이 다 있다니 참 두고두고 기가 찰 노릇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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