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투덜일기 2010. 9. 8. 02:11

5년을 넘긴 컴퓨터가 얼마 전부터 슬슬 걱정스러운 양상을 보이더니 오늘은 급기야 그 무서운 '시퍼런' 화면을 수없이 띄웠다. 완전 컴맹이라 안절부절 못하며 몇번이나 전원을 껐다 켰지만 부팅이 되다말고 무시무시한 경고(이런 화면을 처음 보는 거라면 어쩌구 저쩌구.. 그게 아니라면 시스템 인스트럭터에게 연락하라던가 뭐라던가... )가 뜨더니, 안전모드도 실행이 안되는 상황. 더럭 겁이 났다. 지난주부터는 원고 백업도 안해놨는데!!!

컴퓨터가 슬슬 이상을 보이기 시작한 건 꽤 됐다. 되다말다 했던 CD롬이 완전히 고장나 읽히지 않는 건 1년이 다 돼가고(그렇기 때문에 확 밀어버리고 윈도를 새로 깔 수도 없다. 혼자선 할 자신도 없지만 -_-;; CD롬이라도 괜찮으면 동생이든 누구든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겠나..), 본체에서 갑자기 윙윙 바람부는 소리가 나면서 느려지질 않나, 화면 보호기 작동되다 말고 프로그램 오류 메시지가 뜨질 않나, 과거 경험상으로도 컴퓨터는 수명 5년이 지나면 시한폭탄처럼 저절로 망가지도록 프로그램이 심어져 있는지 꼭 말썽을 부리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악성 코드랑 바이러스 무서워서 유료 V3도 꼬박꼬박 자동실행하고 있거늘 나 원 참! 하지만 버벅거리긴 해도 또 완전히 고장난 것은 아닌 컴퓨터를 확 바꾸긴 좀 뭣하고,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버티는 것도 괴로운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지던 와중에 드디어 오늘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퍼런 화면'이 등장한 것.
 
컴맹답게 이럴 땐 컴퓨터가 열을 받아서 그럴 지 모른다며 모든 전원을 끄고 플러그 까지 빼서 몇시간 식히는 것이 나의 유일한 처방이다. 근데 이번에도 그게 먹히더라. ㅋ 드디어 안전모드가 실행됐으므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시스템 복원' 설정으로 컴퓨터를 다시 부팅하는 데 성공했고, 무서워서 얼른 작업해 놓은 원고들을 이메일로 보내놓았다. 외장하드에 백업하다가도 혹시 오류날까 싶어서 ㅠ.ㅠ

늘 마감인생의 덧없음을 하소연하는 나에겐 꿈에도 등장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두 편 있다.
하나는 거의 완성된 번역원고가 컴퓨터 고장으로 홀라당 날아가는 것이다. 마감일은 이미 어겨놓은 상황인데 백업도 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수천매 원고가 그야말로 홀라당 날아가는 바람에 펄펄 뛰다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거다. 요샌 정전으로 컴퓨터가 꺼져도 워드 프로그램에서 자동저장을 해주지만, 십수년 전엔 새벽녘에 갑자기 정전이 되는 바람에 밤새 작업한 원고를 홀라당 날린 적이 있었다. 하기야 지금도 재수가 없으면 컴퓨터가 미쳤는지 덜컥 오류가 났다가 수십매쯤 날아간 문서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낭패감과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다. 두번째로 번역을 하면 속도야 훨씬 붙지만, 어쩐지 전에 번역한 문장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기분도 영 찜찜하다. 허니 내가 이런 꿈을 꾸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또 하나는 (재수 없는 상상이긴 하지만) 잔뜩 맡아놓은 작업을 마무리도 하지 못하고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것. 사람이 죽었으니 출판사에서도 더는 독촉할 형편이 못되겠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그간 작업한 원고라도 넘겨달라고 하면 어쩌나, 다듬지 않은 초고가 세상에 선보이는 건 정말 싫은데, 계약금만 받아놓고 아직 시작도 못한 추후 작업들은 어찌되는 걸까, 앞으로 받기로 한 원고료는 또 어떻고! 뭐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상상을 하며 괜스레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물론 참 한심하다. 하지만 얼마 전 갑작스레 이윤기 선생이 심장마비로 운명하신 소식을 듣고 보니, 내 상상이 완전히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일단 말썽 부리는 컴퓨터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새 컴퓨터를 장만하면 그만인데, 컴맹주제에 워드며 필요한 프로그램 설치하고 다운받는 과정을 생각하면 또 끔찍하다. 2005년도에 이 컴퓨터 샀을 때는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걸!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는 말이 정말로 나 같은 인간에겐 딱이다. 당면한 문제 해결보다는 그 이후의 소소한 귀찮음이 더 두렵게 느껴지니 말이다. AS를 부르는 방법도 있다는 건 알지만, 그간의 경험상, 그리고 시청자 불만 프로그램의 고발 내용을 보아도 컴퓨터 AS기사는 십중팔구 사기꾼이던데 어찌 믿는단 말인가. 당장 CD롬부터 새것으로 갈으라고 할 텐데 몇만원 들이느니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니 또 어떤 컴퓨터를 어디에서 살 것인가 하는 원초적인 고민부터 다시 꼬리를 문다. 우웩~~~ 책상을 넓고 한가롭게 쓰기 위해선 노트북 컴퓨터를 새로 사는 것도 생각해본 적이 있으니(근데 여름엔 노트북 자판 뜨거워져서 싫단 말이닷) 이런 고민은 최소한 몇달간 지속될 것 같다. 시퍼런 화면이 연일 나를 괴롭히지 않는 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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